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내전
아침이 밝았다.
해가 뜨고 저녁노을이 지는 건 자연의 이치이고 누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누군가에게는 따사롭고 기분 좋은 아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남북천맹 총타는 여느 날과 달랐다.
총타 내에 있는 시비들이 총동원되어 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연례행사 중 하나인 대천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그것도 오늘은 새로운 맹주가 선출되는 날이라 더욱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사 준비에 총책임을 맡은 이는 이환(李奐)이라는 사내였다. 그는 전대 맹주인 율천세의 처소에서 그의 심부름을 맡아 했었고 지금은 총타 내 모든 시비들의 총관리자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오늘 열리는 대천회의 준비로 인해 밤잠을 설쳐 가며 준비를 해 왔다.
완벽하게 준비하여 새로 뽑히게 될 맹주로부터 신임을 얻을 심산이었다.
"저기, 저기 그건 그쪽 자리가 아니라고 했잖느냐."
이환은 신경질적으로 수하들에게 일을 시켰다.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자신이 이런 행사의 총책임관이 된 것이다. 결코 허투루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어이구. 공자님."
이환의 허리가 넙죽 굽혀졌다. 땅에 코라도 박을 기세다.
그런 이환을 보며 율무천은 미소를 띠었다.
"총책임관이 된 걸 축하하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게 다 돌아가신 맹주님이 보살펴 주신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겸손할 필요는 없네. 어찌 그게 아버지의 덕뿐이겠나. 다 자네의 노력이 깃든 탓이지."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지 않던가. 이환의 입이 귀에 걸렸다.
다음 맹주로 율무천이라는 사내 외에 또 누가 있을까. 그의 생각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띄었다는 건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밝은 축복이었다.
"시간이 있으면 잠깐 나 좀 보지."
차기 맹주님이 보자는 데 없는 시간도 만들었을 것이다.
연례행사 중 가장 커다란 행사인 만큼 이삼 일 전부터 총타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새까맣게 붐비기 시작했다.
총타 내부에서도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원을 통제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스물아홉 개의 문파들의 수뇌부들과 그들을 모시는 시비들만 해도 이백 명은 거뜬히 넘었다.
게다가 이번 대천회의는 차기 맹주를 선출하는 자리인 만큼 남북천맹과 연을 이으려는 주변 상인들을 비롯해 정계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 또한 방문을 했다.
그러니 그 인원은 상당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중요 인사들 또한 초대하였기에 건물 주변으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이구. 눈 감고 졸고 있다가는 밟혀 죽겠네."
지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헌데 그 혼자 있는 건 아니다.
"긴장되냐."
마존의 물음에 사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럴 리가. 겨우 검옥을 상대하는 일이야. 그 윗대가리들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가만히 두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옥쯤은 지금 가진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호오. 자신감이 넘치네."
"이 정도 깡도 없으면서 일 저지를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거든."
마존은 긴장하지 않고 있는 사우의 모습에서 안도감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이 감돌았다.
적당한 긴장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좋은 일이지만 지금처럼 너무나 상황을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좋지 않다.
특히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말이다.
"조사는 다 끝냈냐."
"물론이지."
"좋아. 네가 만들어 낸 살생부는 검룡전주에게 넘겨. 아무래도 총타 내부를 잘 아는 이가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
대천회의가 열리기 전날까지도 마존은 모든 정보를 긁어모아 한 권의 살생부를 완성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해 낸 그 책에는 자신들을 따를 자들 외 인물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율무천이 은밀하게 만나고 확답을 들었던 자들 말고는 모조리 죽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검룡전이 자신들의 편에 서 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히 혈천마성과 사망총이 총타를 급습할 계획이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확하게 명단에 적혀 있는 이를 암살하려면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자들이 유리하다.
사부 사전을 이끄는 자들 중 율무천의 편에 선 이들은 검룡전과 귀부, 구룡천부가 다였다.
