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章 격돌 (23/38)
  • 第八章 격돌

    율천세가 세상을 떠난 뒤로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를 이을 다음 맹주가 바로 뽑혔어야만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혈천마성의 공격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동안은 부맹주 단위광과 율천세의 혈육인 율무천이 공동으로 남북천맹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현재는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만 했다. 워낙 많은 문파가 연합하여 있기에 결속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조직개편을 하느냐에 따라서 전술과 전투력이 달라진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일풍문, 뇌정문, 밀종문의 문주가 모조리 살수의 공격을 받아 죽어 버린 것이다. 율천세의 죽음과 더불어 남북천맹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문파의 문주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 칼날은 당연히 혈천마성으로 기울었다.

    맹주를 죽인 것도 모자라 암살로 다른 문주들마저 살인한 그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혈천마성은 안휘성 분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남북천맹에서는 그들을 감시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배가 넘는 병력을 주둔시켜 놓았다.

    헌데 그 많은 눈을 속이고 안휘성 분타로 사람 하나가 침입해 들어갔다.

    완벽하게 어둠과 동화된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담장을 넘었다.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건물 곳곳에 배치된 혈천마성에 무인들조차도 침입자가 생겼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철권이가라고 했던가. 이거야 원. 혼돈영을 극성으로 펼친 것도 아닌데 눈치를 못 채니.'

    그림자, 사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사우는 가장 큰 건물로 잠입했다.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가득하다.

    기감을 넓혀 익숙한 기운을 감지했다.

    아마도 주문룡과 마존일 것이다.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른다. 낯선 기운이었다.

    분위기는 화살을 날리기 전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

    주문룡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주공!"

    "조금 더 기다려라. 그분께서 오실 것이다."

    "……."

    천화유가의 수장 유단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물론 쇄암왕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믿지 못하는 건 바로 이번 싸움을 이끌어 가는 정체불명의 사내다. 쇄암왕이 그분이라 부르는 사내, 사우라는 자 말이다.

    작전을 지휘해야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유단은 그것 자체가 굉장한 불만이었다.

    "주공. 며칠만 더 지나면 남북천맹에서 알아주는 놈들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전열을 정비해 나타날 것입니다."

    "분명 내 뜻은 전했다.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한다면 그땐 네 목을 벨 것이다."

    "……!"

    "그만 화를 식히지요."

    마존의 손이 주문룡의 어깨에 올라갔다.

    진정하라는 의미였는데 주문룡의 몸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강하게 부딪혔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사투가 벌어질 것이다.

    "꼴들 좋구나. 내가 없으니 이건 뭐, 개판이네."

    "사우?"

    "……!"

    갑작스러운 사우의 등장에 세 사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귀신을 봤나."

    사우는 만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의자에 앉았다.

    "살아 돌아왔구나."

    "하하! 그럼 내가 죽어서 시체로 인사를 할 줄 알았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목 아프다. 그만들 앉아."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습니다."

    주문룡은 담담한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사우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또렷이 보였다.

    그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너."

    사우는 유단을 바라봤다.

    "네가 모시는 사람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야.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거냐."

    분명 사우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유단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인이 모시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새파랗게 어리지만 절대로 쉽게 볼 사람이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사우라는 사내의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대가리 빳빳하게 들고 개긴 거지."

    "당신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유단."

    주문룡이 낮은 목소리로 유단을 질책했다. 유단은 주문룡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용서하시지요. 아직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럴 뿐입니다."

    "그냥 당신이라 불러라. 아니면 사우라고 불러도 괜찮고."

    "안 됩니다. 유단, 앞으로 이분의 호칭은 대공자다."

    "……!"

    유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다.

    "대공자?"

    "대공자는 혈천마성을 이끌어 갈 다음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대공자라…… 좋네."

    만족스러운 듯 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마성 아래에 모인 자들은 모두가 대공자라 호칭해야 한다. 알았느냐."

    "예, 주공."

