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화월선자의 정체
"아직도 못 찾았느냐!"
소진악의 주먹이 대리석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의 진노에 사망총 무인들은 부복한 자세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법과 은신술에는 뛰어난 아이니 쉽게 찾기는 힘이 들 것이야."
설무랑도 소진악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근심이 틀어박혀 있었다. 소아경은 이미 과거의 기억을 되찾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얼마나 엄청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자각했다.
물론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행해진 행동이 아님을 알지만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는 시기였다.
그걸 소진악과 설무랑이 알기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이다. 일단 금마옥 무인들은 그들 수장이 있는 곳으로 물렸다.
그리고 사망총 무인들을 이용하여 소아경을 찾기 위해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허탕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녀는 사라졌다. 남을 해하거나 살인을 위한 무공은 약한 소아경이다. 하지만 신법만큼은 뛰어났다.
게다가 은신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그녀였기에 추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소진악으로서는 이렇게 시간을 소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금마옥과 연합하여 총공격을 시행해야만 했다. 그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헌데 소아경 때문에 그 시간이 늦춰지고 있으니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안위도 걱정이 되었지만 금마옥과의 연합도 소진악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오랜 시간 꿈꿔 온 일을 이루기 위한 초석이 되는 계획이었다.
"설무랑."
"왜 그러나."
"총주를 부탁하네."
"자네……!"
"지금 아경이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네."
"하지만 총주…… 아니 그 아이가 그리 된 건 자네와 내 잘못이네. 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 일이란 말일세."
설무랑은 진심으로 오랜 벗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아경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소진악과 바로 자신. 두 사람의 경솔한 행동과 생각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백 번을 사죄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소진악은 다른 일에 시선을 돌리려 했다. 설무랑으로서는 너무나 실망하고 화가 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소진악은 그에게 모든 걸 위임하고 떠나갔다. 사망총 전력을 대동한 채 금마옥과 합류하기 위한 길을 나선 것이다.
설무랑은 소진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는 멍하니 혼자 있다가 이내 다시금 소아경의 흔적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등가휘는 소아경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흑천을 죽일 당시 어떤 금제에 당해서라고 한다.
그 금제를 건 이는 바로 그녀의 부친과 설무랑이라고 했다. 설득력이 없지는 않은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직접 찾아와 인질이 되고자 할 이유가 없다. 위험한 일을 자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좋은 무기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사망총주임과 동시에 소진악의 친 혈육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하나 있다.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흑천을 죽일 정도로 독한 이가 소진악이다.
그런 그가 대의를 위해서 딸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소아경이 인질이 되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한 번쯤 써 볼 만한 비밀 무기임에는 틀림없었다. 등가휘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는 즉시 모용하를 불렀다.
"내일 새벽 움직이도록 하지."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 그때가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수고하게."
"예."
소아경은 지하 뇌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메마른 눈빛은 그저 허공에서 머무를 뿐 생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누구로 인해서 생긴 일이든 이미 흑천은 죽고 없다. 그의 목숨은 자신의 손으로 거둔 것이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이 아니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갈 인물은 존재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죄를 자청해서 갚기로 했다.
아버지와 설무랑의 잘못은 모두 자신이 덮어쓰려고 한 것이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우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죽을 의향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사우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죽고자 한다. 그게 소아경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등가휘의 앞에는 자랑스러운 그의 무인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용맥의 무인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용맥의 정예.
등가휘의 명령 한마디면 지옥이라도 뛰어들 충성스러운 그들이다. 백 명이라는 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인들에게 머릿수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강하냐는 것이다. 일당백의 무력만 갖추고 있다면 어떤 군대나 집단도 두렵지 않다.
등가휘는 아무도 두렵지 않았다. 이런 든든한 무인들이 자신의 앞에 있으니 말이다.
"가지."
"뒤를 따르겠습니다."
모용하의 뒤에도 아수귀옥 무인들이 핏빛 무복과 장포를 걸친 채 뒤따랐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 그들은 태사태부의 장원을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자들이 서로의 모든 걸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이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등가휘가 이끄는 전력이 이동을 시작하자 금마옥과 사망총도 움직였다. 두 세력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장소를 목적지로 정했다.
호북성 북쪽에 위치한 넓은 평야였다. 그곳의 크기는 상당했다. 주변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잔디만이 존재한다.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최적의 장소임에는 틀림없었다. 산 아래서 쳐다보면 그 경치는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었다.
사우는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뒤에는 마존과 주문룡이 있었다.
"경치는 아주 좋네요."
"피 터지게 싸우기에는 어울리지는 않네."
"……."
