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무황을 만나다
촛불 하나만이 존재하는 지하 밀실에서 다섯 명의 사내가 모였다.
쇄검문의 가모공. 천풍문의 감소평(甘小坪). 천영문(千影門)의 선부용(宣芙蓉). 팔방문(八邦門)의 정기룡(鄭起龍). 화섬문(火閃門) 안룡(安龍)이 그들의 신분이었다.
이들 다섯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리며 지냈다. 아버지들 또한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모두가 집안의 장자였으며 이번에 아비를 잃은 아들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은밀하게 회동을 갖은 것이다.
모인 건 가족들이나 문파의 수뇌부들 또한 모르는 만남이었다.
모임을 주최했음은 물론 암묵적으로 이들의 대표는 가모공이었다.
"모두 와 줘서 고맙다."
왜 모이라고 했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름에 와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비록 모두가 아버지를 잃었지만 문파의 미래를 위해서 이번 계획에 참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일이 틀어질 경우에는 멸문지화를 당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계산하기에 지금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식솔들과 문도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상황은 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철없고 생각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허나 이대로 참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말 율무천 혼자 출타를 했다는 건 확실하겠지?"
맹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는 율무천이 혼자 총타를 빠져나오는 게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확실해. 본문의 문주밖에 모르는 간자가 보내온 소식이니 믿어도 돼."
확실하지 않은데 가모공이 위험한 모험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선부용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율무천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은밀히 따르는 자들이 있을 거야."
얼굴에 상처투성이인 안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거의 확실하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모두가 그의 말에 공감을 했다. 이 자리에 왔다는 건 결심이 모두 섰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흔들리는 모양이다.
계획을 주도한 가모공도 떨리는 심장을 주체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과연 작전이 성공할까. 성공을 한다고 해도 문제고 그렇지 못했을 경우도 문제다.
이래저래 궁지로 몰리는 건 변하지 않는다.
"우리 다섯 명 각자가 지닌 절기를 한 번에 쏟아 부어야 해. 율무천의 호위를 맡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목숨을 끊어야지. 그 뒤에 있을 생사는 각자 알아서 챙겨야 한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모두가 그의 말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개인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 만약 율무천의 호위가 있다면 자기 혼자 빠져나오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정해진 날짜 전에 식솔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 놓는 것 잊지 말고."
회담은 끝이 났다.
모두가 자리를 뜨고 난 이후 가모공 홀로 남아 사색에 잠겼다.
지금 나간 이들 중에 과연 몇이나 약속 장소에 나타날까. 미지수다. 확신할 수 없었다.
스스로조차도 그날 자신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해 뭣하랴.
한참을 어둠 속에서 있던 가모공도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사우는 유유자적 거리를 활보했다.
휘파람까지 불어 젖히며 팔자걸음으로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어이. 사우."
"왜 그러시나."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네 눈엔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이냐. 도시 구경하고 있잖아.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서 나온 거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도 아니고 참으로 답답했다. 꼴을 보고 있자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화가 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배고프다."
사우는 점심이 되자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음식점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물론 율무천의 귀에 또렷이 들릴 크기의 목소리로 말이다.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순 날강도였다.
"가자, 가!"
율무천이 앞장서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돈은 두둑하게 가지고 있지?"
"이럴 목적으로 나를 데리고 나왔구만."
"흠, 흠. 든든히 먹어 둬."
"또 어딜 가시려고?"
"따라오면 알아."
"어련하시겠어."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사우와 율무천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성을 빠져나갔다.
그러곤 신법을 발휘해 한참을 내달렸다. 인적이 뜸하였기에 맘 놓고 달릴 수 있었다.
율무천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내달렸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더니 사우가 몸을 멈췄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기에 율무천은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신법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율무천."
"음?"
"소화 다 됐으면 싸울 준비해."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그만들 나와. 우리 주변에는 호위무사들이 하나도 없으니 안심하고."
수풀 사이로 다섯 개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모두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기 싫은지 두 눈만 내놓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설프게도 가렸네. 누군지 다 알겠네. 가모공. 감소평. 선부용. 정기룡. 안룡."