실력들은 출중하나 아무래도 인원수가 굉장히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총타 밖에서는 혈천마성의 대부분의 인원이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망총까지 합세하니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사우의 예상대로라면 천산검문 또한 자신들의 편에 서 줄 것이다. 그리고 스물아홉 개의 문파 수장들이나 수뇌부들 중 아홉 군데 이상이 율무천의 편을 들어 줬다.
물론 은밀하게 전해 준 밀지로 확인했다.
사우로서는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진천남과 천룡원 늙은이들인데."
"진천남은 사우 네가 맡는 것이 좋겠지."
"그건 당연한 이야기고. 나머지 천룡원은 누가 맡을지."
진천남만큼은 안 되어도 한 명 한 명의 무공이 상당할 것이다.
"일단 지하 뇌옥에 갇혀 있는 이사민부터 꺼내서 합류시켜. 그리고 내 신호에 맞춰서 일시에 움직이는 것 잊지 말고."
"그렇게 명령을 내리지."
마존이 사라진 뒤 사우는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활개치고 다닐 만큼 다녀 봐라?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그 시각, 천룡원에는 살가륵을 제외한 나머지 원로들과 진천남이 회합을 가졌다.
"미친 사우 놈이 아들 녀석에게 율천세를 죽인 사람이 저라는 걸 말했더군요."
"진즉에 처리를 했어야 하는 놈이었는데."
"도대체 왜 윗선에서는 사우라는 그놈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아직 사우라는 사내와 안면이 없는 원로들도 이럴 지경인데 진천남 본인은 얼마나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까.
아주 사우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가 절로 갈리는 실정이었다.
이번에 남북천맹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직접 자신이 윗선과 만나서 사우의 존재에 대해서 단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아드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사척의 질문에 진천남은 싸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더군요."
"허어."
"그럴 만도 하지요.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자신이 따르던 주군을 베는 행동을 했으니."
"어째 말씀에 가시가 있습니다."
진천남과 설무랑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곡해 들으실 것 없습니다. 순전히 아드님 입장에서 생각하여 말한 것이니 말입니다."
실내에 있어서 설무랑이 속해 있는 사망총이 흑천살막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진천남뿐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더라면 살가륵처럼 그 또한 척살 대상이 되었을 테니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조만간 살가륵과 함께 저세상 동무로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분 나쁜 언행을 내뱉는 건 유쾌하지가 않았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만 중요한 일이 있는 오늘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식 놈은 제가 간신히 설득해 놓은 끝에 조금 정신을 차렸으니 말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서륜은 아직도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패우를 비롯해 그의 처소 주변으로 무인들을 배치시켰다.
그가 절대로 총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말이다.
혹여 마음이 바뀌어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서륜을 차기 맹주로 앉히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다. 반발하는 세력들이야 천천히 짓밟으면 되는 거고.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총타 주변으로 혈천마성……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답니다."
"그 사우라는 놈의 짓이겠군요."
진천남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 별일 있겠습니까. 그놈들이 아무리 날뛰고 까불어 봤자 각 지역에서 모인 인사들만 수백 수천입니다. 게다가 태반이 무인들이고 모두가 우리 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무랑의 말에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진천남에게는 가시 같은 말이었지만 말이다.
진천남은 억지로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닙니다. 혈천마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주변의 정체가 불분명한 자들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내부에서도 불순 세력이 움직일 수도 있지요. 특히나 검룡전주 주원호는 이미 율무천의 사람이 된 것으로 봐도 무관하니까 말입니다."
"검옥의 무인들은 어디 있습니까."
한비가 물었다.
"총타 내는 물론 바깥에도 배치를 시켜 놨습니다."
"전원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검옥의 전체 인원이 섬서성에 깔려 있다는 말에 원로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들 전원이라면 백만 대군이 온다고 해도 막아 낼 전력이었다.
헌데 진천남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그들은 서륜이 아닌 율무천을 맹주로 앉히려고 합니다. 오후에 열릴 대천회의에서 천룡원이 강하게 주장해야 하고요. 본옥의 무인들이 그때까지는 반드시 회의장소를 사수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하. 물론 그렇겠지요."