    "자, 오늘은 그만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쯤에서 대화를 끊으려던 마존의 의견은 사우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혈천사가의 주인들을 불러. 그리고 녀석들도 좀 부르고."

    "이 밤에?"

    "그래."

    * * *

    "움직임은."

    "사마련 인물로 추정되는 자들이 다녀간 이후로는 없습니다."

    안휘성에 화진천이 나타났다. 그는 혈도대와 은자량을 데리고 안휘성을 찾았다.

    남북천맹 군사인 사마태릉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이었다. 현재 안휘성에 주둔하고 있는 무인들을 지휘하는 위치로 온 것이다.

    화진천은 엽관과 함께 안휘성 분타를 내려다봤다.

    '철통같이 지켜야 한다.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천산검문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현재 남북천맹에서는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다. 율무천과 단위광을 중심으로 회의가 지속되고 있으리라.

    아마 수일 내로 혈천마성의 뿌리를 뽑기 위해 총공격 명령이 떨어질 것이었다. 그때 뭔가 해내야만 한다.

    크든 작든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앞날에 거름이 되어 줄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화진천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도 불타올라 있었다. 기름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확 불꽃이 일 것만 같다.

    "모든 신경을 저곳에 쏟아라.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도 오늘부터 모조리 반으로 줄인다. 조만간 맹에서 명령이 떨어질 것이니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어라."

    화진천은 명령을 내리고는 사라졌다.

    * * *

    "도대체가 의견이 모여지질 않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동안 남북천맹은 단합이 제대로 되질 못했다. 그럴 만한 사건도 없었지."

    율무천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질 줄 몰랐다. 이제 남북천맹과 혈천마성의 싸움은 막을 길이 없어져 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비롯해 세 개 문파의 수장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남북천맹은 결단코 혈천마성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까요."

    "글쎄다. 나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헌데 사우 그자는 무사할까요."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다."

    "그가…… 원주보다 강한가요."

    "당연하다."

    "대체 후우…… 얼마나 강한 고수이기에."

    "아마 천룡원에 속해 있는 늙은이들 전부가 덤벼들어야 목숨을 빼앗을 것 같구나."

    율무천은 마른침을 삼켰다.

    "믿을 수 없는 말씀이시네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구나."

    "후우. 그런가요. 혈천마성이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사우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것 같구나."

    "그게 이유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혈천마성은 안휘성 분타를 기점으로 공격을 감행했어야만 했어요. 그게 옳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둘 다 피를 많이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그래야지요. 적은 내부에 있고 또한 더 거대한 자들이니까요."

    * * *

    "후회 없으시겠습니까."

    "……."

    하제량의 질문에 지청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런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한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아가기 너무 늦었다.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련의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알고…… 있어요."

    "련주께서 확신이 없다면 하나마나인 싸움입니다."

    "우린 그저…… 뭉친 이유를 위해서 검을 들 뿐입니다. 천기전주."

    "예."

    "작전을 개시하세요. 빠르고 은밀하게. 선봉은 살락원입니다. 목표는 대막검문을 비롯해 남북천맹 내 속해 있는 감숙성 두 개의 문파예요."

    "알겠습니다. 그리 명령을 내리지요."

    "그 뒤를 이어 멸천대와 혈천대가 나갑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태청문과 창천문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하도록 하죠."

    하제량은 몸을 일으켜 나가려다 멈췄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빨리 가세요. 흔들리기 전에."

    "후훗. 그러죠."

    "후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지청화의 한숨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 *

    사마련이 움직였다는 소식이 남북천맹 총타로 전해졌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 들은 사마태릉은 소식을 화무홍에게 보냈다. 그러곤 율무천과 단위광에게 보고했다.

    "지금쯤이면 오룡문(烏龍門)과 격전을 치르고 있을 것입니다."

    "천지각주는 며칠이 걸릴 거라 생각하시오."

    "이틀이면 오룡문이 지워질 것입니다."

