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또 다른 적
혈천마성이 남북천맹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사마련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남북천맹은 혈천마성에 움직임을 파악하느라 사천성으로는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사마련으로서는 천우신조다.
검을 뽑기에는 아직 완벽하게 조직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맹주가 죽은 상황을 이용해 공격을 감행하려던 찰나였다.
헌데 혈천마성이라는 엄청난 곳이 먼저 선수를 쳤다. 대형 사고를 쳐 버렸다.
두 세력 간의 싸움은 사마련으로서 너무나 좋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재정비를 할 시간을 주었고 어느 한쪽이든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게 뻔했다. 그 틈을 이용해 남북천맹을 치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힘 빠진 혈천마성도 집어 삼키면 되는 일이었다.
헌데 사마련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련주."
"응?"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여홍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아니."
지청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오랜 시간 지켜봐 온 여홍은 그녀의 얼굴에서 불안감을 감지했다.
한시도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반나절 동안 멍한 눈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꼭 여홍이 아니라 호법 중 한 명이 봤더라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답답하시면 바람이라도 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까."
지청화는 인위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밖으로 나섰다.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요. 아무래도 깊은 뿌리가 더 강하지 않을까요."
남북천맹이 이길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말했다.
"뿌리…… 뿌리라."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흘리며 지청화는 걸음을 옮겼다.
사마련의 무인들이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꽤 많아졌지?"
"오랜 시간 준비하신 것이니 당연한 결과죠."
"그래. 그런데 홍."
"예."
"요즘 들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
"사마련이라는 울타리 안에 모인 무인의 수만 이만이 넘어. 그런 자들을 통솔해 나갈 자신이 없어졌어."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홍은 오늘따라 그녀의 어깨가 굉장히 작게만 느껴졌다.
화월문의 문주가 된 이후 지청화가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겨졌었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그러나 화월문주와 사마련주의 자리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굳이 지휘해야 할 인원이 는 것만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리라.
화월문을 시작으로 남북천맹을 부수겠다는 일념하에 움직였다면 지금은 계획이 아닌 실행에 옮길 시점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누구나가 한다.
허나 실행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지청화는 바로 그 용기를 내야 할 시점에 온 것이다.
그 부담감은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청화는 천기전이 있는 건물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가 천기전을 찾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상 하제량이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청화는 련주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신분패를 보여 줬다. 그녀의 얼굴을 몰라서가 아니다.
어떤 곳보다 보안 유지가 가장 철저한 곳이 천기전이다.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특급으로 분류되는 것들도 있었다. 천기전에 속해 있는 자들의 신분은 사촌, 육촌, 팔촌까지 조사가 들어간다.
그중에서 털끝만큼이나 남북천맹에 관련된 자들이 의심되면 여지없이 내친다. 아무리 사마련주라 할지라도 신분패와 몇 가지 조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복잡한 절차가 있기에 그동안 그녀가 오기보다는 하제량이 보고하러 그녀에게 온 것이다.
"하하! 련주께서 직접 오실 날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을 하제량은 반갑게 맞이했다.
"바쁘신가요."
"남북천맹과 혈천마성 때문에 밤을 새는 날이 허다합니다."
눈이 퀭하고 얼굴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것이다. 앞으로의 행동 방향이 두 세력 간의 전쟁으로 판가름이 난다.
당연히 정확하고 빠른 정보들을 선별하고 파악해야 하는 하제량으로서는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
"헌데 련주께서도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때가 때이니만큼 잠이 오질 않네요."
"그럴 테지요. 본련은 이제 누구도 무시 못 할 힘을 갖췄으니까요. 련주의 판단 아래 수천수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지요."
"알고 있어요."
그렇게 꼬집어서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런 잔소리나 듣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랭해지자 하제량은 뜨끔하여 더 이상의 주제 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좀 듣고 싶어서 왔어요."
"안휘성 분타를 무너트리고 그 기세로 혈천마성이 강하게 몰아칠 줄 알았지만 의외로 답보 상태에 있습니다."
"천기전주께서는 그 점을 어찌 판단하시고 계세요."
"혈천마성이 안휘성 분타를 쳤을 적 인원수가 육백 정도 되었다 들었습니다."
"겨우 육백으로 안휘성 분타를 접수하다니."
육백이면 적지 않은 인원이다.
하지만 그 네 배의 무인들이 있는 곳이 안휘성 분타이다.