유일하게 보이는 그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이름 모를 사내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놀라기는. 그 이름이 뭐더라…… 신강(申岡)이라던데. 그놈이 간자로서의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 줘서 말이야 내가 훈계 좀 했어."
가모공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신강은 아버지와 차기 문주가 되려는 자신밖에는 모르는 이였다.
저 사내가 신강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강이 전한 율무천의 출타는 계획적으로 자신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뭣 하러 이렇게까지 일을 만드는 것일까.
애초에 신강이 간자라는 걸 알았다면 그를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더 의아한 것이다.
궁금증을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기에 가모공과 남은 네 명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가모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각자 사우와 율무천의 주변을 둘러쌌다.
"뭐야, 이것들은."
"네 목 따러 온 놈들."
"본맹에 속해 있는 무인들인가."
"맞아. 이번에 그놈들 손에 죽은 자들의 복수를 위함이겠지."
사우는 검을 뽑지도 않고 바닥에 내던졌다. 이어 율무천의 검도 바닥에 버렸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놀라고 당황한 건 율무천뿐만 아니다. 가모공 일행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 힘이 들었다.
자신들을 죽이러 온 자들 앞에서 무기를 버리는 행위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병기가 없어도 상대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지니고 있기라도 한 걸까.
"어이! 또 다른 쥐새끼들! 난 이놈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거라고. 내 몸에 칼을 쑤셔 박아도 참고 견딜 거야. 그냥 죽을 거라고. 날 살리려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거야!"
내공이 섞인 사자후가 주변을 크게 울렸다.
'미친놈!'
도대체 이 정신 나간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 심히 궁금한 가모공이었다.
율무천도 마찬가지다.
대체 누구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사우는 결코 머리가 나쁜 자가 아니었다.
엉뚱한 행동 뒤에는 뭔가 숨겨 둔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이제야 알았냐."
"……!"
"난 괜찮은데 넌 저들이 공격하면 방어를 해라."
"어이. 너희들 이 녀석 죽이러 온 거 아니었냐? 완전하게 무방비 상태이니 마음대로 해 봐.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오지 않는단다."
사우의 이죽거림에 가모공이 검을 들었다. 동시에 네 명의 사내들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자,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사우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가모공은 그런 그의 행동이 자신들을 무시하기에 나온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익!"
율무천 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선부용과 안룡이 공격의 시작을 알렸다.
율무천은 순간적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검 집을 들어서 두 사람의 검을 튕겨 냈다.
오히려 반격까지 가한 율무천은 사우를 살폈다.
"이런."
가모공의 검 끝이 사우의 복부에 박히기 직전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눈을 감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앙!
그 순간 가모공의 검이 뭔가에 부딪혀 옆으로 밀려났다. 검만이 아니다. 그의 몸도 몇 걸음이나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사우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걸려들었어, 아수귀옥.'
* * *
하제량이 머무는 곳은 대막검문과 얼마 멀지 않은 위치였다. 천천히 걸어도 일다경이면 도착할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감숙성에서 대막검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실감을 하는 그였다.
감숙성 전체를 보더라도 대막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곳에서 대막검문은 남북천맹을 대신한다.
문파 간의 이권다툼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건 대막검문이 결정하고 방향을 정한다.
감숙성의 속해 있는 문파들은 모두가 그걸 따라야만 한다. 눈 밖에 났다가는 얼마 못 가 지워진다.
그건 내분을 일으킨 주동자가 서문륭이라는 게 밝혀진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헌데 그런 대막검문이 봉문을 선언한 순간 분위기는 바뀌었다.
감숙성에서 잠자코 그들의 눈치만 보던 문파들은 지금까지 챙기지 못했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하제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숙성 안에 존재하는 문파들 사이에서 피바람이 불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 확실했다.
설마 대막검문이 봉문을 스스로 깨고 세상에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제량은 사마련주 지청화의 밀명을 받은 뒤로 긴장을 계속 유지하며 대막검문을 살폈다.
그곳에서 그는 대막검문을 오가는 모든 이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열중했다.
