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드러나는 진실 (36/38)

第六章 드러나는 진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모준은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에는 사우를 업고 있었다. 쓰러진 지 반 시진이 지날 동안에도 사우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마존과 그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아수귀옥이 왜 사우와 자신들을 살려 줬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중요한 일은 사우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사우는 굉장히 강한 무인이었다. 그의 검법 구천제혈신검은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걸 눈으로 본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사우를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이 지경으로 만든 자가 있었다.

제대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가 아수귀옥이라는 곳의 수장일 것이다. 앞으로 사우의 적이 되어야 할 사내 말이다.

무적이라고 생각했던 마황십팔전은 이제 열여덟이 아닌 열두 명으로 전락해 버렸다. 여섯 명이나 죽었다.

남은 열두 명 중 네 명은 작지 않은 부상을 당한 상태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륜이라는 자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했기에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모준은 서둘러 사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사우!"

저 멀리 새벽안개 너머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존과 주문룡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자신들이 보지 못한 광경을 본 사람들처럼 당혹스러워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우가 이런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존과 주문룡은 사우와 마황십팔전의 흔적을 쫓아 달려왔다. 자신들이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돌아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사우도 그렇고 마황십팔전이 부상을 입은 채로 돌아오는 모습이라니!

얼른 두 사람은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사우와 함께 머물렀던 곳에서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마존과 주문룡은 사우의 몸을 살폈다. 그의 가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모준의 설명대로 누군가에게 장법을 제대로 당한 모양이었다.

사우가 장법으로 부상을 당할 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건 쉽게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은 정말 그러했다.

별다른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말이다. 부상을 당한 부위가 심장 쪽이었던지라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정말로 다행인 것은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심장을 제대로 맞았는데 죽지 않았다는 건 기적이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사우를 살린 것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지척에서라면 사우는 반격도 하지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사우에게 그런 공격을 가할 정도라면 엄청난 고수일 터인데 왜 사우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을까.

의아해했지만 속 시원하게 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사우가 정신을 차린 건 그날 정오가 지나서였다.

"정신이 들어?"

사우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길 반복했다.

"빌어먹을."

사우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욱신거리는 가슴 통증 때문에 도로 누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주 정말 좋은 모습 보여 주십니다."

주문룡이 비아냥거렸지만 사우는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공격당할 당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저 가슴이 뜨거워졌고 몸이 붕 떠오른 것 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지금 이곳이었다.

사우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당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공격이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가? 사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빠름을 펼칠 수 있는 보법이 하나 있긴 하다.

무영십보(無影十步)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자가 쫓아오지 못할 정도의 속도, 그리고 어떤 거리도 열 걸음 안으로 상대의 지척까지 도착한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보법을 가진 가는 알고 있었다. 바로 아수귀옥의 수장 야차혈왕의 절기였던 것이다.

'훨씬 더 무서운 놈이구나.'

사우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당해 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

야차혈왕이 어찌 자신을 살려 줬는지는 모르나 살심이 있었다면 지금은 염라대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리라.

사우의 눈이 천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귀에는 마존과 주문룡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야차혈왕이 자신을 살려 둔 것일까!

그 이유가 지금 사우가 집중하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중요치 않았다.

'대체 왜…….'

예전에는 구천제혈신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악마의 검법은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익힐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심장에 악마의 낙인을 찍지 않는 이상 익힐 수도 펼칠 수도 없음을. 그들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중원을 다스리는데 자신의 존재는 이미 척살대상 일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헌데 살려 줬다는 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사우는 머릿속에 떠도는 잡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일단 몸을 회복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모두를 물러가게 한 이후 천왕공으로 다친 상처를 회복시키는 일에 열중했다. 몸이 다 치료된 이후에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여느 때처럼 사우의 몸에는 검붉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그렇구나."

수년 만에 만난 부녀지간의 대화치고는 별다른 감동이나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부녀 스스로도 이런 느낌 없는 인사에 익숙한 듯 보였다. 소아경의 눈길은 굉장히 차가웠다. 그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진악은 그런 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듯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인 것이냐."

오랜만에 본 딸아이의 얼굴은 굉장히 야위어 있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물론 그녀의 고생에 대부분은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는 설무랑이나 삼라 같은 뛰어난 이들이 지켜 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 덕분에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쯔쯧."

그런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미안한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대체 지금껏 뭘 하시면서 지내신 거죠?"

대체 얼마만큼 대단한 일을 하기에 사망총의 일도 자신도 버려뒀는지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바로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저 조용히 세상 구경이나 하며 지냈다."

사실일 리가 없다. 사실이라면 부녀지간의 연을 끊을 참이지만 말이다. 소아경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그런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해타산적이며 욕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그런 분이 갑자기 사망총을 버린 채 떠났다면 더 큰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아경은 그렇게 확신했다.

"어설픈 거짓말에 속을 생각은 없어요.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면 여기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소진악의 시선이 그녀의 뒤에 있는 설무랑에게로 향해졌다.

