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아수귀옥
남북천맹이 무너졌다.
무림의 태산으로 군림하던 철옹성과 같은 남북천맹이 외부의 세력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지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혈천마성과 사마련의 합공으로 인해 총타는 불바다가 되었고 천룡원 원로 중 둘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척살당했다.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도 그 전란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스물아홉 개의 중소방파 문주들 절반 이상이 목이 잘려 나갔다.
피의 폭풍이 쉴 틈 없이 몰아쳤던 지난 열흘이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혈천마성과 사마련과의 연합을 주도했다는 사람이 전대 맹주 율천세의 장자 율무천이라는 사실이었다.
율무천을 총타를 접수한 뒤 바로 전 지역에 소문을 내었다.
아버지 율천세는 혈천마성이라는 세력에 죽은 게 아니라 서문륭과 천룡원 원로들로 인해 암살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소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을 믿는 자들도 있었고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였다.
대를 이어 율무천이 맹주가 되었고 이제는 낡고 허물어진 속을 버리고 새롭게 남북천맹이 태어난 것이다.
전보다 더 강해지고 전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보여 줄 기반이 다져진 것이었다.
"문주. 패우입니다."
아도왕 서패우는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대답이 없음에도 서패우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굳은 의지가 겹쳐 보였다.
사흘째 끼니도 거른 채 두문불출하고 있는 서륜이 걱정이 되었다. 일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끔 엄명을 내렸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그 명을 어기려 하기 때문이다.
"주무십니까."
침상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서륜을 보자 서패우는 그늘이 더 깊어졌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일어나시지요."
곡기를 끊었기에 멀건 죽뿐이지만 이것이라도 먹여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서륜마저도 잃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운 없는 음성에 가슴이 미어진다.
"이제 털고 일어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놈이 들어왔다면 목을 베었을 것이야."
몸을 일으킨 서륜의 몰골은 서패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초췌해져 있었다.
야윈 얼굴에다가 입술은 윤기가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 다 망가졌습니다."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아?"
메마른 웃음이라도 보이며 농을 던지는 서륜이었다.
"웃는 문주의 얼굴을 뵈니 이놈 마음이 놓입니다."
서패우는 서륜을 문주라 불렀다.
가문을 책임지던 대막검문의 문주 서문륭이 죽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장자인 서륜이 그의 뒤를 잇는 것이 맞았다. 아직 정식으로 문주의 자리에 오른 건 아니지만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자신의 도가 사정없이 사지를 토막 낼 것이었다.
서륜은 서패우의 정성을 생각해서 입맛이 없지만 한 숟갈 떠서 입안으로 넣었다.
"음…… 누가 만든 거지?"
"제, 제가 만들었습니다."
서륜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형편없네."
평생 무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다. 요리라고는 곁눈질로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죽을 써 온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셔야죠."
"패우."
"예."
"율무천이 왜 대막을 그냥 뒀을까."
"아까운 것이겠지요."
"독을 품는 건 위험한 짓일 텐데도?"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에 연통이 도착했습니다."
서륜은 숟가락을 놓았다.
"왜요? 더 드시지 않고."
"다 듣고 나서 먹으려고."
"총타에서 율무천이 직접 보내온 소식으로…… 본문의 봉문을 명하였습니다."
서패우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언제까지지."
"오 년입니다."
오 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막검문이 원체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 집단이라고는 하더라도 원해서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크다.
그렇지 않아도 전대 맹주를 죽인 이가 서문륭이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대막검문의 위세가 흔들리고 있는 마당이다.
이런 상황에서 봉문을 한다면 치명타를 입게 된다. 어쩌면 감숙성 패자의 자리마저도 내놓아야 할 판국이다.
"현재 본문은 사마련과의 싸움으로 절반 이상의 전력을 잃은 상황입니다. 다른 가솔 분들께서도 이번 봉문을 받아들이고자 할 것입니다."
"후우. 멸문지화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네."
"죄송합니다."
서륜은 고개를 숙이는 서패우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저리도 죄송스러워하는지.
