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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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새로운 시작 >
휴대전화기라는 물건의 보급이 시작돼,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전이 인류에게 다가올 그쯤 무렵.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려던 1999년 말.
세 번째 밀레니엄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세상 곳곳에 그동안 숨겨져 있던 비경(祕境)들이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지구엔 영기(靈氣)라는 신비로운 기운이 만연해졌다.
초고속 성장을 이룰 거라던 세계는 새로운 힘, 새로운 물건, 신비한 능력에 사로잡혀 버렸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버렸다.
지구와 확연히 구분 지어지는 비경.
그곳에서 고대의 유적을 찾아낸 사람들은 각각의 문화에 걸맞게 그것들을 해석했다.
동양에선 신선들의 유적이 되어 사장되어가던 도교 문화가 부활했고,
서양은 고대 마법의 흔적이라며 열광했다.
그렇게 힘의 기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금술과 약학이 동시에 성행하기 시작하며 인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학은 퇴보하고 이적은 늘어갔다.
세상에 만연해진 영기라는 기운을 몸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수도자, 혹은 마도사가 되어 이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수명마저 늘어나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수백 년을 더 오래 살게 되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들처럼 영기를 이용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근(靈根)이라고 하는 씨앗이 몸 안에 존재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의 능력자가 될 수 있었다.
영근이 없는 자는 그전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영근이 없음에도 이적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영근이 없음에도 이적의 끝에 도달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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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울, 사패산 인근의 광산.
얼굴과 온몸에 새까만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사내.
반듯한 눈매와 입술을 지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신중함이 배여 보이는 사내 준혁은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었다.
그리곤 광산 입구를 빠져나오며 소지품을 검사하는 장치 앞으로 향했다.
장치 앞에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중 여인은 준혁을 보더니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준혁도 그녀를 향해 마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루도 빠지질 않으시네요? 준혁 씨는?”
“안녕하세요. 돈 벌어야죠. 쉬면 뭐 하겠습니까.”
여인의 안부 인사에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인 준혁은 네모난 문처럼 생긴 장치 앞에 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광산 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옷을 벗자 흙먼지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상의부터 시작해 하의와 속옷까지 훌러덩 벗어버린 준혁은 옷가지를 바구니에 담아 네모난 문 옆에 올려두었다.
바구니가 장치를 통과하자 기계의 상부에 장착된 조명이 녹색으로 변하며 소리를 냈다.
삐- 이상 무-
“확인했습니다. 문을 지나신 후 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여인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준혁은 네모난 문을 지나쳤다.
삐- 이상무-
다시 한번 울린 알람 소리에 준혁의 표정이 미미하게 바뀌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광산에서 캐내는 물건들을 관리하기 위해 소지품과 옷가지, 발가벗은 몸은 따로 스캔하는 작업을 한다는 건 알지만, 매번 할 때마다 수치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대충 옷을 주워입은 준혁은 다음 사람을 검사하기 위해 서 있던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광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는 척을 했던 여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준혁 씨, 잠깐만요.”
“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딱히 얘깃거리가 없었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었다.
“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여기선 좀 그렇고···. 저기로 가요.”
여인은 성큼 다가오더니 준혁의 팔목을 잡고 광산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로 이동했다.
시끌벅적했던 광산 입구완 다르게 벤치가 놓인 자리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당연하게도 이곳은 광부들이 쉬라고 만들어놓은 곳이 아닌, 광산을 관리하는 주체, 청룡가(靑龍家)와 관련된 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준혁 씨, 혹시 관리자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관리자요? 제가요?”
조금 전 검사 장치 앞에 서 있던 사내들처럼 광산의 출입을 담당하거나, 혹은 광산 내부에서 광부들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뜻했다.
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저에게 갑자기 왜?”
준혁이 일하고 있는 광산은 철이나 구리 같은 광물을 캐는 그런 광산이 아니었다.
세상이 변한 뒤 세상 곳곳에 나타난 비경.
그런 비경 근처엔 영험한 기운을 가진, 영석(靈石) 광맥이 생겨났는데. 당연하게도 가치가 매우 높았기에 그걸 관리하는 자들은 광산을 관리하는 주체에서 고르고 고른 인물들만 할 수 있었다.
즉, 이곳 광산은 청룡가에서 관리하니, 최소한 청룡가의 방계 인물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준혁 씨도 이곳에서 오래 일했으니 알고 있죠? 요즘 저희 가문에서 새로운 후계 문제로 말이 많은 거?”
“아, 얼핏 듣긴 했습니다.”
“원래라면 제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을 테지만, 이젠 기회가 생겨서 저 역시 조금은 욕심을 내고 있어요.”
조금이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청룡가에서도 꽤 유명한 얘기였다. 오죽했으면 사업체 중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영석 광산을 도맡아 처리할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반짝이는 눈빛으로 준혁의 눈을 직시했다.