"설무랑을 그렇게 쳐다보실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가 있는 장소는 다른 이에게서 들은 것이니까요."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구나."

"아버지가 왜 사우를 만난 것이죠?"

"언제부터 네가 아비의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사망총주 자리를 제게 넘겨준 순간부터예요. 아무것도 모르던 저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넘겨주셨죠."

"어차피 사망총은 너에게 넘겨주려 했었다."

"정말 끝까지 거짓말을 하시네요."

소아경의 눈이 한기를 담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흥분하여 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오라버니들은…… 어디 있죠?"

"……."

소진악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미뤘다. 소아경은 그런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 뒤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읽었다.

그녀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죽었다. 두 아이 모두."

불길한 예감은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언제나 하나뿐인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려고 했던 오라버니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그들의 사랑을 더 받고 자라 온 소아경이다. 눈물이 흐르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아버지의 앞에서 운다면 뭔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였다.

"왜…… 그렇게 되었죠?"

"그건 너에게 말을 해 줄 수가 없구나."

"아뇨. 전 왜 오라버니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아경아…… 넌 몰라야 되는 사실이란다."

소아경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부들부들 떨리면서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총주. 잠깐 바람이라도 쐬시지요."

설무랑이 뒤에서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모든 걸 터트렸을 것이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깐 제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소아경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하네.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했네. 홀로 움직이겠다 하셔서 어쩔 수가 없이 동행했네."

"하여간 그놈의 고집은."

"자네를 많이 닮으셨지 않은가."

"지 오라비들은 걱정이 되고 내 다리가 이 꼴이 된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인가 보이."

설무랑은 쓰게 웃었다.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두 부녀 사이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부녀지간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그로서는 익숙한 일이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이 더 나았다. 과거에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죽었나."

"그렇게 되었네."

"안타깝게 되었군 그래."

설무랑은 진심으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소진악도 오랜 벗의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총주는 내가 모시고 내려가지."

"묻지 않는군. 왜 사망총을 떠났는지."

"대충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듣지 않기로 하지."

"아경을 잘 부탁하네."

"내 목숨은 총주를 위해 있는 것이지. 자네가 총주로 있을 때에는 자네를. 이제 사망총주는 저분이시니, 내 역할에는 소홀함이 없을 걸세."

"고맙네."

"별말을."

설무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랑."

"……."

"그 아이의 과거가 돌아와서는 안 되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총주께서 과거를 되찾으신다면 그건 하늘의 뜻인 게지."

소진악이 웃었다.

"그런가. 역시 자네는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군 그래."

"그럼."

설무랑이 밖으로 나가고 한참이 지나도 소아경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설무랑과 함께 산을 내려갔을 것이다.

소진악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혹여 딸아이가 물고 늘어지며 질문했다면 흔들렸을 것이다. 모든 걸 다 말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 * *

"서륜이 죽었다는 보고입니다."

군사 사마태릉의 말에 율무천은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목에 걸린 가시가 빠져 버린 시원한 기분을 느끼는 반면 씁쓸한 감정을 지우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로써 남북천맹에 생긴 이래 이어져 내려오던 사대검문 중 한 축을 담당하던 대막검문이 사라졌다.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한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낸 남은 이들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율무천은 검룡전주 주원호를 불러들였다.

그에게 서패우를 비롯해 남은 대막검문 무인들을 척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사마태릉에게는 상징적인 사대검문을 채울 다른 문파를 찾을 것을 명했다. 이로써 남북천맹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불순 세력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 여부에 따라서 남북천맹이라는 거대 조직이 얼마만큼 더욱더 성장할지가 달라진다.

다만 사우가 말한 그들의 존재 여부가 문제였다. 그들과 싸우고 있는 사우가 죽는다면 남북천맹은 여전히 허수아비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내부 깊숙이 그들이 침투할 것이고 율무천 그에게는 막을 힘이 없었다. 일단은 확실하게 재정비를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 * *

몸을 회복하자마자 사우는 즉시 움직였다. 마황십팔전은 대동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출혈도 심각했기에 휴식을 취하라 명했다.

사우는 홀로 움직이려 했지만 마존과 주문룡이 앞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은 사우를 쫓을 생각이었다. 사우는 혀를 차며 결국 두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기를 선택했다. 물론 두 사람이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속력을 낼 작정이었지만 말이다.

사우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마존과 주문룡이 쫓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사우도 무리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제대로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왕공으로 치유를 시작했지만 염왕장이라는 것에 깊게 당한지라 회복이 완전하게 되지는 않았다.

물론 반나절 만에 이 정도로 회복되는 건 천왕공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웬만한 이들로서는 꿈도 못 꿀 속도였다.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다. 가슴 쪽이 뻐근해지자 사우는 속도를 죽였다.

일각 정도 쉬고 있자 마존과 주문룡이 겨우 도착했다.

"너…… 치사하게 이럴 거냐?"

마존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그래도 마존은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주문룡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숨 쉬는 것도 곤란해 보였다.