"긴장되시는가 봅니다."
바람은 적당히 불어왔다. 차갑지도 않고 딱 적당한 날씨였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면 좋을 텐데.
율무천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오늘만큼은 말이다. 주원호의 말대로 율무천은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저을 만큼 안돼 보였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율무천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으면 생사의 갈림길이 정해진다. 그걸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 오금이 저리는 건 자명한 일이다.
"검룡전을 크게 믿고 계시다면 그 정도로 긴장을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한데 말입니다."
율무천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주원호의 말에 따스함이 느껴진다.
물론 표정은 너무나 굳어 있었지만 말이다.
율무천은 속내를 굳이 감추려고 하는 주원호를 보며 잠깐의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내 다시금 불안한 감정이 내면을 흔들자 율무천은 주저앉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다.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이다.
사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문륭이 아버지를 암살한 것이 맞을 테다.
그 이유까지 신빙성이 더해진다. 서문륭의 진짜 정체는 사우가 말하는 그들과 한패라는 것. 서문륭이 하는 일은 검옥이라는 그의 단체와 함께 중원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소름이 끼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남북천맹을 지탱하는 사대검문 중 하나가 흑천살막이라는 단체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것이 말이다.
게다가 천룡원 원로들까지 모조리 한통속이라는 건 율무천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무서운 자들이다.'
천하에 그런 단체가 있다는 말도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점점 피부로 다가오고 있음이 더 무서웠다.
"이제 나가시죠."
"……."
아직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방에 박혀 두려움에 벌벌 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율무천은 억지로라도 웃으며 주원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도 밖에서 들리는 소음으로 인해 얼마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 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소리는 배가 되어 귀를 울렸다.
처소에 들어가기 전에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늘어난 인파를 보며 당황했다.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총타는 내전으로 피바람이 불 것이었다.
이들이 그 화마에 덮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전주."
"예."
"안전에 만전을 기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내심 자신이 이환에게 시킨 일을 후회하는 율무천이었다.
천성각 내부에는 대천회의를 열 때마다 모이는 수뇌부들을 위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공간이 존재한다.
가장 상석에는 천룡원 원로 다섯 명이 앉았다. 아직도 살가륵은 부재중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사대검문의 수장들이다.
천산검문과 대막검문, 보천검문과 용호검문의 수장들이다.
그 밑으로는 스물아홉 개 문파들의 문주들이 각자 자신들의 자리에 섞여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얼마 전부터 혈천마성으로 추정되는 무리에게 암살을 당한 문주들의 혈족들이 대신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천성각 대전은 굉장히 컸지만 모두 자리를 채우고 주변으로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이 시립해 있자 오히려 좁게끔 느껴졌다.
"지금부터 대천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는 군사인 사마태릉이 진행을 맡았다.
"오늘의 안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차기 맹주를 선출하는 일이고 또 다른 것은 바로 남북천맹의 최대 적인 혈천마성과 사마련과의 전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마태릉은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자 하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그로부터 반 시진 동안 입을 연 자들이라고는 천산검문의 화진천과 율무천, 그리고 주원호뿐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마치 입을 열었다가는 머리가 날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율무천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두가 적으로만 보였다.
현재 남북천맹을 좌지우지하는 천룡원의 눈치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들이 대막검문의 서륜을 택했다는 소문을 이 중에서 모르는 이는 전무했다.
자신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던 이들 또한 침묵으로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화진천은 혈천마성과의 전쟁을 어찌 풀어 갈지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주원호는 차기 맹주 선출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율무천은 두 사람이 내놓은 의견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말했다. 대전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지만 썰렁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실내의 환경이 이렇게 돌아갈 줄 몰랐던 율무천은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서문륭을 쳐다봤다.
'웃어?'
그의 입가는 작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 따위는 숨기지 않는다.
"원로들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차기 맹주를 선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율무천의 눈길을 가벼이 무시한 서문륭이 원로들에게 물었다.