"또 하나의 연통이 있습니다."
밀봉된 봉투를 서륜이 받아 들었다.
놀랍게도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건 아버지의 필체였다.
'아수귀옥?'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서륜은 자리에서 일어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문주?"
"본문은 봉문하지 않는다."
"예?"
"자식이 아비의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문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 서륜의 심리 상태가 불안전하고 복수심에 허덕이고 있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이건 아니었다.
지금 반기를 드는 행위의 끝은 멸문이다.
오랜 시간 감숙성의 패자로 군림하던 대막검문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오 년의 봉문은 없다. 단…… 반년 동안의 봉문은 할 것이다. 전력을 재정비하고 움직일 것이다."
서패우는 서륜의 말에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도대체 그가 읽은 봉투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저렇게 흥분한 상태로 돌변한 것일까.
"오랜만에 외출을 해 볼까."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목소리에는 패기가 넘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남북천맹의 힘이 쇠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헌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평이었다.
이번 전란으로 인해 남북천맹은 그 크기는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한 걸음 더 성장했다는 게 옳았다.
중원 침략을 노리던 사마련을 흡수했고 오랜 숙원을 정리한 덕분에 혈천마성의 전력을 발아래 두게 되었다.
놀라운 성과였다.
모든 공은 율무천에게로 향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남북천맹을 성장시킨 기재로 각광받은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 다음으로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스물아홉 개의 중소방파의 문주 중 절반 이상이 죽었다. 하지만 율무천은 그들의 혈족들을 불러들여 위로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 하여 흩어짐을 방지했다.
결코 쉽지 않았다.
아버지를, 남편을, 형이자 동생을 잃은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혈족들은 그걸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남북천맹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건 오랜 시간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모두가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섯 군데의 문파는 다른 길을 걷기로 공표했다.
더 이상 남북천맹에 속해 있지 않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어떤 압박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율무천의 약속을 확인한 뒤였다.
그들이 빠져나갔다고 해서 남북천맹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다. 꼭 빠져나간 숫자를 채워 넣어야 할 필요도 없거니와 빈자리를 채워 줄 문파들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빈자리는 채워졌다.
그래서 현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는 사대검문을 비롯해 서른두 개의 중소방파로 이루어진 연합 체제를 갖추었다.
율무천은 이각 사부 사전의 기관을 유지한 채 각 요직에는 믿을 만한 사람들로 앉혔다.
혈천사가의 무인들은 새로 창립된 천하보(天河堡)에 귀속시켰다.
천하보주는 천화유가의 유단으로 정해졌다.
사마련은 그 인원이나 전력 면에서 상당한 인원을 지니고 있기에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물론 남북천맹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도록 맹약을 맺은 뒤였다.
주문룡이 이끄는 흑마궁은 천무대로 속해졌다.
기존에 있던 천무대 소속 무인들은 정리하고 흑마궁 전원이 천무대로 귀속되었다.
그들은 맹주인 율무천의 호위를 맡는 임무를 맡았다.
사군악과 담천은 아무런 기관에 속해 있지 않으며 오로지 율무천의 호법만을 맡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초호진과 무진은 천지각 부각주로 임명된 마존 밑으로 배치 받았다.
모두 각자 자신들이 할 역할을 부여받고 남북천맹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어쩐 일이야."
율무천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우를 보며 물었다.
서문륭, 아니 진천남의 육신이 전류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진 그날 이후로 코빼기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그다.
오로지 주문룡과 마존으로부터 명령을 전달할 뿐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않다가 오랜만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총타가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고 하니 이제 네가 직접 나서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사마련을 말하는 건가?"
"똑똑하네."
율무천은 사우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마련은 아직도 위험한 존재이기는 하지. 언제 그들이 마음을 바꿀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본맹이 크게 위험을 느낄 필요성은 없지만 지금은 아니지."
"사마련을 너무 얕잡아 보면 큰코다칠 텐데."
"내가 맹주로 있는 한 그들이 섬서성을 침범할 일은 없을 거야."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우는 그의 호기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엿한 단체의 수장이다.
