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혈전
"암혼전주."
"예."
"적들의 위치."
"북쪽으로 약 삼십 리 밖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각이면 도착하겠군."
서륜은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전속력으로 달리면 그 정도의 시간이면 사마련 무인들이 쉬고 있다는 장소에 도착한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나."
이번 질문에 암혼전주 관유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륜은 알면서도 질문을 한 것이다.
현재 쉬고 있는 정예들은 서륜의 작전을 시행하느라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겨우 반나절 정도의 시간밖에 쉬질 못했다.
그 이전에는 열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마련 본진을 들쑤시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공을 익힌 무인이라도 지치지 않고는 못 배길 강행군이다. 반나절 휴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서륜은 관유가 고개를 끄덕이길 원한다.
관유가 고개를 가로저으면 이대로 시간을 버려야만 한다. 관유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다시 움직인다면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피해가 클 것이다.
만에 하나 기습이 실패한다고 하면 돌아오는 타격은 배가 된다. 쉴 때와 움직일 때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게 지휘자의 가장 처음이다.
헌데 서륜은 지금 그걸 잊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 전투에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서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힘이 든 상황이었다. 그도 체력적으로 지쳐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몸이 힘들면 정신력으로 육체의 고통을 이겨 내야 한다.
냉철한 판단을 기대하기가 힘이 든 것이 사실이다.
"지금…… 예!"
결국 관유는 작전의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대막검문의 주인만 생각을 하면 된다. 자신은 그저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수족에 불과하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믿고 따르는 수밖에.
아도왕 서패우는 대막검문의 무인 사십을 이끌었다.
서패우와 오랜 시간 무예 수련을 해 왔던 자들이다. 서패우 말 한마디면 목숨을 버리고 작전을 시행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다.
사마련 본진에는 굉장히 가까운 위치에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긴장감이 극도로 온몸을 훑었다.
이곳에서 일각 정도 기다리면 암혼전을 비롯 대막의 정예들이 공격을 가한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다가 혼전을 틈타 주요 인물들을 기습 공격한다.
그게 서패우가 서륜에게 받은 명령이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다.
사마련의 전력은 너무나 대막과 차이가 났다.
대막검문은 세가 약해진 상황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무리하게 사마련과 전쟁을 벌인다면 힘든 가시밭길을 걷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서륜은 그걸 알면서도 봉문을 풀고 세상으로 다시금 나왔다. 그 숨은 뜻을 서패우도 알지 못했다.
"모두 잘 들어라. 신호가 떨어지면 한 명당 다섯 명 이상 목을 베어야 한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각자 빠져나오면 된다."
다시 한 번 작전에 대해서 설명한 서패우는 긴장된 얼굴로 사마련 본진을 내려다봤다.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피던 그는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나…… 둘…… 셋!'
셋을 셈과 동시에 사마련 본진 주변으로 시커먼 무리들이 덮쳐들었다.
서패우도 수하들에게 신호를 내렸다.
"움직인다!"
적진을 향해 달려드는 서패우의 수하들의 움직임은 민첩한 표범 같았다.
각자 자신들이 정한 목표물들의 목을 따기 위해서 정확하고 신속하게 움직인다.
'네놈만큼은 반드시 벨 것이다.'
서패우는 단 한 명의 상대를 골랐다.
바로 철혈대제 철대악이다.
사마련주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호법 중 하나다. 그가 있는 이상 사마련주 지청화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현재 더 이상 뒤로 갈 길은 없어진 상황이다. 벼랑 끝까지 몰려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의 피해는 절망만을 안겨 준다. 그래서 서륜은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기에 미친 듯이 움직이는 것이다.
힘들어도 강행군으로 적들의 수뇌부들을 죽여 전투를 끝내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서패우는 철대악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로지 주인을 위한 일이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아도왕 서패우의 도가 춤을 췄다.
아름다운 곡선을 부리기도 하다가 순식간에 독사의 머리처럼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기도 했다.