"아무래도 안에서부터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 침입해 들어가 있다가 안쪽 바깥쪽에서 일시에 사정없이 몰아쳐서 얻은 듯싶습니다. 그리고 안휘성 분타가 인원은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편에 강한 고수들이 대거 있었다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빠른 시일 내에 그곳을 얻지는 못했겠지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현재 저희 전력 중 삼분지 일이 공격을 해야 그곳을 취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만약 우리였다면 며칠이나 걸렸을까요."
"이틀은 걸렸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작전을 짠 가정하에 말이죠."
"생각보다 전력이 막강하네요."
"그 육백 명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걸 가정했을 적에 혈천마성의 힘은 생각 이상입니다."
"한때 천하를 발아래 두었던 곳이니 그러겠지요."
혈천마성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난 일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다. 결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마련보다 철저히 준비하고 나섰을 게 뻔하다.
저들의 힘은 아직 빙산의 일각밖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저들의 힘을 모두 보기 전까지는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때입니다."
하제량의 말이 맞다.
지극히 자신들의 존재를 가리고 있어야 한다. 주목을 받는 것보다는 그것이 옳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청화는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하제량은 그녀가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혹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것입니까."
"후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지 굉장히 갈등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들이…… 혈천마성을 치길 원해요."
* * *
"그분께서 잡혀가셨답니다."
"뭐, 뭐야?"
사군악이 누워 있던 자세에서 튕겨져 일어섰다.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실내에는 사군악, 담천, 초호진, 무진이 있었다. 모두가 안휘성 분타를 빼앗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주문룡이 그분이라고 부르는 자는 단 한 명일 테니까 말이다.
"그 사람이 쉽게 잡혀가지는 않았을 텐데."
담천이 말했다.
그러다 얼굴이 굳어졌다.
"사우가…… 어쩌다 잡혔지."
"살가륵을 구하기 위해 융중산으로 가셨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과 부딪혔나 봅니다."
"그들?"
"그냥 거기까지만 아시면 좋겠네요."
"빌어먹을. 뭔 놈의 비밀들이 그리 많은지."
초호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래서 그들이라는 놈들과 부딪혔는데 뭐."
성격 급한 사군악이 대답을 재촉했다.
"같이 했던 마존과 살가륵, 대찰영을 모두 데리고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스스로 인질이 되셨다 합니다."
"스스로가 인질이? 그놈들도 사우를 인질로 잡길 원했단 말이군."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 별일이 다 있네. 그 미친개 같은 놈이 인질이 되다니. 대체 그놈들이 얼마나 강하길래."
"그분과 저희 혈천마성의 최종 적입니다."
"남북천맹보다 강하오?"
주문룡의 눈길이 무진에게로 향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
"대찰영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고 마존이 보낸 전서구에 적혀 있었습니다."
"……!"
안휘성 분타에 마존이 나타났다.
물론 얼굴은 본래의 것이 아니다.
다시금 남북천맹 총타로 가야 했기 때문에 얼굴을 다른 이의 것으로 바꾸었다.
마존은 네 사람의 마중을 받았다.
사군악, 담천, 초호진, 무진.
이들은 오랜 시간 마인곡에서 자신과 있던 자들이다.
각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의리나 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대찰영의 죽음을 슬퍼했을 이들이다.
소식을 미리 전하고 슬퍼할 시간을 줬다.
나흘 동안 이들은 죽은 대찰영의 죽음을 애도했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비록 복수를 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건 대신 해 주면 된다. 물론 본인이 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겠지만 열배 백배 제대로 해 주면 되는 것이다.
마존은 그리 생각했다.
"융중산에 묻었습니까."
끄덕.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목적을 다 이루면 살아남은 자들끼리 찾아가 보도록 하죠."
초호진의 참담한 기분이 목소리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주문룡 그자가 기다리고 있어."
"가지."
마존은 네 사람을 따라서 주문룡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건물로 들어서는 건 마존 혼자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사마총이 포위하고 있는 곳에서 목이 붙어 있는 채로 돌아온 건 기적이었다.
주문룡도 흑천살막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몸으로 느껴 보지는 못했지만 혈천마성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쇄암왕으로 임명받을 때 전해지는 책에는 흑천살막에 대해서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래서 사우가 인질로 잡혔다는 말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망총이 얼마만큼 강한 곳인지를 알기에.
"현재로서는 사우가 언제 그들에게서 빠져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렇겠지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현재 율무천과 살가륵이 남북천맹으로 갔어요. 대막검문에서 맹주가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긴 했는데."
"일단 저희가 움직였으니 그들도 쉽게 맹주를 선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전대 맹주의 혈육인 율무천이 적합하지요."