그것도 중원을 지배하는 남북천맹 맹주였다.
이 정도의 자신감은 필요했다.
"네가 만남을 좀 주선해 줘. 아무래도 지금 또다시 다른 세력과 전쟁이 벌어지면 큰일이니까.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겠지."
"그렇지 않아도 사마련주로부터 연락이 왔어. 아마 나흘 정도면 총타에 도착하겠지."
"그럼 마중을 나가야겠지."
"어이, 사군악."
사우의 부름에 사군악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왜."
"심부름 하나만 해 줘야겠다."
"뭔데."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백발을 벅벅 긁는다.
"사마련주 지청화 마중을 좀 해. 예의 있게 행동하고."
"그러지."
사군악이라는 사람이 언제 이렇게 순종적이었던가? 왠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사군악이 사라지자 사우가 입을 열었다.
"단단하게 다질 필요가 있어."
"무엇을?"
"남북천맹의 내실 말이야. 아주 단단해서 그 누구도 부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대비하는 거냐."
"맞아. 언제고 나타나겠지. 검옥이 박살나고 사망총이 등을 졌어.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건 어쩌면 우리의 행동들이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러면 이제 어쩌지."
"기다려야지. 내가 말한 대로 내실을 튼튼히 다지면서 언제가 되었든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놈들이 어디 짱 박혀 있는지 정확히 모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야."
"우리의 정보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야?"
사우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손목을 걸지."
사우는 손목을 돌리면서 이죽거렸다.
율무천의 입에서 나오는 건 긴 한숨뿐이었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분명히 있는데 형체조차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대해서 잘 아는 이라고는 사우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그들이 어디에 머무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우가 말하는 그들은 엄청난 비밀 조직임에는 틀림없는데 어찌 남북천맹이 그들을 상대할까.
어찌 생각하면 지금 자신들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걸 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마음속에서 지금처럼만 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흠칫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었다는 건 안일함에 빠져 있다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를 포함해 자신의 선조들이 지켜 오던 남북천맹이다.
혈천마성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냈다고는 해도 열과 성을 바쳐 오면서 지켜 온 남북천맹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손짓 발짓 한 번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다.
잠깐의 잘못된 생각을 깨끗이 지웠다.
아버지를 잃으면서까지 얻은 맹주 자리였다. 많은 이들의 피를 봐 가면서까지 지켜 낸 자리다.
그리고 남북천맹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꿈을 꾸고 가꾸어 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들과의 타협은 없다.
언제고 나타날 날만을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린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 최대한의 정보력을 대막검문에 집중시켜."
"그들이 내 봉문을 받아들였는데도?"
"쯔쯧.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남북천맹 맹주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유일하게 사우뿐이다.
율무천은 바보처럼 웃었다.
그의 시건방진 말투에 적응이 된 것이다.
"아수귀옥은 일단 중원으로 나타난 건 확실해. 대막검문이 사마련과의 싸움을 하는 데 도움을 줬거든. 아마 이번에도 대막을 이용하여 공격을 해 올 거야. 네가 내린 봉문 명령을 받아들인 건 그저 전력을 재정비하는 데까지만 유효하겠지."
"넌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반년."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 말하는 사우였다.
"중원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는 시기이지."
"흐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벌써부터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네가 할 일은 두 가지. 하나는 감숙성을 집중적으로 감시할 것. 또 하나는 내실을 튼튼히 다질 것. 앞으로 서른두 명의 문주들을 수시로 만나서 충성을 다짐받아야 할 거야. 언제라도 일어날지 모를 전쟁을 위해서."
사마련주 지청화가 섬서성에 도착했다.
그녀는 철대악과 북천휘, 그리고 화예대 서른 명을 대동한 상태였다.
그 인원만으로도 마음만 먹는다면 작은 문파 하나 정도는 멸문을 시킬 힘이다. 헌데 철대악은 긴장을 잔뜩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지 지청화를 호위한다는 임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해 보였다.
섬서성, 남북천맹 총타가 있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북천맹을 무너트리려 하던 사마련의 련주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위험했다.