"그러니까 혼자 간다고 했잖아."

"하아…… 하아. 그런 몸으로 어딜 혼자 가신다고 하십니까."

주문룡의 상태는 정말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우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이 자식이 언제부터 나랑 누워서 대화했냐! 안 일어서?"

"커, 커헉!"

가뜩이나 호흡을 하는 것이 어려운데 기습적으로 한 대 맞고 나니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사우의 일어서라는 말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죄송합니다."

차렷 자세가 된 주문룡의 행동에 만족했는지 사우가 굳은 얼굴을 풀었다.

"아무래도 너희랑 같이 가는 건 안 될 것 같다."

"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려는 건데!"

"만날 사람이 있어."

"대체 그게 누굽니까?"

따지면서 묻는 주문룡에게 사우는 눈을 부라렸다. 요즘 들어 자신에게 너무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어딘지 누구를 만나시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위험하십니다."

"그래. 그러니 조금 시간이 걸려도 함께 가자."

마존은 사우가 허락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눈빛이었다.

"빌어먹을. 느려 터진 걸음을 해 가지고 주제도 모르는 것들. 젠장."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인 셈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마존은 즉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음…… 얼마 못 가서 작은 마을이 하나 있네. 그곳에서 오늘은 쉬면 될 것 같다."

허나 사우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자기도 힘들어서 쉬고 싶을 것이면서. 쯔쯧."

적지 않은 부상이다. 저렇게 무리를 하면 당연히 몸이 버텨 내지를 못한다. 아무리 사우의 무공이 높다 한들 고통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자신들에게는 들키지 않는다.

그래서 쫓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리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말이다. 주문룡도 내달렸다. 마존은 그런 사우의 등 뒤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나절 정도를 더 신법으로 달리자 작은 마을 하나가 나왔다. 도시와는 상당히 떨어진 촌이었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알아보던 사우는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바로 소아경과 설무랑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었네."

"그러네요."

마존은 사우의 얼굴에서 반가움을 보았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 지기인 마존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소아경과 설무랑은 식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양을 보니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함께 동석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소아경은 잠시 설무랑과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표정이 왜 그래?"

소아경의 맞은편에 앉은 사우가 대뜸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요."

소아경의 태도는 너무나 냉랭했다.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 한기는 사우에게만 쏘아져 나갔다.

마존이나 주문룡과 대화를 할 적에는 평온했다. 사우의 입이 씰룩거려졌다.

"아직도 그때 그 일에 기분이 풀어지지 않은 건가?"

하지만 소아경은 묵묵부답으로 식사에만 열중했다.

"쩝."

사우는 입맛을 다셨다. 뭐, 그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미련을 갖지 않고 넘기면 그만이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

"식사가 끝나면 따로 뵙죠."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남자를 부르는 건 실례라고."

"되지도 않는 농을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에요."

"어련하시겠어."

사우는 소아경의 옆에 섰다. 크지 않은 냇가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십절무황은 만났나?"

"만나 뵙지만 제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서로 간의 비밀이 많은 부녀지간이군."

"대막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당신 솜씨인가요?"

"뭐…… 당신 아버지가 키워 낸 자들의 솜씨라고 해야 정확하겠지."

"아버지가 키워 낸?"

"마황십팔전이라고 하더군."

"그럼 설마 아버지가 사망총을 버리고 간 이유가 그들을 키우기 위한 일이었을까요?"

"그거야 알 길이 없지만 아마 훨씬 이전부터 진행해 온 일임에는 틀림없겠지. 워낙 애들이 강하거든."

"당신이 말한 선물이 바로 그들인가요? 하지만 아버지는 왜 그들을 당신에게 넘긴 거죠?"

"그거야…… 그 녀석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소아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버지는 그 사람을 싫어했어요."

"흑천을…… 말인가?"

"정확히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분을 싫어했죠. 천하를 지배하는 자의 아내로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소아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자에게 딸아이를 시집보내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요."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지 않았나?"

"설무랑에게서 들은 이야기예요. 저와 그 사람의 결혼을 너무나 반대하셨다고요. 그래서 저와 아버지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대요."

"내 기억에도 당신 부녀지간은 꽤나 다툼이 많았었지."

"어쨌든 절대로 당신에게 공짜로 그들을 내어 줬을 리가 없어요."

"자신의 딸아이를 이번 일에서 빼 달라는 부탁이 있었는데."

"정말 순진한 건가요?"

소아경이 냉랭한 얼굴로 소리쳤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린데. 순진하다는 건 나랑 어울리지가 않아."

"겨우 그런 걸로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말 순진한 거예요."

"그런가? 뭐,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하지만 애초에 마황십팔전은 당신 부친의 말을 빌리자면 흑천의 직속으로 두고자 만들기 시작한 자들이지. 그런데 지금 흑천은 죽었고 그 녀석을 이을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당신…… 정말 과거의 아버지와 그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틀어져 있었는지 모르고 있는 건가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기억은 없다. 그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는 흑천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아수귀옥뿐이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밖에 없던 곳에 설무랑이 나타났다. 사우는 진즉에 그가 숨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무랑?"

