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척살
"오랜만이네요."
지청화는 무뚝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사우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는다.
"여전하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지청화는 사우라는 사내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세상에 이토록 잔인하게 강한 무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충격은 상당했다.
처음 생각은 경계였다. 이런 사내를 적으로 돌리는 건 자살 행위라고 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자신의 편이 된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들이 덧없음을 곧 깨달았지만 말이다.
결코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그와 같은 편이다. 어처구니없는 건 이렇게 강한 상대도 두려워하는 자들이 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고마워요. 이번에 정말 큰 빚을 졌네요."
"내가 빼앗아 갔던 당신의 수하들 목숨을 갚았다고 치면 되겠네."
그 때문에 잃었던 전력이 상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수하들이었다. 지난날을 용서한다는 감정은 없었다. 그건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네요. 헌데 나를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뭐죠?"
"요거야, 요거."
사우는 휘파람을 불며 손으로 낚시를 하는 흉내를 내었다.
"그게 무슨……. 설마!"
"맞아. 아수귀옥이 꼭 너희를 공격할 것 같았거든.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는 놈들이니 미끼를 던져 본 거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막과의 싸움에서 아수귀옥의 무리는 사마련으로 인해 첫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결코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청화를 총타로 오라고 한 것이다.
헌데, 왜 유단에게는 그들이 도망갈 경우 쫓지 말라고 한 것일까.
만약 아수귀옥이 천하보와 검룡전과 전면전을 벌였다면 총타는 물론 남북천맹은 전쟁을 바로 준비했을 것이다.
반면 아수귀옥이 모습을 감춘다면 그건 아직 그들이 중원을 공격할 생각이 없음을 뜻한다.
괜히 쫓아서 피를 흘릴 이유는 없었다.
"음?"
사우는 지청화가 보이는 반응에 의아해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검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할 것 같았다. 몇 대 맞아 줄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지청화는 웃고 있었다.
그게 비웃음인지 행복에 겨운 웃음인지는 분간이 가질 않았다.
"당신 정말 무섭네요. 조금 전까지 당신을 본련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제 생각이 경솔했네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말이야. 같은 편이라는 말은 나와 당신 사이에서 쓰면 어울리지가 않아. 지금 확실히 말해 두는데 사마련이 남북천맹에게 등을 돌리려면 언제라도 돌려. 등에 칼을 꽂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해. 동맹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어.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일 뿐이거든."
불리한 건 사마련이지 남북천맹이 아니었다.
전보다 훨씬 더 굳건히 뿌리를 박은 남북천맹과의 전쟁은 출혈이 심하다. 지금은 더 큰 적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들의 대해서는 사우가 더 잘 안다.
어쩔 수 없이 사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같은 건 버려야 한다. 사마련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면 적들의 손에 단숨에 멸문당할 것이다.
그런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우라는 사내 앞에서 기를 죽이고 있어야 한다.
"당신 말이 맞네요. 명심하죠. 그럼 이제 전 돌아가 봐도 되겠죠?"
"물론. 미끼의 역할은 충분히 해 줬으니 원한다면 이곳에서 편히 쉬었다 가도 돼."
마치 자기가 남북천맹의 주인이라도 되듯 사우는 말했다.
"아, 사마련으로 돌아가면 즉시 전쟁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내 생각대로라면 대막검문이 조만간 움직일 테니까."
"봉문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얼마 가지 않을 거야. 지금 그들은 재정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까."
"그렇게 하죠."
냉담한 대답을 마친 지청화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여자에게 너무 매정하면 벌 받아."
스르륵 마존이 사우의 옆에 나타났다.
"천성이 이런데 어쩌겠어."
"쯔쯧."
마존은 혀를 차며 방금 전 지청화가 있던 자리에 앉았다.
"이젠 뭘 어쩔 셈이야."
"음."
"남북천맹도 자리를 제대로 잡아 가는데…… 아수귀옥은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고. 언제까지 놈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건데."
"생각 중이야."
"아수귀옥이 나타났다 쳐. 그들을 모조리 없앤다고 하더라도 네 형을…… 그리고 내 아버지와 숙부들을 그리 만든 화월선자라는 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일이 모두 헛수고야."
"잔소리쟁이."
"사우.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돼. 그것도 하루속히."
마존답지 않게 서두르고 있었다.
"일단은 아수귀옥부터 처리해야 돼. 놈들이 나타날지 아닐지는 그다음에 나타나게 돼 있어."