지금은 저들도 사마련과의 동맹을 원하고 있지만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 무림이고 강호이지 않은가.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지청화의 호위를 맡은 이들은 긴장감으로 얼굴들이 굳어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철대악은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도저히 편하게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의 호위를 맡지 않았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오늘 밤을 보낼 객잔을 잡는 것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주변 지형을 꼼꼼히 살폈고 조금이라도 퇴로에 문제가 될 것 같은 장소는 피했다.
열군 데가 넘는 객잔을 둘러보고 나서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다.
"너무 예민하신 것 같아요."
얼른 지친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지청화였기에 철대악의 행동에 핀잔을 줬다.
물론 그의 완벽을 기하는 행동들이 자신을 위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꼭 총타가 가까워져서 그런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그들의 움직임도 있기 때문에……."
"그런가요."
철대악이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그녀는 알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철대악은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총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의 경호만으로도 련주를 지키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허니 이제는 철 호법께서도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철대악은 세심한 그녀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 밝은 표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청화는 목욕을 하고 나와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바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오랜만에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서 여홍과 함께 외출을 하려 했다.
"안 됩니다."
당연히 철대악의 반대에 막힐 수밖에 없었다.
"화예대주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아주 잠깐 다녀올 거니 걱정하시지……!"
"가시려거든 제 목을 베고 가십시오."
철대악의 고집을 꺾는 건 포기해야만 했다.
"역시나 괜히 말했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청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서륜과의 접전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준 뒤로부터 저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막검문을 도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집단이 나타난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무런 탈 없이 일을 치렀지만 그걸 들은 철대악으로서는 불안감이 치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군을 보필하는 수하의 마음이 아니다.
딸을 지키고자 하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지청화는 그걸 알기에 웃으면서 그의 예민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몰래 빠져나갈까요?"
여홍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왠지 여홍도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 같다.
"아니. 괜찮아. 그냥 쉬지, 뭐."
그날은 그냥 잠을 자려고 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사군악이라 하오."
"사우의 사람인가요?"
사군악은 사우의 명령대로 지청화 일행이 머무는 곳을 방문했다.
"그렇소. 그대들의 안내를 맡았소."
사군악은 품에서 사우가 써 준 종이를 지청화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남북천맹 맹주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율무천의 뒤에는 사우가 있음을 알기에 더 이상의 의심은 하지 않았다.
"총타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그저 그렇소."
전혀 질문을 한 이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대답이었다.
지청화는 어색하게 웃었다. 더 이상의 질문을 이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사군악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사우라는 자가 왜 저자를 보낸 걸까요."
사군악이 영 마땅치 않은지 철대악은 불쾌한 표정이 가득했다.
"글쎄요.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어 보여요. 있다면 저희들을 감시하는 목적이겠지요. 철 호법이 보셨을 때 어때요?"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찍이 두 사람은 사우라는 사내의 무위를 본 적이 있지 않던가.
가히 경천동지할 만한 힘이었다. 그런 사내의 무위를 봤으니 웬만해서는 강해 보이지도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현재 사군악의 무공은 결코 철대악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실전의 경험이 철대악의 비해 떨어진다 뿐이지 순수한 무공과 내공은 결코 부족하지가 않은 정도였다.
사천성뿐 아니라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인 철대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건 사우와 함께 마인곡에서 나온 이들도 마찬가지다.
마존과 담천, 사군악, 초호진, 무진. 사우의 옆에 있기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무공의 고하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철대악은 지청화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를 마쳤다.
"모두 당도했습니다."
염화궁신 풍공이 부복을 하며 말했다.
이번에 그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얼굴은 준수한 편이었으나 빈틈없이 그려진 흉터들로 인해 본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는 새까만 무복을 입고 있었다.
헌데 원래 그런 것인지 염색을 했는지 눈썹은 시뻘건 핏빛이었다.
그런 몰골을 하고 있는 이가 풍공을 포함 네 사람이다.
사귀옥(死鬼獄)들이다.