"죄송합니다. 늦은 밤에 총주를 밖에 홀로 계시게 할 수 없어 몰래 쫓았습니다."

"후우."

설무랑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

사우는 근처에 있는 바위 위에 앉으며 말했다. 설무랑은 소아경과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입을 열었다.

"소진악 그 친구는 야망이 아주 컸죠. 결코 흑천이라는 사내 밑에서 만족할 만한 그릇이 아니죠. 그건 아주 어렸을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흑천의 아버지와 동년배였던 십절무황은 늘 자신이 누군가의 하수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만큼 그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 못할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았다.

그 나이 또래에 비해서 늘 성숙했고 남들보다 앞서 나갔다. 무공도 나날이 일취월장했고 말이다.

아마 역대 사망총주들 중 가장 사망총을 최고의 전력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는 일등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넘지 못할 산이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흑천의 자리다. 역대 흑천 중 가장 강하다 일컬어지는 사우의 부친이 인정한 이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죽어 버린 흑천 말이다.

겨우 아들뻘 되는 아이의 무공은 그 시절 최고였다. 구천제혈신검을 펼치는 그 모습은 정말 넘지 못할 산으로 다가왔다.

그 집안에 대한 질투심과 자격지심은 날로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사망총의 힘으로 그들을 꺾으려 반심을 품었었다. 허나 그건 상상이었지 결코 현실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사우의 형이 흑천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 사망총과 흑천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늘 사망총주는 흑천의 최측근 자리에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용맥이나 아수귀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소진악으로서는 결코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흑천과 잦은 다툼이 일어났다. 그의 계획에 매번 시비를 걸었고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반대하기 일쑤였다.

"겁이 없었군."

사우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의 말에 반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흑천살막에서 흑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가히 신과 대적할 만한 위치에 있는 이가 흑천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건 곧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진악은 앞으로 미래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흑천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아경이 흑천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서로 부부가 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왔다.

소진악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미워하던 자가 자신의 사위가 된다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어요."

단순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부부의 연을 맺는 걸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과거의 기억은 없다. 설무랑에게서 많이 반대했을 거라는 말을 들은 것 외에는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지금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흑천을 죽인 후보 중 유력한 인물로 사망총주가 떠오른다.

"소진악 그 친구가 흑천을 죽이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감히 흑천을 죽인 인물이 못 된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그 친구는 야망이 큰 만큼 조심성이 많죠. 위험성이 높은 도박에는 절대로 판돈을 걸지 않을 친구입니다."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데. 마황십팔전은 흑천의 군대라고 무황이 내게 말했지. 흑천의 명령으로 그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흑천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한다?"

사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 같아도 그런 개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라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마황십팔전은 직접 경험해 봤듯이 엄청난 인재들이다.

그런 그들을 키워 내는 데 상상도 못할 노력이 필요했을 터인데. 웬만한 집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글쎄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무황 그 친구도 점점 욕심이 생겨났겠지요."

"욕심? 흑천의 군대가 아닌 흑천을 이길 세력을 만드는 것 말인가?"

"그거야…… 저도 알 길이 없는 일입니다."

사우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흑천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키워 내던 세력이다.

"제 생각으로는 흑천을 죽인 이들은 다른 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황이 흑천의 군대를 키우고 있다는 걸 전해 들은 다른 네 곳의 세력들이 반심을 품은 것일 수도 있지요."

누구나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무황은…… 어디 있지?"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려고 왔으니까."

"아버지는 지금 당신과 만났던 산에 계실 거예요."

"아마 지금쯤이면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서둘러야겠군."

"아버지를 만나서 뭘 어쩌려고 그러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과연 대답해 주실까요. 가 봤자 헛수고일 거예요."

"족쳐 보면 입을 열겠지."

"……!"

"말씀이 심하십니다."

설무랑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다리가 그리 되셨지만 쉽게 당하실 분이 아니에요."

"무황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

"아뇨. 당신 스스로를 너무나 높게 평가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사우가 콧방귀를 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건가? 미안하지만 그런 다리병신에게 질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

"노옴!"

설무랑의 손이 급격하게 움직였다.

"멈춰요!"

정확히 사우의 목젖 앞에서 손이 멈췄다. 사우는 그녀가 말릴 줄 알았는지 아무런 방어도 취하지 않았다.

"좋아요. 나도 따라가겠어요."

"하!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닐 텐데. 당신 아비가 땅바닥을 기는 모습 말이야."

"이자의 목을 꺾어 버리겠습니다."

설무랑은 그답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참으세요. 설무랑."

"그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다시는 그 손으로 밥을 먹기 싫으면 안 치워도 좋고."

사우도 지지 않고 설무랑의 기세에 맞대응했다. 결국 그의 손이 거두어졌다.

"어디 직접 눈으로 보도록 하죠."

"얼마든지."

