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마르지 않는 핏물
대막검문의 무인들 삼분지 이가 이름 모를 땅 위에서 죽어 나갔다. 이제 대막검문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무인의 숫자는 겨우 오십 명밖에 되질 않았다.
서륜의 얼굴은 참담함으로 굳어져 있었다. 도저히 펴질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봉문을 하라는 맹주의 명령을 어겼을 적에 가신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었다.
그들로서는 여태껏 선조들이 쌓아 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에 엄청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명색이 대막검문에서 직계 혈통임과 동시에 문주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들은 서륜의 편에 서지 않았다. 각자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대막검문에서 도망쳤다.
피가 섞인 자들에게서 버림받은 서륜은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대막검문의 모든 무인들을 데리고 나왔다.
오랜 세월 터전을 잡았던 곳을 등지고 나선 길이다. 고향을 잠시 비운 것이 아니다. 고향을 버리고 나섰다.
그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사람들이 비웃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자식으로 아버지의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게다가 든든한 동반자도 생겼다. 아수귀옥…… 그들이 지옥에서 온 악마라 할지라도 손을 잡았다.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사우를 놓쳤다. 그의 근처로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현실이 그랬다. 점점 자신의 수하들은 차가운 땅 위에서 죽어 나갔다. 제대로 시체를 처리해 주지도 못했다.
지금은 불안하다. 수하들이 떠나갈까 봐 말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서륜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가다 못해 철저히 찢겨져 가고 있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늦은 밤 추위가 산속에 찾아왔다.
"아직 아수귀옥은 제대로 된 힘을 보여 주지 않았다."
용성의 대답에 서륜은 아직 포기하기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강하다. 뭔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포기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 * *
"생각보다 강한 친구들을 뒀더군."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마황십팔전이라……."
등가휘는 몇 번을 되뇌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소진악 그 늙은이가 꽤나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야."
"결코 얕봐서는 안 될 조직입니다."
"혈왕 자네가 그리 말하니 그렇겠지."
등가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흑천의 군대라! 사우가 그 진실을 제대로 안다면 얼마나 분개할 것인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제대로 된 진실을 알아야 할 것인데."
"모든 건 그분의 뜻이니 우리야 따르는 수밖에."
"참, 그리고 소아경이 소진악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등가휘가 혀를 끌끌 찼다.
"그 아이도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사는 것 같으이."
"두 부녀는…… 반드시 지워야겠지요."
평온하기만 하던 등가휘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용하는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눈을 마주했다가는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소아경 그 아이만큼은 기필코 죽여 없애야겠지. 그 아비와 함께."
그저 은퇴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다가 분노라는 감정을 드러내자 용맥의 수장의 기운을 뼛속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모용하는 등가휘가 진정 자신이 가진 힘을 모조리 보인다면 얼마만큼의 위력을 나타낼지 감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소진악과 소아경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이런 사내를 적으로 돌렸으니 말이다. 그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명이 아니었다면 지금껏 숨을 쉬는 일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말이다. 등가휘는 반드시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심산인 것이다. 그런 등가휘의 마음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두려울 지경이니 두 부녀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분은 사우의 각성을 원하시네."
"노력 중에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네. 자네가 나서게."
"……."
"왜 대답을 못하는가."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모용하는 뒷말을 맺지 못했다.
등가휘는 모용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사우를 과소평가하고 있군, 그래."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 정도 되면 그럴 만도 하지. 자네 부친도 그 나이 때 그 정도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으니까."
"과찬이십니다."
"빈말이 아니네. 하지만 말이야. 그 몸속에 흐르는 피는 우리 같은 자들과는 다르지. 너무나도 판이하고 차원이 다르게 말이야. 구천제혈신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검법이 아니라네. 그런 검법을 익히고 배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통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지. 조심하게.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모용하는 깊게 읍을 하고는 그의 거처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자냐."
이름 없는 마을에서 머물기로 한 사우 일행은 촌장의 집을 하루 빌렸다. 사우 혼자 쓰고 있는 방문을 열고 마존이 들어섰다.
사우는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천왕공(天王功).'
사우의 육체에서는 검붉은 기류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존은 그것이 천왕공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사우가 구천제혈신검을 펼칠 적에도 저런 검붉은 기류가 흘러나온다. 천왕공을 익힌 자들만의 특징이었다.
천지 그 어떤 무공도 이렇게 강한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내공심법은 없었다. 오로지 천왕공을 익힌 무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구천제혈신검을 익히기 위해서는 천왕공이라는 심공을 익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구천제혈신검의 끝을 보고자 한다면 천왕공을 물고 늘어져야만 한다.
