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章 율천세의 죽음 (17/38)

第二章 율천세의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특히나 인간에게는 그 두 가지 성질로 크게 나뉜다.

선과 악.

인간이라면 그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다. 헌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악을 숨기기 바쁘다.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당연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엄청난 질책과 비난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섭고 두려워 악을 감추고 선을 표출한다. 가끔은 그 선을 조작하기도 한다.

둘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이라면, 특히나 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주목받는 곳이라면 더욱 심하다.

무림, 강호라는 세상에서 정파는 곧 선이다.

악을 응징하는, 정의를 수호하는 뭐 그런 단체로 자리한다. 간혹 자신들을 사파라 칭하고 나타나는 단체들도 있지만 세상을 놀라게 할 패악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유지가 가능하다.

어쨌든 정파라 불리는 자들도 인간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고 그것을 채우려 한다면 추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 더럽구나."

율무천이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암흑제도에서 돌아온 그는 석우진이 조사한 보고서를 읽은 감상평을 중얼거렸다.

이토록 비리가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순진했던 것일까?

오로지 선한 일만을 할 것같이 세상에 알려진 남북천맹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아니었다.

사파의 무리들보다 더욱 더럽고 추잡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가 그러했다.

헌데 그 일부가 문제였다.

하나같이 대방파라 분류되는 그들의 짓은 간악무도했다.

율무천은 자신이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반드시 그들을 뿌리부터 뽑으리라 생각했다.

"공자, 우진입니다."

"무슨 일이냐."

"맹주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알겠다. 곧 천무각으로 가겠다."

율무천은 율천세의 부름에 천무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율천세는 자신의 거처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룡원으로 갈 것이다."

"……!"

율무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부친을 바라봤다. 하지만 율천세는 일언반구 없이 걸음을 옮겼다.

율무천은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느라 고생했다. 갑작스럽게 천룡원이라니.

부친은 원로들과 그리 사이가 좋지가 않았다.

꼭 율천세만이 아니다. 천룡원의 원로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일제히 끊고 사는 자들이었다.

'아!'

율무천은 이제야 부친의 뜻을 알아차렸다.

천룡원의 원로들은 혈천마성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 시절은 혈천마성과의 전쟁이 절정이던 시점이었다.

누구보다 혈천마성이라는 자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사실 율천세의 현재 행동은 매우 느린 것이었다. 혈천마성의 존재를 파악한 순간 바로 천룡원에 들렀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은퇴한 원로들에게 의논을 하는 건 맹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의 손에서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맹의 최고 인원들로도 제대로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건 나중이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천룡원에 원로들 말고는 유일한 젊은 청년이 율천세에게 인사했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은 이곳에서 자라 성장한 이였다.

천룡원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무공을 배우는 모양이었다. 못 본 사이에 기도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원주를 뵙고자 왔다. 안에 계시느냐."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냐. 그렇다면 내가 좀 늦었구나."

율천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가자꾸나."

율천세와 율무천 부자가 천룡원주 살가륵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늦었구나."

"후배가 미련하여 늦었습니다."

율천세는 깊게 읍했다.

살가륵은 언제라도 율천세를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앉아라."

두 부자가 그의 앞에 앉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혈천마성이 나타난 듯싶습니다."

"그렇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암흑제도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면 분명 그들이다."

살가륵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확신에 율천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힘이 약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조기에 진압을 하려 했지만 아시다시피 실패했습니다. 암흑제도 전체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천문연환팔괘진(天門連環八卦陣)이다."

"……!"

"혈천마성에 성주 다음으로 강한 쇄암왕에게만 내려오는 진법이지. 그 아이들이 파훼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토록 강한 진법입니까?"

"네 조부조차도 파훼하지 못하신 진법이다."

두 부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율천세의 조부는 엄청난 고수였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천하제일인. 천하의 수많은 고수들을 지배했던 무인조차 진법을 파훼하지 못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 진법으로 인해 혈천마성의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쇄암왕의 후손이 살아 있는 건 확실하구나."

"쇄암왕은 흑마궁을 이끌었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흑마궁은 혈천마성에 최고 조직이었다. 그런 그들이 씨를 뿌려 살아 있다는 건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살가륵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혈천사가(血天四家)를 아느냐?"