    "빠르군. 허면 열흘이면 대막검문과 격돌할 것으로 생각하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승패는."

    "반반입니다."

    "지금은 전력을 다른 쪽으로 빼돌릴 방법이 없소."

    "그렇습니다. 대막검문은 그리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지요."

    율무천이 웃었다. 사마태릉도 웃는다.

    두 사람의 뜻은 같았다.

    은연중에 남북천맹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서문륭을 제지하기 위한 최고의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 전해진 소식은 남북천맹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혈천마성이 한검문(寒劍門)을 공격하다니!"

    안휘성 합비에 있는 분타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그들이 어찌 순식간에 호북성에 존재하는 한검문을 친단 말인가.

    "공자, 그들은 이걸 노린 듯싶습니다."

    "애초에 숨겨 둔 병력이 있었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휘성 분타는 본맹에 속한 문파가 새까맣게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이목을 숨기는……!"

    사마태릉은 섬뜩한 나머지 말끝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땅굴을 이용했다면…… 그러면 앞뒤가 맞습니다."

    "……!"

    "본맹에 이목을 끌어 놓고 땅굴을 파 이동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 이게 그들의 진짜 작전이었나 봅니다."

    "구룡천부를 보낼 것입니다. 또한 검룡전과 검살전을 전체를 내보내십시오."

    "명을 받듭니다."

    "호북성에서 치고 올라오는 혈천마성의 허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휘성에 있는 병력도 되돌리시오. 각자 자신들의 문파로 돌아가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마태릉이 나가자 율무천이 이를 갈았다.

    "사우 이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진 것인가."

    * * *

    서륜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른 산봉우리를 올려다봤다.

    "두 시진이면 볼 수 있겠구나."

    "조금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서패우의 말에 서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암혼전이 중간에 기습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날 믿지 못하시는 건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아니라. 후훗. 그럼 살락원이 그만큼 강하다는 건가."

    살락원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오로지 살인을 하기 위해 탄생한 조직이라 들었다. 패천문의 비밀조직 살락원.

    음살문에 살수들까지 대거 합류한 살락원은 그야말로 엄청난 살수단체라고 볼 수 있었다.

    "인원은."

    "백삼십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백삼십이라."

    꽤나 많은 인원이었다.

    저들이 일반 무인들이라면 개의치 않아도 될 숫자였다. 하지만 살수들이다.

    일격필살의 살수들은 자신들을 숨기는 걸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전면전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암혼전을 그들의 기세를 꺾는 첫 번째로 내보낸 것이리라. 암혼전은 대막검문의 살수들이다.

    두 세력의 싸움은 한마디로 기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암혼전이 살락원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기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다.

    "패우."

    "네."

    "우리 내기할까."

    "갑자기 무슨……."

    지금은 전쟁 중이다. 상대가 선전포고를 했고 이제 곧 싸움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었다. 헌데 내기라니.

    "암혼전은 살락원을 어찌하지 못해. 난 거기에 걸도록 하지."

    "암혼전은 강합니다."

    "알아. 하지만 말이야. 왠지 내 감각은 살락원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서륜은 희미하게 웃었다.

    서패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군이 아닌 적군이 이기는 데 내기를 거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내가 지면 아도왕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서륜과는 달리 서패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도왕이 지면 내 소원을 하나 들어줘야 돼."

    "그러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해 볼까."

    손바닥을 비비며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서륜은 등을 돌렸다.

    "멈춘다."

    한낮의 태양이 대지를 달군다. 너무나 뜨거워 바위마저 녹일 더위였다.

    하지만 그런 더위 따위는 살락원 무인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허나 철유라의 손짓에 모두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그녀는 예전보다 살이 쪽 빠져 있었다. 아마도 심한 부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정면을 응시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세상천지가 모두 잠들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산개한다."