마존은 한참을 사우의 볼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 안의 공기는 참으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단순히 운기조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이들은 기운이 다 빠져나갈 것이다.
천왕공은 그러했다.
아무나 익힐 수도 없는 심공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태초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흑천살막이다. 그들의 역사를 짐작키 어려운 가운데 천왕공은 사우의 집안사람들만 익혀 왔다.
직계 혈육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감히 천왕공을 넘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익히려 든다면 주화입마로 생을 마감할 것이니까 말이다.
"얼굴 닳겠다."
사우는 마존이 들어올 때부터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굳이 눈을 뜨고 보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네. 천왕공을 운기하는 모습 말이야."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그런가. 과연 그놈이 나타날지 모르잖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겠지."
사우는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몸의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언제라도 화월선자라는 놈을 만나면 숨통을 끊을 준비를 해야 했다.
쉬운 싸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형을 죽인 자라는 것 자체가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오른 자일 테니까 말이다.
독? 암기? 기습? 그건 사우가 알고 있는 흑천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잔기술들에 불과하다. 그런 흑천을 죽인 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자만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사우는 몸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전에 야차혈왕이라는 놈부터 잡을 필요가 있었다.
현재 야차혈왕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약하지 않을 것이다. 아수귀옥을 이끄는 것 자체가 그 증거이다.
절대 약자는 주군으로 섬기지 않을 악귀들이 아수귀옥 무인들일 테니까 말이다.
"생각보다 피해가 심해서 말이야."
사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 다음번에 끝낼 셈이니까."
"나설 참이야?"
"시간이 없어."
마존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너무…… 미치지는 말아라."
사우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마존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괜스레 장난을 쳐 보는 것이다. 하지만 마존은 진지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구천제혈신검…… 악마의 검법이잖아.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인간이 아닌 악마가 되는."
"쯔쯧. 순진하기는. 그런 건 다 거짓말이란다."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듯 사우는 마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존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우의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천제혈신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법임과 동시에 익힐 수 있는 자들은 직계 혈통뿐이다. 그런데 구천제혈신검을 사용하면서 살인을 할 경우 당사자의 몸에 상대의 피가 빨려 들어간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악귀로 변한다. 그때부터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악귀가 된다. 감정 같은 건 사라지고 부모도 친구도 가리지 않고 살생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미친 살안마를 막을 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절정무인 수백 명이 덤벼들어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악랄한 살인마로 남을 것이다. 마존은 그런 생각을 하자 섬뜩하여 어느새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사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물론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사우가 얼마만큼 사람을 죽일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아수귀옥 전체를 그 혼자 상대하게 된다면 아마도 결과는 이미 마존의 생각처럼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빌어야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걱정이 되어 이 늦은 시간 사우를 찾아온 것이다.
사우는 귀찮다는 듯 더 할 말이 없으면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마존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무의미한 잔소리가 될 것 같아 포기했다.
'조금만 버티면 돼. 네놈만 죽이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나니까.'
사우는 홀로 어둠 속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 * *
"대공자가 없어지셨습니다."
주문룡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간밤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나서 사우의 방을 찾았지만 주인 없는 실내만이 그를 맞이했던 것이다.
"소란 떨 거 없어."
"모준이라는 놈도 보이지 않습니다."
용경의 말에 주문룡은 사우가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우와 가장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는 마존의 태도는 너무나도 무덤덤했다. 지금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안도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이 더 증폭되었다. 설마라는 의구심이 자꾸만 커져만 갔다.
"어디…… 가신 겁니까."
"나야 모르지."
"말씀해 주십시오."
주문룡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분명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멋대로 추리해 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마황십팔전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모조리 상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마존은 주문룡이 이렇게 한심한 자일 줄은 몰랐다. 아직도 사우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주문룡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대공자라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강자인지 모르거나 믿지 못하는 것이리라.
"사우가 우리에게 따로 시킨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안전하게 대피하는 것."
마존이 놀리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놓으며 일어섰다.
"네가 정말 사우를 주군으로 섬긴다면 믿고 기다려라. 그리고 그 녀석의 명령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 * *
대막검문과 아수귀옥은 사우 일행이 머물던 마을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끝낸 지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특히나 대막검문의 무인들은 초상을 치른 자들처럼 슬픔에 잠겨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 수십이 죽어 나갔다. 제대로 된 무덤조차 만들어 주지 못한 채 말이다.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눈빛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 눈빛에는 단 한 가지 감정이 들어 있다. 독기! 이들은 마음에 독을 품었다. 동고동락을 하면서 함께 검을 들었던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 간 적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몸도 마음도 무겁지만 검을 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뭐라도 좀 드셔야지요."
