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불씨 (26/38)
  • 第三章 불씨

    화진천은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맡으니 살 것 같았다. 안휘성 분타를 책임지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혈천마성에게 당한 뒤 천산검문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폐관에 들어가 있었다. 비록 며칠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고 몸을 다듬어서 나온 것이다.

    그는 바로 아버지의 처소를 찾았다.

    "천입니다."

    "들어오너라."

    화무홍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아들의 방문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앉거라."

    두 부자는 마주 보고 앉았다. 시비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며칠 동안 잘 쉬다가 나온 것 같구나."

    "마음을 정리하고 왔습니다."

    "어떤 마음 말이냐."

    "맹주가 되기 위한 마음 말입니다."

    "흐음."

    예전 같았으면 아들의 이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좋지가 않구나."

    "예?"

    "총타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잠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동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특히나 율천세와의 끈끈한 우정을 이어 오던 문파의 수장들이 암살당했다."

    "허면?"

    "남북천맹을 움직이는 자들은 율무천을 맹주로 앉힐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천룡원은 우리 쪽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자들이다. 우리의 편을 들어줄 이유도 없고 말이다."

    아버지 화무홍의 입에서 이런 자신 없는 말이 자신을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화진천이다.

    "대막검문의 문주 서문륭이 총타에 머물고 있다. 현재 사마련이 감숙성을 공격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총타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입 밖으로 내뱉었던 서륜을 맹주로 앉히려는 수작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 천룡원이 대막검문을 밀어주고 있는 듯하다."

    화무홍이 자신 없어 하는 이유를 알아 버린 화진천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는 천룡원이다.

    남북천맹을 탄생하게 만든 바로 그들이다.

    무공과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은 사대검문이 넘볼 것이 못 된다. 맹주였던 율천세라 할지라도 그들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율무천의 남은 끈들을 끊어 놓은 것도 그들일 것이다.

    "이제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예?"

    "우리가 꾸던 꿈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율무천을 도와 남북천맹을 뒤엎던지."

    "……!"

    화진천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마시던 찻잔을 깨트릴 뻔했다. 그만큼 화무홍의 발언은 충격이었다. 남북천맹을 뒤집어엎다니.

    지금 남북천맹이라는 커다란 나무가 흔들리는 시기다. 창설된 이래 최고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산검문은 사대검문 중 하나였다. 남북천맹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다. 그런 천산 수장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이미 남북천맹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전!'

    무림을 다스린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 조짐을 보인 적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내전이 일어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미 남북천맹은 예전과는 다른 성질을 갖는 단체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결코 좋지 않은 결과였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그렇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혈천마성과 사마련은 남북천맹을 이기지 못한다. 화진천은 분명 그런 믿음이 있다. 허나 내전이 일어난다면…… 그걸로 남북천맹은 끝이 난다.

    깨진 유리병처럼 산산조각나고 사분오열되어 형체조차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걸 원하는 걸까.

    맹주라는 자리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자리일까. 어차피 조직이 와해되면 맹주라는 자리의 가치조차 없어지는 걸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전의 동참이라면 순응할 생각이었다.

    "남북천맹 율무천 공자께서 본문을 방문하셨습니다."

    "율무천?"

    "예."

    시비의 말에 두 부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모셔라."

    잠시 후 시비의 안내를 받으며 율무천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문주."

    "허허. 공자께서 이곳을 방문하실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재밌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온 이의 태도치고는 너무나 여유가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두 사내와 함께 왔습니다. 상당한 고수들입니다."

    그래 봤자 상대는 총 세 명밖에 되질 않는다.

    "천이는 그만 나가 봐라."

    "예."

    화진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율무천과 잠깐 눈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좀 물리시지요."

    "그러죠."

    화무홍은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자신의 호위무사들을 물렸다.

    기척들이 사라지자 율무천은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그래. 공자께서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궁금한데 말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전 맹주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저 복수를 원한다 했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가지고 의논을 드릴까 하는데 말입니다."

    "음?"

    "정식으로 천산검문의 문주 화무홍께 제안을 하는 바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남북천맹을 뒤집어엎는 일…… 새로운 남북천맹을 새우는 일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

    사군악은 냉철했다.

    전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눈길이었다.

    담천은 이런 종류의 눈빛을 가진 이들을 사람들이 살수라 부른다고 알고 있었다.

    결코 자신의 속내 따위는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

    사군악은 지금 그런 종류의 눈빛으로 먹잇감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율무천이 화무홍의 거처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진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담천은 어젯밤 자신에게 말했을 적과 다르게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사군악을 보면서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는 반면 불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사군악이 화진천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면 무력으로 그를 제압한 채 천산검문에서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음?"

    담천과 사군악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지나가던 화진천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혹시 나를 언제 본 적이라도 있던가?"

    사군악은 무심한 눈길을 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는 사군악을 화진천이 사납게 노려봤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만난 무인들끼리 나누는 신경전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애초에 싸울 마음 따위는 화진천에게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율무천의 대화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채 사라져 갔다.

    "너 무슨 생각인 거냐."