    질문은 없었다. 갑자기 떨어진 명령이었지만 살락원 살수들은 빠르게 모습들을 감췄다. 그들은 수십 번도 더 연습한 대로 자신들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러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들개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철유라는 선두에서 여전히 꼼작도 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그러곤 공중에서 두 번 흔들었다.

    대열의 뒤쪽에 있던 사십여 명의 살수들이 자취를 감췄다.

    "돌진한다. 전방의 적은 무조건 베어라. 이상이다."

    철유라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관유는 진심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살락원을 이끄는 수장이 지닌 능력을 굉장히 놀랐다.

    설마 암혼전이 설치해 둔 함정들을 모조리 간파할 줄은 몰랐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살락원이 지나갈 길목에 설치해 놓은 함정들은 암혼전이 가장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헌데 근처도 아닌 십여 장 거리에서 움직임이 없더니 산개한 채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수장의 지휘 아래 함정들을 모조리 통과해 내었다.

    이미 속력을 내기 전에 함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이리라. 그뿐만 아니다. 후방 인원을 따로 선회시켜 잠복하고 있던 자신들의 수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살락원의 본진은 유유히 자신들의 길을 갔다. 반 각 동안 짧은 접전이 벌어졌다. 허나 워낙 은밀하고 빠르게 치고 빠지는 살락원 무인들에게 거의 농락당하는 수준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격으로 인해 암혼전 무인들은 흔들렸다. 죽은 이들도 상당수다.

    처음부터 너무 저들을 얕잡아 봤다. 그것이 실수였다. 상대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엄청난 출혈로 이어졌다.

    "열 명이 죽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라. 그리고 서둘러 저들을 쫓아간다."

    본진이 모두 빠져나가자 기습을 감행했던 살락원 무인들 또한 공격을 멈추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문주를 뵐 면목이 없구나."

    짙은 탄식이 암혼전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저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건 여기까지다. 이다음부터는 대막검문의 주 영역이었다.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하하하."

    서륜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 암혼전은 살락원을 막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도련님. 목소리가 크십니다."

    서패우는 누가 들을까 주변을 둘러보며 서륜을 나무랐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다행히 큰 피해는 입지 않았으니까 괜찮은 거잖아."

    "생각보다 더 강한 듯합니다. 암혼전주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뚫릴 줄이야."

    "지금 위치는."

    "이제 산을 내려와 이동 중이라 합니다. 헌데 속도가 너무 더딥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마련의 세력을 기다리는 것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아마 저들 세력에도 뭔가 작전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본래 오룡문이 저들 계획과는 다르게 선전을 펼치자 살락원 단독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뭐, 저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요."

    "흐음."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대막검문을 상대하러 오면서 말이다.

    그 허영심과 자만이 얼마만큼 터무니없었다는 것인지를 보여 줘야만 한다.

    서륜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준비시켜. 우리가 먼저 친다."

    "저희가 말입니까?"

    "그래. 어디 이번 기회에 사냥을 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껴 보라고 하지 뭐."

    서륜의 얼굴에는 굉장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마치 바람을 쐬러 놀러 가는 사람의 태도였다.

    서륜은 아도왕 서패우와 함께 무인들을 데리고 장원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뒤에는 일백 명의 무인들이 정렬해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강한 훈련을 받은 뛰어난 무인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두 사람은 서륜과 아도왕이었다.

    결코 패배라는 단어는 떠올리지 않았다.

    * * *

    혈천마성의 이동경로는 특이했다.

    안휘성 분타를 공격하기 전에도 그러했다. 누가 봐도 혈천마성의 세는 남북천맹보다 낮게 판단되었다. 그렇다면 작은 곳부터 하나하나씩 공격해 나아가는 게 옳았다.

    헌데 그들은 총타 다음으로 가장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안휘성 분타를 점령했다. 무모하지만 그들은 성공했다.

