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인지경 (2) >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보패예요.”
“옥간이나 목간에도 정보를 담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옥간이란 옥을 직사각형으로 나눈 후 그곳에 글을 적어 책처럼 역은 물건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지식전달용과는 다르게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옥간은 옥의 외면에 글을 적는 것이 아닌, 옥 안에 영기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걸 말했다.
여서령은 준혁의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으로 되물었다.
“고대 지구가 다른 세상의 일부였다는 건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아주 오래전엔 다른 세상의 수도계 일부였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곳과 분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리고는 수천 년간 영기가 봉인된 채 세월이 흐르다, 최근에서야 다시 봉인이 풀린 거죠.”
“그거랑 만통방과는 무슨 관련입니까?”
여서령이 손가락으로 하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통방은 바로 그곳, 지금은 분리돼버린 중천이라는 신선들이 사는 세상의 지식이 담겨있는 물건이에요.”
설명을 듣고 나자 더 이해할 수 없어 준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움직였다.
“수많은 비경의 유적에서 중천이란 곳의 정보가 담긴 옥간이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맞긴 한데, 그거랑은 조금 달라요.”
“무엇이 말입니까?”
“만통방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 정보의 끝이 없데요. 쉽게 말하자면, 일반 정보를 담고 있는 옥간이 책 한 권이라면, 만통방은 도서관 같은 거죠. 그것도 매우 큰.”
“아···.”
완벽하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준혁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공자 손에 쥐어진 법기가 막대한 정보가 담긴 만통방에서도 상위 서열로 기록된 무구라는 것.
대공자는 인지경을 든 채로 눈을 감고 무언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부르르 몸을 떤 대공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인지경을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말했다.
“부럽다.”
“뭐가요? 인지경이요?”
“공간대 말입니다. 사실 저희 같은 일반인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건, 법기 같은 것이 아니고 공간대를 사용하는 걸 겁니다.”
공간대.
기본적으로 힙색처럼 허리에 차는 가방 모양을 하고있는 공간대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안에 수많은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저장 전용 법기였다.
가장 하급의 공간대만 하여도 1평 이상의 넓이를 가지고 있어서, 수도자들의 개인 금고임과 동시에 필수품이었다.
“준혁씨가 영기만 다룰 줄 안다면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아쉽네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때 신비경 내부 조사를 마친 대공자가 여중추와 함께 다가왔다.
“이만 가지. 그리고 서령아. 이곳이 네 관할이긴 하지만, 당분간은 가문 차원에서 조사하겠다.”
“알겠어요.”
인지경을 습득한 대공자는 그 전의 차가웠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네도 조만간 보도록 하지.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미리 생각해 두도록.”
너, 너 따위, 등에서 자네로 승격한 준혁은 대공자의 태도 변화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
멀어져 가는 대공자 무리를 보며 여서령은 관리자 무리에게 경고했다.
“앞으로 최 관리자를 건드린다면 광산에서 쫓아내 주겠어요.”
준혁이 여서령의 세작이란 게 소문이 나 있긴 했지만, 이렇게 공공연하게 밝혀졌으니 여서령은 대놓고 편애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모두가 고개 숙이자 여서령이 준혁을 보며 눈을 찡긋하고는 공간대에서 사각형의 카펫을 꺼냈다.
그 위에 올라타더니 준혁에게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준혁이 카펫 위에 올라서자 그것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서우면 허리 잡아요.”
“아닙니다.”
“풋.”
아니라고 말하던 준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 끝을 잡고 있었다.
날아가는 카펫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참.
준혁은 지금 날아가는 방향이 자신의 집 방향도, 그렇다고 여서령이 머무는 청룡가의 본가 방향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느덧 반짝반짝 빛나는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도달하자, 여서령은 카펫을 멈춰 세웠다.
천천히 날아갈 때도 신기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자니 기분이 매우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여서령이 고개를 돌렸다.
좁은 카펫 위였기에 준혁과 여서령의 얼굴은 바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제 말해봐요. 더 이상 듣는 사람은 없을 테니.”
여서령의 갑작스러운 말에 준혁이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눈치채고 있으셨군요?”
“제가 준혁 씨를 괜히 받아들인 거 같아요? 아주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그러니 알 수 있었죠. 준혁씨 성격에 당장 목숨이 위급하지도 않은데 저를 배신하진 않을 사람이니까요.”
“배신이라···. 살기 위한 몸부림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굳이 신비경의 위치를 말하지 않아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큰 오라버니에 비해 세력도 힘도···. 수행도 부족하지만,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요. 준혁씨 행동은 마치 탈출구를 만들어두고 그곳으로 우릴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결국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습니다. 어차피 의심받은 상황이라면 원하는걸 바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 말은?”
“신비경에 있던 법기는 총 세 개였습니다. 두 가지는 모처에 숨겨두었죠. 다만 하나 남겨두고 온 것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일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실수한 것 같습니다. 그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 순간, 여서령이 준혁을 덥석 껴안았다.
“아, 아가씨?”
“역시! 내 판단이 맞을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제가 청룡패를 낭비하는 거라 했지만, 전 확신하고 있었어요! 준혁 씨가 제게 큰 힘이 될 거란 걸!”
한참 동안 자신을 부둥켜 안고 있던 여서령을 떼어낸 준혁이 말했다.
“진정 좀 하세요. 그나저나 청룡패가 정확히 뭡니까?”
여서령은 자신의 행동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볼이 발그레져 있었다. 양손으로 두 뺨을 꾹꾹 누르다 말을 이었다.