아수귀옥에서는 옥주 다음으로 가장 강한 자들 다섯 명을 그렇게 부른다.
"풍공."
"예."
"지청화에게 당했다고 했지."
심장을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가 담김 음성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귀옥의 우두머리 용성(庸盛)이다.
그는 무복이 아닌 화려하게 치장된 옷차림이었다. 양 귀에는 핏빛의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용성은 아수귀옥의 전력을 총괄하는 사내였다.
이 세상에서 그의 위에 설 수 있는 이는 옥주뿐이다.
비록 같은 사귀옥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네 사람이 덤벼도 용성 하나를 감당 못한다.
"송구합니다."
"괜찮다. 이번에 죽이면 되니까."
"예."
지청화를 처리하지 못하면 이번에는 자신이 죽게 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옥주께서는 검옥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크게 분노하셨다. 거기에 사망총까지 중원의 편에 섰으니. 이제는 본옥이 중원을 관리해야 한다."
용성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원을 관리하는 건 약하기에 하는 것이다.
흑천살막에서 검옥이 가장 세가 약하다.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중원을 관리해 온 것이다.
헌데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사망총이 있다. 검옥이 사라진 이상 그들이 중원을 맡아야 하는데 그들이 등을 돌렸다.
"계집 따위를 총주 자리에 앉히다니. 십절무황 그자가 노망이 든 것이지."
검옥을 그렇게 만들고 현재 중원을 이 지경으로 뒤흔든 자가 흑천의 혈육이라고 들었다.
사망총주 소아경은 흑천의 여인이었고 그의 죽음에 칼을 품고 있다가 이번에 사우의 편에 선 것이리라.
별 같지도 않은 정 때문에 배신한 그들 때문에 아수귀옥이 중원을 관리하게 생겼다.
지독하리만치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수귀옥이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중원은 피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움직인다."
"존명."
용성은 사귀옥과 함께 움직였다.
산 중턱에서 지청화가 오기를 기다린 지 열흘째였다.
산 곳곳에는 아수귀옥 무인 백여 명이 흩어져 있었다.
"소부(蘇釜)."
"예."
거한의 사내가 용성의 부름에 답했다.
"수로를 막는다."
"알겠습니다."
소부라는 사내가 손을 들어 까딱하자 열 명의 무인들이 뒤에 붙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용성은 풍공을 쳐다봤다.
"지청화를 직접적으로 친다."
"예."
풍공은 수하 사십 명을 데리고 이동했다.
"추평(秋平)과 하진(河津)은 나와 함께 움직인다."
"예."
"알겠습니다."
"헌데…… 풍공에게 이번에도 기회를 주십니까?"
삐쩍 마른 추평이 물었다.
"왜 실패할 것 같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지청화가 이끄는 사마련의 힘이 약하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본옥 전체가 나선 이상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검옥이나 사망총이 망친 일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더러운 기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 아수귀옥이 나선 이상 단기간에 중원을 정리해야만 한다.
겨우 지청화를 처리하는 데 열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더 이상의 여유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귀옥 중 풍공이 가장 약하다.
자신과 하진 둘 중 하나만 나서도 지청화의 목숨을 거둘 수가 있었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뿐이다."
풍공 개인의 자존심이 아니다. 아수귀옥의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지청화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고 말이다.
'오늘 사마련주는 반드시 죽는다.'
지청화는 걸음을 멈췄다. 앞장서서 걷던 그녀가 멈추자 뒤따르던 무리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철대악도 북천휘도 여홍도 그녀의 행동에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왜 그녀가 걸음을 멈췄는지 알기 때문이다.
쉬이익!
화살이 빠른 속력으로 지청화에게 날아왔다.
철대악은 순간적으로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멈추세요."
빠른 속력이었다고는 해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청화의 다급한 음성에 철대악은 적이 있음 직한 곳을 쳐다볼 뿐 움직이지는 않았다.
산속에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인간의 숨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에는 진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갑자기 그늘이 졌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린 것이 아니다. 화살들이 하늘을 가린 것이다. 새까맣게 하늘을 가린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피해!"