    그다음이 중요했다. 여세를 몰아 총타까지 치고 갔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을 한 자리에 머물며 포위당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땅속으로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이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남북천맹의 천지각이 눈에 불을 켜고 흔적을 찾아 다녔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것이라고는 호북성으로 향했다는 것뿐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로부터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총 네 건의 보고가 남북천맹 총타로 흘러들었다.

    모두 누군가의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호북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파 네 곳의 문주들이 암살을 당했단다.

    그들은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가 아니었다.

    호북성 무한은 용호검문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네 곳의 문파는 용호검문의 비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 곳의 문주들이 암살을 당했다는 건 용호검문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이었다.

    유천묵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해져 있었다. 혈천마성으로 추측되는 암살에 그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도대체가 이 빌어먹을 놈들은 어디 숨어 있기에 꼬리조차 잡아내지 못하는 것인가!

    유천묵은 용호검문의 무인들을 사방으로 풀었다. 현재 호북성에는 검룡전 무인들이 와 있었다. 그들도 혈천마성을 뒤쫓고 있었다.

    아마도 검룡전도 소식을 듣고 그들을 추적하는 데 앞장서고 있을 것이다.

    그들보다 먼저 흉수를 찾아내야 한다.

    그게 용호검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호북성 무한에서 가장 크기가 커다란 객잔에 용호검문의 무인들이 땀을 식히기 위해 들렀다.

    그들이 용호검문 무인이라는 것을 안 객잔 주인은 공손히 인사를 하며 직접 자리를 배치해 줬다.

    전경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무한에서는 용호검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들에게 밉보여서는 될 것도 안 된다.

    무인들은 총 열 명이었다.

    초저녁이었지만 그들은 술을 가장 먼저 주문하고 재촉했다.

    한 잔씩 돌려받은 뒤에 입안에 망설임 없이 털어 넣는다.

    "카아! 시원하구나. 빌어먹을 혈천마성 때문에 열불이 났는데 말이야."

    "하하. 헌데……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거 술맛 떨어지는 소리하고 앉았네."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막내야."

    무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자 목소리는 더 커졌다.

    주변의 있는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놓고 가서 뭐라 할 인물은 없었다. 용호검문의 무인들을 건드릴 배짱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헌데 그들의 자리로 누군가가 다가갔다.

    커다란 방립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는데 수염을 길게 기른 것만은 보였다.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림인인 듯했다.

    "음? 뭐야?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술 취한 모습이 역력한 무인이 방립인을 노려봤다. 자신들에게 온 것이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나 보다.

    "용호검문의 무인들이냐."

    방립인은 다 알면서 물었다. 용호검문의 문양인 흑호라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이 문양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타지에서 온 이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엥?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구나. 어디 감히 용호검문 무인들에게 반발을 지껄이느냐."

    무인 하나가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데…… 그 무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크어억!"

    무인은 피를 토해 내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엄청난 고통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남은 아홉의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서걱.

    검을 뽑아 상대를 향해 겨눴는데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베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두 명의 무인의 팔 한쪽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말 그대로 쾌속이었다.

    "으…… 으으으."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쳤다.

    "실망이군. 용호검문이 이렇게까지 썩어 있을 줄이야."

    방립인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한 명씩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한에서 용호검문의 무인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벨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

    쐐애액!

    깡!

    방립인은 창가에서 날아온 비도를 쳐 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움직임을 보여 줬다.

    창가로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 용호검문의 검을 겨누느냐."

    그 또한 용호검문 출신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그는 깔끔한 용모에 옷은 화려했다.

    "오랜만이구나. 건아."

    "……!"

    방립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숙부님?"

    방립을 벗은 얼굴은 분명 냉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눈길에서 젊은 사내는 반가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검룡전 부전주이자 용호검문 문주인 유천묵의 동생 유천룡(劉天龍)이 방립인의 정체였다.

    "모두 돌아가 내가 갈 때까지 자숙하고 있으라."

    유천묵의 장자 유건은 작전 중에 술판을 벌인 자들을 꾸짖으며 물렸다.

    "송구합니다, 숙부."