조금이라도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의도가 보인다면 지체하지 않고 전서구를 날릴 것이었다.
대막검문 주변으로는 천기전의 인력 중 절반이 투입되었다.
그들이 밖으로 움직이면 사마련 모든 전력과 전쟁을 벌일 것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는 한 시진 간격으로 수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아직까지는 괜찮았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이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렇게 길고 긴 시간들이 언제쯤이나 끝이 날지는 아직까지도 미지수였다.
* * *
'대체 이게 무슨!'
가모공은 갑자기 들이닥친 자들로 인해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는 사내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엄청난 힘이 밀려 들어와 자신을 뒤로 밀어냈다.
순간 아찔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타날 거 일찍 나타나면 좀 좋아?"
사우는 야차의 가면을 쓴 이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사우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했다는 걸 알았다. 아수귀옥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곧 흑천살막이라는 조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살려 두려고 한다는 걸 뜻했다.
그걸 확인함과 동시에 잠적한 아수귀옥의 무리를 끄집어낸 것이다.
사우는 그들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총타를 빠져나온 순간 사우는 그걸 알아차렸다. 애초에 외출을 한 이유도 그들이 미행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인 것이다.
가모공과 아수귀옥의 추평 모두 사우의 작전에 말려들었다.
용성은 사우라는 사내와의 부딪힘은 반드시 피하라 엄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수귀옥 전체에게 전해진 명령이었다.
사마련주를 기필코 죽이려 했지만 이자의 작전으로 인해 복병이 숨겨져 있었고 그로 인해 후퇴를 해야만 했었다.
사우라는 사내의 뒤를 쫓는 데 자신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추평은 은신술과 미행하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사우의 뒤를 캐는 임무를 맡은 것인데 너무나 쉽게 발각이 되었다.
사우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 건 아수귀옥보다 더 큰 흑천살막의 뜻이라는 게 추평의 생각이었다.
이제는 사우라는 자에게 자신들의 의도가 밝혀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독 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눈길로 추평을 바라보던 사우는 고개를 돌렸다.
"살고 싶으면 저놈 잡아."
"그러는 것이 좋을 거다. 맹주로서 약속한다. 너희들의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
가모공과 그 무리는 지금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야차의 가면을 쓴 이는 누구이며 왜 율무천과 대적하려 드는지 말이다.
가모공의 무리는 사우의 짙은 살기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의 명령에 움직이게 되었다.
추평은 복면인들이 자신을 포위하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수귀옥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발악하는 데까지 해 봐.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사우는 가모공 무리에게 포위당한 자를 생포할 작정이었다. 그 이후의 계획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잡고 난 뒤 결정을 할 것이었다.
가모공을 비롯한 네 명의 무인이 추평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우는 그걸 여유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추평의 신호에 움직이는 아수귀옥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하압!"
율무천은 검기를 뿌렸다.
달려들던 두 명 중 한 명이 팔이 잘려 나갔다.
"……!"
율무천은 너무나 충격적인 걸 본 나머지 다리가 풀려 적의 검을 받음과 동시에 몸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팔이 잘려 나간 적이 아무런 멈춤 없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찰나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들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신 차려. 율무천!"
어느새 신형을 날려 나타난 사우의 무릎이 적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즉사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금 사우의 온몸은 날카로운 검날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병기였다. 그런 그에게 급소를 찍혔으니 살아날 재간이 없으리라.
율무천에게 팔이 잘린 자는 가볍게 사우의 검에 목이 베였다.
"이제 일곱!"
추평을 제외한 아홉 명 중 두 명이 순식간에 저세상 사림이 되었다.
율무천은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적을 상대하는 사우를 보자 호승심이 일어났다.
결코 그에게 밀리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쉬이익.
허리를 뒤로 젖혀 검을 피했다. 그 상태로 살짝 몸을 비틀어 뒤이어 찔러 들어오는 검을 쳐 낸다.
무진쾌(無盡快)!
파팟.
율무천의 검 끝에서 뭔가 번쩍하더니 등을 보인 두 명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검극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급소를 쾌속으로 가격한 것이다. 그들이 정면으로 막으려 했다고 해도 쉽게 보이는 속도가 아니었다.