“하지만 제 위로 세 오라버니와는 다르게 가문에서 제게 준 힘은 별로 없는 게 현실이죠.”
“...”
“다행히 이곳 영석 광산을 맡게 된 후 조금은 희망이 생겼지만···. 이곳은 이미 오라버니들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거든요.”
말을 하던 그녀가 준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서 내 사람이 필요해요. 준혁 씨는 광산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 중 한 명이고, 단 하루도 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죠. 누구보다 광산사람들, 그리고 광산 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거야 뭐. 그렇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사실 준혁씨 뒷조사를 했어요.”
여인의 말에 준혁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아,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혹시나 오라버니들 쪽 사람인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
“준혁씨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이유. 동생 때문이죠? 치료 때문에?”
“다 조사하셨으면서 되물을 필요가 있으십니까?”
살짝 빈정거림이 담긴 준혁의 말에 그녀는 살짝 웃음 짓더니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배. 지금 버시는 것에 세배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준혁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제가 농담하는 거로 보이세요? 단, 조건이 있어요.”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그녀는 허리춤을 살짝 만지더니 노란 바탕에 빨간 문양이 가득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맹약의 부적. 이걸 이용해 나에게 충성서약을 해주세요. 그럼 조금 전에 말했던 세배의 수익에 더해, 우리 가문과 관련된 시설을 이용할 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청룡패도 드릴게요.”
준혁은 그녀의 손에 들린 부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맹약의 부적. 부적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말에 힘을 담는 술법 중 하나였다.
부적을 사용해 맹약을 맺은 자에게는 두 가지 제약이 생겼다.
첫째, 어떤 경우라도 시전자의 목숨을 해할수 없다.
둘째, 자신이 내뱉은 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부적의 반서(反噬)를 받아 몸이 크게 상할 수도 있다.
물론 맹약을 하는 사람이 시전자보다 술법 경지가 높아지면, 두 가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애초에 준혁처럼 아무 능력이 없는 일반인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 같은 것이었다.
준혁이 부적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여인이 상큼하게 웃더니 말했다.
“나는 여서령이 청룡가의 가주가 되는 날까지 충성을 맹세한다. 라고 하면 돼요. 맹약을 하는 게 중요하지, 그 내용까지 과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큰 눈을 깜박이며 웃는 여서령을 보며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그 정도의 맹약만을 맺는 계약이라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크게 이익이 되는 조건임은 분명했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오히려 수하가 되겠다고 자처하며 그녀의 발이라도 핥을지 몰랐다.
“다만 제게 충성 맹세를 하게 된 게 알려진다면, 오라버니의 수하들과 불편한 일이 많이 생길 거예요. 특히 준혁씨는 일반인이라 쉽게 건들 수도 있고요.”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좋아요. 잘 결정하신 거예요.”
한 번 더 크게 웃음 지어 보인 여서령은 부적을 공중에 휙 하고 집어 던졌다. 그리곤 손을 가슴 앞에 모으더니, 손가락의 위치를 빠르게 교차하며 기이한 수결을 맺었다.
“합!”
수결을 끝낸 여서령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부적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채자 부적이 꼿꼿하게 서더니 기이한 노란색 빛을 뿜어댔다.
“말하세요.”
“나 최준혁은 여서령이 청룡가의 가주가 되는 날까지 충성을 맹세한다.”
여서령은 진지한 눈빛으로 부적을 잠시 응시하더니, 준혁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잡혀있던 부적이 빠르게 날아와 준혁의 가슴에 닿았다.
“흐음···.”
준혁은 가슴이 후끈거리는 느낌에 신음을 내다 상의를 들춰보았다.
얘기로 들었던 것처럼 어느새 자신의 심장 부근에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자들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끝났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준혁씨. 충성의 맹세를 했다고는 하나 당신을 하인처럼 대할 생각은 없어요. 내게 도움이 되는 만큼 당신을 우대해 줄 테고,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인격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될 거예요.”
여서령의 말에 준혁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으니, 그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행동해야 했다.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변한 준혁의 태도 때문인지, 여서령이 기분 좋게 웃으며 허리에 매어진 가방을 가볍게 쳤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평범한 봇짐처럼 생긴 물건이 잡혀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준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영석 100개를 담았어요. 이 돈이면 준혁씨가 하고자 하는 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저, 정말 이걸 주시는 겁니까?”
“내 사람이 가족 걱정을 하며 살아가게 할 순 없죠. 준혁씨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그리고 약속하죠. 만약 내가 가주(家主)가 된다면 당신의 동생은 책임지고 치료해 주겠어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준혁은 조금 전보다 더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손안엔 푸른 용이 새겨진 옥패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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