사우는 묵묵히 넓디넓은 평야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죽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쉽게 죽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십절무황…… 그리고 금마옥주 천외안을 죽이고 죽는다.
오로지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그게 사우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적들이 움직였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검은 그림자의 보고에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사우와 마존, 그리고 주문룡은 산 입구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번 전투를 함께할 자들이 있었다.
"내려다본 기분이 어떻습니까."
"죽이더군."
"하하. 모든 것을 걸고 싸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지요."
"그런 것 같더군."
"가시죠.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장 앞이야."
등가휘는 미소를 보였다.
사우라는 사내 하나만큼 든든한 인물도 없었다. 흑천의 혈육…… 명분은 그들에게 있었다. 흑천의 복수 말이다.
게다가 구천제혈신검을 막아 낼 자는 세상에 존재치 않았다. 일당천의 힘을 발휘할 사내가 앞장을 서겠다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소진악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라진 소아경이 바로 적들의 품에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질로 잡혀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란 정도가 아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총주가 잡혀 있군요."
용천기의 음성이 싸늘하게 귓가로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의도가 파악이 되었다. 더 이상 전쟁을 미룰 수는 없었다. 또한 불리하게 끌고 가도 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용천기의 뜻이다.
용천기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용맥과 아수귀옥을 바라봤다. 누구보다 가장 자신들 위에 존재했던 자들이다.
늘 금마옥은 두 집단 아래에서 눈치만 봤어야 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마음을 숨기고 자존심 없이 살아왔다.
오랜 시간 짓눌려 왔던 앙금을 오늘에서야 모조리 풀 수가 있었다. 금마옥은 역사상 가장 강해져 있었다. 그 증거로 용맥의 무인들을 수년 전 부숴 버렸다.
사망총주가 저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든 말든 그건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용천기는 오늘 승리하여 중원을 장악하는 것을 비롯해 흑천의 자리에 오를 작정이었다.
비록 모든 집단이 멸절하여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꿈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어 미칠 지경이었다. 용천기의 오른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금마옥 무인들 전부가 신법을 발휘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천 명의 무인이 동시에 그러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용천기도 마지막으로 몸을 날렸다.
"삼라는 들어라. 저들과의 난전 속에서 총주를 반드시 구해야 하느니라. 그게 이번 싸움에서 너희들의 임무이니라."
소진악도 삼라에게 명을 내리곤 사망총 무인들과 함께 금마옥을 뒤따랐다.
번개가 번쩍였다.
일섬!
하지만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은 자들은 수십이다.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용맥과 아수귀옥보다 앞으로 나아간 사우의 솜씨였다.
아무리 금마옥 무인들이 지난 시간보다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사우에 비해서는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두 번 세 번 연이어 번개를 먹은 사우의 검이 휘둘러졌다.
까깡!
유일하게 그의 검을 막은 이가 나타났다. 바로 동천화다. 명색이 금마옥의 부옥주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 힘을 줘서 이가 부서질 것 같았다.
전심전력으로 사우의 검을 막아 냈다. 이렇게 벌써 죽을 수는 없었다. 검에서 떨어진 그는 뒤로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동천화의 목은 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아주 잠깐 검을 섞어 봤지만 역시나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동천화가 뒤로 물러난 사이 금마옥 무인들이 다시금 사우에게로 달려들었다.
덤벼들 적마다 모조리 죽는다. 너무나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동천화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친다.
저 무인들을 어찌 키웠나.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모두를 외울 수는 없지만 얼굴들은 하나같이 다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헌데 저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다니.
'빌어먹을.'
동천화는 내공을 발끝으로 모았다.
고무줄이 튕겨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돈 이후 북해박룡(北海搏龍)이 펼쳐진다. 강한 내기가 집결된 동천화의 검 끝이 현란하고 빠르게 움직여 많은 잔상을 남겼다.
사방으로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던 사우는 재빨리 검막으로 방어에 나섰다.
콰콰쾅!
폭음이 들렸다. 동천화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다는 증거의 소음이었다. 동천화는 지상에 몸이 닿자마자 움직였다.
파팍.
사우의 검기가 그가 착지한 자리에 쏟아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동서남북으로 있던 금마옥 무인들을 물리고는 동천화는 쫓는다.
가히 신기에 가까운 검법이다. 동천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망쳤다. 허나 난전 속에서 얼마 못 가 발목을 잡혔다.
"할 만해?"
"죽을 맛입니다."
사우의 옆에 주문룡이 다가왔다. 뒤이어 마존도 도착했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약들을 먹는 것이기에 이렇게 강한 건지."