율천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을 아는 자들은 많이 없다. 흑마궁주 쇄암왕을 비롯해 혈천마성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자들이 혈천사가이니라."

"헌데 그런 자들을 아는 이가 없다 하십니까?"

"혈천마성은 혈천사가의 일부가 세상에 드러났음에도 천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함을 가졌기에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혈천사가가 모두 나타났을 때는 딱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혈천마성의 성주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 그들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그날 말이다."

살가륵의 눈빛은 과거를 탐험하고 있었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의 일들을 말이다.

"철권이가, 용황신가, 천외백가, 천화유가. 이들이 혈천사가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다. 그들의 혈족이 살아서 쇄암왕과 힘을 합쳤다면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과거의 혈사만큼이나 말인가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율무천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다."

"……!"

오싹 소름이 온몸에 돋아난다.

결코 상상하기 싫다.

당시의 상황을 피부로 실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만으로도 그때의 참혹함을 상상하게 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천룡원의 힘이 절실히 필요할 것입니다."

천룡원이 세상에 나오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살가륵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어쩔지 모르겠구나."

"힘을 좀 써 주십시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는 그들을 상대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특히난 부맹주 단위광에게 현재의 상황을 똑바로 각인시켜야 한다."

"이미 그리했습니다. 만약 저들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부맹주가 있는 곳이 될 테니까요."

부맹주 사자천황인 단위광은 사자검문의 문주였다. 안휘성은 그의 사자검문을 주축으로 강한 전력을 지닌 지역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안휘성 근처가 혈천마성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걸로 남북천맹은 뿌리가 흔들릴 수 있었다.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저들이 움직이기 전에 뭔가 대책을 간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암흑제도로 본맹에 아이들이 침입했을 때에 왜 살려 두었냐는 것이죠."

"그것은 나 또한 이해하기 힘이 들구나."

"그만큼 전력이 약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괜한 피를 흘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들을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살가륵도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대꾸하지 못했다.

그 또한 이해하기 힘이 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한 혈천마성은 자신들의 아성에 침입한 적을 살려 둘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있는 실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오늘 이렇게 찾아뵌 것은 혈천마성에 관한 것과 이 아이에 대해서 의논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때가 되었지."

율무천은 갑자기 이야기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지자 놀란 눈으로 부친을 쳐다봤다.

"저는 아직……!"

"아니. 이제 넌 어린 나이가 아니다. 나 또한 네 나이 즈음에 맹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딱 적당하구나."

아들의 그릇을 좀 더 키울 생각이었다. 천천히 말이다. 고난과 시련을 주어 단련시킬 생각이었다. 그 상대자도 강한 인물이었다.

화진천이라는 상대로 인해 아들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혈천마성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이야기였다.

어찌 생각하면 더 미뤄야 하는지도 몰랐다.

강한 상대가 나타났는데 새로운 변화는 오히려 독이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율천세는 자신보다는 아들이 남북천맹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비록 율무천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우두머리가 될 수는 없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런 자들이 많았다.

겸손한 자세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분명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천룡원주 살가륵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이 아이를 세우고자 마음먹는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뵙고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율천세의 눈빛에서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살가륵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맹주나 무인이기 전에 자식 같은 아이였다.

율천세의 조부는 인간적으로 많은 걸 배우게 한 존재였고 부친은 벗이었다.

그리고 율천세는 아들이었다.

비록 친혈육은 아니지만 때로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클 때가 있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는 그런 마음이 더욱 컸다.

자신이 이미 정을 준 이상은 율천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음을 살가륵은 알고 있었다.

"노력해 보마."

"감사합니다."

"따로 독대를 하려 하니 천이를 보내고 오너라."

"그럼 나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테니 그만 가 보거라."

살가륵은 두 부자를 내보냈다.

일각이 지난 후 율천세가 다시 그의 공간에 나타났다.

"무슨 일로."

"천이 그 아이가 따로 그림자로 두었던 아이는 어찌 지내느냐."

"그것 때문에 따로 부르신 겁니까?"

"그렇다."

대체 그 젊은이가 누구기에 천룡원주가 이리도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입니다."

"오래?"

"예. 천이가 폐관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따로 부탁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천이의 약혼녀가 맹 밖으로 몰래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헌데 이후로 그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죠."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그는 남북천맹을 원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뜻한다.