"걱정되는 것은 저들이 무작정 자신들의 계획을 끌고 갈까 하는 거지요."
"흐음. 그분의 목적은 최대한 남북천맹의 힘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그렇게 될 경우 전력을 다하는 전쟁이 벌어질 것인데."
"그걸 막아야 합니다."
"안휘성에서 며칠 더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다음 공격할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 * *
남북천맹 총타에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실종되었던 천룡원주와 전 맹주의 혈육 율무천이 함께 등장하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을 비롯 사대검문의 문주들, 스물아홉 개의 문파 중 상위 열다섯 문파의 문주들이 참여했다.
근래에 들어 이처럼 많은 이들이 모여 회의를 나눈 적은 없었다.
안휘성 분타를 적에게 빼앗긴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책임자인 부맹주가 부재중이었다 하더라도 그 짧은 시일 내에 빼앗긴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적들은 대부분의 무인들을 생포한 상태로 분타 밖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면 천하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걸 막기 위해 이렇게 긴급회의가 열렸다.
비록 스물아홉 명의 문주들이 모두 모이지 않았지만 사실 지금 모인 자들만으로도 가능했다.
회의 주제는 두 가지였다.
앞으로 혈천마성과의 전쟁을 어찌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와 다음 맹주를 누구로 선출하느냐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최소 십 년 앞을 결정하는, 어쩌면 맹의 미래를 모조리 결정지을 수 있는 무거운 회의였다.
맹주가 없기에 부맹주인 단위광이 회의를 진행했다. 허나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부맹주이다.
그의 존재감은 그 많은 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설전이 오갔다. 무려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혈천마성에 대해서 대화들이 오갔다.
진지하게 나눌 때도 있었고 의견이 맞지 않는 자들끼리 고성이 터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단위광의 눈썹은 역팔자를 그렸다. 너무나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자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결국 회의는 다음 날로 연기가 되었다.
오늘 하루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회의장을 나온 이후 율무천의 집무실에는 살가륵과 단위광이 함께 자리했다.
"일이 좀 있었다."
"천룡원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다?"
"모두가 율 공자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단위광은 율무천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돌아가신 맹주의 천명이 있었음에도 원로들은 대놓고 반대를 하셨습니다."
"아마도 대막의 편에 서겠지."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모험은 위험합니다."
"나 또한 반대다. 천이 이 아이가 반드시 맹주 직에 앉아야만 하네."
"그래도 천운이 따라 줘서 그런지 혈천마성이 공격을 감행해 맹주 자리에 앉을 확률이 커졌습니다. 내 수하들이 죽어 나자빠지게 한 놈들인데…… 참 우스운 상황이 따로 없습니다."
단위광은 지금 자신에게 처해진 현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맹주는 죽고 부맹주라는 자리에 있는 자신은 힘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맹주가 선출되어야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은 많은데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들은 자기들 의견 내세우기 바쁘다. 그래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남북천맹을 좌지우지하는 원로들은 율무천이 아닌 다른 이를 맹주로 앉히고자 한다.
사실 그들이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밖으로 나온다면 맹주라는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직책이 되어 버린다.
누구도 그들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겨우 믿을 사람이라고는 지금 함께 있는 대도천신 살가륵이라는 사내다.
하지만 혼자였다.
천룡원주라고는 하지만 남은 원로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일단 내일 부맹주께서 제 이름을 언급하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리신 천명도 공표하시구요."
"그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주께서는 천룡원의 동태를 파악해 주셔야 할 듯싶어요."
이미 천룡원 원로들과 자신의 신분을 아는 율무천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살가륵뿐이었다.
수룡무검 한비는 무심한 눈길로 연못을 내려다봤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 위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한쪽 머리카락을 넘겼다. 있어야 할 귀가 없었다.
인간의 귀는 두 개인데 그에게는 한 쪽밖에 없었다.
"이걸 언젠가는 갚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지."
"……."
혼잣말인가 싶었는데 그가 대화를 건넨 존재가 뒤에서 나타났다.
"자네가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내 대도가 목을 베었을 테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살가륵은 쥐고 있던 주먹을 연못 위에서 쫙 폈다.
물고기 밥이 아래로 떨어지자 수면 아래에서 새까맣게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모습이랑 비슷하지."
"당연한 이치인 것을."
한비는 연못에서 시선을 거뒀다.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놀랐네. 영영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의 음성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한비와 살가륵은 같은 무리에 속해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비의 한쪽 귀를 앗아 간 이가 살가륵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곳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었기에 동료애라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현재 살가륵은 조직을 배신한 자다.