정확성 면에서도 탁월했다.
율무천은 몸을 피하고 검을 찌르고 휘두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상대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나니 가면을 쓴 아홉 명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율무천은 가모공 일행이 있는 장소로 고개를 돌렸다.
"……!"
오 대 일의 싸움이었다.
헌데 지금은 가모공 홀로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실력으로 맹주를 암살하겠다고 덤볐으니."
같은 편이지만 사우의 말은 정말로 잔인하고 냉혹하게 들렸다. 단 한 명에게 처참하게 짓밟혀 죽은 자들만 불쌍한 꼴이다.
비록 그들이 잘못된 오해로 인해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아비의 복수를 위해 검을 든다는 건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사우의 작전에 휘말려 괜한 개죽음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다가 남은 한 명마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몸을 날래게 움직이는 율무천이었다.
"괜한 짓."
사우는 무표정으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쉬익!
추평이 날린 두 개의 비도가 율무천의 어깨와 허벅지를 향해 날아들었다.
추평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암기를 날림과 동시에 율무천의 코앞까지 짓쳐 들어갔다.
두 개의 비도를 피하느라 정신없던 율무천은 추평의 무릎 공격에 복부를 내주고 말았다.
퍼억.
가죽 공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오장육부가 목젖에서 모조리 다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이 동반되었다.
공중에 붕 뜬 율무천의 목을 베어 버리려던 추평의 검이 날아온 돌멩이로 인해 움직임을 멈췄다.
땅. 따당!
세 개의 돌멩이를 쳐 낸 추평은 사우의 기척을 살폈다.
어느새인가 몸을 감춘 사우였다.
그렇게 추평이 긴장한 상태로 옴짝달싹못하는 사이 율무천은 정신을 차리고 가모공의 곁으로 갔다.
"괜찮나?"
질문을 하는 사람의 꼴도 그리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아직도 호흡을 하는 것이 불편한 그였다.
가모공은 여기저기 생긴 상처로 인해 출혈이 심했다.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혈도를 눌렀다. 그러곤 옷을 찢어 심하게 다친 부위를 꽁꽁 둘러맸다.
"왜……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율무천은 쳐다도 보지 않고 제 할 일만 했다.
왜냐고 물었을 때 속으로만 대답했다.
'모두가 내가 품어야 할 사람들이니까.'
어느 정도 가모공의 상처를 봉합하고 자신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사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도저히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발을 떼었다가는 목이 달아난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등줄기는 물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피는 역시나 못 속이는 것이었나 보다.
과연 흑천의 핏줄이었다. 직접 흑천과 대면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멀리서나마 풍기는 절대자의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헌데 이 사우라는 사내도 그 기세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이 정도의 무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무형의 기운은 날카로운 거미줄 같다.
거기에 잡힌 추평은 오로지 생각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때.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냥 죽여라. 어차피 네가 나에게 얻어 낼 수 있는 건 없어."
"여긴 장소가 좀 그렇지? 지상최대의 고통을 느끼기에는 말이야. 조금 더 멋진 곳으로 안내하지."
"으윽! 크아악!"
한차례 비명을 터트린 추평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뭐 해. 이놈 챙기지 않고."
어느새 율무천과 가모공 뒤에서 사우가 나타났다.
* * *
남북천맹 총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야산 중턱에 무덤 하나가 만들어졌다.
"개죽음도 이런 개죽음이 없네."
사우는 물끄러미 무덤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뒤로 마존과 담천, 초호진, 무진이 서 있었다. 마존을 따라나선 사군악이 시체로 변해서 돌아왔다.
모두가 놀랐지만 슬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매정하거나 정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각자가 항상 마음속에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인곡에서 나온 순간 죽음은 늘 곁에 있었다. 그림자처럼 항시 옆에서 존재했었다.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게 언제 목을 움켜쥘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그걸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대찰영이 죽었을 때도 그러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다.
초호진이 늘 달고 다니는 술병에 든 술을 무덤 위에 뿌렸다.
"잘 가라, 이 빌어먹을 놈아."