"헌데, 도대체 그자가 누구이기에 원주께서 그리 관심을 갖으시는지."

"내가 너를 따로 보자고 한 것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율천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미 주변은 내 기운으로 일절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니."

그제야 율천세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을 아느냐."

"그들이라 하면?"

"네 부친이 말을 해 줬을 것인데 말이다."

"……."

"그들 말이다. 천하를 암중에서 지배하는…… 흑천살막을 말이다."

"……!"

* * *

"차가 식습니다."

"음…… 알겠다."

김이 피어오르던 찻물이 식은 지는 오래다. 뭔가 고민을 하던 화무홍은 갈증을 가시게 하고자 찻물로 입안을 적셨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으신지요."

오랜만에 자신을 불러 준 아버지였지만 일언반구 없이 입을 다물고 있어 괜한 걱정이 앞서는 화진천이다.

"맹주가 천룡원주를 만났다고 하는구나."

"……!"

화진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허면."

"맹주가 모험을 하려는 것이겠지."

"아버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화무홍은 쓰게 웃었다.

"천아."

"네."

"맹주가 되고 싶으냐."

"어찌 다 아시면서 그리 물으십니까."

"무혈입성 할 날이 올 것 같아서 그런단다."

화진천은 도저히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자가 미련하여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화무홍은 답답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는 아들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율천세가 아마도 율무천을 맹주로 세우고자 천룡원주를 찾아간 것 같구나."

"제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군요."

"지금은 그렇지."

"……."

"혈천마성이 세상에 나올 모양이더구나."

너무 놀란 나머지 화진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두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 버렸다.

"율천세는 그것을 의논하고자 천룡원주를 찾아 간 것이겠지."

"혈천마성은 과거에 이미……!"

"아니다. 그건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들을 세상에서 깨끗이 지우지는 못했다."

"그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까?"

화무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의 무인들이 비밀리에 그들을 척살하려 출타했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해 내지 못하고 돌아왔단다. 구룡천부의 한유가 직접 갔음에도 말이다."

"믿기 힘든 사실이군요."

구룡천부의 아홉 명을 진두지휘하는 한유는 실로 강한 무인이었다.

그의 무공 실력은 천하가 알아줄 정도다.

그런 한유조차 흔적을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혈천마성의 후손들은 물론 적이 아예 없는 상태이거나 아니면 적들이 맹의 고수들보다 몇 배는 강한 존재들이거나.

화무홍은 후자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화진천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전혀 실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쥐새끼마냥 숨어 있다는 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꼬리가 잡히게 되어 있고 남북천맹의 힘은 그리 약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명분을 얻게 되었다."

"어떤 명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산의 씨가 맹주의 자리에 앉을 명분 말이다."

화무홍은 식은 차로 입안을 행구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율천세가 율무천에게 맹주의 자리를 양보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리해진다. 어린 그 아이가 뭘 해 봤겠느냐. 혈천마성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아이보다는 우리 천산의 사람들이 공을 많이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맹주 율무천의 자질을 가지고 그 아이를 끌어 내려야겠지."

"아!"

화진천은 부친의 뜻을 알아차렸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뒤바뀌게 된다.

"율천세는 제 발로 제 무덤을 판 꼴이 되겠지. 곧 천산의 핏줄이 남북천맹에 주인이 될 터이니."

늦은 밤 대막검문 문주의 집무실로 흑빛 깃털을 지닌 전서구 한 마리가 찾아 들었다.

서문륭은 전서구가 달고 온 소식을 꺼내 보았다.

천살(天殺).

서문륭은 단 두 글자가 적힌 내용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대도천신이 슬퍼하겠구만."

그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서문륭은 동이 트기도 전에 홀로 대막검문을 떠났다. 물론 그가 출타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 * *

철대악은 다른 호법들과 련주인 지청화와의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분명 누군가가 왔다 간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책상에는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환도문.'

철대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놈이다!'

유장룡과 유가량을 죽인 놈들.

그리고 자신의 제자 신도청과 패천문 무인 오십을 도륙한 놈들. 혈화와 살락원을 이용했음에도 잡지 못했던 놈들이었다.

철대악은 이가 부서져라 꽉 깨물었다.

반드시 죽인다.

이번에야말로 잡아 사지를 찢어 버려야만 한다.