처단해야 할 존재였다.
흑천살막에서 죽이려 마음먹고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살가륵은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척살대상인 사우라는 인물로 인해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허나 언젠가는 다시금 명줄을 끊어 놓아야 한다. 그게 지금 당장일 수도 있었다.
한비는 차가운 눈동자로 살가륵을 바라봤다.
한때는 가장 절친했던 벗.
젊은 시절에는 서로의 장점을 닮아 가려 했던 선의의 경쟁자.
그런 벗과 원수지간이 되어 온 지 수십 년이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 이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는 않았다.
"멀리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나."
"그럴 생각이었지. 그런데 미끼가 되었지 뭔가."
살가륵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
실제로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살고자 도망치고 싶었다. 율천세를 죽이고 자신마저 해치러 온 흑천광무의 손길을 피해 살고 싶었다.
하지만 율무천이 사우와 동행한 채 자신을 구하러 왔을 때 느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아이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이들이 자신을 살려 두는 이유는 사우라는 존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이들은 결코 인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조직이다.
살가륵이 알고 있는 흑천살막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
이용가치가 있는 자와 없는 자.
그 외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우의 진두지휘 아래 혈천마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고 자신들에게 검을 들이대는 그들을 처단할 것이다.
헌데 앞장서서 싸워 줄 대표가 없었다.
혈천마성에 의해 맹주가 죽었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복수를 위해 아들이 맹주의 자리에 앉아 검을 휘두른다.
이들은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살려 두는 것이리라.
살가륵은 자신이 천룡원에 다시금 되돌아오고도 그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 순간 깨달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살가륵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은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묻지도 않았는데 한비는 살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오지 않아도 될 어쩌면 사지가 될 곳을 찾은 살가륵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절대 누구의 손에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비는 이미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상태였다.
"네놈을 죽이는 일은 내가 할 것이니까."
"그날을 기대하지."
사우는 느긋했다.
인질로 잡혀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인질로 잡혀 왔다고 생각지 않았다. 스스로 제 발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이 거지같은 놈들을 모조리 부수고 나갈 수도 있었다.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여유 있게 자신에게 허락된 것을 즐길 수가 있었다.
삼시세끼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져 눈앞에 나타났다. 사우는 산해진미를 마음껏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편식을 한다고,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남긴다고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비들은 그저 상을 차리고 치워 갔다.
음식이 짜네, 싱겁네, 투덜거려도 시비들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철저히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사우는 무심히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하루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꺼억 하고 트림을 내뱉었다.
시비들이 물러가자 사우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침상에 누웠다.
"지루하네."
사우는 입맛을 다셨다.
좀이 쑤신다.
하지만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기다리는 이가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단순히 몸을 묶어 두기 위해 여기에다 앉혔을 리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죽여 버리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도통 모르고 있으니 그것이 조금 답답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나가는 휴식 기간이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 * *
"숨을 죽이는 건 길지 않아야 합니다."
삼호법 사가훈의 말이었다.
호법들과 함께 한 저녁 식사 자리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사마련의 계획에 대해서 의논하는 자리가 되었다.
지청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무섭게 칼을 갈던 사마련의 행보에 혈천마성 때문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물론 그들로 인해 재정비를 할 시간을 얻었지만 마음을 다잡던 무인들에게는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내는 시간들은 유쾌하지가 않다. 맘 편하게 한 자리에 모여 식사나 할 수가 없었다.
지청화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맞아요. 오래 숨죽일 생각은 없어요."
"최대한 빨리 휘몰아쳐야 합니다."
"련주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실 것인데, 보채지 좀 말게."
모처럼 아무 걱정 없이 마련한 자리인데 사가훈이 초를 치니 철대악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차라리 잘되었어요. 어차피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김에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괜찮습니다, 련주. 이렇게 맘 편히 식사를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북천휘도 지청화의 뜻에 동의했다.
"사 호법께서는 앞으로 본련이 어찌했으면 좋을까 좋은 계획이 있으신가요?"
"제가 숨죽이지 말고 휘물아치자고 한 곳은 남북천맹이 아닙니다."
"……!"
"혈천마성이지요."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북천휘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청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속으로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련주의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만."
"사 호법.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게."
철대악은 사가훈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누구에게 들으셨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가요."
지청화는 누가 그런 말을 사가훈에게 전했는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하제량이거나 그들이 사가훈에게 손을 뻗쳤을 것이 뻔했으니까 말이다.