결국 소아경은 사우 일행의 뒤를 쫓기로 했다.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다시금 되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곳에 있다는 것에 큰 희망은 걸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 장소에 없다고 봐야 할 일이다.

만약 사우가 아버지를 해하려 든다면 그땐 모든 걸 걸고서라도 막아 내기 위해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아경의 예상이 빗나갔다. 소진악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식생활을 하기 불편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며칠째 그곳에 머무는 것이 이상하다.

소진악은 마치 사우가 이곳에 다시 올 줄 알았다는 듯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올 줄 알았나 보군."

"그럴 리가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점쟁이가 되었겠지요."

능글맞은 그의 미소는 사우의 기분을 언짢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소진악은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나가 있어."

사우는 소진악과 독대를 원했다.

"나가 있거라."

소진악은 끝까지 실내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딸에게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내에는 사우와 소진악 둘만이 남았다.

사우는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나의 보호막을 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누가…… 흑천을 죽였는지 말해."

강압적인 말투였다. 몰라도 안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중요한 것은 사망총은 아니라는 것이죠."

쾅!

두 사람의 가운데 놓여 있던 나무 식탁이 주저앉았다.

"장난질했다가는 그 눈을 뽑아 버릴 것이야."

"생각해 보십시오. 전 오랜 시간을 흑천의 군대인 마황십팔전을 키우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공치사를 듣자고 온 것이 아니야."

"왜 그랬을까요. 숨기지 않겠습니다. 흑천과 전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분은 제게 마황십팔전을 키우는 걸 명하셨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의 부친과 틀어지기 전이었지요. 하지만 마황십팔전을 돌보면서 문득 탐욕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들더군요."

"가지고 싶다?"

"예. 그렇습니다.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그만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을 가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요. 흑천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결국 그런 마음은 버렸답니다. 그러니 본총이 아닌 다른 이들을 의심해 봐야 할 일이랍니다."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

"먼저 본총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단체가 있다면 바로 아수귀옥입니다. 정확하게는 야차혈왕과 전 그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죠. 서로가 늘 흑천의 최측근에 서기 위해 암투를 벌이던 사이죠. 헌데 흑천의 군대라는 명목 아래 흑천의 후원을 받는 일은 그들에게 일종의 위기였을 수도 있겠죠."

복잡하다. 절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누가 흑천을 죽였나?

더 이상 헤매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범인을 정확하게 알아내야만 한다.

"파천용왕은 야차혈왕과 친분이 두터운가?"

"흑천을 죽인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죠."

"금마옥(禁魔獄)은?"

"사실 금마옥은 워낙 입지가 튼튼해서 자신들의 내부적인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자들이죠."

"그런데 왜 아수귀옥은 나를 살려 준 것이지?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도 많았는데 말이야."

"그것은 그대가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흑천의 힘을 이용하여 모든 걸 하나로 모으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흑천살막은 흑천이 죽은 이후로 와해가 되어 있는 상황이죠."

"그래서 아직은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소리네."

"그렇습니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살려 두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을 굴복시켜 허수아비 같은 흑천으로 만들어 버린다. 흑천은 그 무엇보다 상징적인 자리일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사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자결하여 죽는 것이 낫다.

물론 그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저들이 자신을 살려 두는 이유나 의도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소진악의 말을 신뢰하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돌아가는 정황상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파천용왕…… 어디 있지."

"글쎄요……."

소진악이 말끝을 흐렸다.

"아는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사우는 살기를 자신의 피부 밖으로 여지없이 드러냈다. 피부가 다 따끔거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소진악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명색이 십절무황이다.

흑천살막에서도 그 누구도 피하려 했었다. 물론 다리가 이 모양이 됐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게 자신을 지킬 인물은 아니다.

"아무리 그대가 흑천의 혈육이라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는 대화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주관할 것이 못 되지."

"제 명령 하나면 마황십팔전이 움직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대의 곁에 있지만 그들은 제 수족이나 다름없이 키워져 왔죠."

"파천용왕의 거처를 발설하는 것이 당신 목숨보다 귀하다면 받아들이지."

살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세상 모든 걸 부숴 버릴 기세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진악도 오기가 생긴다. 아니 독기를 품는다.

위축되거나 겁내지 않는다. 이미 살 만큼 살았고 죽는다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쉽게 지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아버지!"

실내의 문을 부수고 소아경이 들어왔다. 그녀는 다급하게 아버지를 찾았다. 밖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기운은 강렬했다.

안으로 들어오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설무랑."

소진악이 설무랑의 이름을 불렀다.

"아가씨. 위험하십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이미 소아경은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신형은 사우에게로 빠르게 이동했다. 사우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면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가 저렇게 덤벼들고 있으니.

사우는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기에 당하는 소아경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해 버렸다.

"이제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

소아경의 두 손목은 사우의 손에 잡혔고 들고 있던 검은 그녀 자신의 목 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익!"

발버둥을 쳐 봤지만 헛수고였다. 결코 그의 힘에서 풀려날 방법이 없다.