"생각 없어."
서패우는 자꾸만 끼니를 거르는 서륜이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물론 절정고수가 몇 끼 굶는다고 무슨 탈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지켜보기에 결코 좋지 않는 일이었다.
서륜은 작은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서패우도 그의 뒤를 따랐다.
"패우."
"예."
"패우는 어렸을 적…… 노비였다고 했지?"
서륜이 아닌 다른 이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바로 그의 과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던 시절 말이다.
"그렇습니다."
대막검문의 문주 서문륭의 눈에 들어서 신분을 탈피하고 무공까지 배울 수가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경지도 높은 쪽에 속하여 명예도 재물도 얻었다.
대막검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곳이었다. 그 은혜는 죽어서도 갚지 못함을 서패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죽을힘을 다해 서륜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막검문에게 받은 은혜보다 현재는 서륜이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봐 온 정이 얕지 않았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좋아했고 털털한 행동들이 보기 좋았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서륜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패우."
"예."
"살아온 날을 후회하지 않아?"
"……."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많은 날들을 후회하고 후회했죠."
"그런데?"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난 뒤부터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나도…… 숙부들과 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봉문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온 내 선택을 지금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어."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그 나이에 경험하기 힘든 일들을 빠른 시간 동안 겪은 서륜이었다.
그 책임감이 목을 졸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서패우는 위로나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 문제는 서륜 스스로가 이겨 내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결코 약하지 않은 사내임을 알기에 서패우는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회하는 감정을 이겨 내려고."
"제가 분골쇄신하여 문주를 보필할 것입니다."
이제 서륜에게 남은 거라고는 자신의 몸과 서패우, 그리고 대막검문 무인들 오십 명이 전부였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을 행복감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과 함께 싸워 줄 사람들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오십일 명이나 된다. 전혀 외롭지 않았다. 침울한 얼굴을 할 입장이 못 된다.
책임지고 지켜 줘야 할 이들이 오십일 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에게는 조조의 백만 대군보다 더 값지고 힘이 되는 자들이었다.
서륜의 눈빛이 변했다.
생기가 넘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륜은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독을 품고 있는 수하들과 아니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웃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위로하고 같이 대화를 나눴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그래도 대화를 하면 할수록 힘이 났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치열하게 싸우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일까. 두려움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떨리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륜은 그런 자신의 상태에 만족했다.
아수귀옥과는 적지 않은 거리에서 따로 쉬었다. 지금껏 저들 무리와 대화를 섞은 건 용성이라는 자 말고는 없었다.
같은 무인이고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베곤 있지만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저들이 전투에서 보이는 모습은 절로 그런 거리감을 갖게 한다.
그래서일까. 서륜도 대막검문의 무인들도 아수귀옥 무인들과는 눈빛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저쪽에서도 그걸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걸 생각도 하지 않고 무심한 눈빛을 유지했다. 같은 적을 두고 싸우고는 있지만 같은 세계 사람들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륜은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만 자."
"잠이 오질 않아서요."
서륜은 피식 웃었다.
"패우하고 거짓말은 어울리지 않아."
우직한 사내다. 대쪽 같고 굽힘이 없었다. 고집도 상당했지만 늘 자신에게 져 준다.
늘 그래 왔다. 어린 시절부터 사고를 치면 늘 뒤처리는 그의 몫이었다.
어느새 그것이 익숙해졌다. 그래서 서패우가 당했어야 할 기분에는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잠들고 나서야 자려고 하는 그의 행동이 불편했다. 예전 같으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느꼈을 그런 넓은 시야가 지금이라도 생겼으니까 말이다. 죽기 전에 말이다.
서륜과 서패우, 대막의 무인들과 아수귀옥은 결국 잠들지 못했다.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양이처럼 가벼운 움직임으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바로 코앞까지 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달빛을 받은 검신이 반짝거렸음에도 아무도 몰랐다. 참으로 기가 막힌 움직임들이었다. 대막검문 무인들의 무공은 천하에서 알아주는 이들이다.
게다가 서륜과 서패우는 절정무인이다. 두 사람의 감각을 속였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검들이 수많은 잔영을 남기며 공격해 들어왔다. 모조리 서륜과 서패우에게로 쏟아졌다. 검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닌 상황에서 지켜봤다면 말이다.
두 사람은 무지막지한 검비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려타곤을 선택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수치심이나 그런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다.
순식간에 급습을 당하자 당황했지만 어느새 대막검문의 무인들이 두 사람 주변을 감싸 안았다.