사가훈은 세 명의 호법 중 자신에게 가장 불만이 많은 인물이었으니 대상으로 정했을 것이다.
"련주, 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저희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천휘가 조금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자니 련주가 호법인 자신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는 듯했다. 그 자체만으로 기분이 불쾌해져 버린 것이다.
"살기를 거두게."
철대악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들은 련주를 너무나 우습게 여긴다. 가벼이 여기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곤란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여자이기에 나이가 어리기에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무공과 화월문 문주였던 신분이 무게가 있기에 그녀 밑에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그녀의 계획이 무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체계를 갖춘 하나의 조직, 방금 북천휘의 태도는 주인을 반하는 행동이다.
철대악의 충고는 진심이었다. 다시 한 번 더 이런 무례한 태도를 지청화에게 보인다면 손을 쓸 것이다.
북천휘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철대악은 자신보다 강하다. 괜히 발끈했다가는 칼부림이 일어났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녀는 그들, 흑천살막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청화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마지막으로 술을 목 안으로 넣은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술을 즐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술에 취해 잠이 들고 싶었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빈 잔에 철대악이 술을 따랐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어요."
"헌데 그런 큰일을 왜 지금껏 혼자 앓아 오셨습니까."
"그러게요."
"미련하십니다."
지청화는 크게 웃었다.
미련하다. 맞는 말이다. 정말 미련한 짓을 지금까지 해 왔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속은 시원하다.
취기가 올라왔다.
어느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청화가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철 호법께서는 어찌 생각하세요."
"위험합니다."
"무엇이 말이죠?"
"그들 존재 자체가 위험합니다."
"……."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혈천마성을 공격하는 일은 본련의 행보에 있어서 좋지 않습니다. 남북천맹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저희입니다. 그것이 사마련의 탄생 목적이기도 하고요. 처음 취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본련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지게 돼요."
철대악은 술을 들이켰다.
대답을 바로 하지는 않았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은 있었지만 쉽게 뱉을 말은 아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사마련에 대한 애정이 강한 그녀였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지청화의 입장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이 들 것이다.
철대악은 그녀가 혼자서 끙끙 앓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알았으니 다행이다.
자신이 뭔가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옆에 있으면서 못다 한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전 련주의 뜻에 절대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
지청화는 살짝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러곤 그녀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철대악은 여홍을 불러 지청화를 처소에 데려가게 했다. 그러곤 혼자서 밤을 지새웠다.
"만남을 주선해 주세요."
"……!"
늦은 저녁 지청화는 하제량을 찾았다.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사우라고 했던가요? 그자를 찾아주세요."
"허면 련주께서는?"
"아니요. 단정 짓기에는 시기가 조금 빠르지 않나요? 그 사내를 만나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어요."
하제량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는 일생일대의 가장 위험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줘야만 한다.
"하아. 또 바빠지겠군요."
* * *
"나흘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상서운이 사우를 찾아왔다.
"많이 바쁜 모양이야?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야."
"하하. 뭐, 그리 바쁘지는 않습니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사람이 나누는 대화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의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묘한 사내.'
상서운은 사우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누구나 이런 식으로 감금 비슷한 걸 당하게 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사내는 전혀 그런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눈빛에서 분노를 읽지 못한 것은 아니다.
"보고자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호오. 드디어 납신 건가?"
사우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얌전히 있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괜한 말썽을 일으키신다면 그대의 동료들이 다칩니다."
"크크크큭."
이들은 자신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잡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런 이유는 있었지만 오로지 그것만은 아니다.
자신을 보고자 하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흑천의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사우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그렇다 해도 직접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흑천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그게 화월선자라는 놈인지, 흑천살막은 지금 누구의 손에 조종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건 모조리 파악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으로 따라온 것이다.
사우는 상서운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장원에서 가장 화려하고 높은 곳으로 향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검소한 풍경이 보이는 작은 건물로 안내되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네."
상서운은 가볍게 사우의 말을 무시했다.
"들어가시죠."
문 앞에서 상서운은 떠났다.
사우는 주변에 기척을 살폈다. 쥐새끼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어쩌려고.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리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헌데 그 웃음이 너무나 소름 끼쳤다. 도저히 인간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존재가 아님을 사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망총주."
"그대가…… 흑천의 동생인가요?"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듯 아름답다.
"소아경(消芽敬)…… 네가 사망총주였나."
사우는 그녀를 알아봤다.
꽤나 오래전 만났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