수룡무검 한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 천룡원을 이끌고 계시는 원주께서 부재중이십니다. 그로 인해 본 천룡원의 의견을 제가 대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비에게로 모아졌다.
"천룡원은 과거 남북천맹이 이 땅 위에 뿌리를 내릴 적부터 함께해 왔던 자들입니다. 많은 피를 보았고 동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연합의 기틀을 마련했죠. 지금 우리는 다시없을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임을 모르시는 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혈천마성과 사마련…… 그들은 강합니다. 여느 때보다도 연합은 똘똘 뭉쳐야 하고 새로운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과거의 혈연으로 맹주를 선출하는 건 오래된 생각으로 판단…… 본 천룡원은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의 장자 서륜이 차기 맹주로서 적임자라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조용하던 장내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천룡원 원로들의 눈치만 살피던 이들에게는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서륜이냐, 율무천이냐.
"자, 천룡원의 생각을 밝혔으니 이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구구구궁.
그때, 천지가 요동치는 흔들림에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소리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조금 일찍 터졌네.'
그것이 남북천맹에 벌어진 혈전의 시발점이었음을 아는 이는 율무천뿐이었다.
* * *
"이적."
"예."
"흑마궁을 세 개의 조로 나눈다."
주문룡은 새하얀 백색 섭선을 접으며 말했다.
"하나는 내가, 하나는 네가. 그리고 또 하나는 총타 밖에서 진천남을 기다린다."
"준비하겠습니다."
이적이 받은바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주문룡에게로 여인이 다가왔다.
"이들이 말로만 듣던 흑마궁이군요."
여인의 음성은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는 듯했다. 헌데 어째 주문룡은 비웃음으로 화답한다.
"어디 사망총만 할까요."
사망총주 소아경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진심으로 대단하다 여겨 말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상대의 말을 비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후후. 저 또한 진심으로 말한 것이랍니다. 흑마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흑천살막 중 하나인 사망총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요."
"자신과 자신의 수하들을 깎아내리는 말씀으로 보아 흑마궁 무인들은 좋지 않은 주군을 두었다는 걸 알았네요."
주문룡은 섭선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려진 얼굴에는 서릿발 같은 웃음이 퍼져 있었다.
사망총의 지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하늘이 자신들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흑천살막과 함께했던 사망총이 사우라는 존재를 따르는 걸 지켜보고만 있는 현실이 의문스러웠다.
분명 그들에게 사우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말이다.
자신들이 오랜 시간 닦아 놓은 터전에 더러운 흙탕물을 뿌려 놓는 사우에게 왜 이토록 관대한 것일까.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뜻일까.
그리고 주문룡이 사망총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흑마궁을 이끄는 초대 쇄암왕이 누구의 손에 삶을 마감했는지에 대해서 알기 때문이다.
바로 전대 사망총주 십절무황이라는 자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사망총에 대한 반감을 갖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이들과 사우라는 사내 품 안에서 뒹굴어야만 한다.
그것이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검옥은 본총이 맡을 생각이에요."
"본궁은 진천남을 노릴 것입니다."
"사우에게 듣지 못했나요? 흑마궁은 진천남과 천룡원을 호위하는 검옥 무인들을 맡으라는 이야기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진천남이 곧 검옥이니."
"아뇨. 그건 흑마궁주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진천남의 무위는 상당하답니다. 흑마궁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까는 흑마궁에 대해서 감탄하더니 이번에는 제멋대로 깔아뭉갠다. 순간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무시해야 할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진천남이라는 사내 하나를 잡기 위해 사망총 전부가 나서는 건 우습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정도로 강한 사내니까요."
소아경의 말은 칠 할 정도는 진짜였다.
정말로 진천남은 강했다. 물론 사망총 전원이 나선다면 필히 죽이거나 잡을 수 있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할 일처리였다.
그것이 앞으로의 행보에 큰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우가 사망총에게 일을 맡긴 것이고.
현재 중원을 관리하고 있는 진천남을 전력이 확실치 않은 흑마궁에게 맡기는 건 어려운 일임에는 사실이었다.