    "어제 말한 대로."

    담천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녀석은 정말로 화진천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인 것이다. 진심으로.

    모르면 몰랐겠지만 안 이상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 화진천을 죽인다 하더라도 사군악이 얻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것도 개죽음이다.

    "미리 경고하는데 말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털끝만큼이라도 그럴 의도가 보이면 너부터 죽인다."

    '이를 어쩐다.'

    너무나 강경하게 살심을 품은 사군악의 눈가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 * *

    모두가 잠들어 있을 그 시각, 사우는 홀로 강바람을 맞으며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 낚시에 관심을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커다란 방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데 낚시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하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길 수차례. 오로지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함만이 존재하던 그의 곁으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사우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 두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시간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워낙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입장인지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사우의 근처로 가까이 온 여인은 현 사망총주 소아경이었다.

    "떨거지들은 왜 달고 다니는지."

    소아경 혼자 온 것이 아니다.

    그녀의 직속 호법인 삼라를 대동한 채였다.

    당연히 사우의 피부로 진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쉽게 그에게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그의 가공할 능력을 맛봤기에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망총이 위험해졌을 것 같은데."

    "걱정해 주는 건가요?"

    "뭐, 받은 게 있으니까. 한마디 정도는 해 줘도 나쁘진 않겠지."

    소아경은 뒤에 서 있는 삼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수귀옥까지 중원에 나타난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에요."

    "사망총 또한 마찬가지고."

    "네. 오로지 검옥만이 은밀하게 중원을 지배해 왔죠."

    "헌데 지금은 아수귀옥까지 중원에 나타난 건 그만큼 그들이 이번 일에 위험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겠지."

    "맞아요. 지금의 혈천마성과 사마련이 합쳐지고 융합만 제대로 된다면 남북천맹 따위는 휩쓸 가공할 단체가 탄생하는 거죠. 문제는 두 세력의 중점에 흑천의 동생 당신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아수귀옥까지 세상으로 나오게 한 이유이겠죠."

    사우가 목을 움직이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영광인데."

    "구천제혈신검."

    "음?"

    "흑천살막의 주인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구천제혈신검을 익혔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세상으로 이끌어 내기에 부족하지 않은 미끼예요."

    사우는 피식 웃었다.

    겨우 구천제혈신검으로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우가 구천제혈신검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굳이 구천제혈신검을 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꼭 그런 가공할 검법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천하를 내려다보고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틀렸어."

    "네?"

    "그들이 구천제혈신검을 탐냈다면 난 벌써 죽었겠지. 그것도 예전에. 하지만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고 나란 놈이 위협적이라면 애초에 힘을 키우기 전에 척살했을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척살 대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우라는 사내가 활개를 치고 다니면 다닐수록 그의 생명줄 또한 조금씩 줄어 갈 것이다.

    또한 사망총도 위험해진다.

    사우라는 사내와 이렇게 접촉을 시도하고 아수귀옥이 움직였다는 정보를 흘려줬으니 이제부터는 적이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다.

    사망총으로는 자신들의 운명을 건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을 선택한 것이다. 사우는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희망을 품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자신의 편에 서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형의 복수를 하기 위해?

    헌데, 왜 지금까지 기다렸을까. 자신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도 분명 기회가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아수귀옥이 나타났다는 건…… 우리의 일이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걸 의미해요."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었어."

    "하지만 제대로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무리예요."

    "그래서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보지?"

    "……."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비책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수귀옥의 주인을 만난 적이 있어."

    "예?"

    "마치…… 세상의 모든 피들이 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었어."

    소아경은 자신감 넘치던 사우의 음성에서 미묘한 떨림을 느꼈다.

    "그자가 어린 시절 내 볼을 쓰다듬었지. 차가웠어. 시체처럼. 인간 같지 않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나."

    "아수귀옥은 검옥이나 본총과는 전혀 접촉이 없어서 전 잘 모르겠네요."

    "하나만 알려 주지. 야차의 가면을 쓴 사내…… 그리고 자신의 신장보다 커다란 창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도망쳐. 죽고 싶지 않으면. 그게 살 길이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소아경은 물끄러미 사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사람…….'

    엄청난 두려움으로 인해 몸을 떨고 있었다.

    흑천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무서워할 정도라면 상상이 가질 않는다. 특히나 사우는 자신감 가득 찬 모습만을 보여 줬기에 더더욱 믿기가 힘이 든다.

    "그리고 오늘부로 사망총은 땅 밑이건 바다 속이건 숨는 것이 좋을 거야. 이젠 십절무황이 나선다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으니까."

    "본총을 너무 무시하네요."

    "그럼 아수귀옥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직접 시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분명 사실이었다.

    아수귀옥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사망총이 버틸 수 있는 기일은 넉넉잡고 열흘이다. 그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아수귀옥과 사망총과의 전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흑천살막의 다섯 단체 중 검옥과 사망총은 전력이 비슷하나 그 외 세 군데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나 아수귀옥은 공격적인 면에 있어서 가히 지상 최고의 무인들만 모아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살인을 위해서 태어나고 조련된 존재들이다.