    "어찌 네가 그러느냐."

    "현재 혈천마성을 쫓는 작전 책임자가 저입니다. 저들 또한 제가 통솔하는 자들이죠. 제 불찰입니다."

    유건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수하의 잘못은 그들을 이끄는 자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천룡은 조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했다.

    "검룡전은 따로 움직이는 것입니까."

    "이인이 일조가 되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혼자 다니는 자들도 있지."

    "그렇군요."

    "형님은 어떠하시냐."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세요. 용호검문의 절반이 지금 추적을 감행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많지 않으냐."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화를 식히시는 게 조금 오래 걸릴 듯싶어요."

    유천룡의 입가에 마른 미소가 걸렸다.

    "성정은 여전하시구나."

    "허면 이제 숙부께서는 어디로 가실 건가요."

    "나 또한 모르겠다. 전주께서 내리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 외각에서부터 조금씩 좁혀 갈 요량인 듯하다."

    "아직 저들이 호북성을 빠져나가지 못했겠지요."

    "그럴 것이다. 내 생각에는 혈천마성 전부가 호북성에 있을 리는 없고 일부만이 암살을 목적으로 잠입했을 것이다."

    이 넓은 도시에서 그들을 찾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만 했다. 사방으로 퍼져 있는 천지각 요원들조차도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전 반드시 잡을 생각입니다. 절대 검룡전에게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유건의 당돌한 태도에 유천룡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마존."

    "왜."

    "검룡전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줘."

    사우는 침상 위에서 잠들 준비를 했다.

    마존은 검을 손질하다가 사우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궁금해서."

    마존은 천지각에 있으면서 남북천맹이라는 연합체에 대해서 모조리 파악을 해 뒀다.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게 그의 목적이었으니까.

    "이각 사부 사전 중 사전에 속하는 검룡전은 말이다."

    "응."

    "총인원 오백 명으로 사룡검신(死龍劍神) 주원호(朱袁鎬)를 중심으로 그 아래 삼전주가 있지. 그들 세 명은 부전주라고 부르는데 세 명을 한꺼번에 부를 적에는 삼전주라 부른다."

    "사룡검신은 강하냐."

    "어느 정도는. 사부사전의 수장들 중 가장 강할 거야."

    "호오."

    사우는 갑자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

    "삼전주들도 강한 걸로 유명한데 그중 하나가 용호검문의 문주의 친동생이지. 헌데 이번에 검룡전과 용호검문의 연계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겠지. 동생이라 하더라도 자존심을 챙기는 게 우선이거든. 무인들은 말이야."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검룡전… 살려 둘 값어치가 있는 놈들인 거냐."

    마존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걸 말이라고. 검룡전은 남북천맹에서도 최고 중에 최고인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야."

    "허면 살려 둬야겠네."

    누가 들었으면 두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을 했을 것이다.

    검룡전주 사룡검신 주원호는 너무나 완벽한 인물로 유명했다. 원래 집안 자체가 대대로 엄청난 재력가 집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스승 밑에서 학문과 무공을 수련했다.

    학문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공 쪽의 사부는 굉장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십이무룡 중 사신에 속하는 사내 귀령사신(鬼靈邪神) 장무진(張茂秦)이 주원호의 무공 사부였다.

    장무진이라는 사내는 현재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한참 활동하던 시절에는 천룡원 원로들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사내라는 것이다.

    그런 장무진의 제자 주원호는 승승장구하며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넘쳐 나는 재력을 지닌 집안과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사부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이 있다. 그렇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주원호가 이끄는 검룡전은 천하제일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그런 곳을 죽이네 마네 농담이 아닌 진담처럼 하는 두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는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려서 어쩌려고."

    "글쎄. 일단은 남북천맹에서 쓸 만한 놈들은 다 남겨 둬야지. 모두 내 편으로 만들어야 유리한 싸움이 될 텐데 말이야."