“청룡패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 청룡패를 정식으로 부여받은 자는 청룡가의 일원으로 본다.”
“그 말은?”
“말 그대로예요. 진정으로 청룡가의 본가의 일원으로 보는 거예요. 만약 준혁씨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원할 경우 그 아이도 여씨 성을 받을 수 있어요. 능력만 있다면 가주 자리를 제외한 어떤 위치라도 올라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방계 출신들은 청룡패를 받기 위해 목숨을 걸죠.”
“세상에나···.”
“두 번째. 직계혈족의 살인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라면, 그 어떤 죄도 단 한 번은 용서받을 권리.”
첫 번째 얘기도 놀라웠지만, 두 번째 내용엔 정말 크게 놀랐다.
“그럼 청룡패를 받지 않은 방계의 사람은 해쳐도 된다는 말입니까?”
“네. 단 한 번뿐이지만요.”
“세상에나.”
“하지만 누가 그런 일에 사용하겠어요? 그 뒤론 청룡패를 회수당하고 말 텐데.”
그렇다고 해도 실로 막강한 권한이라 할만했다. 방계라고 해도 청룡가인 여씨 가문의 피를 이은 건 분명했다.
즉 가문의 사람을 죽인다 해도 직계만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한번은 용서해준다는 것 아닌가.
“그럼 제가 받은 건 몇 번째입니까? 대공자 말에 따르면 다섯 개까지 받을 수 있다던데.”
“후훗.”
준혁의 질문에 여서령이 낮게 웃었다. 그리곤 자신 있게 말했다.
“첫 번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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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아가씨였네.”
집으로 돌아온 준혁은 샤워를 마친 뒤 방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밤하늘 허공에 두둥실 뜬 채로 그녀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후계에 대한 의지가 강렬하기에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된 줄 알았건만, 그녀는 자신의 최고의 패가 청룡패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어릴 적 청룡패를 전부 사용해버린 오라버니들에 비해, 자신에겐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철이 없긴 한데···. 세상일은 모르는 거지.”
문득 여서령을 대하던 대공자의 태도가 떠올랐다.
“어쩐지···. 전혀 경쟁자를 보는 시선이 아니더니.”
여서령은 자신이 오라버니들과 후계 경쟁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오라버니들 입장에선 그저 귀여운 여동생의 재롱으로 보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것들이 뒤처졌지만, 재능.
수련에 관한 재능 하나만큼은 남은 모두를 압도할 만큼 대단했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천재라고 말한 게 빈말은 아니었다.
“모든 걸 내가 고려할 필욘 없지.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걸 얻으면 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한 준혁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제 신비경에서 얻은 그것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노려보아도 손바닥을 비롯한 몸 어디에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분명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게 꿈은 아닐 텐데···. 설마? 진법으로 인한 환상 같은 건가?”
어떤 진법들은 사람의 뇌를 조종해 기이한 환상을 경험하게 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고통은 진짜였어.”
결국 밤을 꼬박 새운 준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아침을 맞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출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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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에 도착한 준혁은 신비경을 처음 찾은 삼인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아, 그놈들? 얘길 들어보니까 출근하기도 전에 아가씨께서 전부 잡아갔다던데? 감히 청룡가 재물에 욕심을 내? 아마 다신 보긴 힘들 거야.”
혹시라도 대공자에게 소식이 들어갈까 염려한 준혁이 여서령에게 미리 언질을 줬기에 빠르게 처리한 듯싶었다.
준혁은 간단한 업무를 마치고 순찰을 핑계로 법기를 숨겨둔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곤 더욱 깊숙한 곳에 옮긴 후, 땅을 파서 깊이 묻어 버렸다.
이제 준혁이 해야 할 일은 끝이 났고, 이 법기들을 대공자의 세작들에게 들키지 않고 광산 밖으로 옮기는 건 여서령의 몫이었다.
이미 합의가 된 사항이었기에 준혁은 홀가분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여중추가 다가왔다.
“최준혁.”
“무슨 일이십니까?”
“큰형님, 아니 대공자께서 부르신다. 오늘은 그곳으로 갔다가 바로 퇴근해.”
정체를 드러낸 후, 광산의 주인처럼 행동하는 여중추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광산을 관리하는 명부상 주인은 여서령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공자 휘하의 여중추가 진짜 관리자처럼 행동했다.
준혁은 대공자의 위치를 전달받은 후 광산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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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인근에 위치한 대저택.
이곳이 청룡가의 대공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세상이 변한 후, 가장 살기 좋은 곳, 혹은 가장 살고 싶은 곳을 말하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산 인근을 얘기했다.
대부분의 비경과 영석 광산이 산 주위에 생겨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산일수록 뿜어내는 영기가 짙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좁은 땅과 인구수로 인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수도자의 수는 부족했지만, 전력상 뒤처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산맥으로 뒤덮인 지형 때문이었다.
“좋은 곳에 살긴 하네.”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는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까지.
다섯 개의 산이 산맥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어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였다.
그중 도봉산과 북한산에 근접하고 있는 지역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준혁이 저택 앞에 도달하자, 거대한 문이 스스로 열리며 그를 반겼다.
문 맞은편에는 산책하고 있었는지, 편안한 복장의 대공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준혁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는 준혁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얼 받을지는 생각하고 왔나? 내 능력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지. 물론 청룡패를 내려준다는 것까지 포함일세.”
여전히 자신을 포섭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말에 준혁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네. 대공자님. 이미 생각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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