비록 양지바른 땅 위도 아니었고 수많은 군중 들 속에서 상을 치르지도 않았다.
사군악의 인생과 같았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억울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질긴 목숨이 끊어진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
그 어떤 것도 예상할 수는 없지만 딱 한 가지가 있다면 그는 후회하며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사우."
산을 내려오는 중에 마존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화월선자가 사군악을 죽였다는 사실을 듣고도 사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놈 다시 보니까 어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화월선자…… 인간이 아니었어."
"……?"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 같았어."
"미친놈."
사우는 마존이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난 본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야."
사우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차피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신? 반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적이면 베고 그렇지 않으면 이용해 먹으면 된다.
그게 지금까지 사우가 살아온 방식이다.
"화월선자가 너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어."
"뭔데."
"자신을 만나려면 악귀가 되라고. 온 세상의 피를 모조리 머금은 악귀 말이다."
"……!"
전율이 허리를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사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한다면."
사우 일행이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전서구 한 마리가 마존에게로 날아왔다.
"대막검문이…… 움직였어."
"생각보다 빠르네. 그쪽은 사마련에게 맡기고 넌 사마태릉과 함께 앞으로의 싸움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데 힘을 쏟아."
"알겠어."
"그리고 담천과 초호진, 무진은 지금껏 있었던 자리를 지켜."
"그러지."
토막 그릇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차가운 바닥 주변으로는 썩은 음식물들이 여기저기 존재했다. 처음 지하 밀실에 반입될 때부터 저 상태로 들어왔다.
제대로 된 음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차마 냄새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정도의 쓰레기 물을 먹으라고 집어넣었다.
허락된 건 물뿐이다.
그것조차도 위생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활이 나흘째로 접어들었다. 아니 어쩌면 칠 일이 지났을 수도 있다.
추평의 몰골은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단 며칠이 흘렀을 뿐인데 말이다.
나체로 찬 바닥 위를 벌레처럼 기어 다닌다. 온몸에 힘이 없어 손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다.
사우는 하루에 두 시진 동안 그를 찾아와 고문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혀를 잘라 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사지를 제 손으로 끊어 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만큼 사우는 잔인한 방법으로 추평의 몸을 괴롭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추평의 생명줄은 조금씩 갉아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탈출은 포기했다.
아수귀옥이 자신을 구하러 여기까지 올 거라는 건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죽는 일만 남았다.
삶을 포기해 버렸다.
철컥. 철커덩.
썩은 냄새만 맡다 보니 후각은 마비된 상태였다.
누군가가 들어와 음식을 넣어 주었다.
추평은 생기 없는 눈길로 쟁반 위에 놓여진 음식을 봤다. 쓰레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영양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안에 넣어도 탈이 나지 않아 보이는 음식이었다.
추평은 몸을 질질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안간힘을 쓰며 음식 앞에 도착했다.
"……."
추평은 웃었다.
제대로 된 음식 때문이 아니다. 그 옆에 있는 작고 둥근 환약을 봤기 때문이다.
추평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확인은."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뜻을 따를 것입니다. 워낙 모질게 당한지라 생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용성은 총타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소부의 보고를 받았다. 방금 전 추평에게 음식물을 넣어 준 이가 바로 소부였다.
용성의 명령을 받고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전달한 것이다.
음식과 자결을 할 수 있는 독약이 그것이다.
그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자들이라고 해도 사우가 행한 방식이라면 얼마 못 가 많은 비밀을 누설할 것이었다.
"옥주의 의중이 궁금합니다."
"이놈! 어디서 감히."
아수귀옥의 옥주 야차혈왕의 의중을 물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용성 본인조차 그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못한다. 그저 죽으라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사는 것이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그들의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하루빨리 추평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소부는 이마와 땅이 부딪혔다.
오체투지였다.
바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목이 베였을 것이다.
"조만간 옥주께서 뜻을 전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알겠습니다."
"쯔쯧."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 낸 채로 죽어 있는 추평의 시신은 처참했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시신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부패되어 가고 있었다.
"치워."