마존도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우의 옆으로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두 사람 다 이곳에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사우의 옆에 온 것이다. 사우의 근처에 있으면 어처구니없게는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사우의 엄호를 위해서였다. 그가 강한 자들을 죽이기 위한 과정에서 달려드는 금마옥 무인들을 막아 주기 위함이다.
"너…… 이제 죽을 준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사우는 악마의 미소를 동천화에게 보냈다.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네."
하지만 등가휘의 얼굴은 펴지지 못했다. 모용하의 말대로 예상보다 용맥과 아수귀옥 무인들은 잘해 주고 있었다.
특히나 사우라는 자는 신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히 전신이라 부를 만하다. 여기서 자신과 파천용왕이 나선다면 전세는 충분히 유리하게 끌고 갈 수 가 있었다.
헌데 용왕의 얼굴이 어둡다.
"저러다…… 그곳을 건들게 된다면 큰일일 것인데."
"그곳이라 하면."
"마옥혈검."
"예?"
"구천제혈신검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초식이라네. 또한 이 세상에서 그걸 막을 만한 무공은 존재치 않지. 하지만 말이야. 마옥혈검이 세상으로 나오게 하려면 무공을 익힌 주인의 뇌가 악마에게 파 먹히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모용하는 이해하기 힘든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 또한 그것이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에 불과하길 비네. 마옥혈검은 이 세상에 딱 한 번 나타났으니까."
"정말입니까?"
"아주 옛날이야기지."
등가휘는 심각한 눈으로 사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도 난전 속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동천화의 머리가 바닥에서 먼지에 뒤집혔다. 목을 잃은 육체는 아무런 힘도 없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용천기는 감정 없는 눈길로 떨어진 동천화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네가 금마옥주인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중년 사내의 몸에서는 정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강함이 느껴졌다. 사우의 후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냄새만으로도 그가 얼마만큼 강한지를 알게 해 준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장포가 찢어질 듯 펄럭인다.
이 사내…… 결코 만만치 않는다. 등가휘나 모용하보다 더 강한 사내다. 아마 흑천과 버금갈 정도다.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뇌를 강타하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이토록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 말이다. 이자가 직접 흑천과 상대해서 죽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사우는 몸 안에 피가 들끓고 있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밖으로 뱉어 내지 않으면 장기가 데일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천천히 검을 들었다.
"구천제혈신검…… 한 번쯤은 겪어 보고 싶었습니다."
용천기의 병기는 검이 아닌 도(刀)였다. 그것도 엄청난 두께와 길이를 자랑한다.
"한 번 맛을 보려면 목숨을 걸어야 될 거야."
"이미…… 흑천을 죽이려고 작정했을 적부터 목숨에 미련은 없었습니다."
"잘도 지껄이네. 주인을 문 개새끼 주제에."
"수족을 잘라 내고 키우던 개를 버리려던 주인을 문 것뿐이라고 해 두지요."
"그거야 네놈의 잘난 자기 합리화일 뿐이고. 어차피 내 손에 죽는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 일이겠지."
"그거야…… 잠시 뒤에 알게 될 일이지요."
용천기도 사우의 기세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우를 압도한다. 두 사람은 각자 병기를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사우는 용천기가 무슨 무공을 쓰는지 잘 몰랐다. 병기는 도인지라 도법을 쓰겠지만 얼마만큼의 위력이 있는지 모른다.
수라신마도(修羅神魔刀)다.
사우는 잘 몰랐지만 최초의 도법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도법들은 수라신마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도법이었다. 게다가 용천기는 그 도법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기재였다.
금마옥 초대 옥주 외에 유일하게 수라신마도를 극성으로 펼칠 줄 아는 무인이기도 했다. 지금 사우는 그런 자와 맞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도기의 빛이 벌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수라신마도의 특징이다. 반대로 사우의 검에는 검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주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 근처에 있다가는 뼈 하나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기세는 삼십 장까지 전달되었다.
등가휘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번 전쟁의 결과는 두 사람의 승패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기에 남은 이들은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이어 갔다.
이천 명의 숫자는 직접 몸으로 겪어 보니 엄청났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약한 이들도 아닌 절정무인들 열 명이 한 번에 공격을 해 오면 감당하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 전투가 시작된 지 반 시진가량 지나가고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쉬지 않고 움직이기에는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리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 하더라도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의 싸움에서 일각이라는 시간도 버티기 힘이 든다.
그런 상황에서 수적으로 밀리게 되니 전세는 이미 금마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등가휘는 사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그와 용천기의 싸움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마존은 주문룡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과 몸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생기를 잃지 않는 곳이 있다면 눈빛이다.