    "검룡전은 우리를 추격하는 데 무리를 지어서 다니지는 않을 거야. 분명… 소수의 인원이 한 조가 되어서 다닐 거야. 호북성에는 검룡전과 검살전이 잔뜩 깔려 있어. 게다가 그들 사이로 구룡천부가 움직이고 있지."

    "따돌리는 데는 성공한 셈이군."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야. 저들이 총타로 돌아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겠지."

    "율무천에게 전해. 내 계획을 도와 달라고."

    "후우. 솔직히 그가 우리를 도와줄지는 미지수야."

    "해 줄 거야. 살가륵은 나를 잘 알거든. 그리고 흑천살막에 대해서도. 그러니 율무천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이제 어디지."

    "총타를 우리가 접수하면 그놈들 전부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허니 하루라도 빨리 부숴 버려야 돼. 음…… 천산검문이 좋겠네."

    사우는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설레어 하는 마음으로 눈빛에 반짝거린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할게."

    마존은 손질하던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 * *

    권풍이 불었다. 바람에 맞은 무인들 세 명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그들이 막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녹색 무복을 입은 사내들 주변을 검룡전 무인들 사십이 둘러싼 형국이었다. 누가 봐도 녹색 옷을 입은 자들은 사냥감이었다.

    사냥꾼이 검룡전 무인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사냥감들은 긴장한 눈빛들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은 검이나 도, 날카로운 병기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믿는 것은 맨주먹과 튼실한 다리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명밖에 되질 않는 녹의인들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검룡전 무인들을 쏘아봤다.

    "저들이냐."

    "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천룡이 물었다.

    "저들이…… 혈천사가의 철권이가라."

    안휘성 분타를 지키던 자들에게서 건물을 사방에서 지키고 있던 자들의 복장과 같다는 걸 들었다.

    '스스로 나타났다?'

    사실 혈천마성의 인물을 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의 신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유일하게나마 알려진 자들이 저 녹의인들이다.

    철권이가!

    헌데 저들도 녹색 무복을 입지 않았더라면 몰라볼 자들이다. 그런데 호북성 무한을 저 옷차림으로 대놓고 돌아다닌다.

    "흐음."

    유천룡은 심각한 눈길로 저들이 검룡전 무인들을 상대하는 걸 지켜봤다.

    "한두 놈만 남겨 두고 모조리 죽인다."

    수하가 명을 받고 사라졌다.

    유천룡은 절대로 검룡전 무인들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권각지각을 사용하는 무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 있다.

    바로 보법이다.

    살수처럼 움직이는 흑마궁은 은살보(隱殺步)라는 보법을 사용한다. 그들의 보법은 살수들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절공이었다.

    철권이가에서는 은살보를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한 은영보(隱影步)라는 보법을 쓴다.

    바로 현 가주인 이사민의 조부가 변형시킨 것으로 효력은 절대적이었다.

    바로 지금 철권이가의 무인들이 아무런 병기도 없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은영보에서 시작했다.

    검룡전의 합격술은 빈틈이 없고 상대를 옥죄는 것으로 유명한데 철권이가 무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은영보라는 보법은 귀신같이 검룡전의 검을 피해 냈다. 검을 든 자들이 맨몸의 적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장소가 산이었으니 망정이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 유천룡이 움직이려는 찰나 서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용호검문!"

    누군가 정보를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 장소에 용호검문은 나타날 수가 없었다.

    유천룡은 미련 없이 신형을 날렸다.

    "검룡전은 그만 물러나시지요."

    용호검문 무인들 중 가장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자가 나타났다.

    용호검문 무인 오십 명과 검룡전 무인 사십의 싸움은 용호상박이리라. 승패를 떠나 두 세력에게 남는 것이 없다.

    같은 남북천맹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현재로서는 예민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유일하게 흔적을 드러낸 혈천마성의 무리를 용호검문에서 확보를 해야만 했다. 만약 용호검문이 이번에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찌 무한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이어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유천묵은 필사적이었다.