누군가가 외친 소리와 동시에 지청화 일행은 조각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말이지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잠깐만 한눈을 파는 이가 있었다면 온몸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적들의 의도는 무리를 떨어트려 놓는 데 있었다. 그들의 작전은 통했다.
무리 지어 있던 지청화 일행이 사분오열되자 적은 모습을 드러냈다. 땅 밑에서, 나무와 바위들 사이에서.
숨겼던 살기를 드러내며 검을 겨눈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숨이 다 막힐 정도로 강렬했다. 결코 범인들은 일각도 채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적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자신감이 없다면 결코 하지 못할 행동이다.
지청화를 비롯 그녀를 따르던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드러났다.
'저자는!'
지청화는 주변을 포위하는 무리를 이끄는 자가 모습을 보이자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은 맨얼굴이었다. 혈궁으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대막검문을 도왔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체. 사우가 말하는 그들의 세력임이 분명했다.
지청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너무 적은 인원을 데리고 움직이는 건 역시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예상했어야만 했다.
남북천맹의 울타리 안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자신들을 향해 살심을 드러내는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약했다.
"무엇을 하느냐. 련주를 호위하지 않고!"
철대악은 아직도 삼삼오오 떨어져 있는 화예대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화예대 무인들은 적들에게 이미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철대악과 북천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그 결과는 죽음 외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 정도 인원으로 사마련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호법을 맡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지청화가 요란한 이동은 원하지 않아 그 고집을 꺾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다.
철대악은 북천휘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쉽게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화예대 무인들이 지청화의 곁으로 모여들려고 했다.
그 순간 북천휘는 자신의 볼을 스치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군악?"
혈궁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로 쏘아져 가는 자는 사우의 사람 사군악이었다.
동시에 아수귀옥의 무인들이 사냥감을 향해 덤벼들었다.
철대악과 북천휘, 여홍은 지청화의 옆에 바짝 붙어서 호법을 섰다.
"저자를 도와야 합니다."
"안 됩니다. 지금은 련주의 호법이 우선입니다."
세 사람이 함께 지켜도 버거운 판국에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위험한 상황이다.
철대악의 눈이 사군악이라는 사내의 뒤를 쫓았다. 한눈에 봐도 그의 신법이 신묘하기 짝이 없었다.
결코 약한 내공으로는 펼칠 수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어쩌면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정면을 뚫기만 한다면 련주를 지킬 수 있었다.
사방에 깔린 적들은 화예대 서른 명이 막기 시작했다.
화예대도 결코 약한 수준의 무인들이 아니기에 최소 일각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안전한 곳까지 도망을 쳐야 한다.
"내가 후방을 맡지."
북천휘의 말에 철대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련주. 지금부터는 오로지 앞만을 보시면서 가셔야 합니다. 저 사내는 육안으로 봐도 결코 약해 보이지 않으니 제 살길은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련주의 안위만을 걱정하십시오."
지청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본련의 련주를 너무 어린아이같이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지청화의 무위는 북천휘와 철대악을 넘어선 수준이다.
두 사람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은 그녀의 호법이었다.
공식적이든 사적인 자리든 자신들이 호법을 맡은 이상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적들은 눈앞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주변에 천라지망을 펼쳐 놓은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청화의 입장에서는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화예대 서른 명을 희생시켜야 하고 사우라는 조력자의 사람을 앞장세워 자신만 살고자 도망을 가야 하는 것이 싫었다.
수하들을 버려 가면서까지 목숨을 연명해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는 도망 대신 검을 뽑았다.
"여기서…… 싸울 것입니다."
"련주. 화예대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일각입니다. 저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산 전체를 지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차피 뚫고 가기는 힘듭니다."
지청화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칼을 들고서 화예대와 적들이 싸우는 곳으로 가려던 그녀의 앞을 여홍이 막아섰다.
"화예대는 련주의 행동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지."