겉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눈빛 외에는 모두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마존은 이제 거의 한계에 부딪혔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냈다.
주문룡이 부축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상태는 좋지 못하다. 이제는 검을 들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주변은 적들로 가득했다.
"궁주!"
환청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주문룡의 귀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주문룡은 너무나 반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이적이었다.
흑마궁의 부궁주 이적 말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서른 명의 흑마궁 무인들이 등장했다. 주문룡으로서는 한줄기 햇빛 같은 존재들이다.
"궁주를 뵙습니다."
그들은 주문룡을 둘러싸고 예를 갖췄다.
"죽으려고 환장한 놈들이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문룡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 죽을 거라는 걸 알고도 찾아온 이들이다.
수하들이지만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속으로만 해야 했다. 지금 이곳은 피 튀기는 전쟁터였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안전한 장소로 흑마궁 무인들의 호위 아래 이동한 주문룡은 마존의 안위를 살폈다. 숨결이 거칠지 않고 조용하다.
아마도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 사우는."
"잘 싸우고 계십니다."
저 멀리 사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주문룡이 조용히 설명해 줬다.
"그 녀석…… 잘 해내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저희가 있으니 편히 쉬십시오."
마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결정 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싶지만 더 이상의 무리는 죽음으로 직결된다. 오로지 사우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존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즈음 용맥과 아수귀옥 무인들은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 갔다. 하나둘 죽어 갔지만 그래도 끝까지 싸웠다. 등가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진정으로 따랐다. 주군이기 전에 아버지처럼 파천용왕을 따른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어길 자식이 용맥에서는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의 곁에서 검을 휘둘렀다. 아수귀옥도 마찬가지다. 모용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
핏빛으로 물든 용천기의 도가 하늘에서 춤을 추며 도기를 뿌려 댔다. 사우는 그런 그의 공격을 피하느라 한 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쉬지 않고 보법으로 몸을 움직였다. 지칠 틈도 없었다. 오로지 도기를 피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반격을 가해야 하는데 그 틈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저 도기는 자신의 검막으로는 막아 내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로지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칠 수는 없는 노릇. 사우의 눈이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쑤욱 내민 검이 뱀의 그것처럼 움직였다.
십이분광(十二分光)!
열두 개의 잔상을 남긴 사우의 검이 용천기의 심장을 향했다. 용천기는 황급히 도를 회수해 막아 냈다.
사우의 공격은 용천기가 자신의 도를 회수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제 장난질은 그만하자고, 늙은이."
아직 두 사람 다 자신들의 절초를 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몸 풀기에 불과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사우는 마옥혈검을 제외한 구천제혈신검 여덟 개의 초식을 이번에 모조리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그것을 용천기가 버텨 낸다면 이번 싸움은 자신의 패배로 끝이 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우는 미련 없이 내공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연속으로 구천제혈신검을 펼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 될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처음은 천뢰무망이다.
전류가 온몸에 감돌았다. 용천기도 수라신마도의 초식을 펼쳤다.
혈해수라(血海修羅)와 천뢰무망이 부딪혔다. 중간에서 두 사람의 힘이 부딪히자 엄청난 기운이 주변을 휩쓸었다. 아마 주변에 누군가 있었다면 모조리 태워져 버렸을 것이다.
사우도 용천기도 멈추지 않았다.
사우는 십이분광과 극섬쾌류(極閃快流)를 연이어서 검 끝에서 폭파시키듯 뿌려 댔다. 두 초식 다 쾌속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용천기의 병기인 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어깻죽지에 살점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극심한 고통이 따를 터인데 용천기의 얼굴은 너무나 잔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 같았다.
그러나 그건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자에 대한 지독한 화가 치밀어 오른다.
혈해멸절(血海滅絶)!
고오오오.
구구구궁.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용천기의 머리카락과 장포가 펄럭거렸다. 동시에 땅이 뒤흔들렸다. 사우는 자신의 살갗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도기의 면적이 엄청났다. 피의 바다! 그리고 모조리 멸하기 위한 힘이 실려 있었다. 도저히 막아 낼 만한 것이 아니다.
사우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피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도저히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바보같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런 행동을 사우가 해 버린 것이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떤 빛이 자신의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없이 맑고 투명한 빛이었다. 그리고 따스했다. 언젠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느껴 봤던 기운이다.
'설마…….'
사우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손톱만 한 때도 묻지 않은 새하얀 옷을 입은 이였다. 옷의 색과는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여인인가, 사내인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금마옥주는 이 싸움을 당장 중지해라."
목소리는 분명 남자의 것이다. 그리고 그 음성이 낯설지 않다. 사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
용천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보지 말았어야 할 걸 봐 버린 눈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찌!"