세 겹으로 두 사람 주변으로 진을 펼쳤다. 이건 대막검문 무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어야 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우두머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고였으니까 말이다. 서륜은 반대쪽에 있었던 아수귀옥 무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도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 서륜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
단 한 명이었다. 사십 명의 절정무인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자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볏짚을 메고 불길로 뛰어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십 배의 달하는 인원수를 이겨 낼 인간은 없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저런 행동은 보이기가 힘이 들었다. 서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결코 꿈이나 헛것이 아니었다.
'사우!'
바로 그자가 사우라는 사내라는 것에 서륜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사우의 검에는 눈이 있었다. 바로 사안(死眼)이다. 죽음을 부르는 눈이 그의 검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절정무인들의 목이 쉽게 떨어질 수가 없다.
마치 그들의 몸이 사우의 검에 빨려 들어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속수무책! 죽음의 바다가 그들을 덮쳤다. 사우의 구천제혈신검은 그런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우는 아홉 개의 초식 중 한 가지만 펼쳤다. 바로 천뢰무망이다. 전류를 머금은 검날은 무엇도 벨 수 있는 위력이 있었다.
'기가 막히는구나!'
진심이었다. 용성의 심장은 뛰다 못해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껏 이런 초식은 견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자 야차혈왕에게서 느꼈던 공포를 저 사우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그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구천제혈신검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게 인간으로 펼칠 수 있는 무공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인간이 번개를 저렇게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자연과 인간의 혼이 합쳐진 모습은 정말이지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 걸 직접 눈으로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용성은 수하들이 죽어 가는데 쉽게 움직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다면 저 말도 안 되는 전류가 자신의 육체를 찢어발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엄청난 것이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무서움에 떠는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용성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을 비웠다. 곧 그분이 오신다. 그전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다. 그 정도는 할 자신이 생겼다.
또한 그래야만 하는 일이고 말이다.
흐릿해지더니 용성의 몸이 빠르게 접전 가운데로 치고 들어갔다.
용암장(鎔巖掌)!
벌겋게 달아오른 용성의 두 손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목표는 사우의 명치다! 스치기만 해도 즉사다. 사우는 몸을 숙임과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에 용성의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상대에게 뒤를 허용했다는 건 패배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것과 다름없다. 다행히 용성의 수하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막아 주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용성은 조금 높은 나무로 올라가더니 반동을 이용해 수직 낙하했다. 두 손은 사우의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하기 위해 움직였다.
콰쾅!
용성의 장기인 용암장이 사우가 있던 자리를 가루로 만들었다. 사우의 몸에 닿았다면 그의 육체는 뼛조각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사우는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좌우에서 뱀처럼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쳐 냈다. 사우의 보법은 정말이지 귀신같았다.
눈으로는 쫓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지만 막상 다가서면 저만치 물러서 있다. 벌써 열 명이나 시체로 변했다. 이제 사십 명의 무인들이 사우를 상대해야만 한다.
헌데 쉽지가 않다. 보법도 보법이지만 사우가 펼치는 구천제혈신검의 위력이 너무나 강하다. 근처로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맹렬하여 상대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수귀옥 무인 사십이면 한 지역을 집어삼킬 수 있는 힘이었다. 문파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사우라는 사내 하나에게 이렇게 당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발을 묶어야 한다!"
용성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동서남북과 하늘에서 사우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한 검공이 펼쳐졌다.
어느 쪽은 빠르고 어느 쪽은 현저히 속도가 느리다. 그거야말로 사우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재빨리 검을 휘두른 사우의 지척에서 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가가강!
아무리 많은 검기라 할지라도 사우의 검막은 막아 낼 수 있었다.
구천제혈신검의 만검성막(萬劍成幕)이었다. 이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지 못할 성질의 검막인 것이다.
그렇게 아수귀옥의 검기를 홀로 막아 내고 있을 때 마황십팔전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중원 무인을 무시하는 용성이 인정하는 모준이 이끄는 마황십팔전이다. 용성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우도 인정한 자들이었다.
열여덟 명이 마치 한 몸처럼 유기체가 되어 펼치는 공격은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었다. 헌데 대막검문이 그들과 제대로 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코 한 치의 밀림도 없어 보였다.
이건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막검문과 마황십팔전이 지금껏 수련해 온 과정은 극과 극이었다.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재물로 인해 좋은 환경에서 수련해 온 대막검문과는 달리 마황십팔전에게 따뜻함이란 사치였다.
그들에게 소진악은 악마나 다름없었다. 수년간 온 천하를 방랑하며 나흘 이상 한 곳에 머문 적이 없었다. 쉬지 않고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자들과 검을 섞으며 실전 경험을 쌓아 왔다.