사우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추평에게 독약을 준 아수귀옥의 흔적을 쫓지는 않았다. 찾을 생각도 없었다. 헛수고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네놈들이 이렇게 쥐새끼들처럼 숨어 다니는지 보자."
사우는 자신의 거처로 주문룡을 불렀다.
"추평이 죽었다."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그에게 알아낸 건 이름 두 글자뿐이다.
"그렇습니까."
주문룡은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아수귀옥의 흔적을 쫓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자의 죽음이다.
하지만 사우나 주문룡이나 이런 결말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더 철저히 관리를 했었어야 하는데."
"아니. 어차피 추평의 입에서 중요한 내용을 듣기는 힘들었어."
인간으로서 대한 적이 없었다. 기어 다니는 벌레만도 못하게 고통을 주고 처참히 짓밟았다.
하지만 추평은 이름 외에 어떠한 것도 누설하지는 않았다.
그 정신력이면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었다. 설사 알아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에겐 영양가 없는 내용일 게 뻔하다.
"대막검문이 움직였으니 아수귀옥도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그러니 총타 내부는 물론 각 지역에 존재하는 문파의 수장들을 잘 단속시키라고 마존에게 전해."
"알겠습니다."
율무천이 살리려 노력했던 가모공으로 인해 맹주를 오해하던 세력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들었다.
율무천의 진실 된 행동으로 인해 가모공이 감동을 받아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갈등들을 풀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비록 의도했던 일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했던 성과임에는 틀림없었다.
* * *
대막검문이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는 하제량의 보고를 받은 지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대막검문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일까.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사마련주 지청화는 직접 무인들을 이끌고 감숙성 경계선까지 왔다.
"천기전주가 련주를 뵙습니다."
부복한 하제량의 인사를 받은 지청화는 급히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현재 멸천대와 혈천대, 화예대가 이곳으로 이동했어요. 각 조직별로 칠 할의 전력이 온 셈이죠."
그 인원은 무려 천여 명에 달한다.
빠르게 이동을 해온 탓에 그중 절반은 후방에서 오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사천성과 운남 귀주에서도 증원 인원이 몰려올 것이다.
"대략 이천 명의 인원이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알려진 대막검문의 전력에 비하면 몇 배나 우세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죠."
하지만 지청화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결코 자만에 빠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막검문이다.
수백 년을 감숙성을 지배해 왔고 오랜 세월 최고의 검가로 명성을 떨친 단체이다.
그녀가 긴장하고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든 사활을 걸고 부딪치려고 했다.
패배한다면 그걸로 사마련의 존재 여부는 불투명해진다. 와해되는 걸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마련과 연이 닿았던 자들이라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물론 남북천맹이 존재하기에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도 결코 만만치 않은 적들을 상대하느라 자신들을 신경 써 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사우는 현재 자신들이 이용 가치가 있기에 함께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버릴 인물이었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걸 뼛속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만남이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본련이 기다리는 시간은 지금부터 이틀입니다. 그 이후에도 대막검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저희가 먼저 칩니다."
"위험합니다."
"아뇨. 그 이상 기다리면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 것이에요. 지금 그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건 불안한 일이죠. 뭔가 방어책을 준비할 수도 있어요. 길게 갈수록 저희만 더 힘들어질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천기전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대막검문이 뭔가 준비하고 있다면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한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 본련으로서는 서둘러야 합니다."
철대악이 지청화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왜 그토록 서두르시는 겁니까."
"최소한의 피해. 최고로 빠르게 이 싸움을 종결 시켜야 해요. 천기전주도 아시겠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대막이 아닌 사우라는 사내가 싸우려는 자들이니까요."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 본련은 너무나 조급해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제량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요직에 앉아 있는 하제량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다.
"허면 이틀에서 하루를 추가하죠. 그러면 만족하실 수 있으신가요?"
"감사합니다."
겨우 하루의 시간이 추가되었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 하루 동안 대막검문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제 천기전이 바빠지겠네요."
"그게 제 일인걸요."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 * *
감숙성과 사천성이 대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사우는 늦은 시각 총타를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와 동행하는 이가 있었는데 뜻밖의 인물이었다.
무적대군 설무랑이었다.