철대악은 죽을 각오로 자신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자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상대의 움직이는 모습에서 자기 목숨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확실하다.
지금껏 이런 자들을 많이 상대해 봤다.
이런 종류의 자들은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죽을힘을 다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덤빈다.
결코 막아 내기 쉽지가 않다. 제 몸을 아끼는 자들은 상대하기 쉽다. 헌데 이런 자들은 정말로 어렵다.
그런 공격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대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기에 더 힘든 것이다. 어느 곳에서 암기나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로지 한 사람의 움직임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대악의 임무는 련주인 지청화를 보호하는 일이다. 혈화가 있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필하는 것이 마음이 놓였다.
헌데 자신의 임무를 방해하는 적은 절대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콰콰쾅!
땅이 쩍쩍 갈라지며 튀어 올랐다.
서륜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초들을 선보였다.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살초들뿐이다. 오로지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들투성이였다.
서륜이 어떤 마음으로 전투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게끔 해 주고 있었다.
목표 대상은 당연히 지청화다.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도 서륜의 강공을 막아 내고 있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반격까지 가하면서 말이다.
사실 두 사람의 무공을 비교했을 적에 서륜이 한 수 위였다. 역시나 사대검문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다.
가히 타고난 재능은 천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났다.
골격이며 무공을 익히고 펼침에 있어서 머리가 잘 돌아갔다.
허나 그러한 재능을 가리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실전 경험이다. 사람을 상대로 이 정도의 맹공을 펼친 바가 없는 서륜이었기에 지청화가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의 경험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면 지청화는 벌써 목에 떨어졌을 게 틀림없다.
서륜의 눈에는 지금 지청화밖에 보이질 않는다.
주변에서 싸우는 소리는 진작부터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청화의 체력이 바닥을 보였다.
너무나 거친 공격을 막아 내는 데에만 급급하다 보니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변을 살필 기회조차 없으니 다급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륜의 공격이 멈췄다.
찰나의 순간 지청화는 주변을 살폈다.
'이런…….'
사마련의 무인들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지청화의 안색이 굳어지다 못해 퍼렇게 질려 버렸다.
아무리 기습 공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의 피해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대막검문의 힘이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더 충격에 컸으리라.
"몸을 피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혈화의 전음이었다. 그녀의 음성에는 다급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지청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지친 만큼 저들도 지금 체력이 바닥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저들의 기세에 본련 무인들이 눌려 버린 상황입니다."
혈화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치 사자 떼가 들개들을 사냥하는 분위기였다. 그건 지청화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망치는 건 싫었다.
언제까지 저들과의 싸움을 이어 갈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싸움을 종결시켜야만 했다. 그것만이 사마련의 힘을 최대한으로 남겨 두는 유일한 방법.
지청화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허나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상대 쪽에서 계속 밀어붙일지에 대한 생각을 하듯 사마련 쪽에서도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마도 대막검문은 계속 공격을 이어 올 것이다.
"후퇴한다!"
"……!"
지청화를 비롯해 사마련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퇴라니!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헌데 저들이 물러간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서둘러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산검문의 문주 화무홍입니다."
붉은 물결이 사마련 본진 주변으로 가득해졌다.
바로 천산검문이 이번 전투에 지원군으로 나선 것이다.
"천산검문이 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것도 광무홍 화무홍이 직접 무인들을 이끌고 올 줄이야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그 수는 상당했다. 약 일백 명 정도? 화무홍이 이끌고 온 만큼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을 거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풍기는 기도들이 상당했다.
지청화는 아직도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사우…… 그자가 보낸 건가요?"
화무홍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본문은 남북천맹 맹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제야 지청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엄연히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천산검문이 맹주 외에 다른 이의 명령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화무홍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부족함 없는 말임을 깨달은 것이다.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천산검문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녀와 나머지 호법 세 명도 깊게 고개를 숙였다. 사마련의 입장에서 보면 천산검문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대막검문이 물러서지 않았다면 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마련주의 안위는 장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철대악이 술을 한 사발이나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본분은 사마련주를 지키는 일인데 그걸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 저희가 제때에 맞춰 와서 다행입니다."