서찰에는 환도문이라는 단어와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단 홀로 나오라는 조건이 있었다.

철대악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상 자신 혼자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크게 당할 수가 있기에 마음을 다스릴 뿐이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자신을 불러내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십이무룡 중 한 명과 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을 상대는 너무 얕보고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도용, 밖에 있느냐."

"네."

밖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신도용이 안으로 들어섰다.

"멸천대 스무 명을 데리고 출타한다."

"련주께는……."

"내가 책임질 터이니 비밀리에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철대악은 약속 장소가 적힌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멀찌감치 뒤에서 신도용과 멸천대 스무 명이 뒤 따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낡아 빠진 초가 앞이었다.

도시의 외각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다.

신도용과 멸천대는 멀리 숨어 철대악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철대악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만 흘렸다. 초가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봤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사내.

평범한 무복을 입고 한 손에는 낡아 빠진 도 하나를 쥐고 있는 사내를 보자니 맥이 풀렸다.

과거에는 패천문의 문주였고 지금은 사마련의 호법인 자신이었다. 철혈대제 철대악 자신을 상대하려면서 고작 혼자서 왔다.

기운을 넓혀 숨은 자들을 찾아봤지만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나머지 두 놈은 어디 간 것이냐!"

철대악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만약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내공이 약한 자였다면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것이다.

"환도문을 아시오?"

"당연히 안다. 사천성에서 환도문을 모르는 자가 있더냐!"

철대악은 처음의 방심을 접었다.

상대는 혈화와 살락원을 따돌린 자들 중 한 명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혈화의 무공을 견식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강함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살락원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힘을, 특히나 자신의 딸 철유라의 독기와 살심을.

그런 아이들에게서 살아남았다는 건 결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혼자서 온 것은 큰 실수였다.

결코 자신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구나. 나 철대악이 너 같은 핏덩이에게 당할 것같이 약해 보이더냐."

철대악은 천천히 사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환도문 장로 사자도왕이 내 아버지이시다."

"……!"

철대악이 걷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대모수…… 정말 네가 대모수의 아들이더냐?"

믿기 힘이 들었다.

대모수는 환도문에서 가장 강한 인물로 꼽히던 강자였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무인으로 키우고자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 물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무공을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철대악의 상식으로 이토록 강해질 방법은 존재치 않았다. 당시 그의 기억으로는 대모수의 아들은 무공을 익히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천운이 너에게 있었구나."

철대악은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현재 저 아이가 성장하기까지 얼마만큼의 고통이 따랐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대모수와는 각별한 친분을 지녔던 철대악이었다. 자신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믿고 의지하던 사내였고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무인의 자식이 강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대찰영."

"찰영……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그 어린아이가 벌써 이리도 컸구나."

서로 혈전을 벌일 상황에서 나눌 대화치고는 꽤나 정겨웠다.

철대악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감고 있기까지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운명이지 않느냐. 내가 우러러보던 형님의 자식과 지금은 목숨을 빼앗아야 할 사이로 만난 것이 말이다."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대찰영은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당신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하하하!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모든 것은 환도문이 우리와 삭제 뜻을 같이하지 않아서이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시오?"

"변명? 아니. 난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란다. 환도문은 우리를 배신했다. 사마련을 처음 조직할 때 환도문도 함께였다. 하지만 남북천맹의 개가 되어 우리를 배신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조리 없애 버린 것이다."

"닥치시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찰영은 흥분한 감정을 다스렸다.

이유를 막론하고 저자와 사마련은 아버지가 몸 바쳐 있던 곳을 없애 버렸다. 단지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오늘 난 그대를 죽이려 하오."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하려무나. 단, 대 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난 절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단단히 각오를 하거라. 나 또한 너와 네 일당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으니."

대찰영이 도를 뽑았다.

'반드시 죽인다.'

전력을 다할 것을 그는 다짐했다.

'길게 가면 힘들어진다.'

대찰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속전속결!

대찰영의 혈우멸절도는 지극히 강맹한 초식으로 이루어졌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대찰영이 자신에게로 빠르게 이동해 오자 철대악은 살짝 당황했다가 이내 냉정을 찾았다.

보법을 이용해 뒤로 빠졌다.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상대와 맞부딪혀 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상대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기에 더더욱.

