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2화 (12/408)

# 12 < 사역마 (2) >

눈앞의 상황과 머릿속에 혼재돼 있던 정보들이 조각조각 맞춰지면서 준혁은 손안에 든 식칼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법기들의 주인이었구나!”

영기를 주입해 발동까지 시켰음에도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판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금빛 글자들을 받아들인 후 알게 된 정보들에 의하면 식칼은 세 가지 법기를 소환하는 매개체였다.

정확히는 세 법기가 식칼에 종속되어 있었다. 마치 군주와 신하처럼.

상황 파악을 끝마친 준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눈에 선했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공자를 잘 속여넘겼는데···. 이번에도 잘될지는 모르겠구나.”

몇 가지 가능성과 상황을 떠올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 가지 법기를 챙겼다.

인지경은 다시 단상 위에 올려놓고 신비경을 빠져나와 근처 토굴을 향해 나머지 두 법기를 날려 보냈다.

두 법기가 흙벽을 파고들어 자취를 감추자, 준혁은 다시 신비경 안으로 돌아와 공동의 중앙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예상했듯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

“무슨 짓을 한 거지?”

신비경 안으로 혼자 들어선 여중추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예전에도 너 혼자 광산 안에 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다. 또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우연이라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여중추는 코웃음 치더니 공간대에서 검을 꺼내 들고는 신비경 입구 앞에 대기했다.

“곧 큰형님께서 오실 거다. 그때도 그렇게 변명할 수 있나 두고 보자.”

잠시 후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대공자와 둘째 공자가 차례대로 들어섰다.

신비경 내부로 들어선 대공자는 준혁을 보며 침음을 흘리고는 단상으로 걸어가 인지경을 챙겼다.

그리곤 준혁 앞으로 걸어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대로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자님.”

“흠···. 이번엔 사실을 말해줄 텐가?”

2년여 전 사태 때도 준혁은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나 여러 가지 여건들을 조합해 봤을 때, 온전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사실일 거라 여겼다.

특히, 눈썰미가 뛰어난 대공자는 토굴을 지나며 준혁의 얼굴과 옷 위로 붉은 흙들이 묻어나는 걸 보고는 마지막 의심을 지워버렸었다.

수도자라면 방어 법기로 몸을 깨끗이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일반인인 준혁에겐 불가능하다 판단했었다.

하지만 이젠 충분히 의심이 갈만했고 의심을 해야 했다.

“대공자님. 참···. 상황이 의심 갈만하지 않습니까? 예전과 마찬가지로?”

준혁은 대공자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평소처럼 이곳을 조사하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말투를 보아하니 무언가 본 게 분명하군?”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온종일 시간을 보낸 건 대공자께서도 알 것입니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을 제외하곤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대공자의 기색을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괴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괴이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아가씨께서 오고 난 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마 사태를 알아채시고 곧 오실 테니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제 주군인데···. 제가 알아낸 정보를 먼저 듣진 못해도 다른 이보다 늦게 듣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형님! 뭐가 좋다 입니까?! 당장 저놈을 족쳐서 정보를 알아내야지요! 어디 건방지게 범인 나부랭이가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가며 입을 놀려!”

인근에 서 있던 둘째 여동수는 준혁이 상황을 주도해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버럭 소릴 질렀다.

“형님,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정신부를 사용하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놈이 알고 있는 걸 전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여동수가 공간대에서 부적을 꺼내 들고 말하자 준혁은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겉모습만은 태연하게 유지했다.

“아까운 부적을 사용할 필요 있겠습니까? 전 청룡가에 매여있는 사람입니다. 굳이 드러날 거짓말을 해서 손해를 감수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대공자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한때 청룡가 빙제소에 있는 여동생을 언급하며 대공자가 준혁을 회유한 적도 있었다. 준혁의 목표가 동생의 완치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대공자는 준혁이 말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여동수를 말렸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정신부는 넣어두거라.”

“형님!”

“그만. 그게 완벽하지 않다는 건 알지 않느냐?”

대공자의 제지에 결국 여동수는 부적을 치우고는 준혁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큰일 날 뻔했구나. 정신부라니.’

정신부를 사용한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낱낱이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정신부에 당하고 나면, 뇌 속이 곤죽이 돼서 술법이 끝나고 난 후엔 백치가 돼버렸다.

준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여동수가 씩씩거리며 다른 대안을 생각하고 있을 때, 두 명의 여인이 신비경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죠? 준혁씨는 괜찮아요?”

여서령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준혁을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본 여동수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주군? 신하? 마치 연인을 챙겨주는 것 같네. 둘이 뭐 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기고만장해 있던 건가? 청룡가의 여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오라버니!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너나 행실을 바로 해라. 청룡가의 딸이자 축기기에 이른 수도자가, 저따위 범인에게 존칭하고 살뜰히 살펴준다? 다른 수도가에서 들으면 우리 가문을 얼마나 업신여기겠느냐?”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여서령은 더는 대꾸 없이 뒤에 서 있던 여인에게 명령했다.