    그들이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중원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은 계획의 최대 변수였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우리는 우리대로 계획을 그대로 진행시켜야지. 일단은 검옥을 박살 낼 생각이고."

    "저희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은신처는 모조리 없애 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게. 그리고 사흘 뒤. 사망총 절반의 전력을 데리고 남북천맹 총타로 와."

    "가서는요."

    "도망치는 검옥의 무리, 그리고 천룡원 늙은이들이 멀리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야지."

    좀 전의 자신감이 없어 보이던 모습은 사라졌다.

    사우는 검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소아경은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혹여 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감도 동시에 들었다. 상대는 흑천살막이다.

    만약 사망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의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나질 않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유일한 혈육이다. 형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최선을 다할 참이었다.

    * * *

    "흔적이 끊겼습니다."

    풍공은 수하의 보고에 주변을 살폈다.

    "제법이네."

    처음에는 이동 속도에 놀랐다.

    두 번째로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동경로를 지우는 솜씨에 놀랐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반나절 안으로 찾아야 한다."

    "예."

    풍공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는 수하들을 믿었다. 그래서 묵묵히 해가 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찾았습니다."

    역시나 수하들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좋다. 움직인다."

    풍공은 수하들과 함께 화예대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밤늦도록 쉬지도 않고 신법을 발휘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흔적을 찾는 반나절 동안 추격 대상자들은 멀찌감치 이동했으리라. 서둘 필요는 없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막검문과 부딪혔을 것이다. 천천히 여유를 부리다 가도 된다. 하지만 너무 느긋하게는 이동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중원에 나오자마자 드높은 자존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마련주라는 년만큼은 내 손으로 기필코 죽인다.'

    풍공은 이를 갈았다.

    화가 나서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초식으로 자신이 개박살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만하다. 평소에 여성으로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하고 무시해 왔던가.

    무인으로서의 예의는 아예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중원에 처음으로 등장해 패배라는 단어를 가르쳐 준 이가 여인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풍공 휘하 소요전(逍遙殿) 삼대 무인들은 황급히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자들답게 신속하게 준비를 마쳤다.

    오로지 살인을 하기 위해 훈련받고 자라 온 이들이었다. 지금과 같이 전장을 누빌 때면 침묵은 첫 번째 중요한 기술로 꼽힌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작은 풀벌레 한 마리가 움직이는 소음도 들릴 적막함이었다.

    "전주."

    "알고 있다."

    풍공과 삼대의 부전주만 느낀 움직임이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 근처에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헌데 그 인원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최소 서른 명이다.

    그런 인원이 이 정도의 기척밖에 내질 않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어찌할까요."

    "각 대장들에게 전음을 보내. 적들이 조금 더 가까워지면 움직인다."

    "예."

    풍공은 속으로 일부터 삼십까지 세었다.

    일, 이, 삼…… 이십칠…… 이십구…… 삼십!

    숙면을 취하고 있던 소요전 삼대 무인들 전원이 벼락처럼 일어서 자신들의 무기를 뽑았다.

    땅을 박차고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병기들의 마찰음!

    하지만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모두 멈춰라!"

    풍공의 사자후에 일시에 모든 무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저들은 대막의 무인들이다. 검을 거둬라."

    소요전 무인들이 일시에 풍공의 뒤로 빠졌다.

    "그대가 서륜이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지원자가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그대들인가 봅니다. 우린 사마련의 무리인 줄 알고 은밀히 접근했던 것인데."

    이들이 대막의 무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은 영웅건에 그려진 흑호의 문양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서륜은 혈궁을 들고 요상한 가면을 쓴 사내의 뒤로 일사불란하게 정렬해 있는 무인들의 기운들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이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결코 궁금해해서도 질문 또한 해서도 안 된다는 당부를 거듭하셨다.

    도대체 이 정도의 강한 자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당부가 없었더라면 그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막의 힘만으로 생각했던 사마련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다른 이들의 손까지 빌려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중원으로 온 이후 놀라는 것이 많소. 사마련도 그렇지만 대막검문에도 이런 뛰어난 무인들이 많은 건 진즉에 몰랐소."

    '새외 세력?'

    서륜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원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것이 사내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버지가 새외 세력과 결탁을 한 모양이다.

    좋지 않은 일이다.

    중원의 일에 새외 세력까지 끌어들인다는 건 처음에는 달콤하겠지만 그 끝은 너무나 쓰디쓴 독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륜은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헌데 아직 사마련주가 이끄는 무리와 부딪히지 않았소?"

    "분명 올 때가 되었음에도 나타나지 앉아 직접 밑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흐음."

    서륜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마련의 무리는 방향을 바꾸었다거나 아니면 근처에 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속전속결로 승부를 지어 감숙성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헌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었다.

    "저들은 일부러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습이라고 하겠다는 의도로 보이시오?"

    "그렇지 않고서야 움직이지 않을 일은 없겠죠. 아니면 일찌감치 방향을 틀어 다른 이동을 했다는 것인데 저희가 내려온 길이 유일하게 감숙성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펼치겠다는 의도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마련의 다른 무리는 어찌 되었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문에서 철저하게 막고 있을 테니까. 사마련은 결코 감숙성을 지나지 못합니다."