사실 사마련으로서는 천산검문, 아니 남북천맹에서 도움을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그들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비상사태로 돌입했을 테니까 말이다.
뒤늦게 지원군을 보낸다 하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았을 테니 분명 미리부터 준비를 했던 것이다.
'사우인가.'
남북천맹은 아직 사마련의 힘이 크게 필요한 모양인가 보다. 굳이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천산검문을 보낸 것으로 보아 말이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서 다음 작전을 구상해야 할 듯싶은데 말입니다."
"물론이에요. 저들도 이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니 저희도 다음을 준비해야겠지요."
사마련과 천산검문의 힘이 합쳐진 이상 대막검문도 더 이상의 과감한 공격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 * *
"문주."
"……."
서륜은 대답이 없었다.
서패우는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지금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번에 아주 모든 걸 걸고 움직였으리라.
더 이상의 망설임은 패배로 돌아갈 거라는 걸 서륜은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움직인 것인데. 그것마저도 일이 틀어져 버렸다. 조금만 몰아붙였다면 승패는 분명 대막검문에게로 돌아왔을 텐데 말이다.
대막검문 무인들은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상황에 처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자들이 낯선 땅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서륜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든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 줘야 하는데…… 상황이 앞뒤 꽉 막혀서 답이 나오질 않는다.
결국 섬서성으로 돌아왔다.
"하아."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침상에 누워서 쉬어야만 할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다. 헌데 눕지도 못한 채 한참을 창가에서 기대 있었다.
도저히 잠을 청하지 못했다.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눈을 감질 못한다.
"헛된 소문이었나 봐."
"……!"
서륜은 소스라치게 놀랄 틈도 없이 몸이 굳어 버렸다.
바로 등 뒤에서 얼음처럼 싸늘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장하지 말고 움직여도 돼.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끝났을 테니까 말이야."
자존심이 상했지만 서륜은 몸을 돌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누구냐."
"글쎄. 그건 차차 알아 가기로 하고, 예전에 대막검문은 지금처럼 약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지금은 우두머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영 아니야."
서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둠 속에서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륜에게는 처음 보는 낯선 사내다.
"용성. 그게 내 이름이야."
아수귀옥 소속 사귀옥의 수장 용성이었다.
"혈궁을 들고 다니던 녀석 기억할 거야. 몇 번인가 대막검문을 도와줬으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덕분에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 아비가 이끌던 단체는 검옥이라는 곳인데…… 그 위에 본옥이 존재한다. 아수귀옥. 중원을 관리하던 곳이 검옥인데 네 아비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결과로 본옥이 나선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거대 세력 중 하나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바로 지금 저 사내가 말하는 아수귀옥 말이다.
"네 아버지를 죽인 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사우."
"맞아. 사우라는 놈이야."
서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버지를 죽인 놈이다. 그런 자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남은 대막의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려 주지."
"……."
* * *
"제때에 맞춰서 도착했다고 보고가 들어왔어."
"다행이네."
사우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했다.
그의 명령대로 천산검문이 사마련을 도와주기 위해 알맞은 시간에 도착했다는 마존의 보고였다.
아마도 그의 계획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막검문은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이미 기세가 진 대막검문이다.
봉문을 당한 이후 힘을 키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예상대로 지들 멋대로 봉문을 깨고 세상에 튀어나왔다.
이제는 오랜 세월 지켜 온 터전을 잃어버릴 차례다. 용서를 해 주려고 했음에도 약속을 어긴 건 용서할 가치가 없는 행동이다.
그러니 짓밟을 필요가 있었다.
천산검문을 설득하는 데에는 율무천의 공이 컸다. 사실 천산검문이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들을 구슬렸는지는 사우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도 여러 단체들을 힘으로든 언변으로든 품을 수 있는 자질은 가지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무공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다른 부분은 맹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타고난 녀석이다.