사우는 침착하게 말을 하고는 마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급해하지 마."
"그런 적 없어."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사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후우. 불안하다. 이제껏 해 온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 같아서."
"내 귀에는 죽는 게 무섭다고밖에 들리지 않는데?"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요즘…… 두렵고 무섭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될까 봐 말이다."
"……."
침묵이 무겁게 두 사람의 대화를 멈추게 했다.
"그래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련다."
"혼자서?"
"그래."
"왜 갑자기 청승을 떠는지."
"허락한 걸로 알게."
마존은 망설이지 앉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몇 명 데리고 가."
"혼자 다녀올게."
사우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마존이 어디를 다녀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 마인곡이다.
이 세상천지에서 그가 편히 휴식을 취할 곳이라고는 마인곡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마존은 치밀하고 차분한 성격인데다 무공도 약하지 않으니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사우는 그렇게 믿으며 마존의 외출을 허락했다.
"같이 가자."
"하하!"
마존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군악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지금처럼 뭔가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또한 자신처럼 두려운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정말로 바람을 쐬고 싶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자신을 채찍질해 오면서 버텨 온 이유는 바로 복수 때문이었다. 천산의 장자 화진천의 목을 베는 것.
그가 마인곡에서 이를 악물고 무공에만 전념하게끔 만든 원동력이다.
헌데 이번 싸움에서 그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다.
천산검문을 방문했을 때는 한때 마음에 품었던 여인이 슬퍼하는 것이 싫었다고 쳐도 지난번에는 아니었다.
마음을 독하게 품었다면 은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사군악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정이나 의리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마존은 화진천을 죽이지 않는 사군악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바꿨다.
자신의 상처를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은 성품 때문에 까칠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나 알고 그래?"
"마인곡."
"바람을 쐬려면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마인곡은 어울리지 않을 텐데."
사군악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내가 마인곡으로 간다고 했냐? 웃기는 놈일세."
사군악은 마인곡으로 오기 전에도 천하를 떠돌아다니던 사람이었다. 아는 장소도 마존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군악은 자신과 함께 마인곡으로 갈 것이라 믿었다.
사군악의 눈물과 피와 땀이 진정으로 배어 있는 장소는 마인곡 외에는 없을 테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최적의 장소라는 것도 사군악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았다.
억지로라도 말을 걸었다.
툴툴거리며 맞추기 힘든 비위도 참을 만했다.
그런데 사나흘이 지나고 나니 절로 지쳤다.
마존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틀째 밤부터는 두 사람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마인곡은 왜 가냐."
늦은 저녁을 먹는 와중에 사군악이 물어봤다.
총타를 나오고 나서 먼저 입을 연 건 처음이었다.
마존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넌 왜 총타를 나왔냐."
"질문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되묻는 건데."
마존은 그저 웃었다.
그는 남자치고는 웃는 모습이 꽤나 아름다웠다.
사내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조금 어색하지만 마존만큼은 예외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잘난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매력만큼은 치명적이었다.
"허여멀건하게 생긴 것이 처웃기는."
"총타에 있다 보면 자꾸만 흔들리거든."
"음?"
"화월선자…… 내 아버지와 숙부들을, 그리고 내 터전을 짓밟은 그놈에 대한 복수심이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어서."
"배부른 소리네."
"그럴지도. 어쩌면 네 탓도 있는지도 몰라. 네가 화진천을 쉽게 베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냉정해지지 못할 것 같아서."
사군악은 얼굴이 붉어져서 놀리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쳤다.
"멍청한 놈! 너와 내가 처한 상황이 같다고 보는 거냐?"
"분명 다르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건 사실이야. 복수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거든."
마인곡이 초토화가 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곳에서 지낼 적에는 정말로 복수심으로 온몸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사우의 일을 도우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달라짐을 느꼈다.
꼭 복수가 답은 아님을.
지금처럼 수많은 이들과 뒤섞이면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임을 알아 갔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고 해서 그렇게 지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인간의 감정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화월선자를 자신의 손으로 베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까.
인간의 피를 어느 정도 보고 마셔야 복수가 가능한 것일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허공에다가 칼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적의 대한 털끝만큼의 정보도 없이 움직인다는 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난 내 인생을 잃었지만 내가 사랑하던 여인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불행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걸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알았지. 그래서 살려 준 거야. 하지만 넌 아니지. 네 인생도 네 부친과 숙부들의 인생도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았어. 그러니 끝까지 그놈을 찾아서 죽여라."