철대악은 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복부를 향해 치고 들어오는 도를 아래에서 위로 쳐 냈다. 이어 바로 그의 검 끝이 쉬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철대악은 검에 자신의 내력을 오성 가까이 실었다. 대찰영의 요혈을 난도질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철대악의 검법은 굉장히 패도적이었다.

그의 독문검법인 팔왕검법(八王劍法), 제삼왕, 패왕(覇王)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대찰영도 귀신같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콰콰쾅!

철대악의 검 끝에서 검기가 뿌려졌다.

급히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지만 대찰영은 큰 충격에 몸이 날아가 낡은 초가에 박혀져 버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번쩍!

어두운 밤인데다가 먼지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도를 회전시키며 날린 것이다.

철대악은 허리를 구십 도로 눕혀 간신히 공격을 피해 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휘익 하고 지나갔다.

그림자의 속도는 정상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자신의 수하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속도였다.

결코 자신보다 아래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철대악은 허리를 펴고는 그림자가 지나간 곳을 바라봤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허공을 가르던 도를 잡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놈도 저 아이와 한 패인 것이냐?"

속으로 긴장을 풀지 않은 철대악이 말했다.

상대가 범상치 않았다. 뿜어 대는 기도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다.

복면인은 말없이 천천히 다가오기만 했다.

"멈추십시오. 저자는 제 몫입니다."

"넌 진다."

철대악을 사이에 두고 대찰영과 사우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나 몰래 복수를 하려고 한 것을 몰라서 봐준 것이 아니다."

"그럼 뭡니까."

처음부터 사우를 완벽히 속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출발하기 전까지도 그는 모르는 척해 줬다.

무언의 허락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를 하니 대찰영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현재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우는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어느새 철대악 근처까지 다가왔다.

"숨어 있는 쥐새끼들까지 다 동원해야 할 거야. 저놈과 나를 잡으려면."

"……!"

"그래도 힘들겠지만."

사우는 덤덤히 그를 지나치며 대찰영에게 도를 집어 던졌다.

"그만 가자."

생각했던 것보다 철대악이 강했다.

대찰영이 약한 것이 아니다.

철대악이 현재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무인임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데도 대찰영을 그냥 두면 필패다.

동귀어진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그걸 원하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희생은 달갑지 않았다.

"못 갑니다."

"저기 저 숲에는 쥐새끼들이 숨어 있다니까. 원수를 잡는데 혼자 올 미친놈이 어디 있겠냐."

사우는 한심하다는 듯 대찰영을 바라봤다.

그는 사우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철대악만을 노려봤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잡소리만 늘어놓는구나!"

철대악의 분노가 극에 달았다.

사우와 대찰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철대악이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멸천대가 앞뒤로 두 사람을 포위했다.

사우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쩌겠다는 거지? 겨우 저런 놈들로 나를 어찌해 보겠다는 건가?"

"내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죽음으로 되돌려줄 수밖에."

혼자서 두 놈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놈들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것은 무인으로서 감당하게 힘든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철대악의 신형이 사우에게로 짓쳐 들어갔다.

동시에 멸천대가 두 사람을 향해 공격을 가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달빛만을 의지한 채 피 튀기는 혈투를 벌이는 장면을 하제량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사내, 괴물이구나.'

그는 진정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제량의 시선을 잡아끈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바로 사우였다.

멸천대 소속 무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는 대찰영이라는 사내도 대단했지만 단연 돋보이는 건 사우다.

그는 철혈대제 철대악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나 가볍게 말이다.

철대악의 강력한 공격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제량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니. 흑혈대를 전멸로 이끈 사내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하제량은 자신이 받은 충격을 거부하지 않았다. 인정했다.

바로 흑혈대 때문이다.

천기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곳이 흑혈대였다.

하나같이 절정의 무공 실력을 갖춘 그들을 한 번에 공격을 참살시킨 사우라면 지금의 무위는 오히려 빙산의 일각이었다.

'후우. 숨이 다 막힐 지경이구나.'

굉장히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피부가 따끔거렸다.

반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사내, 그런 사우가 자신과 거래를 원했다.

하제량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고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사내보다 그들이 더 강하다.'

하제량은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 사내가 상대하려는 자들은 사마련도 남북천맹도 아니다. 어둠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을 상대하려 했다.

