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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9화 (9/408)
  • # 9 < 암시장 >

    관리자가 된 지 2년여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낸 준혁은 종로4가로 향했다.

    맛집이 즐비한 이 거리엔 수도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암시장.

    철저하게 신분을 가린 채 물물교환을 진행하는 곳 중 하나였다. 가끔은 소, 대규모 경매도 진행했는데, 수도자가 아니면 애초에 참가가 불가능했다.

    다행히 암시장 자체는 일반인도 드나들 수 있었기에, 준혁은 자신의 수행을 드러내지 않고도 조용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가면을 얼굴에 쓴 준혁은 허름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붉은 장막이 쳐진 문을 지나가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문 앞엔 연기기 후기로 보이는 사내가 준혁에게 손짓하며 이동을 방해했다.

    “처음 오셨나 봅니다? 물건을 파실 거면 영석 다섯 개를 지불하시고 여기 이 돗자리를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사실 거면 영석 하나면 되고.”

    준혁은 미리 준비했던 영석 하나를 꺼내 사내에게 건넨 후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암시장 내부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돗자리를 편 채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구경하며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거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준혁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돗자리마다 펼쳐진 물건들을 하나씩 구경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있구나. 저건 뭐지? 긴 호리병처럼 생겼는데···. 단약을 담는 자기병인가? 아니면 법기인가?’

    궁금함에 몇 번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꺼지라는 말뿐이었다.

    그들은 물건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준혁과는 애초에 거래할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그들의 매몰찬 태도에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구경을 이어가던 준혁의 눈에 자기병 몇 병을 늘어놓은 채 ‘단약 교환’이라고 팻말을 내건 곳을 발견했다.

    자기병이 늘어진 돗자리 바로 앞까지 다가간 준혁이 얼굴에 호랑이 가면을 쓴 사내에게 말했다.

    “축기단도 있습니까?”

    준혁의 말에 호랑이 가면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더니 짜증을 냈다.

    “애들은 가라~ 귀찮으니까 말 걸지 말고.”

    지금껏 계속 보았던 반응이기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품 안에서 자기병 하나를 꺼냈다.

    “축기단이 있다면 이걸로 교환하고 싶은데.”

    “흐음?”

    준혁이 자기병을 열어 안쪽을 살짝 비춰주자, 궁금증에 고개를 내밀었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손님. 축기단이면 당연히 있습죠. 혹시 다른 물건은 필요한 게 없으십니까?”

    급변한 호랑이 가면의 태도에 준혁이 가볍게 코웃음 치고는 자기병을 품 안에 넣었다.

    “축기단이면 됩니다.”

    “쩝···. 세 알다 교환하기엔 축기단이 적은데···.”

    준혁이 더 말해보란 듯 턱을 위로 까딱거리자, 사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가진 게 축기단 3알뿐입니다. 혹시 다른 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기 보시면 체력 증진에 좋은 활명단과 집 나간 마누라도 돌아오게 한다는 정력단! 거기다 막힌 대장을 단숨에 뚫어주는 쾌변단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필요 없으십니까? 제가 안 그래도 청명단이 꼬오옥 필요했었는데 말입니다. 아이고 참. 하루만 일찍 오셨으면 축기단도 충분했을 터인데.”

    축기단 세 알이면 충분했던 준혁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알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른 건 딱히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나 축기기에 익히는 술법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감정 변화가 보일 만큼 가면이 들썩거린 사내가 급하게 공간대에서 옥간 여러 개를 꺼내 들었다.

    “축기기급 술법서는 없어도 연기기에 익히는 것들은 많습니다. 보아하니 아직 연기기 초기에도 제대로 입문하지 못하신 거 같은데···. 이런 것들부터 익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청명단 세 알이라 해도···. 축기기급 술법서라면 좋은 걸 구하진 못할 겁니다.”

    “잘못 판단하셨군요. 제가 익힐 게 아니라 저희 도련님 심부름을 하는 중입니다. 제가 수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련님 곁에서 제법 수도계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손에 든 것들이 화구술이나 빙결술 같은 초급술법인 것 같은데···. 도련님은 이미 익히셨습니다.”