"그럴 생각이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마인곡으로 가는 것이다. 결코 포기할 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 사군악."
"등신 같은 놈."
그날 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 * *
사천성 사마련 총타.
지청화가 무사 귀환했다는 소리에 철대악을 포함한 두 명의 호법들이 정문까지 나왔다.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사마련에서 세 호법과 하제량뿐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온 그녀의 귀환에 철대악의 마음이 놓였다.
"철 호법이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북천휘의 말에 지청화는 웃음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세 호법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지청화가 말을 아끼는 모습에 입을 열지 않았다.
"천기전주는 어디 갔죠?"
지청화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하제량의 위치부터 물었다. 자신이 왔음에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아 외부에 있는 것이다.
"살락원이 있는 곳으로 며칠 전 떠났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살락원주는 같이 안 왔습니까?"
"정문에 도착하기 전 헤어졌어요."
"그렇군요."
"천기전주에게 연통을 넣으세요. 연락을 받은 이후부터 대막검문의 크고 작은 정보들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저에게 보고하도록 말이에요."
"련주께 직접 말입니까?"
"네."
사가훈의 되물음에 지청화는 짧게 대꾸했다.
"왜인지 여쭤도 될까요."
"조만간 대막검문은 봉문을 스스로 깨고 움직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를 기습했던 아수귀옥과 연합을 할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놈들이 아수귀옥인가요?"
"사우가 그러더군요. 게다가 그들은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중원의 무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라고도 하고요."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련은 대막검문을 상대하는 데 온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이 봉문을 푸는 순간 본련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해요. 오늘부터 본련은 비상체제에 돌입할 것입니다. 무기를 항상 점검하고 총련을 비롯해 사마련에 속해 있는 중소방파는 물론 사천성 전체를 하나로 봅니다."
지청화는 북천휘를 보며 말했다.
"타 지역에서 넘어오는 모든 무인들의 통제는 북 호법께서 맡아 주세요."
"존명."
"총련의 방어는 철 호법께서 맡아 주시고요."
"명을 받듭니다."
"사 호법께서는 사천성 내 아직도 본련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과 반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색출하세요. 사 호법의 판단 아래 죽이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외부의 적도 무섭지만 내부에 칼을 품고 있는 자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조직은 내실을 다지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남북천맹이 바로 그렇지 않던가.
오랜 시간 천하를 다스리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죽어 나갔다.
주인은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 갔지만 핵심적인 인물들은 모조리 물갈이가 되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예전의 남북천맹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련주."
"예. 말씀하세요."
사가훈이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말이죠?"
"대막과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아 내는 것 말입니다."
그의 말에 무슨 의도가 깔려 있는지 지청화는 알았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적에 두 가지 결말이 존재한다.
아수귀옥이라 불리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부리는 더 커다란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지거나 이기거나.
지면 모두가 죽음을 당할 것이다. 아니면 종이 될 것이다.
이긴다면?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기게 될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남북천맹이 자신들을 품으려 할까.
품기에는 버겁다. 오히려 없애 버리는 것이 그들로서는 편할 것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손을 잡고 있지만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다.
사마련의 탄생 배경은 남북천맹에 반하는 것이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괜히 후환거리를 남겨 두지는 않을 건 눈으로 보듯 뻔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서 모든 힘을 드러내는 건 좋지 않았다.
미래를 준비해야만 했다.
사가훈은 지금 그걸 말하고자 함이었다.
분명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정정하지요. 본련의 힘 삼 할은 남겨 두도록 하죠. 그리고 여기서 절대 변하지 않을 이야기 하나를 드리자면 새외의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면 우리는 남북천맹을 칠 것입니다."
"존명!"
세 호법의 대답이 실내를 크게 울렸다.
* * *
"뭐 하십니까?"
"뭐?"
사우는 화들짝 놀랐다.
"설마 졸고 계셨습니까?"
사우는 입 주변에 묻은 흔적을 소매로 지웠다.
"졸긴 누가 졸아. 잠깐 명상을 한 거지."
"그렇습니까."
주문룡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사우는 딴청을 피웠다. 사람인 이상 점심을 먹고 나서 졸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주문룡은 지금처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졸고 있을 수 있느냐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노려보고 그러냐."