무섭고 두려운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은조."

"예."

"사마련주에게 가서 보고해.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철대악은 죽는다고."

어둠 속에 있던 은조가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 하제량은 그곳을 떠났다.

* * *

그 시각 율천세는 늦은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늘 걱정거리를 달고 살아야 하는 자리가 바로 우두머리의 자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매일같이 조직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일로 인해 고뇌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너무나 많은 중소방파가 맹이라는 무리 아래로 줄기처럼 뻗어 있었다. 각 문파의 수장들만 모아도 서른 명이 넘었다.

그 밑으로 너무나 많은 무인들이 존재했고 전부는 아니지만 모두를 살펴야만 하는 자리가 맹주였다.

그 자리에서 십 년이 넘는 세월 있다 보면 밤을 지새우는 것쯤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게가 상당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크게는 두 가지였다.

앞으로 수개월 안으로 남북천맹에게 칼을 겨눌 사마련과 혈천마성이라는 두 단체의 등장이었다.

하나는 마음으로 품었던 자들이 배신하여 세를 키운 것이고 하나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현재 사마련은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물론 수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 오고 있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것은 지금부터였다.

아무리 사천성과 귀주 운남성의 힘을 합쳤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북천맹을 상대하기에는 벅차다는 것이 율천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혈천마성과 그들, 사마련이 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런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그래서 천지각을 두 단체가 있는 곳으로 집중시켰다.

동시에 감찰부라는 조직에 인원을 보충하여 내실을 다질 생각이었다.

허나 혈천마성 같은 경우에는 워낙 귀신같은 곳이었고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아. 정말이지 큰일이구나."

그는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놀라지 마시오."

실내에 등장한 인물을 보자 율천세는 눈을 부릅떴다.

"자네는!"

"밤이 늦었는데 어찌 잠을 못 드시는지."

율천세의 집무실에 몰래 잠입한 인물은 바로 서문륭이었다.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의 등장에 율천세는 크게 당황했다.

"이리 등장한 것에 대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화를 내려던 율천세를 무안하게 할 정도로 서문륭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율천세는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지만 그건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금세 냉정을 되찾았지만 서문륭을 노려보는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자네가 총타를 혼자서 찾고 말이야."

화는 났지만 진정으로 궁금함이 치밀어 올라 질문했다. 거의 자신의 가문에서 칩거 수준으로 외출을 하지 않던 서문륭이다.

그런 그가 이 늦은 밤에 나타난 것은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그저……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하하!"

율천세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속에서 황당하다는 감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미 내력으로 인해 안의 음성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서문륭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음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문륭은 희미하게 웃었다.

"맹주께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어 이리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혈천마성이 나타났다 들었습니다."

"사대검문의 정보력이 꽤나 뛰어나네그려."

율천세는 비아냥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노력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사대검문의 수장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건 불쾌한 일이었다.

알고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안다고 말하는 건 더더욱 불쾌했다.

사대검문은 물론 스물아홉 개의 문파 위에는 바로 맹주인 자신이 군림한다. 그게 불문율이다.

군주이자 주군인 자신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건 소문이지 사실이 아니다. 질문을 해서도 아니 된다.

이들이 진정 자신을 그리 생각한다면 생각지도 못할 태도이자 행동이었다.

"언제까지 숨기실 생각이셨습니까. 맹주께서 이리 잠 못 드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렇다네. 왜, 자네에게 뾰족한 방법이 있나?"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마련을 공격해야 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사마련을 공격해야만 하는 이유?"

"예. 저들은 앞으로 혈천마성과의 전쟁에서 불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미리 싹을 잘라 내야 하는 존재이지요."

"하지만 사천성과 귀주, 운남의 힘이 모였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세. 본맹이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분산시키는 것을 혈천마성이 기다린다면? 그럼 어찌할 텐가."

"사마련은 혈천마성보다 강합니다."

율천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제가 오늘 맹주를 찾은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함입니다."

"말해 보게."

"사마련과 힘을 합치십시오."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인가!"

율천세의 주먹이 탁자를 후려쳤다.

사마련을 공격하라고 했다가 갑자기 이번에는 그들과 힘을 합치라고 한다. 율천세가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서문륭에 태도는 너무나 여유가 넘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율천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사내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흥분케 하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살길을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살길……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사마련의 뒤에는 그들이 있습니다. 맹주께서는 그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 그들이라니?"