아마도 남북천맹을 잘 이끌어 가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사우가 율무천을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네 계획은 궁지에 몰린 대막을 아수귀옥에서 도와줄 것이라는 거겠지?"
"역시 넌 똑똑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사우는 웃었다.
마존은 영리했다. 눈치도 빠르다.
언제나 자기 몫은 해내는 녀석이다.
사우는 만족스러웠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놈들이 서륜에게 달라붙었겠지.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네 계획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는 불리해져."
본거지가 어디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이 존재한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율무천은."
"요 며칠은 각 지역에 퍼져 있는 문파의 수장들을 만나고 있어. 앞으로 남북천맹이 나아갈 길이라든지 추구하는 바를 설명하며 내실을 다지고 있어."
"잘하고 있네. 영리한 놈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고. 소아경은."
"천지각 요원들이 집중해서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바로 취하라고 했으니."
"걱정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존은 사우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인간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마존은 옅은 웃음을 사우 몰래 지어 보였다.
"뭐야. 왜 웃어?"
눈치 빠른 그에게 걸렸지만 짐짓 그러지 않았던 척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녀석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긴장 풀지 않도록 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러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남북천맹 휘하의 문파들은 하나같이 예리한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우의 생각이 철저하게 틀려 버렸다. 용성이 서륜을 만나고 난 지 이틀 정도 지나자 남북천맹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다시 시작된 대막검문의 공격이 향한 방향 때문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다.
일단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사마련을 완전히 저지하지 않을까 했던 자들의 생각을 깨부순 것이다.
그들의 무모한 행동은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과거 전성기를 누리던 대막검문이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지금은 기세가 꺾이다 못해 바닥을 치는 상황.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공격의 칼날을 남북천맹으로 돌렸다.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본격적으로 남북천맹을 향해 적의를 보인다면 철저히 밟아야만 한다.
율무천은 도저히 서륜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대막검문 전체가 움직인다면 자신들의 안방을 사마련에게 내줘야만 한다.
천지를 다 뒤져도 그들의 터전은 감숙성이다. 그곳에서 수백 년 동안 그의 조상들이 터전을 닦았을 터인데 그런 곳을 버린다?
일반 백성들도 오랜 시간 공들인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무림의 가문이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자신의 집무실에 낯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군지는 얼굴이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곳에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갈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을 테니까. 천성각을 빽빽하게 지키고 있는 천무대의 제지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서륜이라는 자식 생각보다 멍청한데."
사우는 아무렇지 않게 율무천의 침상에 누웠다.
"좋게 표현하면 배포가 큰 거지."
사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아니. 아니야. 네 표현이 너무나 멋들어져서 말이야. 배포가 커? 내가 들은 표현 중 가장 웃겼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사우의 행동은 불쾌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같이 맞받아치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 인간의 언행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에 힘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 외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수귀옥과 접촉을 한 건 맞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대막검문이 남북천맹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는 못하겠지."
"천지각에서는 뭐라고 해."
마존을 통해서 이미 사우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우의 귀에 먼저 보고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엄연히 남북천맹의 수장은 자신이었지만 각 조직의 수뇌부들은 그의 수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안위를 맡는 천무대만 하더라도 사우의 신복인 주문룡이 대주로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의 상황을 거부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이 율무천 자신에게 더 이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로 사우가 말하는 그들을 세상에서 지우고 난 이후에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거겠지만 사우는 자신의 목적만 달성한다면 권력에는 손을 뗄 인물이었다.
율무천이 바라본 사우는 그랬다.
"대막검문은 자신들의 모든 전력을 데리고 경계선 부근까지 왔다고 연락이 왔어."
"인원은."
"파악된 숫자는 오백."
"하!"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남북천맹 총타에만 머무는 전력이 약 이천에 다다란다.
일류라 칭할 수 있는 무인만 현재 대막검문의 전력과 맞먹는다. 헌데도 저들은 당당하게 검을 들고 싸우려고 들다니.