    유쳔룡의 뒤를 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검룡전이 남북천맹 직속이라고 하지만, 용호검문이 더 중요하다.

    모든 것들이 혈천마성의 음모라도 상관이 없었다. 현재 용호검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가 하진(河振)인가."

    유쳔룡을 보필하던 사내가 물었다.

    하진은 용호검문 무인들을 총괄하는 자였다.

    하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룡전 무인들도 상대를 죽일 태도를 취했다.

    서로가 검을 겨루는 모습에 일장 분위기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남북천맹은 자기네 식구들끼리도 검을 겨누나 보군."

    철권이가의 무인 하나가 비아냥거렸다.

    "그 입 닫아라. 한 번만 더 나불거리면 그땐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 하직을 시켜 줄 테니."

    하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일부러 나타난 것 같은데 그걸 후회하게 해 줄 심산이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검룡전을 물린 다음에야 말이다.

    "멈춰라."

    유쳔룡이 하진의 앞에 나타났다.

    "하진이 유 공자를 뵙습니다."

    유천룡이 나타나자 하진은 조금 전의 사나운 태도를 바로 접었다.

    "저들을 원하느냐."

    "그렇습니다."

    "그게 형님의 뜻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다… 용호검문은 남북천맹 안에 있다. 그리고 본맹 직속인 검룡전이 이들을 원한다. 그럼에도 본전을 제치고 이들을 너희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거냐."

    "저 또한 마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소리 같구나. 지금부터 나는 나를 있게 해 준 가문의 무인들에게 검을 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것은 곧 두 세력이 피를 보겠다는 뜻이리라.

    하진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침을 삼켰다.

    누구보다 유천룡을 잘 아는 하진이다.

    그의 무서움 또한 모르지 않았다.

    도저히 자신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명색이 검룡전주 아래 있는 사내였다.

    허나 가주이자 문주인 유천묵의 명령이 떨어졌다. 반드시 혈천마성 놈들을 잡아 오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반드시 저들을 확보해야만 한다.

    "난 혈천사가의 네 가문 중 하나인 천화유단의 주인 유단이라 하오."

    유천룡에게 낯선 이의 전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두리번거린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적을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파는 멍청한 짓을 벌일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 들으시오. 우린 그대의 주인 검룡전주에게 전할 뜻이 있소. 그렇기에 철권이가의 이들을 수면 위로 올려 보낸 것이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유천룡은 대답을 미뤘다.

    "우리를 의심하는 마음은 잘 아오. 하지만 우리는 검룡전의 힘이 필요하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잡는 일. 그럼 보여 드리겠소."

    전음으로 전해지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철권이가의 무인들이 용호검문의 무인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진은 갑작스럽게 저들이 공격해 들어오자 쾌재를 불렀다.

    "저들을 포위하라."

    하진의 명령에 용호검문 무인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허나 철권이가의 몸놀림이 더 빨랐다. 이윽고 두 세력이 한데 어울려 공방을 펼친다.

    "그대가 진정 남북천맹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저들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으오."

    유천룡은 묵묵히 철권이가와 용호검문의 싸움을 지켜봤다. 살공을 펼치는 용호검문 무인들과는 달리 녹의인들은 살초가 아닌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유천룡은 마음에 갈등이 시작됐다.

    분명 자신은 혈천마성의 무리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가문과도 등을 져야만 한다.

    자신이 검룡전 삼전주가 되려고 했을 적에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곤 했었다.

    남북천맹과 가문 중 택한다고 하면 어떤 곳을 택할 것인지 말이다. 검룡전주도 자신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때도 지금도 둘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는 굉장히 어려웠다.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유천룡은 결국 용기를 내었다.

    전음을 보낸 사람과 혈천마성이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 건 자신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 용호검문을 제압한다."

    결국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검룡전이 움직였다.

    뜻밖의 상황이 연출 되어 버린 것이다.

    < 『흑천』 제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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