"그 아이는 풀어 주심이 좋을 듯합니다."

소진악은 당황하지 않은 듯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지금 긴장하고 있을 이가 소진악이라고 판단했다.

"곧 죽어도 허세를 부리시겠다, 이건가?"

사우는 진심으로 소아경의 몸에서 피를 보고자 했다. 지금으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헌데 그러지 못했다. 천장과 바닥, 그리고 양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

사우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로 인해 소아경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런."

사방팔방에서 검들이 공격해 들어오자 사우는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검을 크게 횡으로 그어 모든 공격을 막아 내자마자 나무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모준."

밖에서는 주문룡과 마존이 있다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는 사우의 옆에 바짝 붙었다.

사우는 이죽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아주 불쾌한 기분 때문이었다. 자신을 공격한 이들이 마황십팔전이기 때문이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황십팔전은 제 수족이라고."

모준의 뒤로 소진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들로 날 막을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아."

"적어도 몸을 피할 정도의 시간은 가질 수 있겠지요."

사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디 자신 있다면."

현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숫자는 열 명이었다. 마황십팔전의 열여덟 명 중 절반 가까이 부상을 입었지만 현재 온 인원으로도 가히 무적이었다.

이들이 펼치는 검진을 뚫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확실히 단축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소진악의 허리를 부러트려야 했기 때문이다.

모준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싸늘하게 굳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한 마리 늑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늘어트린 채 사우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그에게서 필살의 의지가 엿보인다. 사우는 이번에 이들을 뚫고 나아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모준의 뒤로 소아경의 움직임을 따라 소진악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설무랑도 보인다.

"어디 신나게 놀아 보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문룡과 마존의 몸이 좌우로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사우는 모준이 있는 정면을 뚫기 위해 나아갔다.

* * *

"저자가 뭘 물어봤기에 대답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황급히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소아경은 질문을 해 댔다. 도대체 뭘 물어봤고 그걸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서 죽일 듯 싸울 태세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네가 알아서 될 일이 아니다."

"대체 무슨 비밀이 이리도 많으신 거예요?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시기에 딸에게도 비밀을 유지하시는 거냐고요!"

정말로 분통해 마지않는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소진악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지런히 산을 내려가던 그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무황."

핏빛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안광이 번뜩인다. 그 모습이 야차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소진악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아니,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유일하게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글쎄요…… 아마 그건 무황께서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내 비록 다리병신이 되었지만 네놈에게 질 만큼 늙지는 않았다."

"그거야 직접 손을 섞어 보면 알 터. 그리고 저도 이참에 몸이나 좀 풀어 보죠."

"아버지?"

"저자는 누군가?"

"야차혈왕."

소진악의 입에서 야차혈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아경과 설무랑이 사색이 되었다. 이름만 들어 봤지 이렇게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다.

게다가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자가 야차혈왕이었다니.

"같이 힘을 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네."

"힘들어. 저놈은 지 애비보다 더 독하고 강한 놈이거든."

"……!"

설무랑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았다. 바로 소아경을 무사히 지켜 내는 일이었다.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야차혈왕 모용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새끼들! 더럽게 끈질기네."

마존은 상대의 팔을 부러트리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뒤이어 목뼈까지 부숴 버렸다. 즉사일 것이다.

딱 두 명을 상대했을 뿐이다. 헌데 체력이 바닥이 나 버렸다. 도대체가 몸놀림들이 장난이 아니다. 눈으로는 도저히 쫓지 못할 정도다. 오로지 몸에 배인 감각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주문룡이 조금 여유롭게 상대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신의 힘든 점을 이용해 더 달려드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데 주력하기만 했다. 반격을 하는 데 힘을 쓸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콰콰쾅!

저 멀리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소진악이 도망간 방향이다. 사우의 마음이 급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빨리 가 봐야 한다. 그런데 모준은 비켜 줄 생각 따위 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랑 놀아 줄 시간이 없다."

사우는 구천제혈신검을 펼치기 위해 힘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 * *

엄청난 충격에 소아경과 설무랑의 몸이 십 장이나 떨어져 나갔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그 힘은 모용하와 소진악이 내뱉은 기운이 충돌하면서 낸 결과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저런 능력을 지닌 모용하도 대단했지만 불구가 된 몸으로도 가공할 무위를 선보이는 소진악도 놀라운 인간이었다.

소아경은 소진악의 안위가 걱정되어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설무랑이 잡았다.

"지금 가시면 무황은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힘만으로는……."

"약한 친구가 아니니 잘 해낼 것입니다. 그보다 총주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다. 저 친구도 그걸 원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혼자서는 안 갑니다."

그녀의 태도가 완강하여 설무랑으로서는 어쩌지 못했다.

"……!"

소아경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설무랑이 급히 부축을 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흔한 두통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하게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픔과 동시에 몸속에 있는 모든 장기가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충격으로 나무에 부딪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고통이 찾아올 리가 없다.

약하긴 하지만 명색이 그녀도 무인이었다. 무가에서 태어나 지금은 사망총의 수장이기도 했다.