가장 가까운 지역에 연통 하나씩만 넣어도 이틀이면 천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섬서성으로 몰려들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싸움이다. 긴장은커녕 되려, 힘이 빠진다.
"생각해 둔 계획이라도 있어?"
"아니."
사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수귀옥이라는 곳이 그렇게 강한가. 그렇지 않고서 이런 전력으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강하지. 아주 많이."
율무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제도 무서워하지 않을, 세상천지에 저렇게 제멋대로 사는 인간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답이었다.
율무천은 사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사우는 솔직하다.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속임이 없는 이였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인정하는 게 부족한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만큼 대막검문을 도와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전력을 다해 뒷받침한다면 총타의 힘만으로는 버거울지도 모를 거야."
"너무 본맹을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아니. 내 기준에서 최고로 점수를 준다는 가정하에 판단한 결과야."
율무천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륜이 바보도 아닌 이상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섬서성으로 넘어오려는 것일 게다.
사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
"일단 가장 가까운 다섯 곳의 문파에게 연락을 취해 놓으면 되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 네가 은밀하게 숨어 있을 수 있는 장소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너무 비약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율무천은 흘려듣지 않았다.
"그럼 본맹에서는 누가 저들을 막지."
총타 바로 앞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전에 어느 정도 탐색전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전에 사마련과 연락을 취해서 어떤 식으로 공동 작전을 펼칠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도 잊지 마."
"그렇게 하지."
"일단 내일 동이 트자마자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회의를 해."
율무천은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가 방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어떤 움직임도 없이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책임감이라는 것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잔 지도 오래다.
아버지도 이렇게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셨던 것일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억압과 부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결코 행복하거나 좋은 삶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남북천맹에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들의 흥망성쇠의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에 그들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승부가 확실히 점쳐지는 싸움에도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율무천은 각 조직의 수뇌부들과 아침 일찍부터 대책 회의를 열었다. 대막검문을 막을 작전을 짜는 내용이 주였다.
결론을 내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룡전과 검살전 각각 절반의 전력을 통합시켰다. 게다가 두 세력과는 달리 별동대는 구룡천부가 맡기로 했다.
명실상부 남북천맹 최고의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수는 약 육백 명에 달한다.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나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한 지역을 차지할 수도 있는 힘이다.
모두가 대막검문을 박살 낼 것으로 확신했다. 율무천도 그런 그들의 의견에 불만은 없었지만 마음 한쪽이 무겁다.
사우가 말한 아수귀옥 때문이다.
하지만 속히 그 마음을 떨쳐 냈다. 지금은 자신들을 향해 칼을 뽑은 적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집중해야 할 때였다.
* * *
그날 정오가 지나자 대막검문을 상대할 전력이 총타를 빠져나갔다. 총지휘자는 둘이었다. 한 명은 구룡천부의 부주 한유,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검룡전주 주원호였다.
주원호는 검룡전과 검살전을 총괄하고 한유는 구룡천부를 직접 이끈다.
두 사내는 공동 작전을 짜도 되었고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두 사람에게 맹주가 일임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총책임자는 한 명으로 정했을 것이다.
율무천이 조금이라도 이런 싸움에 익숙한 전략가였다면 총지휘자를 두 명으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미묘한 감정의 싸움이 전투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지 율무천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대막검문은 무슨 생각인지."
반나절 정도 움직이던 무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유의 말에 주원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호도 지금까지 중원에서 벌어진 많은 싸움을 지켜봤지만 이번과도 같은 문파 간의 전쟁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저들이 한때는 사대검문으로서 남북천맹을 받치는 기둥이었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남북천맹을 잘 아는 자들일 터인데 이렇게 경솔하게 움직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비록 지금은 풋내기 서륜이라는 젊은이가 문주로 있지만 그 주변에는 가신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다면 서륜의 행동을 뜯어말렸을 터인데 그 힘이 약했던 모양이다.
주원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리 쓰게 웃으십니까."
"안타까워서 그렇소."