"마존을 보좌하던 두 부각주가 어찌나 대공자의 험담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지각주 마존의 부재로 인해 얼마 몸담지도 않은 초호진과 무진이 얼마큼 고생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놈들은 좀 고생 좀 해 봐야 돼."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천지각주의 부재는 저희에게는 불리합니다."
"사마태릉."
"예?"
"군사인 사마태릉을 데려와. 율무천에게 말해. 사마태릉을 총타로 불러들이라고."
총타에서 내전이 벌어진 이후 군사였던 사마태릉은 천산검문으로 갔다. 스스로 군사라는 직위를 버린 것이다.
"사마태릉만 한 사람이 없지. 군사로 다시 앉히라고 해. 그리고 당분간 천지각을 그에게 맡기면 되겠네."
"오려고 할까요."
"글쎄다. 화무홍이 생각이 있는 양반이라면 사마태릉을 보내겠지."
"알겠습니다.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만나러 온 용건이 이거 때문이야?"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이야기면 앉고 아니면 나가."
주문룡은 바로 사우의 앞에 앉았다.
"뭔데."
"사망총 때문입니다."
"걱정돼?"
"대공자께서는 그들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는."
"이제는 선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적인 흑천살막과의 싸울 시기였다. 물론 그건 자신들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망총을 곁에 둔다는 건 어쩌면 엄청난 모험이다.
그들을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오로지 주관적인 것뿐이다. 사우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말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망총주 소아경이 흑천의 여자였다는 것 말고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전무하다.
하지만 사우는 다르다.
그녀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그들을 믿는 건 불가능하다.
주문룡은 사실 그녀와 사망총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칼을 꽂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을 품에 안고 있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사망총의 힘은 달콤하고 든든하다. 하지만 달콤함 뒤에 찾아올 위험은 너무나 크다.
이제는 정말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칠지 독 같은 그들을 품을지 말이다.
"주문룡."
"예."
"흑천살막 전체를 중원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사우는 대답을 회피했다.
"대공자!"
주문룡이 약간 언성을 높이자 사우의 얼굴이 구겨졌다.
"사망총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하나, 둘……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공자 사우가 어떤 의중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사우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주문룡은 천무대에서 천하보주 유단을 불렀다.
"은신술에 뛰어난 자들을 다섯 명 뽑아서 내게 데려오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총타 내부에 은밀하게 거주하고 있는 소아경의 감시를 맡겼다.
"총주. 설무랑입니다."
"들어오세요."
소아경은 과거 천룡원 원로들이 머물던 장소에 기거하고 있었다.
가장 외진 곳이자 사람들의 발걸음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거의 혼자만의 시간들을 보낸다.
시비도 없다. 식사도 청소도 홀로 해결한다.
좋게 말하면 소탈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청승이다.
굳이 자신이 할 필요는 없을 텐데 굳이 하려고 한다.
그곳에 설무랑이 나타났다.
과거 천룡원 소속이었던 자들 중 설무랑과 살가륵만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도 소아경을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워낙 얼굴을 잘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총주와 담소나 나눌까 하고 찾아뵙습니다."
소아경은 살짝 미소 지으며 직접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무랑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소아경이 가만있으라는 손짓을 보내자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차가 눈앞에 놓이자 뭔가 잘못이라도 한 듯 귓불이 붉어졌다.
"괜찮아요. 이 공간에서만큼은 총주가 아닌 절친한 친우의 딸이라고 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한 모금 뜨거운 찻물로 입을 적신 설무랑은 크게 놀랐다.
"언제 이런 걸 다."
떫지도 않고 굉장히 잘 끓였다.
"틈틈이요.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사망총주라는 자리에 앉을 줄 말이에요."
"잘 해 나가고 계십니다. 앞으로 그럴 것이라 믿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음을 자아냈다.
"사우라는 사내를 돕는 건 아버지의 뜻도 오라버니들의 뜻도 아니에요. 오로지 제 뜻입니다. 설무랑."
"예."
"어찌 생각하세요. 제가 흑천살막에 등을 지는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글쎄요. 무황께서 계셨다면 아마도 크게 반대하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셨겠죠. 아버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허나 총주께서 사랑하셨던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위에서는 그 사실을 제대로 공표한 적이 없지요. 비밀로 부치는 이유는 의심해 볼 만한 일이지요. 총주의 마음이 크게 상하셨을 겁니다. 조금은 총주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제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망총을 이번 일에 끌어들였으니 말이죠."
"본총에 속해 있는 무인들은 오로지 총주의 명령만을 듣습니다.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그런 존재들이지요."
