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第一章 마황십팔전 (31/38)

5권

第一章 마황십팔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네."

어느 때보다 차갑고 싸늘한 눈길로 이풍을 쏘아봤다.

속에서는 한기가 치밀어 오른다.

조금만 냉철하지 못한 성격이었다면 살생을 저질렀을 것이다.

소진악을 모시고 있는 이풍의 모습은 사우에게 있어서 그런 마음을 품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모시던 주군이 죽었다.

이후 무책임하게 자신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떠났다.

그런데 십절무황의 옆에서 그의 수족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게 할 짓이 없었던가?

남은 인생 겁쟁이로서 살아가기로 했다면 그리하면 되지 않은가 말이다.

흑천의 밑에 있던 십절무황의 수족 노릇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렇게 이풍을 노려보실 것 없습니다."

"……."

"이 친구는 제가 데려왔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낚시나 하면서 보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서 말입니다."

사우는 시선을 돌려 소진악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허전한 다리였다.

"뭐지. 그 꼴은."

아무렇지 않게 뱉은 질문이었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가슴 아픈 상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우는 별 망설임이 없었다.

잃어버린 다리 때문에 소진악이 아파하든 말든 말이다.

소진악은 이풍을 쳐다봤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의미였다.

이풍은 가시방석 같은 실내의 공기를 이겨 내기 힘들었던 찰나 소진악의 의중을 받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보시다시피 대접할 만한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숙식을 이곳에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낡은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무로 만든 둥근 탁자와 의자 두어 개가 전부이다.

사우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대충 자리에 앉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나 풀어 놔."

두 사람의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우가 십절무황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는 하대를 소진악은 존대를 하고 있었다.

한때 모셨던 주군의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흑천은 죽고 없어졌다. 하지만 소진악의 태도는 흑천을 대하듯 정중했다.

사우는 그런 소진악의 태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흑천을 따르던 자들…… 그들이 얼마나 흑천이라는 사내를 존경하고 따랐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대우에 어깨가 으쓱하거나 목에 힘이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배경으로 인해 좋은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썩 내켜 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제 딸아이가 공자를 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애비로서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겨우 그딴 부정을 내게 말하고 싶어서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제 다리가 왜 이 모양이 됐는지 여쭤 보셨죠. 바로 화월선자 때문입니다."

사우의 눈이 이채롭게 반짝거렸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화월선자라는 이름은 자극적이고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흉수를 쫓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언제 어느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그리 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체는."

"시체는 분명 그분이 맞으셨습니다."

"계속해 봐."

"그러던 중 화월선자라는 자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죠. 화월선자라는 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분보다 강했습니다."

"그 녀석을 무시하는군. 제대로 한 번이라도 구천제혈신검을 본 적이 있는지."

"있습니다. 그것도 구천제혈신검 중 최고라 불리던 염왕현신(閻王現身)을 직접 본 적이 있었으니까요."

틀렸다. 소진악이 말한 염왕현신은 구천제혈신검 중 두 번째로 파괴력이 있다.

처음은 다른 초식이다.

하지만 염왕현신을 직접 봤다고 하는 그가 흑천보다 화월선자가 더 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되는 종류라는 건 확실하다.

점점 그의 대한 호기심이 증폭했다.

마존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가지지 못할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이다.

사우도 그런 인간을 태어나서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존재지만 지금껏 태어나 자신의 형만큼 강한 무인은 본 적이 없었다.

중원은 물론이고 온 세상을 통틀어 그만한 무위를 가진 이는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자에게 도전을 했었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어쩌면 기적이었다.

"오늘 공자를 뵙자고 한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함입니다."

"흥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공자께서도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소진악은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풍을 불렀다.

"잠깐 바깥바람이나 쐬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이풍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사우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풍은 미리 동선을 파악한 듯 소진악이 타고 있는 물건을 끌고는 거침없이 이동했다.

사우는 그저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아이가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기억을 잃었다더군."

"충격이 컸던 탓이겠지요."

소진악은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공자."

"……."

"전 그분께서 막 흑천의 자리에 오르셨을 적에 밀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흑천께서는 자신만의 군대를 원하셨습니다."

"……!"

자신만의 군대?

처음 듣는 이야기다.

흑천이 누구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리에 있던 자였다.

그런 자가 자신만의 군대를 따로 원한다?

사우는 알 것 같았다.

그도 잘 알다시피 흑천에게는 특별히 자신만의 세력이 없었다.

그건 오랜 시간 전부터 그래 왔다.