겨우 이런 부딪힘으로 이렇게 무기력할 리가 없다. 소아경은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분명 이상한 증상이다.

설무랑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상태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꿈을 꿨다.

아주 오래전인 듯했지만 며칠 전 일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참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꿈속에서 저 모습이 정말 자신의 모습인가 할 정도로 아름답게 웃었다.

무엇 때문일까. 대체 뭘 보고 있기에 저리도 행복하게 웃고 있을까. 이유가 뭘까.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남자가 서 있다.

잘생겼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반가움보다는 애틋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건 연모의 마음이었다. 정인을 바라본 여인이 품는 마음인 것이다.

기억을 잃고 나서 그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 흑천의 얼굴을 꿈속에서 보게 되었다.

낯설지 않았다. 비록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그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희한한 경험이었다.

분명 꿈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느껴졌다. 그의 손을 잡은 감촉마저 말이다. 순간 꿈속에 존재하던 자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더없이 차가웠고 더없이 살인을 저지르기 위한 최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푸욱!

얼굴로 시뻘건 핏물이 튀어 올랐다. 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얼굴 가득 핏물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쓰러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도 강한 남자……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처절하게 쓰러지는 약해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끝으로 그녀는 현실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

* * *

"너…… 뭐냐."

사우는 감정 없는 눈길로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용하를 올려다봤다.

"늦었네. 겨우 그런 놈들 처리하는 데 이렇게 늦으면 어쩌겠다는 건지."

"……."

사우는 가볍게 나무를 박차고 올라갔다. 그 움직임이 마치 고양이처럼 가볍다. 그리고 모용하가 있는 위치에서 검을 횡으로 그었다.

상대를 베었다 싶었는데 이미 모용하는 나무 아래에서 사우를 기다렸다.

"장난칠 시간이 없다. 너를 보자고 하시는 분이 계신다."

사우는 대답 없이 무작정 모용하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멍청한 놈. 네놈이 정말 그분의 혈육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모용하는 정말로 여유가 있었다. 사우도 빨랐지만 그보다 더 빠른 몸놀림이었다.

"용맥의 수장 파천용왕께서 네놈을 보자고 하신다."

사우의 검이 이제 막 모용하의 턱 아래에까지 도착했을 때였다. 물론 그가 멈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격이었다.

"네놈을 죽이면 볼 수 있겠지."

"허! 이놈 봐라."

모용하는 어쩔 수 없이 사우를 쓰러트린 다음에 데려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모용하의 보법은 신출귀몰했다. 변화가 다양했다.

뒤로 물러나면서 염왕장을 사정없이 퍼부었지만 애꿎은 땅들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뿐이었다.

겨우 그런 장법으로 사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우의 검에서 천뢰무망이 뿌려졌다.

거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이번만큼은 이놈에게 당한 걸 갚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오가는 곳마다 땅이 파이고 나무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주문룡과 마존은 저 멀리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봤다. 도저히 그들이 끼어들 차원의 싸움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저놈이 야차혈왕이구나."

"대공자가 어쩌지 못할 놈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충격입니다."

"사우……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예?"

"저 녀석이 정말 온 힘을 다 쏟으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악귀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야."

"그게 무슨……."

주문룡은 더 묻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봤다.

"우리 둘의 싸움은 서로에게 힘 낭비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헛소리 지껄일 시간에 모가지 간수나 하는 게 더 좋을 거야."

"소진악…… 그놈 발목을 마지막까지 잡은 것이 나였다면 대화가 가능하게 될까."

"아니. 내가 네놈에게 한 방 먹어 기절한 순간부터 이 싸움은 정해진 거니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신가 보군."

서로 대화를 나누곤 있지만 몸과 그들의 검은 쉬지 않았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천지가 뒤바뀔 것 같은 기운들이 폭발하는 듯했다.

도저히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모용하는 사우를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가야만 했다. 그게 이곳으로 온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우라는 놈이 미치광이처럼 칼을 휘둘러 대니 무력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쾅!

잠깐 다른 생각을 품은 사이 사우의 발목이 모용하의 허리를 꺾었다. 모용하의 몸이 땅바닥을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방심하지 말라고. 그러다 너 죽어."

사우는 그대로 공격을 이어 나갔다.

모용하는 피를 토해 내면서 몸을 움직였다. 전력을 다한다면 별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제대로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다.

지금껏 자신이 전력을 다해서 싸운 상대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살아남은 자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그거야 내가 널 이기고 나면 자연스럽게 들을 내용인데 뭣하러 지금 듣지?"

"네놈에게 무릎을 꿇을 바에 지금 자결을 선택할 것이다. 진심이야."

"헛소리!"

도저히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는 꼴통이다. 모용하는 혀를 내둘렀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나 싶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져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존심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흑천을 죽인 놈…… 누군지 알고 싶다면 멈추는 것이 좋을 거야."

"그 말…… 헛소리일 경우 네놈 정말 죽는다."