"대공자께서 그리 명령하셨다면 따라야겠지요. 허나 이 자리에서 단단히 못 박을 말이 있다면 흑마궁의 진짜 힘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다는 것이죠. 혈천마성이 세상에서 지워졌을 적에도 말입니다. 완벽하지 않았던 존재…… 허나 지금은 완전한 각성을 이루었으니 잘 지켜봐 주시길."
조만간 소아경이 흑마궁을 무시했던 발언만큼은 취소하게끔 만들어 주겠다는 주문룡의 의지였다.
"기대하지요."
소아경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율무천이 폭탄을 구입한 것은 마존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탄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품목이었다.
일반인이나 무림인들이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돈과 정보력만 있다면 아예 쳐다도 볼 수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폭탄은 행사 총 책임자인 이환에게 양도되었다.
그리고 방금 폭탄의 위력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주변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거리는 건 기본인데다 몇몇은 넘어져 밟혀 죽을 뻔했다. 다행히 검룡전 무인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엄청난 굉음으로 인해 군중들이 혼란스러운 반면 천성각 대전은 살기로 가득해져 있었다.
진천남과 천룡원 원로들을 중심으로 대전에 있던 중소방파 문주들이 대거 무리를 지었다.
반면에 율무천의 뒤에는 그들에 비해 빈약할 정도로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검룡전주 주원호와 구룡천부의 수장 한유, 귀부의 수장 귀성.
그리고 진천남의 의도하에 암살된 문파의 혈족들 여덟뿐이었다. 헌데 의외의 인물이 보인다.
천산검문의 화무홍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이해가 되는 이가 화무홍일지 모른다. 서륜이 차기 맹주가 된다면 누구보다 곤란한 상황에 이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율천세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세력도 성립하지 못한 율무천이 서륜보다는 상대하기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세력으로 나뉜 가운데 모두가 칼을 뽑고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이상한 것은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두 세력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뽑았다는 것이다.
이미 대전에서 열린 대천회의의 의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대전에 있던 모든 이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폭음은 그 신호였고 말이다.
"오늘은 차기 맹주를 뽑으려 했는데…… 율 공자께서 이렇게 무력행사를 하시니 저희 또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서문륭이 마치 율무천이 먼저 검을 뽑아 이런 상황을 만든 것으로 몰아갔다.
"그거야 살아남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겠지요."
율무천은 대천회의가 시작되기 전의 모습과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역시 무인은 무인이었다.
칼을 뽑으니 소름 끼칠 정도로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니 말이다.
"검룡전주."
"일각만 버텨 주세요."
일각이 지나고 나면 사방에서 지원군이 몰려들 것이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알겠습니다."
두 무리의 접전은 주원호가 앞으로 쏘아져 나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천성각이 무너져 내렸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랜 시간 총타 내 건물 들 중 가장 아름다움을 독차지했던 천성각이다.
남북천맹의 주인을 모시던 그 건물은 버텨 온 시간에 비해 허무하게 와르르 모습을 감췄다.
주변이 먼지로 자욱하다.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흩어졌다.
무너진 건물 잔해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뒤엉키며 칼 부딪히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총타 내부에서의 중심은 그들이었지만 주변으로도 엄청난 인파가 서로 검을 들고 원수를 대하듯 휘둘렀다.
그중 눈에 띄는 사내가 있었다.
사군악이다.
그는 사우와 뜻을 함께했다. 그가 처리해야 할 인물들을 찾았다.
총 다섯이었는데 네 명은 베어 죽였고 남은 하나는 다름 아닌 화진천이었다.
"저 인간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남북천맹 무인들을 베던 초호진이 무리를 이탈하는 사군악의 등 뒤를 보며 물었다.
"원수 갚으러."
담벼락 위에서 철궁을 신나게 놀리던 담천이 짧게 대꾸했다.
"난, 또 뭐라고."
초호진은 피식 웃으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크악!"
"비명 소리 좋고!"
사군악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싸늘한 냉기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동안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모든 것이 발현되었다.