    서륜의 얼굴에는 지나친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소요전 삼대와 서륜이 이끄는 대막검문의 무인 백 명의 수색은 밤새도록 이루어졌다. 그들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런데도 지청화가 이끄는 화예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륜은 눈살을 찌푸렸다.

    쫓는 입장에서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답답하고 호흡을 하는 것조차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분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마련주는 방향을 튼 것 같습니다."

    "길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지요. 지금까지 그들이 저희와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예상했던 경로로 이동을 했어야 하는데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애초에 전면전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서륜은 자신의 잘못을 냉철하게 판단해서 내렸다.

    후에 있을 더 큰 실수를 막기 위함이었다.

    "공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반드시 감숙성을 지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소? 분명 어딘가에 쥐새끼들마냥 숨어 있을 것이오. 그대의 생각대로 전면전은 피할 요량인 모양이오."

    자신의 의견에 동의한 풍공의 말에 서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감숙성 내부로 돌아가야만 했다. 중심이 되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 멀리 내려온 것이다. 다른 사마련의 무리로 인해 대막검문이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사마련주 지청화의 계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중심이 되는 자신의 무리를 남쪽으로 유인하여 감숙성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려는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풍공에게 말하니 그 또한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빨리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돌아가야만 한다.

    그날 밤, 대막검문의 수장인 서문륭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하필 지금과 같은 상황에."

    서륜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지금은 전란 중에 있는 상황이다.

    대막검문의 모든 무인들에게 총비상이 걸린 시국이란 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맹주로 앉히고자 하는 계획을 너무나 억지로 진행하고 있었다.

    서찰의 내용은 하루라도 빨리 총타로 입성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황당했다.

    자신이 아니면 현재 감숙성과 대막검문은 누가 지휘한단 말인가. 물밀듯이 사마련의 전력이 몰려 들어오는 와중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서신은 강압적인 내용이 강했다. 서륜의 고민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번 사마련과의 싸움에서 가문에 대한 애정이 피어났고 책임감이라는 것이 어깨를 짓눌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가문을 등한시하고 가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자신이다. 헌데 이제는 어떻게든 가문의 자존심과 위용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야 그런 마음이 생겨났는데 총타로 불려가야 하는 상황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도왕 서패우는 서륜의 어두운 얼굴이 무슨 이유에서 그러한지를 알고 있었다. 서문륭은 일찍이 그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 줬었다.

    그리고 반드시 서륜을 총타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약속까지 했었다. 이제 자신이 그를 설득해 총타로 가야만 했다. 허나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서륜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떨리는 서패우였다. 늘 한량처럼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살던 서륜이었다. 헌데 지금은 아니다. 대막검문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갖추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애초에 갖추고 있던 것을 펼쳐 보이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옳았다. 그토록 바라던 서륜의 모습이었다. 이제야 그리고 꿈꾸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총타로 간다면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서륜이 고민하듯 서패우 또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 *

    율무천과 사군악, 담천은 천산검문을 방문하여 볼일을 마친 이후 총타를 향해 길을 나섰다.

    "과연 화무홍이 우리의 편에 설까."

    불안한 기색을 억지로 지우려고 해 봤지만 사군악과 담천의 눈에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막상 화진천에게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하는 뜻을 전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사실 긍정적인 기대를 하고 천산검문을 방문했던 율무천이었다. 헌데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을 때 화무홍의 표정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로서는 네 편에 서서 움직이는 것이 미래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을 것이 뻔해. 사우도 그걸 예상하고 너를 보낸 것이겠지. 그 녀석 망나니 같아도 머리 굴리는 거 하나는 탁월한 놈이니까."

    세 사람은 이동 속도를 높였다.

    율무천이 자리를 비운 사이 총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담천은 사우가 그곳에 있기에 별다른 불안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율무천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지고 있을 것이다.

    날이 저물어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노숙을 선택했다. 율무천은 깜깜한 앞날의 걱정으로 인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 봤자 두 시진가량밖에 눈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수면 부족으로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정신은 또렷해져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자 두는 게 좋아."

    "담천."

    "왜."

    "당신은 왜 사우라는 사내를 따르는 거야."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데."

    "그냥…… 궁금했어. 예전부터."

    "흐음."

    담천은 팔베개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나는 고아였다."

    "……?"

    "부모가 누구인지 내 조상이 누구인지, 내 이름 담천이 진짜 이름인지도 몰라. 고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은 거지로 동냥질을 하며 컸다. 그런 와중에 내 사부님을 만났지."

    갑자기 담천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자 율무천은 귀를 활짝 열고 집중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철궁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신 그 모습은 당시 나에겐 거대한 산처럼 보였지. 왜 나 같은 천애고아를 제자로 삼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부님은 나를 데리고 마인곡으로 향하셨다."