그가 왜 사망총주 소아경의 측근인 설무랑과 이 시간에 외출을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말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신법은 가히 경이로웠다. 어둠 같은 건 이동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너무나 빨라서 웬만한 무인들조차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설무랑은 혀를 내둘렀다. 앞장서서 향하는 사우를 쫓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고통스러웠다.
자존심이 있기에 지금까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갈 게 틀림없었다.
"조금…… 쉬었다 갑시다."
"음?"
설무랑은 결국에 잠깐의 휴식을 요청했다.
"이것 참.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겠구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쫓아가지 못해서?"
"허허. 그렇소."
일반인이었다면 당연한 일이다.
젊은이와 노인이 달리기를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헌데 무림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공의 깊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닌바 재능이나 노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적대군이나 되는 이가 내공에서 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손자뻘 되는 나이의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말이다.
"왜 묻지 않으시오."
숨고르기를 하던 설무랑이 문득 질문을 건넨다.
사우는 힘든 내색 없이 맨바닥에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그분께서 그대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시오?"
"궁금하지. 하지만 왠지 설레이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야. 그자가 왜 나를 만나자고 했는지 정말 궁금하거든."
사우가 물어봤어도 설무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가 사우라는 사내를 만나고자 하는 것인지 말이다.
자신의 벗…… 자신의 주군인 십절무황이 말이다.
"지금 속도면 하루 정도 걸리겠지."
두 사람이 향하는 장소는 종남산(綜南山)이다. 지금의 속도면 충분히 도착을 하겠지만 자신이 없어지는 설무랑이다.
이제 그도 늙었다.
도저히 사우의 뒤를 따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역시나 흑천의 동생이다.
집안 내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던 흑천의 모습과 사우를 비교해 봤다.
외적인 모습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흑천은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몸짓 하나하나 기품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내였다.
헌데 사우는 투박하고 거칠다.
흑천이 빛나는 보검이라면 사우는 이가 빠진 낡은 검이다.
분명 눈에 보이는 모습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사우의 눈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크진 않지만 새까만 눈동자는 심연처럼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서 깊은 슬픔이 엿보인다.
조금이나마 사람의 관상을 볼 줄 아는 건 관록이 가져다준 작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지."
"그러시오."
"소아경…… 그대의 총주가 정말 기억을 잃은 건가."
"그렇소이다."
"왜지?"
"나도 모르오. 아마 그대의 형님 되시는 분의 죽음이 불러온 충격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오만."
역시나 예상하던 답변이 나왔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자 두 사람은 또다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꼬박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늦은 오후가 돼서 산 초입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혼자서 올라가셔야 하오."
"그러지."
"산 중턱으로 향하다 보면 낡은 모옥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계실 것이오."
사우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려 산을 타기 시작했다.
반 시진 정도 비탈길을 올라가자 설무랑의 말대로 낡고 볼품없는 모옥이 보였다.
저곳에 십절무황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사우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는데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
사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랜만입니다."
"……."
사우는 노인의 위아래를 살폈다.
문 안에 존재하는 노인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담요가 덮어져 있었는데 밑이 허했다.
'다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이 노인 십절무황이 아닌 것인가.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다.
하지만 왠지 이 노인이 십절무황이 맞는 것 같았다.
비록 늙어 빠진 외모에다가 다리는 없지만 뿜어내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그저 허허 하며 웃고 있지만 사우 정도 되는 무인도 쉽게 승리를 점하기가 힘이 든다.
노인은 자신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긴 십절무황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자신의 얼굴 정도는 두어 번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성장했고 얼굴도 많이 바뀌었을 터인데 알아보는 게 신기할 뿐이다.
"당신이 십절무황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십절무황 소진악(消振岳)입니다. 일어나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죄를 드립니다."
나이와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우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예의가 배어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
바퀴가 달린 의자가 움직이는 걸 지켜보던 사우는 또 한 번 놀란 얼굴이 되었다.
다리가 없는 십절무황을 보필하는 이가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풍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흑천의 죽음을 알려 줬던 사내 이풍 말이다.
< 『흑천』 제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