사군악은 어렵지 않게 화진천과 만날 수 있었다. 화진천의 가문 천산검문의 무인들은 사우의 편에 서서 내전에 동참했다.
그건 사군악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우는 그를 베도 좋다고 했다.
꼭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해서 움직인 건 아니다.
사우의 허락 같은 것이 없었더라도 사군악은 오늘 화진천과 단판을 지으려던 참이었다. 그의 목숨을 빼앗든 아니면 용서를 하든.
"……!"
화진천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에게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저자는……!"
며칠 전 천산검문을 방문했던 율무천과 동행했던 자로 기억한다. 그런데 왜?
쾅!
사군악의 주먹이 화진천의 복부에 꽂혔다.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화진천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머리채를 붙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로 턱을 후려쳤지만 정신을 차린 화진천의 방어에 맥없이 막혔다.
"뭐냐, 네놈은."
같은 편이 아니었던가?
천산검문은 율무천의 편에 서서 사활을 건 전쟁에 참여를 했다. 헌데 그의 수하라 생각했던 자의 기습적인 공격은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다.
"네 눈깔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
"그게 무슨……!"
화진천은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사군악의 정강이뼈가 화진천의 발목을 무너트렸기 때문이다.
"기억을 못하면 어쩔 수 없고."
"크윽."
목 위를 짓누르는 사군악의 발을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어때…… 기억이 나?"
기억이 난다.
어찌 기억해 내지 못할까.
자신의 한쪽 눈을 앗아 간 사내를 말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살기 띤 눈빛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지금의 부인과 연정을 품던 사내……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군악."
"……."
"너를 죽일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쉭!
깡!
작은 암기 하나가 날아와 사군악의 신형을 비틀게 했다.
"괜찮으십니까."
검괴 은자량이었다.
화진천은 어느새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자량."
"예."
"저자는 내가 상대한다. 너는 가서 아버님을 보필해라."
"하지만……."
"부탁이다."
은자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대사형인 화진천이 부탁이라는 걸 한 적이 있던가?
"알겠습니다."
은자량과 합격하면 이길 수 있는 상대다.
허나 그러고 싶지 않다.
화진천은 다친 눈을 가리기 위해 썼던 안대를 벗어 던졌다.
"고맙다. 내 앞에 다시금 나타나 줘서. 이 눈…… 아플 때가 많거든. 그때마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으니까."
입안에 고인 핏물을 내뱉은 화진천의 미소는 어느 때와 다르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군악과 화진천이 오랜 숙원을 정리하고 있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진천남이 있었다. 천룡원의 편에 서서 검을 들어준 각 문파의 수장들과 율무천의 세력이 부딪히는 걸 지켜봤다.
분명 상황은 자신들이 우세했다.
헌데 그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
주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처참했다. 무인들은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를 판가름하지 못했고 그저 밟혀 죽지 않으면 칼에 베여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갔다.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종결시키는 게 중요했다.
진천남은 사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적들을 이끌고 지금의 내전을 만든 장본인이 사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발목을 잡는 이가 나타났다.
"네놈이 내 상대가 될 거라 보느냐."
"그거야…… 검을 섞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율무천이다.
진천남은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자신을 가로막자 웃음도 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검도 뽑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꼴에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는 거면 그냥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 좋아. 지금은 네놈보다 다른 쥐새끼를 찾아야 하거든."
"나를 무너트리면 사우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진천남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핏덩어리를 밟고 사우를 찾아야만 했다.
진천남의 바위같이 크고 굵직한 양 주먹이 율무천의 명치를 노렸다.
빗맞아도 죽음과 연결된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운에 율무천은 급히 몸을 틀었다.
틀자마자 검으로 진천남의 하체를 향해 휘둘렀다.
진천남은 급히 공중에 몸을 띄워 공격을 피해 냈다. 이어 허공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권풍이 땅에 부딪히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율무천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고수다.
그가 아는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의 무공이 아니었다. 율무천은 아버지나 다른 세간의 소문으로 대막의 무공은 이렇게 패도적이지 않다고 들었다.