주원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 부주께서는 그렇지 않으시오?"
"글쎄요……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 온 사대검문이 사라지는 건 무림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울지도 모르지요. 허나 전 그런 마음을 품지 않으렵니다."
"왜 그렇소?"
"본맹에게 적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대의 말이 맞소."
"분명 본맹은 지난 서문륭의 배신을 서문륭 하나의 목숨으로 끝냈죠. 봉문이라는 천명을 내리긴 하였어도 명맥을 이어 나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죠. 헌데 저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 이하의 사람들입니다."
한유의 눈에 불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말을 하다 보니 대막검문의 행동들이 너무나 괘씸한 것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해도 부족한 판에 터전마저 박차고 나와 모든 걸 걸고 무모하게 주인을 물려 들다니.
한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허나 그의 말대로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었다.
오로지 이제부터 그들은 철천지원수다.
맹주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피가 섞였다 하더라도 적은 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생각 같은 건 사라진다.
오로지 객관적이고 차가운 심장으로 적을 상대해야만 한다. 그게 한유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방법이었다.
"검룡전주께서는 어찌하셨으면 좋겠습니까."
"이번 작전 말이오?"
"예."
주원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구룡천부가 후방에서 적진을 흔들어 놓아 주셨으면 하오."
공동으로 작전을 펼치자는 소리였다.
한유도 같은 생각이었다.
굳이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검룡전과 검살전, 남북천맹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두 단체의 힘이 합쳐졌다. 게다가 이끄는 자는 사룡검신 주원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다.
"구룡천부는 소수 인원입니다. 저를 포함한 열 명은 신법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살수의 역할을 해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허면?"
"예. 총타를 나설 때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열 명 중 다섯은 서륜을 목표로. 나머지 다섯은 그의 주변을 지키는 자들을 교란시키는 것이죠."
한유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넘쳐 났다.
누가 들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총타를 빠져나온 이들이 전부 투입되어 전력으로 싸운다면 반드시 승리한다.
하지만 천하의 대막검문이었다.
아무리 지친 상태들이라고는 해도 호랑이는 호랑인 것이다.
남북천맹에서 흘릴 피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한유의 계획은 최소한의 피해, 어쩌면 이번 싸움을 빠른 시일에 끝낼 수도 있었다.
주원호도 그의 계획이 너무나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헌데 뭔가 불편하다. 손이 닿기 불편한 곳에 무엇인가가 간질거리는 기분이랄까.
찝찝하고 개운치가 않다.
이건 직감이었다.
무모하게 총타를 향해 다가오는 대막검문이지만 뭔가 자신이 있기에 그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자칫 경솔했다가는 남북천맹의 위상만 더럽히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대막검문에게 패배라도 하는 날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주원호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고 말을 하려다가 만 것이다.
소문에 구룡천부의 한유는 자존심이 드높은 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림인 중 한유처럼 자존심이 높지 않은 자가 있겠나마는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원호는 생각했다.
"자네 계획대로 하지."
한유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보였다.
* * *
섬서성에서는 주원호와 한유가 이끄는 전력이 대막검문의 공격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막검문은 섬서성으로, 그런 그들의 뒤를 사마련과 천산검문이 쫓는다.
남북천맹 창단 역사상 가장 큰 반란 세력이 될 것이었다. 사대검문 중 하나인 대막검문과 척을 두게 된 남북천맹.
한때는 한 식구였지만 이제는 적이 되었다.
이것이 무림이고 강호라는 세계였다.
냉혹하고 무자비함. 배신의 배신.
그 속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는 이들은 대부분 대막검문의 처참한 패배라고 예상,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막검문이라 하지만 남북천맹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막검문은 앞뒤로 꽉 막힌 상황이다.
앞에는 남북천맹이 뒤로는 사마련이.
헌데 이변이 일어났다.
일차로 맞붙었던 대막과 남북천맹의 전투는 대막검문의 승리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하늘이 대막검문의 편에 서서 검을 휘둘러 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남북천맹이 패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룡검신 주원호와 비천괴도 한유가 이끄는 전력이었다.