그 와중에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때마다 새로운 자들이 채워졌고 긴 여행은 끝이 날 줄 몰랐다.
그렇게 살아온 자들이 마황십팔전 열여덟 명의 무인들이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정신적인 면에서 대막검문은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정말로 이상했다. 분명 마황십팔전이 대막검문을 몰아붙이고 있는 듯했지만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
결코 대막검문이 질 것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서륜을 비롯해 대막검문 무인들에게는 현재 전투가 모든 걸 쏟아부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방심도 자만도 이곳에는 버려야만 한다. 철저하게 막을 것은 막고 줄 것은 줘야만 한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서륜과 대막검문의 무인들은 그런 심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급습을 당한 상황에서 아직 전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력으로 똘똘 무장한 그들의 목숨을 쉽게는 빼앗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막검문의 사상자는 늘어났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실력 차이가 워낙 많이 났기 때문에 대막검문은 서서히, 빠르진 않지만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인간들의 싸움에서 듣기 힘든 굉음이 들렸지만 그들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딴생각을 한다면 목이 떨어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서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품지 않으려 했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적들은 너무나 강하게 자신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강함이 있었지만 결코 자만해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사자였고 자신들은 토끼에 불과했다. 헌데 사자인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싸운다. 단 한 마리의 토끼도 놓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처절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힘을 쏟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의 연속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서륜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 마음이 지친 몸을 움직이게 했다.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힘이 몸 밖으로 표출되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저세상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적들의 사망자는 없었다. 반면 대막검문의 무인은 스무 명이 죽어 나갔다.
이제 서른 명 남짓 남은 셈이다.
배나 많았던 수지만 현재는 엇비슷한 상황까지 이어져 가고 있었다. 지금과 같다면 일다경 안으로 대막검문은 전멸한다.
아수귀옥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이 들 것 같았다. 사우라는 원수 하나를 상대하는 데 저 강한 무인들이 덤벼드는데도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이쪽을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서륜은 공격을 피하면서 급히 서패우를 찾았다. 그에게 내릴 명령이 있었다. 서륜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보였다.
서륜은 서패우를 곧 발견했다. 한쪽 팔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말이다.
"패우. 그대에게 내릴 명령이 있어."
* * *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사우와 아수귀옥 무인들도 그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은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들 사이에 고정되었다.
"저런 병신!"
용성의 입에서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눈치를 챈 것이다. 아니, 아니다.
순간 용성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좋은 일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귓가를 울린 소음은 분명 자신들에게는 좋은 일인 것이다.
동귀어진!
누군가가 전투 중에 자신의 모든 힘을 육체를 터트리는 데 이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주변에 있던 이들은 살아남기가 힘이 들어진다.
산다고 하더라도 반병신이 된다.
저 무리에는 사우를 돕는 마황십팔전이 있다. 그들은 소진악이 키운 이들이다. 결코 자신들의 편에 설 수가 없을 위인들이다.
지금은 사우를 따르고 있지만 소진악의 명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용성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들이 사라지고 흔적을 육안으로 볼 수 가 있었다.
그곳에는 차가운 땅 위에 널브러져 있는 무인들과 피를 토해 내며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는 자들이 보였다.
모두가 마황십팔전 무인들이다. 대막검문은 보이지 않는다. 땅으로 꺼졌는지 아무도 없었다.
"미친!"
이번에는 사우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사우는 누가 저따위 짓을 저질렀는지 안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서륜이었다. 그의 육체는 허공에서 뿌려졌다. 스스로 희생하면서 수하들을 살린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최고의 선택이었으리라.
의외라면 의외인 전개였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사우는 모준의 상태를 멀리서나마 살폈다. 오로지 멀쩡해 보이는 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열여덟 명 중 삼분지 일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도 있는 듯 보였다. 사우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다.
마황십팔전만 한 수족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런데 저들을 저렇게까지 망친 놈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분풀이를 할 방도가 없다.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사우는 심장부근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이내 자신의 몸이 하늘 높이 치솟아오른다고 느꼈다.
느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용성, 주군을 뵙습니다."
사우의 심장 근처에 불도장을 찍은 이는 다름 아닌 야차혈왕 모용하였다. 용성의 주특기인 용암장은 바로 모용하의 절기이기도 했다.
그걸 갑자기 맞은 사우는 아마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 이성의 힘만을 이용했기에 죽지는 않을 터다.
"일단 물러선다."
"명을 받듭니다."
모용하는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사우를 잠깐 보더니 이내 수하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