    "마인곡이라는 곳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럼 설명할 필요가 없겠네. 그곳에는 사부님 외에 다른 숙부님들도 많으셨지. 사정상 밖으로 나가서 생활하시지 못하셨는데 한 분 한 분의 무위는 무공에 무지했던 내가 보더라도 경천동지할 만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들이 중원에 나타셨다면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정도였지."

    담천의 말이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가 보기에 담천도 결코 약한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부라는 사람과 비슷한 실력의 사람들이라면 담천의 말이 크게 부풀려진 거짓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나이가 스물이 넘어갈 즈음 사부님은 심부름 하나를 시키셨다. 정말이지 오랜만의 중원 출타였던 난 설레는 마음이었다. 사부님은 한 달의 시간을 주셨는데 난 잠깐 미쳐 있었던 모양이야. 한 달이 하루처럼 짧게 느껴졌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어."

    담천은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나 씁쓸한 웃음이었다.

    율무천은 그 모습에서 진한 슬픔을 느꼈다. 진심으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달이 아닌 반년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 돈도 넉넉하게 있었고 무공도 어디 가서 기죽지 않을 정도였으니 천하가 내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야."

    "……."

    "사부님이 걱정하실 거라고는 생각을 하면서도 돌아갈 마음은 없었어. 그동안 나에게 마인곡은 답답한 곳이었거든. 그리고 한 일 년 정도 지나서 사부님에게서 받은 돈도 다 떨어져서 마인곡으로 되돌아갔지."

    담천은 말을 멈추고 한참을 침묵했다.

    율무천은 그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마인곡으로 되돌아갔던 그날…… 난 지옥을 보았다. 지옥이었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숙부들이 피를 흘린 채 죽어 가고 있는 모습들은 내 두 눈에 담기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지. 난 급히 사부님을 찾았다. 천운인지 사부님은 미미하게나마 호흡을 하고 계셨지."

    어느새 담천은 상체를 일으킨 자세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율무천도 몸을 일으켰다. 오로지 사군악만이 잠을 청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담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누워 있었다.

    "사부님은 내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으시곤 인자하신 표정으로 웃으셨다. 그러곤 울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죽여 달라고. 당신이 지금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속히 목숨을 끊어 달라고. 그때 사부님의 몸은 독으로 인해 팔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거든. 제자의 손에 죽는 것도 괜찮은 행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야."

    "그래서…… 어찌 되었어?"

    "결국. 이승과의 연결 고리를 내 손으로 끊었지."

    그 말을 끝으로 담천은 입을 다물었다. 율무천도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왜 사우를 따르는지 물었지. 내가 사부님과 숙부들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니까. 그 녀석이라면 꿈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놈이니까. 그래서 사우를 따르고 있는 거야."

    질문의 대답을 듣기 위해 조금 많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율무천은 만족할 만했다. 담천이 원하는 복수의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도 그도 가슴 깊이 간직한 복수를 원한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 * *

    서문륭의 아들 서륜이 남북천맹 총타로 오지 않았다.

    약속된 시일보다 늦고 있는 것이다.

    서문륭, 아니 진천남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는 진심으로 진노하고 있었다. 서륜이 오지 않았기에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겼다.

    그가 와야지 천룡원과 함께 맹주 자리에 앉힐 일들이 진행될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속속들이 자신들의 편에 설 문파의 수장들이 모여들 텐데 큰일이다.

    일단 진천남은 천룡원의 힘을 빌려 대천회의를 주최했다. 열리는 시기가 적힌 서찰이 각 지역에 퍼졌을 것이다.

    기일은 이제 일주일밖에 남질 않았다.

    "멍청하고 미련한 놈!"

    진천남이 내지른 주먹으로 인해 벽이 갈라졌다.

    감숙성에서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족히 열흘은 걸릴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서두르지 않을 걸 감안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진천남은 아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올 생각이었다면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헌데 깜깜무소식이다. 아도왕 서패우에게도 이런 일을 대비해 신신당부를 했지만 서륜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진천남은 천룡원 원로들을 찾았다.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천룡전에 도착할 때 즈음 수하의 전음이 들려왔다.

    "서륜 공자께서 방금 총타에 당도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진천남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조금 전까지 진노하던 얼굴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들을 믿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진천남은 방향을 틀어 처소로 향했다.

    서륜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렀다.

    오랜만에 본 아들의 모습에서 진천남은 뭔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외적인 것으로는 크게 변한 것이 없지만 분명 눈빛만큼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과거에는 총명한 눈빛을 억지로 스스로가 퇴색시키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곧 아들이 이제는 남자로서 자신의 본능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다시금 희망을 갖게 해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아비이자 가문의 수장인 자신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이제야 도착했다는 건 엄히 다스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리도 늦은 것이야!"

    "늦다니요. 아직 대천회의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지 않았습니까."

    "노옴. 이번 대천회의는 너를 위한 중대한 일임을 모르는 것이냐. 네가 만나 봐야 할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야."

    "죄송합니다."

    서륜은 더 이상의 반항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 사마련은 어떻더냐."

    "반드시 이번 기회에 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오. 그 정도인 것이야?"