검옥, 아수귀옥, 사망총, 용맥, 금마옥이라는 다섯 단체의 수장들로부터 엄청난 충성을 받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들은 흑천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가 얼마만큼 강한지 알기 때문이다.

허나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그들 간의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건 한 가지 율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독자적인 흑천의 조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우의 형은 그 율법을 깨기 위해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당연히 마음에는 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왜 다섯 단체의 수장들에게 충성을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 무리수를 뒀던 것일까.

허면 흑천이 죽게 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을까.

율법을 깬 자를 처벌했던 것일까.

누가? 화월선자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이후 저는 온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인재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몸에, 특히나 무인에게 좋다고 하는 건 모조리 수집을 해 왔죠."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까다로운 조건이었을 것이다.

중원에서 이름을 알린 자들은 안 되며 가문이나 무공이 특별한 자들도 안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고아들밖에 없다. 그 녀석들의 근골을 하나하나 봐 가며 고르고 고르는 작업, 그리고 수련시키는 건 수십 년 가지고는 안 된다.

그만큼 어렵고 고되고 지겨운 세월이었을 것이다.

소진악은 거짓말을 했다. 사우는 흑천이 아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작자가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오랜 시간 흑천에게 충성해 왔고 지금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았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이유는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껏 많은 걸 포기해 오면서 완성해 온 흑천의 군대를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사우의 기척에 수십 명의 기운이 잡혔다.

저들은 일부러 자신들의 기운을 밖으로 표출해 냈다. 그전까지는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사우다.

'제법이네.'

절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진심으로 감탄해하고 있었다. 그만큼 여기저기 숨어 있는 무인들이 지닌 힘은 대단한 것이다.

바로 근처에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이니 말이다.

"어떻습니까."

"괜찮네."

"감사합니다."

어느새 소진악은 사우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칫 그것이 오만과 자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싶어 소진악은 스스로 절제해야만 했다.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사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황십팔전(魔皇十八殿)은 모두 모습을 나타내라."

스스슥.

열일곱 명의 사내들은 온통 백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 차고 있는 검도 그다지 화려하다거나 튀지 않는다. 허나 한 명 한 명의 기도는 정말이지 살이 떨릴 지경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저들이 무리를 지어 합공을 하는 합격진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면 사우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소진악이 이풍과 함께 저만치 떨어져 나갔다.

"조심하십시오. 이들의 합격진은 장난이 아니니까요."

어느새 백색 무복이 아닌 검은 무복을 입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사우의 눈앞에는 열여덟 명 전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 검은 무복의 사내가 이들을 이끄는 수장으로 보인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정리가 되지 않아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마황십팔전의 전주를 맡고 있는 섭무(攝武)입니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대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 줄 만큼 사우의 성격이 곧지는 않았다.

"자기소개는 나한테 무릎 꿇고 해도 늦지 않아."

사우는 정말이지 지칠 때까지 구천제혈신검을 펼칠 생각이었다.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펼쳐도 될 것만 같다.

"마황십팔전, 전원은 지금부터 십팔로항마진(十八路降魔陣)을 펼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가 사우의 주변을 둘러쌌다.

* * *

"뭐? 사우가 자리를 비워?"

"그렇습니다."

사우의 부재는 율무천을 화나게 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비우고 그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다. 물론 어딜 가더라도 허락 같은 걸 맡아 가면서 다니는 사우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언제쯤 나간 것 같아?"

"오늘 새벽이나 어제 늦은 밤일 것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주문룡도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자리를 비운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우라는 사내를 이길 만큼 강한 자들은 손에 꼽힐 만큼 소수이지만 그게 무리가 되면 사우도 힘이 들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소아경이에요."

율무천과 주문룡의 눈이 마주쳤다.

율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지요."

그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실내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출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님을 두 사내도 알고 있었다.

"설무랑이 없어졌어요. 사우는 어디에 있죠?"

"대공자께서도 부재중이십니다."

"그런가요?"

살짝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에 두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다.

소아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우와 설무랑이 단둘이 외출을 할 만큼 돈독한 친분을 가졌었던가?

아니면 두 사람이 부재중인 것이 일치하는 건 우연인 것일까.

'이런.'

갑자기 소아경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다.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에 주문룡이 물었다.

"뭔가 짚이시는 데가 있으신가요?"

오늘 안으로 사우가 돌아오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외출이 길어지면 분명 좋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뇨. 아니에요. 일단 기다려 봐야겠죠."

심증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점점 마음속에는 설무랑이 사우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지에 대한 확신이 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딸인 자신에게는 아버지의 위치를 그렇게 함구했으면서 사우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바로 사망총에 정보력을 동원하여 두 사람의 행방을 찾는 데 힘을 쓰기로 했다.