"화예대는 련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가 있습니다.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헌데 지금 련주는 우리들의 의지를 짓밟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련주의 안전입니다."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만 몸을 내뺀다고 해서 화예대 무인 중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청화가 고민을 하는 동안 철대악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사군악이라는 사내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몸에서 뿌려지는 냉기는 철대악의 눈에 똑똑히 각인되어 가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훨씬 높은 무공을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철대악의 입에서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헌데 중요한 건 지청화였다. 결코 움직이지 않으려 하니 꼼짝 없이 목이 잘려 나갈 판이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죽는 게 어려운 것이다.
자신들이 죽으면 사천성에 있는 사마련은 뿔뿔이 흩어져 자멸하고 말 것이다.
결코 쉽게 이룬 사마련이 아니다.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방황하고 헤매며 어렵게 만들어 낸 곳이 사마련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와해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청화를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가야만 한다. 철대악은 굳은 의지로 손을 들었다.
그녀를 기절시켜서라도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와아아!
그때 함성 소리가 들리며 일단의 무리가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더럽게 늦게 처오네."
오로지 사군악만이 투덜거리며 쳐다보지 않았다.
"남북천맹?"
백색 깃발에는 분명 남북천맹을 상징하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천하보주 유단입니다."
진청색의 무복을 입은 유단이 지청화를 향해 예를 취했다.
그녀도 남북천맹에 새로 생긴 천하보라는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과거 혈천사가라 불리던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말이다.
지청화는 그의 예를 받으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주변에 포진해 있던 정체불명의 단체가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지원군의 인원은 상당했다.
천하보 무인들과 검룡전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력의 전부가 온 것 같았다.
몇 백 명의 무인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든든했다.
"사우가 보낸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대공자께서 미리 아시고 보내셨습니다."
"저들을…… 쫓지는 않으시나요?"
"대공자께서는 저들이 물러가지 않을 경우 피를 보되 도망을 간다면 쫓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청화는 사우라는 사내에게 큰 빚을 졌다.
"부상자들을 돌볼 시간은 있겠죠?"
유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래는 안 됩니다."
"반 시진이면 족해요."
"알겠습니다."
유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하보와 검룡전 무인들과 함께 주변을 철통같이 지킬 수 있는 진을 폈다.
"천운입니다."
"예."
지청화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한 고집을 부렸잖아요."
북천휘와 여홍이 다친 수하들을 살피기 위해 분주해졌다.
지청화는 철대악과 함께 다시 유단을 찾았다.
"저희를 공격했던 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아시나요?"
"저 또한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저들이 아수귀옥이라는 단체라는 것과 대공자께서 이번에 저들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거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사우의 말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대막검문과의 싸움에서도 크나큰 피해를 입을 뻔하지 않았던가.
두 번씩이나 직접 몸으로 느낀 그들의 전력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서른 명의 화예대 무인들 중 열 명이 죽었고 나머지 인원 중 대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저들은 전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 불길한 느낌은 정확할 것이다.
자신들의 모든 걸 보여 주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망을 쳤으리라.
충분히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생겨 먹은 조직이길래 이토록 강한 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냔 말이다.
도저히 그녀는 자신의 지식으로는 가늠조차 하기 힘이 들었다.
헌데, 왜 자신들을 공격했을까.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문제지만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답은 얼마 걸리지 않아 나왔다.
"철 호법."
"예.
"북 호법과 함께 사마련으로 가세요."
이번에야말로 철대악의 얼굴에서 심각한 불만이 보였다.
"련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지금 련주를 보필할 사람은 저와 북천휘뿐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
"철 호법께서 걱정하셨던 이유일 거예요. 본련의 와해. 그리고 또 하나 대막검문을 이용하여 감숙성과 사천성 일대를 지배하려는 속셈이죠.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저희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요."
철대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마련으로 당장 돌아가야 한다.
철대악은 그녀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사천성으로 가는 길은 결코 가깝지 않다. 언제라도 그들의 공격이 진행될지 모른다.
그들이 노리는 건 사마련주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북천휘만이 돌아가야 한다. 나머지 화예대 무인들과 여홍만을 남겨 둔 채.