"하하! 얼마든지. 어차피 네놈과 난 언젠가 한판 다시 붙을 팔자인가 보니 지금이 아닌 나중에 언제든지."

모용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해."

"그러지."

* * *

호북성에 위치한 흥산(興山).

산세가 험하기는 하지만 산마을에 사는 사냥꾼들의 일터이기도 한 그곳에서 딱 한 곳만큼은 낯선 이의 출입을 불허한다.

사방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근처에 풀 한 포기도 없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 이천 명의 무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전무하다.

이천 명!

한 명 한 명의 무위는 중원에서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이 정도라면 황제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황제도 갈아 치울 수 있을 힘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흥산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동천화(董泉和)는 무복 한가운데 백(百)이라는 글자가 적힌 스무 명의 사내들 앞에 있는 단상 위로 올라섰다.

사십 대 중반의 동천화는 수하들을 내려다봤다.

"본옥의 전체가 중원으로 내려왔다. 이제부터 본옥이 중원을 총괄한다. 흑천이 죽은 순간부터 예견된 일. 너희는 수하들 하나하나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존명."

스무 명이 동시에 부복했다.

"이보게, 천화."

설무랑이 동천화를 불렀다.

"대체 어찌 돌아가는 일인가. 금마옥(禁魔獄)이 어찌 중원으로 내려왔는지."

수하들을 물린 동천화는 설무랑과 주변을 걸었다. 설무랑의 질문에 동천화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들으셨다시피 본옥이 지금부터 중원을 맡을 것입니다."

"본래 검옥이 중원을 다스렸지만 지금은 멸문했고 허면 본총이 나서야 하는 일 아닌가?"

"옥주께서 내리신 명입니다. 무황과 옥주께서는 사우라는 자를 이용하여 흑천의 힘을 모조리 이어 모으려고 하셨겠지만 일이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야차혈왕에게 발목을 잡혀 무슨 일을 당하셨을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동천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야차혈왕이 사우라는 자를 돕기로 나섰습니다. 이미 일이 틀어진 것이지요. 그가 움직였다면 파천용왕의 명이 있어서이겠지요."

그제야 설무랑의 얼굴이 굳게 변했다.

"큰일이군."

"그렇습니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사우가 그자들과 이제 함께할 것입니다. 그들은 사우에게 아주 중요한 비밀을 발설할 것이니까요."

"다시 그를 이용하기에는 늦은 일인가."

"그래서 본옥 전체가 나선 것입니다."

"허허."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망총의 전력도 합세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후우. 한 지붕 아래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흑천이 죽은 순간부터 예견된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설무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나저나 총주께서는 어떠십니까."

"지금은 잠들어 계시네. 헌데 불길한 기분이 들어."

"네?"

"총주께서 기억을 되찾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네."

"그럴 리가요. 기억을 지운 건 설무랑이 직접 하셨잖습니까."

"지금 총주의 상태는 분명…… 예전의 기억이 되돌아온 증상과 흡사하네."

"……!"

* * *

"이제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소진악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오히려 더 잘된 일일 수도."

소진악은 창가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마옥주 천외안(天外眼) 용천기(龍天奇).

황금색 장포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바로 금마옥주 용천기다. 그는 흑천이 죽기 직전부터 자신과 뜻을 같이한 사내였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늦지 않게 중원으로 진출한 그의 손길은 매우 고마웠다. 자칫 사우의 손에 목숨을 빼앗길 뻔했다.

그 빌어먹을 야차혈왕 때문에 말이다. 동천화가 이끌고 온 무인들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애써 키운 마황십팔전을 희생양으로 지킨 목숨인데 반드시 살아남았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사우는 그들을 모조리 도륙했을 것이다. 한번 배신한 자들을 살려 둘 만큼 순수한 이는 절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들 소용은 없다.

지금은 그들보다 더 큰 힘이 생겼으니까 말이다. 금마옥 무인 이천! 이런 인원이 중원에 나타난 건 흑천살막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천하 위에 있던 흑천살막은 현재 두 분류로 나뉘었다. 용맥과 아수귀옥, 금마옥과 사망총. 승부는 예측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사우라는 괴물이 그쪽 편에 섰다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다. 아마 그는 그들 편에 서서 자신들에게 검을 겨눌 것이다.

거의 확실하다. 지금껏 사우와 다툼을 벌이던 야차혈왕이 그를 돕기로 나섰다면 이제 사우와는 적이 되어야 한다.

그를 이용할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사우는…… 아쉽게 되었습니다."

"내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그자를 우리 편에 서게 하여 주무를 일은 상상이 잘 가지 않았으니까요."

용천기의 말투는 굉장히 딱딱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소진악은 익숙한 듯 그의 목소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총주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여식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아이입니다. 잘 견뎌 낼 것이라 믿습니다."

"후우. 꽤나 긴 시간이 흘렀군요."

"이제부터가 중요한 상황이지요."

"아주 중요하죠."

"시일은 정하셨습니까."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죠."

"본총의 힘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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