    "조직이라는 구성을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흐음. 하긴 사마련은 예전부터 사천성 내부에서 자신들끼리 상부상조하던 자들이 연합을 이룬 단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예전부터 사마련은 남북천맹에게 있어서 독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옛정으로 인해 처단하지 못한 전대 맹주 율천세의 잘못으로 지금까지 성장한 것이다.

    진즉에 처리를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는 끝이었다. 남북천맹이 자리를 잡고 제대로 반격에 나설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말이다.

    "헌데 그자들은 누구입니까. 야차의 가면을 쓴 사내…… 상당한 무위를 지녔더군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설마…… 새외의 세력과 손을 잡으신 겁니까."

    "어허. 그건 네가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넌 그저 내 말에 따라 맹주가 되면 그만인 것이다."

    "아버지."

    서륜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답을 듣고자 했다. 허나 정작 대답 대신 어색한 침묵만이 공기를 짓눌렀다.

    결국 서륜이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전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전에 하나만 묻겠다."

    "예."

    "넌…… 진심으로 천하를 내려다보는 용좌에 앉을 의지가 있는 것이냐."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진천남은 아들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결코 흔들림이 없는 눈빛이다.

    지금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뜻이 확고한 아이는 훗날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남북천맹의 맹주라는 자리가 흑천살막이라는 커다란 집단의 심부름꾼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안다면 어찌 될까.

    그만한 충격이 없을 것이다.

    그 혼란을 이 아이가 잘 견뎌 낼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비록 검옥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명령을 받는 입장, 윗선에서 내리는 명령은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완수해야만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훗날 있을 강한 압력들에 대비하여 아들의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기반을 튼튼히 만들어 주는 일, 그것이면 되었다.

    * * *

    "수고했어."

    율무천이 남북천맹 총타로 돌아온 날 사우가 어깨를 두들기며 한 첫 말이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건방지다 그를 힐난했겠지만 주변은 담천과 사군악, 사우와 율무천뿐이었다.

    "묻지 않네."

    "뭘."

    "화무홍이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

    "뻔하지. 겉으로는 어쨌을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머리 싸매고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 편에 설 거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우의 말투에서는 확신이 있었다.

    내심 율무천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왠지 사우가 말을 하면 그것이 꼭 이루어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딱히 그의 행동이나 말투에 큰 신뢰가 묻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천룡원이 대천회의를 주최했다던데."

    "맞아. 이제 정말로 며칠 남지 않은 셈이지. 그리고 너에게는 적이 될 서륜이 오늘 도착했어."

    "음……."

    아직까지도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감과 긴장은 지속되어 그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사마련은."

    "가장 문제인 것이 사마련이야. 예상보다 감숙성을 너무나 늦게 통과하고 있어. 어쩌면 대천회의가 열리는 그날까지도 이곳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말이지?"

    율무천이 알기로는 사마련은 거의 자신들의 모든 힘을 대동한 채 총타로 오고 있었다. 대막검문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어야 한다.

    패배했든 승리했든 말이다.

    헌데 이렇다 할 무엇인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두 세력이 아직 제대로 부딪히지 않았다는 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마련의 몸체가 사천성을 떠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접전을 벌이지 않았다니! 자신이 사마련을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말인가?

    아니다.

    아마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대막검문 말고 사마련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놈들이 있어. 좀 강한 녀석들이거든."

    "네가 말하는 그들이야?"

    "맞아. 그들 중 하나지."

    아버지에게 듣고 사우에게서도 들었다.

    그들…… 천하를 위시하는 무서운 단체에 대해서 말이다. 허나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세상에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특히나 천룡원 원로들이 겨우 그들에게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맹주의 자리가 부재중인 지금 남북천맹을 쥐고 흔드는 이들은 바로 천룡원 원로들이기 때문이다.

    남북천맹을 움켜쥐고 있다는 건 중원을 지배하는 핵심 인물들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강하기는 얼마나 강한가.

    과거 혈천마성으로부터 중원을 구해 낸 영웅들이기도 하다. 명성이나 무공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자들을 겨우 하수인으로 부리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건 그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리라.

    율무천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강한가."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물론 지금 사마련을 상대하고 있는 놈들은 일부에 불과해. 아수귀옥 전체가 나선다면 상당히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아수귀옥?"

    "지옥의 야차들이라고 부르지. 놈들 전체가 나서기 전에 기반을 갖추고 있어야 돼. 특히나 아수귀옥을 이끌고 있는 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수야. 나도 그놈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을 정도니."

    "……!"

    율무천과 담천, 잠자코 있던 사군악도 굉장히 놀란 얼굴로 사우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누군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 듣지 못할 것 같았던 말이기도 했다.

    사우라는 사내는 나이에 비해 정말이지 초월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무림사에 전무후무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우의 입에서 이렇게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듣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사우가 두려워하는 그들의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어진다.

    "일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총타를 움직이는 검옥을 부수는 일이야."

    "그날은 바로 대천회의가 열리는 날이고. 그렇지?"

    사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남지 않았다.