    준혁의 말에 사내가 손에 들고 있던 옥간 중 하나를 슬며시 공간대 안에 넣었다.

    “크흠···. 이건 그런 저급 술법서가 아니라 제법 고급 주문이 들어있는 겁니다. 연기기 후기 에나 익힐 수 있는 화령술. 그리고 이건 말을 해석해주는 통역술이 적혀있습죠.”

    화령술이란 화구술의 상위 등급으로 몸 주위에 불의 기운을 일으켜 신체를 강화하는 술법이었다.

    “통역술? 말입니까? 처음 듣는군요?”

    “혹시 통주술은 아시겠죠? 통주술이 상대방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고급 술법이라면···. 이건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통주술의 열화판 같은 겁니다.”

    “오호.”

    “다만···.”

    “??”

    “이게 고급 술법을 열화판으로 고친 것이다 보니···. 연기기 후기가 넘거나 축기기에는 들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내의 설명이 끝나자 준혁이 팔짱을 끼며 장고에 들어갔다. 그리곤 초조해하는 사내를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축기단 세 알에 연기기 술법 두 가지라···. 제가 너무 밑지는 거 같군요. 다음에 오겠습니다.”

    말을 끝낸 준혁이 단호하게 돌아서자 사내가 급하게 손을 뻗었다.

    “잠시!”

    “??”

    고개를 돌리자 사내가 공간대에서 또 다른 옥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크으···. 이건 정말 아까운데···. 그쪽 도련님이 축기단을 구하는 걸 보면, 분명 아직 연기기 후기겠지요? 이 옥간엔 비행 법기를 다루는 비술이 적혀있습니다. 이것까지 더하면 충분히 가격이 맞을 겁니다.”

    사내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립니까? 비행 법기는 축기기에만 오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건데?”

    “수련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시는군요. 말 그대로 축기기에만 오르면 누구나 비행 법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법기에 따라 그 속도가 천차만별이지요. 이 비술은 비행 능력이 떨어지는 수도자들을 능숙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연기기에도 비행 법기를 조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이걸 익히고 있다면 비행을 유지하는 시간마저도 수배 늘어나고요. 어떱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흠···.”

    “아이고 답답해! 그쪽 도련님도 심부름을 시키려면 보는 눈이 있는 사람한테 시켜야지!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쳤다.

    “좋습니다. 거래하시죠. 대신.”

    “대신?”

    “조금 전에 공간대에 넣은 기초 술법도 챙겨주시면 말입니다.”

    “예에? 방금 그쪽 도련님께서 기초는 다 익히셨다고···.”

    “그건 도련님이 아니라 제껍니다. 저도 심부름하는데 떨어지는 게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싫으시면 말고.”

    “아, 아니. 드리리다. 드려.”

    준혁이 자꾸 다른 상점을 힐끗 쳐다보며 이동하려고 하자, 다급해진 사내가 공간대에서 빈 옥간 들을 꺼내 화령술과 통역술, 그리고 비행술과 기초 술법들을 복사하더니 축기단과 함께 준혁에게 건넸다.

    준혁은 손에 들어온 옥간 속으로 영기를 살짝 주입해 내용이 들어있나 확인하고는 품속에 집에 넣었다.

    “흐흐, 그럼 청명단을 넘기시죠?”

    “아, 왠지 너무 손해 보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도련님께 왕창 깨지는 거 아닌가···.”

    “에이 왜 그러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서비스 조금만···.”

    준혁이 노골적으로 또 다른 걸 요구하자 결국 호랑이 가면 사내가 폭발했다.

    “아니! 이 사람이!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아주 나를 벗겨 먹으려고 작정을 한 겁니까?!”

    “아니 뭐···. 도련님 말씀이···. 청명단 세 알이면 막혀있던 수행이 쭉쭉 오른다고···.”

    “크흠.”

    다시 한번 준혁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사내는 결국 어깨가 축 처지며, 공간대에 손을 가져가 댔다.