"다시 한 번 명령한다. 이 싸움을 당장 중지시켜라."
온몸에 빛을 머금은 사내는 냉정하고 단호한 투로 말했다. 말 그대로 명령이었다. 제대로 그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시 생명의 보장은 없다.
용천기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서 수하들에게 싸움을 멈출 것을 명령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 같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사우와 용천기, 그리고 용천기에게 명령을 내린 자에게로 모아졌다.
"아…… 아……!"
소아경은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은 행복함의 의미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빛을 머금은 사내가 누구인지, 그 때문에 얼마만큼 자신이 힘들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갑다. 미치도록 반가운데 달려 나가질 못한다.
손발이 묶여 있어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겠다. 마음 같아서는 쇠사슬을 다 뜯어내고 싶지만 그녀에게는 힘이 없었다.
"가지."
"예."
등가휘가 모용하와 함께 사우와 용천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너무나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등가휘와 모용하는 빛을 머금은 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아……!"
그 말 한마디에 사우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죽었다는 놈이 어찌하여 멀쩡하게 눈앞에 존재한단 말인가! 이건 꿈이었다. 꿈일 것이다. 현실이…… 아닐 것이다.
"금마옥주."
"……."
용천기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사우만큼이나 그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다.
"아주 예전…… 금마옥에서 지독한 악귀가 한 명 나타났었지. 구천제혈신검을 도둑질하여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든 그는 인간이 아닌 살육하는 짐승이 되어 천하를 위험에 빠트렸지. 그때 처음으로 흑천의 자리에 있던 자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어 그 악귀를 죽여 버렸는데 중원 사람들은 그를 화월선자라고 부르게 되었지. 이후 금마옥은 흑천의 관리 아래 많은 이득을 취해 왔지. 헌데…… 결국 이렇게 되었네."
'화월선자!'
사우는 마존이 말한 화월선자를 떠올렸다. 설마 흑천이 화월선자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소리인가!
중원에서는 흑천을 화월선자로 알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부터 금마옥과 사망총은 이 세상에서 지워지게 될 것이야. 흑천을 시해하려고 했던 죄를 오늘에서야 묻는 것이지."
용천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중원으로 뛰쳐나와 목덜미를 잡혔다.
이제는 별 방법이 없다. 싸우거나 항복하거나.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싸우고자 하는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도저히 저 사내를 막아 낼 방도를 찾지 못하겠다. 죽으면 죽었지 다시 무릎을 꿇을 생각도 없었다.
"다시…… 흑천을 섬길 생각은 없소."
그걸로 끝이었다. 빛 무리가 용천기를 둘러싸더니 이내 그의 목숨을 앗아 갔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용천기 같은 엄청난 고수를 저렇게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번에는 십절무황이었다.
무황 소진악도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너…… 뭐 하는 새끼냐."
사우는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사우."
"하! 오랜만이다? 죽었다고 알려진 놈이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죽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것이지."
"흑천께서는 이미 용천기와 소진악의 계획을 예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흑천을 대신하여 등가휘가 입을 열었다.
"소아경을 이용하여 당신의 목숨을 취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아시면서도 그대로 당하는 척 연기를 하셨습니다."
"어째서지?"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반심을 품을 것이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계획에 속아 주신 겁니다. 그 명분을 이용하여 오늘처럼 그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거기에 나는…… 놀아났군."
"애초에 그럴 계획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진악은 공자를 이용하여 흑천을 통합하기 위해서 이풍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를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이지요."
사우의 눈이 흑천을 노려봤다.
"그리 쳐다볼 것 없다."
"닥쳐. 네놈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한 일들이 애들 장난처럼 되어 버렸거든."
"아니. 아니다. 난 이제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난다. 이미……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지?"
"소아경이 들고 있던 검은 독이 묻어 있었다. 그건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지상에서 가장 악독한 독이지. 그걸 이기기 위해서 천왕공을 운기하다 보니 마옥혈검이 나타나더라. 그로 인해 마인곡의 내 벗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 미친 악귀가 되어 마인곡을 짓밟은 후에서야 정신이 든 나는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행인 건 속히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지. 이제는…… 너에게 모든 걸 맡기고 가야 할 것 같다."
"헛소리하지 마."
흑천은 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탁한다. 과거의 흑천살막을 만들어 다오. 평화롭고 아무 탈도 없이 중원을 지켜만 보던 그런 곳으로. 부탁한다…… 내 동생아. 나와 피를 나눈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사우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그놈의 육체가 빛 무리에 섞여서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흑천』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