    * * *

    늦은 시각, 하늘 높이 치솟아올라 있는 건물의 지붕에는 사군악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길쭉한 술병이 외로움을 달래 주기 위해 들려 있었다.

    "죽일 줄 알았는데."

    등 뒤에서 사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쥐새끼처럼 나타나지 말고 기척 좀 하고 다녀라."

    "나름 존재를 알렸는데 네놈의 신경이 무뎌서 못 느낀 것이다."

    "아마 물에 빠지면 네놈은 주둥이만 둥둥 뜰 것이 분명해."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사우는 사군악의 옆에 앉더니 이내 다리를 쭉 펴고 누워 버렸다.

    "왜 죽이지 않았지."

    "……."

    사군악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사우는 진심으로 물었다.

    사실 사군악이 진짜로 화진천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의외로 그는 조용히 살심을 가린 채 천산검문을 빠져나왔다.

    그가 화진천을 죽이려 했다면 아마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사군악의 복수심은 이미 죽은 대찰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음을 사우는 모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검을 뽑지 않은 건 사우로서는 정말이지 의외인 결과였다.

    "들어갔었다."

    "음?"

    "화진천의 처소로 진입을 했었어."

    "……."

    "그런데 그놈 옆에 그녀가 있더라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여자가 되었지만 정말 변한 것이 없더라."

    사군악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차마…… 죽이지 못하겠어서 나왔지. 그런데 그게 잘한 것 같았어. 다음 날 화진천이 제 아들과 그녀와 함께 산책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거든."

    "의외로 순애보네."

    "비꼬아도 상관없다. 난 단지 그녀에게 남편이자 자식의 아비인 화진천의 피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니까."

    사우의 입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습냐."

    "조금."

    "……!"

    "네가 지난날 받은 고통 따위는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그 모습이 아름다웠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우습지."

    사군악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온다.

    "입조심하는 게 좋아."

    사우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보기엔 네놈은 그저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쳐 나왔을 뿐이야. 사랑하는 여자? 뭐? 그녀에게 화진천의 피를 보이는 것이 싫었다고?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번에 화진천이 총타에 오면 그때…… 죽이면 되겠네. 그녀가 없는 장소에서 말이야."

    쌔애액!

    사군악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재빨리 사군악의 품으로 파고든 사우는 그의 목줄기를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난 너희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멍석을 깔아 줬을 뿐이야. 대찰영은 제대로 된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어. 그에 비해 넌 운이 좋은 편이지."

    "커헉!"

    사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사군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러니…… 허튼 감상 따위에 젖어 있지 말라고. 네가 감당해 낸 지난날들을 보상받아야 할 거 아니야. 응?"

    사우는 도를 넘어섰다고 느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 감정의 대상은 정확하게 말하면 사군악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다.

    복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 자신도 사군악처럼 흔들릴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않는가. 스스로한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도 인간이다. 강한 사람들의 등장 앞에 긴장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행동에는 그런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우의 힘에 내팽개쳐진 사군악은 지붕 위를 나뒹굴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시금 사우에게로 달려들었다. 사군악으로서는 사우의 심리 상태를 모르고 있기에 황당하고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좋다. 네놈과 오늘 목숨 걸고 한판 붙어야겠구나."

    사군악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무 주목을 받지 않을까?"

    지금 사군악의 눈에 그런 상황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천산검문은 무섭고 나는 무섭지 않다는 건가?"

    이미 사군악은 몸을 낮게 숙인 채 사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쯧."

    사우는 그 와중에도 혀를 차며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사군악과의 싸움을 피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사우는 허리를 낮추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사군악이 아무리 엄청난 성장을 해 냈다고는 하지만 아직 자신이 검을 뽑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사군악은 초식을 펼치며 강맹하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웬만한 무인들이라면 그 잔혹한 냉기의 압박감에 다리가 후들거렸겠지만 상대는 사우다.

    빙살참륙검식 제일초와 이초가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허나 사우는 너무나 가볍게 피해 낸다.

    쿠쿠쿠쿵.

    건물의 지붕이 무너질 듯 요동쳤다.

    순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림자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 명은 율무천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누군지 모르는 낯선 사내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글쎄다. 이 친구가 몸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아서."

    율무천의 시선이 사군악에게로 향했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한기는 감당하기가 힘이 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 사내가 이토록 강한 이였던가?

    "저 사람은 누구냐."

    사우가 율무천과 함께 지붕으로 올라온 이를 보며 물었다.

    "대막검문의 장자 서륜이라고 합니다."

    '오호라.'

    사우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서륜이 총타로 온 건 알고 있었지만 율무천을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율무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륜이 자신을 소개했으니 이제 두 사람이 자신들을 소개해야 할 차례였던 것이다. 헌데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네놈과의 싸움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그러니 그 냉기 좀 거둬라."

    사우의 전음에도 사군악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기운을 모조리 거뒀다.

    "난 율무천의 호법을 맡고 있는 사우라고 한다."

    "흐음."

    율무천은 서륜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사우를 보면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이구, 두야.'

    대체 어디서 배워 먹었길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리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한다는 말인가.

    서륜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시군요. 아까 율 공자께 존대를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친분이 두터우신가 보군요."