    “이 도둑..ㅅ. 내가 진짜 수행이 막혀있지만 않았다면···. 후우···. 이거 가져가고 청명단 이리 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릅니까? 하급 비행법기 아닙니까! 이것만 해도 축기단 두 알은 바꿀 수 있을 겁니다!”

    30㎝ 정도 길이에 네모난 판자처럼 생긴 법기를 받아든 준혁은 앞뒤로 살펴보고는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딱 보아도 하급보다 좀 더 아래인 최하급으로 보이긴 했으나, 법기가 전혀 없던 준혁으로선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곤 사내에게 자기병을 건네주었다.

    “쿨거래 감사합니다.”

    사내가 한 번 더 폭발하기 전, 준혁은 거래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빠르게 암시장을 벗어났다.

    처음과 달리 준혁의 앞가슴은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

    “역시 정찰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시끄러운 거였군.”

    거래하는 상대방이 열을 받아 소리를 지르는 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암시장.

    자신 역시 크게 일조했다는 건 잊어버리고, 시끄러웠던 암시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만족할만한 거래였어.”

    공간대가 없어 앞섬에 옥간과 법기 등을 넣어둔 준혁은 한껏 부풀어 있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웃음 짓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방이라도 가져갈걸.”

    축기단만 교환해올 생각이었기에 가벼운 차림으로 온 게 조금은 후회되었다.

    “빨리 돌아가서 술법서 내용을 확인···??”

    암시장을 빠르게 벗어나 골목길을 지나가려던 준혁 앞에 어느새 덩치가 커다란 사내 세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곤 그를 둘러싸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좋은 의도로 온 것 같진 않았다.

    “형님, 제 말이 맞죠? 가끔 일반인들이 보물을 교환하고 여길 지나간다니깐요.”

    셋중 가장 비열하게 생긴 사내가 씨익 웃으며 침을 퉤 뱉었다.

    “어이~ 형씨? 혼자 왔어?”

    준혁은 이들이 무얼 노리고 왔는지 단번에 파악하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혼자 가는데?”

    “뭐? 아니 이 미친놈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너 지금 매우 위험해 진 거야. 알아?”

    “모르겠는데?”

    “근데 이 새끼가 초면에 반말을 지껄이네?”

    “네가 먼저 했잖아?”

    거들먹거리던 사내는 순간 벙찐 표정을 하더니 어처구니가 없단 얼굴을 했다.

    “나 참 진짜 별 거지 같은···. 야? 그 허연 가면 좀 벗어봐라. 쌍판좀 확인해 보게.”

    “아!”

    그제야 준혁은 아직도 암시장에서 썼던 가면을 쓰고 있던 걸 깨달았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단 생각에 까먹고 있었다.

    “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나 굉장히 바쁘거든? 휴가가 겨우 이틀뿐이야.”

    그때 험상궂은 사내의 똘마니로 보이는 놈이 옆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형님. 저 새끼가 어디 가서 주먹질 좀 했나 본데요? 그걸 믿고 저러나 봅니다.”

    “크큭, 세상엔 범 무서운지 모르는 똥개들이 천지긴 하지.”

    순간 큰형님으로 보이는 사내의 몸에서 옅은 영기가 살며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에 똘마니 하나가 목소리를 키웠다.

    “봤냐? 어? 우리 형님은 수도자시다! 너 같은 새끼는 한 주먹? 아니 한 손가락도 필요 없으시지. 당장 대가리 박고 물건들 다 내놔.”

    똘마니의 소개에 한껏 의기양양해진 사내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공간대에서 기다란 사시미 칼을 꺼내 들었다.

    “봤냐? 어? 봤어? 이게 바로 수도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어?, 그거다!”

    법기는 아니고 그저 평범한 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준혁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딱 보니깐 겨우 연기기 3성에 이를까 말까 하네?”

    연기기 4성이 되면 초기라고 부르며 수도계의 입문을 의미한다.

    3성은 말 그대로 영근은 있지만 제대로 된 수련은커녕 기초 술법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디서 공간대는 하나 구한 듯한데,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가방 하나 필요했는데.”

    순간, 상황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느낀 강도 3인방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당황을 감추지 못한 그때. 준혁의 몸 주위로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물론 연기기 3성에 비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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