유함의 상징을 갖고 있는 곳이 대막이라 들었다.
헌데 지금의 무공은 가히 살인적인 데다가 패공의 성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새 이마와 등줄기는 땀으로 젖어 버렸다.
어쩌면 혼자서는 그를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크게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정도이리라고는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율무천의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검 끝에서는 검기가 뿌려졌다.
진천남이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단순한 속임수였다.
스스슥.
율무천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신법을 발휘해 진천남의 코앞까지 이동했다.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였다.
진천남도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허나 재빨리 뒤로 몸을 뺐다.
그런데 율무천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쏘아져 갔다.
그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검기가 끊이지 않는다.
검기만 뿌려지지 않았더라면 율무천의 공격법은 하수 중 하수들이나 쓰는 방법이었다. 일정한 검로를 무시한 채 무작정 상대가 맞아 주길 바라며 검을 휘두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어이구. 저런 등신."
사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집중해서 본 인물은 진천남이다.
결코 율무천 따위의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헌데 지금 싸우는 율무천의 모습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러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사우는 급히 일어나 몸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내려온 그는 진천남에게로 향했다.
진천남은 사우가 다가옴을 느끼고 주먹으로 율무천의 복부를 강타해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용케도 나타났구나."
"하도 꼴 같지 않게들 싸우셔서."
사우는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않은가 보군."
"아까웠으면 감히 이딴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지."
진천남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곧 죽어도 입만 살아 있는 놈이다.
원래는 사우라는 놈을 죽여서는 안 되었다.
허나 생각이 바뀌었다.
결코 살려 둘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미 사망총까지 이 사우라는 놈과 결탁했다. 무슨 이유에서든 척살을 해야만 한다. 위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죽이지 말라고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책임은 물론 자신이 져야만 한다.
그것이 목숨일지라도.
"구천제혈신검…… 네 윗대가리들이 그걸 탐내느라 나를 지금껏 살려 두는 것일 수도 있어."
그게 아닐 것이라는 건 사우도 알고 있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라는 인간을 살려 둔 건 정말이지 실수하는 거야."
"그것도 오늘로서 끝이다."
"과연?"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사우와 진천남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어디 그 잘난 구천제혈신검의 맛이나 보자."
"지난번에 맛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사우의 검에서 검붉은 기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구천제혈신검은 피를 부르는 살인검이다.
아홉 개의 초식을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천하 그 어떤 누구도 상대할 수 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히 신의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일 초만으로도 태산을 베고 이 초에는 하늘을 벤다는 것이 허풍처럼 들릴 수 있다. 허나 아직까지 구천제혈신검이 세상 밖으로 제대로 드러난 적이 없기에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역대 흑천살막의 주인들 중 구천제혈신검을 사우의 형 흑천만이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었다.
반면 사우는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격이 다르다.
지금껏 사우가 펼친 구천제혈신검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공할 힘을 보여 줬다는 건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사우 본인도 깜짝깜짝 놀란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엄청난 힘을 조절 못하면 주변이 온통 폐허로 변해 버릴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보이려는 초식 하나가 있다.
구천제혈신검 제사초 천뢰무망(天雷无妄)이었다.
검붉은 기류를 뿜어 대던 사우의 검 끝에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근처에서 어울리던 무리가 본능적으로 검을 멈추고 물러섰다.
주변에 얼쩡거리다가는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나도 아직 천뢰무망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거든. 재주껏 피해도 사지 중 하나가 잘릴 거야. 뭐 도망치는 게 내키지 않으면 맞아서 뒈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노옴!"
진천남은 온 힘을 끌어냈다.
피부를 베어 낼 것만 같은 엄청난 힘이 전해졌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감이 있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다가오는 사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인이 검을 들었을 적에 가장 첫 번째로 마음에 새겨야 하는 건 침착이었다.
결코 상대방의 어떤 입 발린 소리나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을 무심(無心)이 필요했다.
헌데 진천남 같은 고수가 지금 그걸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파멸을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