    "맞습니다. 오랜 벗이지요."

    혹여 사우가 또 이상한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율무천이 재빨리 설명했다.

    "그렇군요. 율 공자와 대화를 나눌 겸 찾아왔는데 엄청난 소음으로 급히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대화라…… 조만간 철천지원수가 될 두 위인들께서 무슨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우의 태도를 처음 접하는 서륜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그저 웃으며 넘어가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예의를 모르는 친구인지라."

    "괜찮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율무천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등신 같은 놈."

    "뭐?"

    "율무천 네놈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저놈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겠구나. 원수 놈의 아들과 대화라니."

    "……!"

    "노옴! 보자보자 하니까 행실이 기고만장하구나.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따위 말을 하는 것이야! 누가 누구의 원수라는 것이냐."

    서륜이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렸다.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네 아버지 서문륭이 율천세를 죽였다고, 새끼야."

    "……!"

    서륜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 율무천을 보더니 다시금 사우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내뱉은 말에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가 진실을 밝혀 낼 수 있을까. 제 아비의 정체도 모르는 주제에. 키킥. 겨우 아비의 꼭두각시 같은 놈이 말이야."

    "사우!"

    율무천의 일갈이 터졌다.

    "방금 네가 한 말…… 무슨 뜻이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네 아버지 율천세를 죽인 인간이 저놈의 아버지라고. 대막의 주인 서문륭…… 검옥의 수장 진천남."

    율무천도 서륜도 사군악도, 사우가 내뱉은 말들이 모조리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검옥의 수장 진천남이 대막검문의 문주 서문륭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우의 말은 신뢰가 가질 않는다.

    "똑바로 말해. 정말…… 아버지를 죽인 자가 대막의 주인 서문륭이냐."

    사우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인다.

    믿기지 않지만 율무천은 사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율무천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만 가 보시죠."

    "공자. 대체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 저 사내의 말을 믿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진실이 궁금하시다면 부친께 직접 가셔서 들으시지요."

    서륜은 율무천의 처소에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비록 맹주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입장이었지만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싶은 마음에 율무천을 찾아온 서륜이었다.

    율무천 또한 서륜과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살갑게 대해 줬다.

    허나 그건 사우의 말을 듣기 전까지의 행동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대막검문과 손톱만큼이라도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화를 참느라 손톱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는 중이었다.

    "어이,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저놈 지금 완전히 뚜껑이 열렸거든."

    사우가 이죽거린다.

    서륜은 사우라는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런 안하무인격인 행동에다가 그 누구도 모르고 있는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는 말인가.

    허나 궁금증보다는 지독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처음 본…… 아니다.

    서륜은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디서 낯이 많이 익다 싶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본 적이 있었다.

    "네놈……!"

    "흐음. 이제 알아보시는 건가?"

    그랬다.

    사우라는 사내, 과거에 아버지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놈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자정을 넘긴 시각, 밖에는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르기 전에는 자신을 잘 찾아오지 않은 서륜이 방문한 건 의외였다. 게다가 오늘 오전에 이야기를 나눈 터라 의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비에 홀딱 젖은 데다 표정도 좋지 않아 보인다.

    "사우라는 사내를 알고 계십니까?"

    서륜은 낮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내심 당혹스러웠지만 진천남은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정말로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륜은 그의 아들이었다.

    누구보다 그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 물고 늘어져야 함을 모르지 않았다.

    "율무천의 옆에 있는 사내…… 그리고 과거 아버지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내. 사우라는 자 알고 계시지요?"

    진천남은 모든 걸 다 알고 온 듯한 서륜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진천남은 특유의 결단력으로 마음을 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

    "헌데 그걸 왜 묻는 것이야."

    "그가 저에게 말하더군요. 맹주를 죽인 사람이 바로 아버지시라고."

    "그래서 넌 이 아비를 의심하는 것이냐."

    "그자가 제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왜 맹주를 죽였을 것 같으냐."

    "설마…… 그자의 말이 진실인 것입니까?"

    "맞다. 내가 율천세를 죽였다."

    "하! 하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서륜은 광소를 터트렸다.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다.

    사우라는 자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시는 아버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림의 기둥인 율천세를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이란다.

    아버지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흘러나오자 충격은 배가 되어 자신을 덮쳐 온다.

    "왜…… 왜 그러신 건가요."

    "그게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길이었으니까."

    "저를…… 맹주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나요?"

    "아니. 아니다. 너에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율천세를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단다."

    "그러시겠지요."

    서륜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맹주로 앉히기 위해서 율천세를 죽였을 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을 거라는 것이 서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륜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치졸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잠시 잊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건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더 이상 왈가왈부해 봤자 득 될 것은 없어."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는 진천남과는 달리 그런 그의 모습이 서륜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뭔가 지금까지 자신이 봐 오던 아버지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었다.

    물론 아버지와 자신이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이라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때 우러러보며 따르던 단체의 수장을 배신한 것이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맹주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총타에 온 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맹주가 죽은 배후에 자신의 아버지가 있다는 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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