소아경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저도 본총의 무인들을 그런 의미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수하이기 전에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총주께서 괜한 걱정을 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가요? 호호."
"며칠 전에 사마련주가 왔다 갔다더군요."
"갑자기 왜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수귀옥이 그들이 나타나면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는 판단하에 사마련주를 총타로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아수귀옥이 사마련주 일행을 공격하는 와중에 천하보가 나타나 그들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사우가 머리를 썼네요."
"사마련주만 괜히 미끼로 이용당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사우는 이번 기회에 사마련주에게 이번 동맹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것이에요."
사우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내 편과 적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안다. 게다가 사람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정 따위는 주지 않는다.
그저 필요하면 이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린다.
단순하지만 사람인 이상 쉬운 일은 아니다.
"설무랑."
"예."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거죠."
"……."
"설무랑이 모르고 있다는 건 솔직히 납득이 가질 않아요. 아버지의 절친한 벗인데다가 굳이 당신의 거처를 숨기실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사흘 전 연통이 오긴 왔었습니다."
소아경의 눈이 흔들렸다.
"어디 계시는 거죠."
흥분한 소아경의 음성이 떨렸다.
"그건 말씀 드리기 곤란합니다. 무황께서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비밀로 하라 하셨습니다."
"저를…… 끝까지 허수아비 총주로 만드실 작정이시군요."
"총주. 그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황께서 뭔가 생각이 있으신……!"
"그만! 그만하세요. 이젠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네요. 설무랑만큼은 믿을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실망스럽네요."
설무랑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난처한 상황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숨길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다.
지금은 사망총주로 있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의 딸이다.
딸이 아버지의 거처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심으로 설무랑이 모르고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고 있다면 자신에게는 말을 해 줘야 한다.
그것이 어떤 엄청난 계획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설무랑은 냉랭해진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허수아비였어.'
설무랑의 태도에서 지금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냉정하게 받아들인 소아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 * *
여전하게도 마인곡은 변한 것은 없었다. 주변 풍경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중원천지에서 이만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도 없으리라.
하지만 오랜 시간 사람의 인적이 끊긴 탓일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존은 자신이 머물렀던 거처를 찾았다.
마인곡을 떠난 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수십 년 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보낸 곳이었지만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져 있는 것은 물론 먼지가 한가득이다.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사군악! 청소나 좀 할까?"
밖에서 서성이는 사군악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불만 어린 눈길로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뭐, 나 혼자 하지."
마존은 금세 떠날 것이었지만 정성스럽게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치웠다. 반 시진 정도 걸려 깨끗하게 청소를 하자 확실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밖을 보니 사군악은 없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홀로 마인곡 밖을 나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존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마존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버지와 숙부들이 묻혀 있는 무덤가였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무덤이 존재했다.
그중에 가장 중심에 위치한 무덤이 바로 마존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이다.
괜찮았던 심장이 아버지의 무덤을 보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피는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복수를 맹세했고 아직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왔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에는 이곳만 한 곳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역시 그의 예상은 맞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굳게 다잡을 수 있었다.
울컥거리는 감정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얼른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
무덤가를 빠져나오는 마존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마인곡의 풍경이 그대로이듯 사내도 과거 모습 그대로였다. 황금색의 장포에 태양의 그림이 곳곳에 그려져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사내의 몸에서는 빛이 났다.
마존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마치 황제처럼 눈부신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마존의 마음속에는 경외심보다는 살심이 폭발했다.
그다! 그다!
아버지와 숙부들의 무덤을 만들게 한 장본인!
"화월선자!"
화월선자는 전혀 늙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건만 오히려 더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존은 신법을 발휘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으아악!"
이성을 잃은 그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검기를 뿌렸다.
쭉 뻗어 나가던 검기는 무형의 막에 막혀 버렸다. 그리고 달리던 그의 육체도 튕겨 내 버렸다.
다리가 풀려 버린 마존을 오만한 자태로 화월선자는 내려다봤다.
"지금 그대는 나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네."
"입 닫아."
"나를 죽이고 싶은가."
"……."
"하지만 말이야. 이 세상에는 노력해서 되는 일이 있는 반면 천지가 바뀌어도 되지 않는 일이 있지."
화월선자가 느릿한 걸음으로 마존에게 다가왔다.
"그대가 나를 죽이는 일…… 그건 불가능해."