* * *

지청화는 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척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화예대가 있다.

그녀는 이렇게 노을이 지는 장면을 보면 과거를 떠올렸다. 딱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그건 어머니와의 추억이었다.

매일매일 어머니는 노을이 질 때면 자신과 함께 화월문 바로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곤 하셨다.

그녀가 대체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게 바로 패천문의 문주 철대악이라는 걸 알았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그.

우습게도 지금은 아버지와 딸이 아닌 주종관계로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작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예전에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불쌍하고 슬프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도 없었고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화월문이라는 단체를 이끌어 갔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 중압감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울 수도 없었고 오로지 홀로 아픔을 삭여야만 했다.

친구도 없었다. 화월문 문도들은 오로지 자신의 수하들이었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 따위를 주고받아서는 안 되었다.

문주로서 지켜야 할 가장 첫 번째 철칙이었다. 바로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배운 규칙을 잘 지켜 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문도들에게 정을 나눠 준 것은 아니다.

오직 여홍에게만 그걸 허락했다.

"바람이 찹니다."

"시원한데."

무공을 익힌 그녀가 감기 같은 거에 걸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노을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그래서 여홍은 그만 들어갈 것을 청한 것이다.

지청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홍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걱정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제량에게 약속한 기일이 이제 반나절 남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사마련은 움직인다.

지청화는 모닥불에 가까이 앉아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되니 그때까지 이거라도."

여홍은 지청화에게 육포를 건네줬다.

"고마워."

철대악은 오늘 밤을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지청화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화예대가 있었지만 그 멀리 주변으로는 멸천대와 혈천대가 빽빽하게 지키고 있다.

마음 편하게 쉬어도 될 만큼 믿음이 간다. 하지만 지청화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째 다리 한 번 쭉 펴지 못하고 지내 왔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하루라도 평화로운 시기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대악이 돌아왔다.

"근처에 마을이 없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있지 않았나요?"

"예. 하지만 마을에 큰 화마가 덮쳤는지 잿더미뿐입니다."

지청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해가 지고 나면 산은 추워진다.

그것도 뼈가 시릴 정도로 칼바람이 부는데 노숙을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멸천대와 혈천대는 남자들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화예대 모두는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찬 곳에서 잠을 자면 좋지 않다.

게다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고의 상태를 만들기에는 부적합한 건 사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단은 기다려야만 한다.

아직 대막검문의 움직임이 없는 이상은 말이다. 지청화는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자정이 지나가자 기다림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제량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왔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방어를 담당하던 북천휘가 신법을 발휘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작은 쪽지를 받아 든 지청화는 지체하지 않고 내용을 살폈다.

'이런.'

내용은 분명 좋지 않았다.

대막검문이 자신들의 터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것만큼 최악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철저한 방어 체제를 구축해 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막검문이 자신들의 터에서 나와 전투를 벌인다면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방어를 선택한다면 이쪽의 피해가 상당할 것이 예상된다.

"대막검문의 움직임이 없다고 하는군요."

"허면……!"

철대악과 북천휘, 여홍도 그 의미를 알고는 낯빛이 굳어졌다.

"총공격을 감행하는 방법 말고는 없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별다른 작전이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오로지 전면전밖에는 남지 않았다.

* * *

진땀이 난다.

피가 끓어올라 더 이상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형 흑천에게 덤빌 적에 느꼈던 건 긴장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대부분이었다.

헌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슷하지만 사뭇 다르다.

지금은 기분이 좋다.

희열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정말로 자신의 온 힘을 다해서 싸울 상대를 만난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사우는 그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전력을 다해서 싸울 상대.

마황십팔전은 그만한 상대들이었다.

"크크큭."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구천제혈신검을 마음껏 펼쳤다. 하지만 마황십팔전이 펼치는 십팔로항마진의 합격진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열여덟 곳의 길을 철저히 차단하여 단 한 명의 적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한다. 한 명이 한자리에서 머무는 것도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면 위치의 이동이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 쏟아지는 검기를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번에 동서남북, 하늘과 땅, 여섯 곳에서 검기가 쏟아졌고 그걸 막아 내면 그 뒤에 있던 열두 명이 번갈아 가며 검을 휘두른다.

현재 천하에서 이들의 합격진을 반 시진이라는 시간 동안 막을 수 있는 자는 다섯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내공이 바닥이 날 게 틀림없었다.

사우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조금 더 하시겠습니까."

사우가 힘겨워하고 있다는 걸 느낀 소진악이 멀리서 큰 소리로 물었다.