검룡전, 검살전. 그리고 구룡천부가 당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했던가.
이미 세상은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정말로 대막검문이 남북천맹을 상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대막검문을 이끄는 서륜이 천재 전략가라는 소문도 함께 퍼져 나갔다.
그건 돈으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오는 대막검문의 기세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갈아 치웠다. 남북천맹은 충격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 이차 방어를 준비하는 데 집중을 해야만 했다.
"끄아아악!"
한 남자의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울렸다.
임무열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서성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리는 비명 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려 왔다.
누구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 그러했다. 그런 그가 이 정도 비명을 지른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소?"
한유의 상태를 보고 나온 의원의 어두운 얼굴에는 벌써 그 대답이 있었다. 하지만 임무열은 머뭇거리는 의원을 다그쳤다.
"앞으로 한쪽 팔을 쓰시기 힘드실 겁니다."
"……!"
혼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뒤에는 수하들이 지켜보고 있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인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 미칠 노릇이었다.
한쪽 팔을 영원히 쓸 수 없다니.
그건 그냥 죽으라는 말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무인에게 오른쪽 팔이 없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임무열은 지금껏 그런 무인을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외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얼른 소매로 닦은 그는 의원이 나온 그곳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한유의 얼굴색이 너무나도 창백했다. 출혈이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입술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채였다.
임무열은 벌레마냥 바닥에서 고통에 나뒹구는 그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는지 그만 방에서 뛰쳐나왔다.
어린 시절 남북천맹에 피붙이 하나 없던 그에게 형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자가 한유였다.
구룡천부의 수장이기 전에 혈육의 정을 나눈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그의 팔이 아니라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임무열의 눈에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몸을 움직였다.
"어딜 가는 것이오?"
임무열의 손에는 자신의 병기인 창이 들려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주원호의 음성이 들린다.
"막지 마십시오."
"그대 마음을 전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선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소."
"검룡전주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미안하오."
"……!"
옮기던 임무열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내가 한 부주의 작전을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소."
사과를 한다? 주원호에게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임무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맡겨만 달라 하였습니다."
임무열의 목소리에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제게 맡겨 달라 했습니다. 제가 서륜의 목을 벤다고 부주께 구룡천부가 적진의 한가운데 침투할 수 있도록 작전을 짜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대막검문과 부딪히기 전에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검룡전과 검살전이 대막검문과 칼부림을 하는 사이 구룡천부는 한가운데 진입하여 적진을 뒤 흔든다.
헌데 함정이었다.
야차의 가면을 쓴 괴상한 자들이 땅 밑에서 치솟아올랐다. 그들의 무공은 강했다. 구룡천부가 밀릴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구룡천부를 이끄는 한유의 팔 한쪽을 빼앗아 갔다.
너무나 손쉽게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싸움은 의미가 없기에 후퇴한 것이다. 미쳐 날뛰는 임무열을 막느라 주원호가 직접 혈도를 공격해 기절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제 알겠다.
임무열에게 공을 주고자 했던 한유였기에 이번 작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허나 그보다 주원호는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연배가 훨씬 높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주의를 줬어야 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게끔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했어야 했다.
헌데 그러질 못했다.
그 책임은 오로지 자신이 짊어져야만 한다.
애꿎은 임무열에게 화살이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행동에 제지를 가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게 되는 일이 된다.
"지금 그대가 제멋대로 행동하여 다시는 그대 주군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러니 경솔한 행동은 삼가시오."
"죄…… 죄송합니다. 전주."
주원호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지금은 한 부주의 마음이 치료되어야 할 때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 일은 그대의 몫이라는 것도."
"그리하겠습니다."
"오늘 자정이 지나면 바로 떠날 것이니 그리 준비하시오."
그랬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때다.
지극히 냉철한 가슴으로 상황을 파악해야만 한다. 적들은 조만간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지금은 총타에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몸을 숨겨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