바로 코앞에서 원수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검 한 번만 휘두르면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으윽! 아악!"
피를 토해 내는 심정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서 사우에게 내 말을 꼭 전하도록 해. 흑천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악귀가 되어야 한다고. 인간의 피를 마시고 그 피로 몸을 씻는 그런 악귀가 말이야. 그 전에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고."
화월선자가 몸을 돌렸다.
"거기 서…… 거기 서, 이 새끼야!"
"중원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건 그대 외에는 있으면 안 되겠지."
마존은 근처에 사군악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화월선자가 사군악을 죽일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막아야 해.'
하지만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사군악은 그를 이길 수 없다.
안간힘을 다해서 자신을 옭아매는 무형의 밧줄들을 끊어 내려 애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 안에 혈관들이 통째로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결국 마존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너…… 뭐 하는 놈이냐."
겁도 없이 사군악은 화월선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검천마 마혁의 후예…… 사군악. 그대의 생명을 거두는 자는 바로 화월선자입니다."
사군악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순간 새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사군악의 육체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우. 어서 빨리 악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라."
화월선자는 혼잣말을 하더니 자취를 감췄다.
* * *
그 시각 하남성(河南省) 쇄검문(碎劍門)에는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쇄검문 문주 가도랑(賈島狼)이 마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무장에 나와 직접 문도들을 교육했던 가도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직계 가족이나 문파의 요직에 있는 자들은 대외적으로 가도랑의 죽음을 질병으로 선포했다. 오랜 시간 앓고 있던 중병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이다.
장이 끝나고 가도랑의 장자와 쇄검문의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율무천의 짓이 확실합니다."
장자인 가모공(賈牡恭)이 분기 어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진정하십시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질 않습니까."
"아뇨. 평소 아버지께서는 남북천맹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공공연히 남북천맹이 시행하는 일들에 대해 불만도 표출하셨고요. 게다가 본문은 율무천이 아닌 대막의 편에 섰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복입니다."
가모공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는 달리 쇄검문주 가도랑은 살수의 공격으로 인해 사흘 전 밤 암살을 당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조차 암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절정고수의 손속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총타에는 고수들이 많다. 쇄검문주를 죽일 수 있는 자들 또한 즐비하다. 지금으로서는 남북천맹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전서구 하나가 날아왔다.
연통을 보내온 곳은 쇄검문과 친분이 두터운 천풍문(天風門)의 소공자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 보십시오! 천풍문주께서도 어젯밤 암살을 당하셨답니다."
연통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수뇌부들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천풍문도 과거 대막검문의 편에 섰던 문파가 아니던가 말이다.
남북천맹 내전에서 대막의 편에 섰다가 죽은 문주들도 있지만 쇄검문과 천풍문처럼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복을 가해 올 줄은 몰랐다.
새로 맹주의 자리에 앉은 율무천을 믿었던 터라 그 배신감은 배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이 사실을 맹에 속해 있는 문주들에게 은밀하게 알려야 합니다."
* * *
"총 열 명이 암살되었습니다."
율무천의 물음에 사마태릉이 답했다.
"문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쉬쉬하고는 있지만 뒤에서는 맹주님을 맹렬히 비판하는 중에 있다고 합니다."
사마태릉은 군사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가 복귀하자마자 사단이 일어났다.
남북천맹 이름 아래 모여 있는 문파의 문주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손에 암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들 한 명 한 명은 과거 남북천맹을 배신하려고 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개중에는 남북천맹에서 빠져나간 자들도 있었다.
율무천이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자들이었다. 문주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율무천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혈천마성으로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표적을 맞춘단 말인가.
세상에 아수귀옥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떠벌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러면 천하는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 욕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보셔도 됩니다. 수시로 보고하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예."
내실을 다져야 할 때에 맹주로서의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흔들려는 적들의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정말로 큰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어도 답이 없다. 그의 머리로는 지금 위기를 풀어 갈 재간이 없었다.
율무천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 사우의 거처로 향했다.
"뭐야."
사우는 외출을 하려고 했는지 문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외출이야."
"하! 이제 내 맘대로 외출도 못하는 거냐?"
"한가롭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 하는 소리지."
"쯔쯧. 맹주라는 자식이 이런 일에 호들갑은. 따라와. 할 일이 있다."
"사우!"
"네가 날 찾아온 이유가 뭔지도 아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남북천맹 맹주 율무천이 젊은 사내의 손에 잡혀가는 명풍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