사우는 그쪽을 보며 살짝 고개만 끄덕인다.

여기서 끝을 내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왠지 패배를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만 주어지고 다시금 지독하리 만한 공수가 이어져 갔다.

사우는 구천제혈신검의 천뢰무망을 사정없이 뿌려 댔다. 전류를 머금은 그의 검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황십팔전은 그의 공격을 검막을 펼쳐서 막아 냈다. 혼자가 아닌 삼 인 일 조로 힘을 합쳐서 방어막을 구축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우의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 대 다수.

사우는 강하다. 하지만 집단으로 이루어진 마황십팔전도 강하다. 그렇다면 장기전으로 싸움이 이어진다.

사우가 물고 늘어진다면 반나절도 가능하다. 쥐어짜듯 온몸에 힘을 쏟아 낸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적이 아니었고 앞으로 함께하기 위한 사이였다.

소진악은 마황십팔전주 섭무에게 전음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 명령했다.

사우가 먼저 싸움을 멈추길 기대했다가는 길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멈추게 한 것이다.

"이들의 능력은 충분히 느끼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생각보다 놀란 건 사실이다.

흑천의 군대…… 정말이지 그런 이름이 부족하지 않을 지경이다.

"섭무. 인사드려라. 앞으로 너희가 모실 주군이시다."

섭무가 부복했다.

뒤이어 열일곱 명이 무릎을 일시에 꿇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사우는 만족스러운 듯 그들을 훑어봤다.

형의 군대로 육성된 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싸늘하게 식어 버린 마음과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황십팔전의 수장은 내 앞으로 나와라."

섭무가 자리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서려고 했다.

"너 말고, 자식아."

"……!"

섭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소진악과 이풍도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내가 손으로 가리켜야 나올래?"

그제야 무리 중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모준(毛俊)입니다."

이십 대 후반으로 얼굴은 지극히 평범하다. 잘생겼다거나 크게 못나지 않았다. 어딜 가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생김새였다.

"정식으로."

"제이대 마황십팔전주 모준입니다."

"이대?"

"초대 전주가 그 아이의 사부이죠."

어느새 소진악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경고하는데 내 앞에서 이런 장난질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소진악은 고개를 조아렸다.

사우는 입맛을 다셨다. 저들 나름대로 자신을 시험했던 것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 시험에서 낙제를 받을 뻔했다.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특유의 관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과격하게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유독 저 사내의 곁에 있는 자들이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 보였다.

그건 직접 검을 섞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무리에 섞여서 아무런 존재감 없어 보이는 자의 옆에서 그러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섭무라는 자……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 만한 무공 실력이 아니었다. 물론 중원에 나가면 가히 필적할 만한 자를 찾기 힘들겠지만 마황십팔전을 이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모준이라는 자는 가늠하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보다 강하지는 않은 게 확실했다.

다수 대 개인으로 싸워서 그렇지 마황십팔전 무인 중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자만도 아니고 오만함도 아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괜찮다. 마황십팔전을 처음 대면한 감상평이다. 앞으로 화월선자를 상대하는 데 좋은 무기가 될 것이다.

이전에 남북천맹의 무인들 가지고는 힘에 부칠 거라고 생각은 해 왔다. 뜻밖의 인재들을 얻어 기분이 좋았다.

사우는 마황십팔전을 물렸다.

그리고 소진악과 낡은 오두막을 다시 찾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선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아닙니다. 마황십팔전은 흑천의 군대이옵니다. 전 그저 제 주인의 심부름을 해 왔던 것이니 제가 뭔가를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인가 보군."

"예."

소진악은 눈치가 빠르고 상대의 숨은 뜻을 잘 파악하는 사우와 대화를 하기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말해 봐."

"딸아이를…… 이번 일에서 제외시켜 주십시오."

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한다고 해서 먹힐 종류도 아닌 것 같은데."

"부탁드립니다."

소진악은 거의 막무가내였다.

"지금 전 그 아이 앞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모르나?"

턱으로 살짝 소진악의 무릎 밑을 가리켰다.

"예. 몇 년 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도 다 이것 때문입니다."

"다른 자식들은."

"화월선자에게 죽었습니다."

잠깐이지만 소진악의 눈에서 진한 한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화월선자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흑천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잃은 분노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흑천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자식의 죽임이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그녀가 내 말을 들을까. 당신 딸이니 더 잘 알거 아니야. 보기보다 고집이 세더군."

"하지만 그 아이는 이번 일에서 빠져야 합니다."

"왜지."