“언니. 이 사람 몸 좀 살펴주세요. 이상이 없나.”

“알겠습니다. 아가씨.”

잠시 후 준혁에게 알약 하나를 먹인 여인이 여서령에게 말했다.

“조금 놀라서 기맥이 흔들리는 것 말고는 딱히 이상이 없습니다. 청심환을 먹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일련의 일 처리가 끝나자 그제야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보지. 서령이도 왔으니 말해보게.”

대공자의 말에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

“그러니까 결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공동 중앙에 진법이 나타나며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그 문자들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나?”

준혁은 잠시 턱을 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필기구만 주신다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중추가 부적의 재료인 듯 보이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다만 제가 알던 문자가 아닌지라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야 하니, 그 점 양해 바랍니다.”

정신을 집중한 준혁은 머릿속에 떠돌고 있는 글자 중 몇 가지만 가져와 대충 조합했다. 일부러 획을 틀리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이 위에 대여섯 글자를 그려 넣어 대공자에게 건네자 그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부름···. 사역마···.”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제가 아는 게 무어 있겠습니까. 다만 대공자님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저 문자들이 나타난 직후 단상 위로 예전에 보았던 거울 법기가 소환된 걸 보면···. 아마 그 법기가 이곳 신비경에 묶여있는 사역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진법이 발동할 때면 이곳으로 소환된다는?”

준혁의 말에 대공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네. 한데 정말 이게 다인가?”

“아닙니다. 진법 위로 떠올랐던 글자들이 수십 가지는 넘었던 거 같습니다. 다만···.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것만 대충 기억할 뿐 나머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저 역시 놀라서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흠···. 알겠네. 내 믿어주지.”

“형님! 뭘 믿어줍니까?! 정신부를 사용하면 나머지 내용도 전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무의식에도 관여한다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여동수가 소리치자 대공자가 그를 직시했다.

“동수야. 너는 이자가 청룡패를 지녔다는 걸 까먹었느냐? 함부로 이자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하는 건 우리 스스로 청룡가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다.”

“끄응.”

“그러니 그 일은 그만 언급하거라. 그리고 서령아.”

“네. 오라버니.”

“그동안 이곳을 방치했었지만, 인지경이 매번 이곳으로 소환된다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앞으론 이곳을 내가 통제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게 하겠다. 알겠지?”

명목상 광산의 주인은 여서령이었으니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일방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번 사태가 일단락되나 싶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 못 한 인물이 신비경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슨 일이냐?”

신비경의 입구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고는 대공자를 포함한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를 뵙습니다.”

“가주님을 뵈어요.”

준혁 역시 눈치껏 몸을 낮추고 고개를 땅에 박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청룡가의 가주 여공천은 말없이 반 무릎을 하고 고개 숙인 사람들을 내려보았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가주께 아뢨네. 대공자가 인지경을 잃어버리고는 허둥지둥 광산으로 향했다고 말일세.”

“그걸 어찌···.”

“흘흘, 이 나이쯤 되면 듣기 싫은 것도 듣게 되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게 되는 법이지. 어디 말해보게나, 인지경은 어찌 되었나?”

중년인의 말에 대공자는 공간대에서 인지경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신비경에 관한 이상 현상에 대해 소상히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여공천은 인지경을 받아들여 살피고는 공간대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리곤 몸을 돌려 신비경을 나서며 한마디 했다.

“네 녀석이 결단기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나, 안 되겠다. 우선은 내가 관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그리고 광산은 회수할 테니 서령이는 그렇게 알고 있거라. 앞으로 허락 없이 광산에 출입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야속하다 생각하지 말고.”

“분부 따르겠습니다.”

“가주님 말씀대로 할게요.”

나름 청룡가의 후계라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던 그들도 결단기 후기에 오른 가주 앞에선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바짝 얼어 대꾸 한번 하지 못하고 고개만 조악거렸다.

특히 여서령은 자신이 가진 것 중 유일하게 돈이 되는 광산을 뺏겼음에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위세가 대단하구나. 저자의 말 한마디면 청룡패든 뭐든 그대로 끝이겠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

애초에 청룡패에 힘을 부여해준 게 가주 여공천이었다.

가주가 돌아가자 여서령은 힘없이 따라 사라졌고, 잠시 후 대공자도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허망한 표정이었는데, 크게 내색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둘째 공자 여동수.

아무 말없이 광산을 벗어나려는데, 여동수가 다가오더니 준혁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 비밀을 내가 밝혀줄 테니까. 나는 형님처럼 인내심이 강한 편이 아니거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