그나마 아군이라고 생각되는 남북천맹 총타가 멀지 않다. 게다가 강한 지원군이 도착한 상황이다.
문제는 남북천맹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나 사우라는 사내…… 아직까지 모든 것을 믿기에는 부족한 상황이 아닌가.
"믿고 가세요."
"후우."
철대악은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몸에 걸치고 있는 옷들을 모조리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련주로서의 명령입니다. 정 마음이 불안하시다면 살락원을 호출하세요. 그들을 최대한 빨리 섬서성으로 보내시면 되겠네요."
철대악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살락원은 현재 사천성과 감숙성 경계 부근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직 감숙성은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라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수일 내로 섬서성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지청화는 홀로 남겨지는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싱긋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 * *
아수귀옥은 흑천살막의 밑에 있는 다섯 단체 중 세 번째 서열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수장인 야차혈왕 개인의 강함은 다섯 수장 중 두 번째로 평가받는다.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은 야차혈왕에게 심장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부터 한다고 한다.
그만큼 성정이 차고 도무지 인간의 감성이라는 것이 없어 보인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오로지 매진하고 집중하는 것이 무공이었다.
야차혈왕이 과거에 했던 수련법 중 하나가 있는데 바로 맹수들과의 싸움이다.
맹수들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호랑이 열 마리와 싸우곤 했다. 그것도 두 눈을 가리고 맨손으로 모조리 때려잡으니 사람 같지도 않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맹수와의 싸움은 수많은 수련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더 잔인하고 사람의 한계를 느끼는 방법들이 많을 것이다.
오로지 살심을 극대화시키는 수련을 하는 이가 바로 야차혈왕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의 과거예요."
은밀하게 총타를 방문한 소아경은 찻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과거?"
"예. 바로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지요."
야차혈왕은 한때 사망총 소속 무인이었다.
당시 소아경의 부친인 십절무황은 최연소 총주의 자리에 앉았었고 야차혈왕과는 절친한 의형제 사이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야차혈왕의 성품은 온화하고 부드러웠었다.
두 사람은 사망총을 흑천살막에서 최고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로 의기투합해 있었고 성장은 끝을 몰랐다.
당연히 다른 세력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십절무황을 제거할 수는 없었고 그의 옆에서 충실히 총주를 보필하는 야차혈왕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 계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그 결과로 야차혈왕의 혈육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야차혈왕은 끈질긴 적들의 추격 속에서도 살아남게 되었는데 피난처가 바로 중원이었다.
중원에서 그는 숨을 돌리고 복수의 꿈을 꾸었다. 인재를 모으고 자신만의 세력을 만든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야차혈왕은 세력을 이끌고 흑천살막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흑천에게 굴복당해 영원히 그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게 아수귀옥과 야차혈왕에 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때 야차혈왕이 지금과 같은 인물인지는 몰라요. 워낙 신비스러운 자이고 얼굴과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니까요."
"흑천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상당하겠네."
"그렇겠죠. 하지만 그때 흑천은 당신의 조부이거나 부친이었으니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흑천이 직접 그의 가족을 죽이라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니까요. 다섯 단체 중 흑천에 대한 충성심은 야차혈왕을 따라올 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사람의 마음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야차혈왕이 직접적으로 주동하지는 않았겠지만 주변에서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뇨. 아버지께서 야차혈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빼놓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야차혈왕의 굳은 심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다고요."
마치 자신이 보고 느낀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사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십절무황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리고 네 오라버니라는 작자들도 마찬가지고."
"저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네요. 누가 좀 제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어디 있는지 시원하게 말이라고 해 줬으면."
작은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답답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사망총이라는 작지 않은 단체를 자신에게 물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라버니들도 쪽지 한 장만 남긴 채 없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었다. 보고 싶고 걱정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벌써 삼 년이 지났다.
이제는 나름 무덤덤해져 있었다.
어딘가 잘 살아 있겠지.
쉽게 누군가에게 죽을 인물들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미쳐서 죽었을 것이다.
사우는 더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녀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소아경의 얼굴에서 괜한 슬픔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