"그 녀석은 낭군의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칫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식이라고는 이제 그 아이 하나뿐입니다."

사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부녀 사이가 예전에도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내 기억력이 나빠진 건가."

분명 과거 사우의 기억으로는 두 부녀 사이는 정말로 물과 기름이었다.

소진악은 흑천과 딸아이의 사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아경이 절대자의 아내로서 어울리지 않으며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는 지금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잃은 비련의 여인이다.

흑천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두 부녀 사이는 지극히 좋지가 않았다. 사우가 흑천의 곁에서 떨어져 나올 때만 하더라도 말이다.

"생각보다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노력은 해 보지."

"감사합니다."

사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소진악이 급히 입을 열었다.

"조만간 아수귀옥을 잡을 방법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예."

사우는 마황십팔전과 함께 움직였다.

그의 옆으로는 모준이 있었다. 허나 다른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사우를 호위했다.

"본명이냐."

"예."

"소진악은 너희를 흑천의 군대라고 불렀는데…… 흑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거의 들은 것이 없습니다. 단지 마황십팔전이라면 그분을 위해서 영혼마저 바쳐야 한다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말은 그럴듯하네."

사우는 뭔가 불만인 표정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를 위해서 영혼마저 바쳐야 한다……. 참 너희들의 운명도 딱하기 그지없구나."

사우는 혀를 찼다.

"넌 언제부터 소진악의 손에서 자란 것이냐."

"전 제 사부님의 손에 키워졌습니다. 그분에게 무공을 배우고 성인이 되어서야 마황십팔전에 합류하게 된 것이죠."

모준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약간 생기가 없는 듯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상대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네 사부는 누구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전 사부님의 존함은 알지 못합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네."

"……."

모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사우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준은 정말로 자신의 사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사부는 자신의 사적인 걸 거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너의 사부에게 배운 무공은 무엇이 있지?"

"검법과 권법을 배웠습니다."

"가장 자신 있는 건."

"권법입니다."

"호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났다.

"어떤 권법이지."

"사부님은 제게 가르쳐 주는 권법의 이름이 암향비권(暗香飛拳)이라 하셨습니다."

"암향비권…… 흐음."

떠오를 듯 말 듯했다.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권법의 이름이다.

"하…… 하하하."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천권성(天拳星)."

사우는 웃음을 지우고 중얼거렸다.

천권성 백리준(白狸晙).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권법에 있어서 그를 따라올 자는 천하에 없다. 단 한 명도.

권장지각에 있어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나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 또한 흑천살막에 속해 있는 무인이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에는 거의 등장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모준이 그의 제자였다니. 사우는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네 사부는 정말 강했지."

"제 사부님의 별호가 천권성이셨습니까?"

"그래. 권법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였지. 지금 천권성은 살아 있냐."

"아닙니다. 삼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대충 나이는 소진악과 비슷할 그였다. 그 정도 되는 고수치고는 수명이 짧았다.

"아쉽네."

진심이었다.

천권성만 한 고수는 어디에서도 찾기가 힘이 드는 법이다. 하지만 이미 죽었다는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괜히 아쉬움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사우는 몇 가지 더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이, 모준."

"예."

산을 다 내려왔을 즈음 사우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흑천은 죽었고…… 이제 너희는 나 사우의 군대다. 너희가 훈련받았듯이 나에게도 영혼을 바칠 수 있으려나."

모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망설였다.

"뼈가 깎이고 살집이 넝마가 되는 훈련 속에서도 저희는 생전 보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영혼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다섯 살, 여섯 살 때부터 그렇게 지내 왔습니다. 흑천의 군대…… 공자께서 흑천이 되어 주십시오."

'흑천이 되어라.'

그건 곧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되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모준은 그 의미를 모른다.

흑천이 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마음에 드네…… 흑천이 되어라."

사우는 등을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 * *

"이풍."

"네."

"후회하지 않나."

"……."

이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사우는 많이 강합니다."

"그렇더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

"정말로…… 그가 화월선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이풍의 의구심은 당연하다. 화월선자는 강하다. 십절무황마저도 불구자로 만들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 아니…… 흑천을 죽였으니 이미 세상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전무하다.

헌데 소진악은 마지막 희망을 사우에게 걸었다.

엄청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상당히 낮고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풍은 그렇게 생각했다.

"글쎄…… 구천제혈신검을 익혔으니 그거 하나만 보고 도박을 하는 것이지."

그렇다. 소진악은 구천제혈신검만이 화월선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구천제혈신검을 극성까지 익힌 흑천이 화월선자의 손에 죽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풍은 그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후회한다?

모른다.

아직도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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