"맹주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천룡원주와도 밀담을 나누셨다 들었습니다만."

"……!"

율천세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몸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단전에서 내공을 천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선택하십시오. 마지막 질문이자 제가 맹주께 드리는 기회입니다."

"건방지구나, 서문륭!"

율천세의 팔이 늘어지는가 싶더니 서문륭의 가슴을 때렸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서문륭은 그대로 그의 일장을 맞았다. 맥없이 날아간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광기 섞인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큭!"

율천세는 자신의 검을 뽑아 싸울 태세를 갖췄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크크큭."

율천세가 알고 있던 서문륭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씩 살기가 흘러나오더니 그의 몸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서문륭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온화하고 너무나 평범하던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게 진짜 그의 모습이었다.

"내 소개를 하지. 흑천살막에 검옥(劍獄)의 수장인 내가 바로 진천남(陳天南)이지. 네놈을 황천길로 보낼 자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율천세의 눈앞에 등장했다.

진천남의 두 주먹이 율천세의 관자놀이를 향했다.

율천세는 몸을 뒤로 튕겼다.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그는 쉴 틈도 없이 진천남의 주먹을 피해야만 했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그의 주먹은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맹한 공격을 퍼붓는 진천남의 무공을 피하기에는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쾅, 쾅!

진천남의 주먹이 인정사정없이 율천세의 집무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일각 정도 지나자 실내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꽤나 충격적이군. 서문륭이라고 믿었던 사내가 흑천살막이라는 곳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진천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전부 모습을 드러낸다면 기절초풍을 하겠군."

그의 말은 아직도 자신들의 사람들이 남북천맹 곳곳에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절로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율천세는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사실 남북천맹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대검문의 수장이 흑천살막의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헌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말은 절망감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너무 좁지 않나?"

꿈틀.

진천남의 음성에서 너무나 오만한 자신감을 느낀 율천세는 인상을 찡그렸다.

두 사람 다 아직 자신들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장소가 너무나 좁았다.

진정으로 무공을 펼쳤다면 건물이 폭삭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천남은 맹주를 암살하려 한 것을 널리 알리게 되는 꼴이다.

이미 밖에는 천무대가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섣불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율천세의 명령이 없기 때문이다.

헌데 진천남은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남북천맹 총타에 있는 무인들을 모두 쓸어버릴 자신이 있어서일까?

반신의 경지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문득 율천세의 머리에서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떨쳐 버렸다.

그는 신형을 밖으로 날렸다.

그러자 진천남도 율천세의 뒤를 따른다.

건물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밖에 있는 자들은 몰랐다. 전혀 소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허나 나온 이상은 달랐다.

율천세는 주변에 천무대 무인들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저들의 손을 빌리진 않는다. 그 전에 자신이 적을 죽여 버릴 테니까 말이다.

"밖으로 나왔으니 검을 한 번 섞어 봐야겠지?"

진천남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다.

율천세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지금까지가 몸 풀기였다면 검을 뽑은 이상은 혈전이다. 목숨을 내놓고 상대를 죽일 의지를 보이는 것이리라.

이렇게 상대를 죽이기 위해 검을 뽑은 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 묘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좋아. 그래야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지."

진천남도 검을 뽑았다.

검신마저 칠흑 같은 묘한 검이었다.

우웅.

내력을 불어넣자 검이 울기 시작했다.

진천남은 그 느낌이 좋아서인지 광소를 터트렸다.

"그 유명한 연화검법을 보게 되니 영광이군."

대답은 없었다.

그저 새까만 그림자가 들이닥치는 것 말고는 말이다.

연화검법 제일초! 연화불멸(蓮花不滅)!

율천세의 독문검법인 연화검법이 그의 검 끝에서 터져 버렸다.

연화검법은 아름다운 연꽃을 피게 한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무공으로 표현했을 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려하고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연화검법은 실로 엄청난 살상력을 갖춘 공격들이 대부분이다.

열 개의 연꽃이 율천세의 검 끝에서 피어올라 진천남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연화불멸을 사용한 이유는 즉사시키기 위함이었다.

길게 싸움을 이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현 중원에서 연화불멸을 제대로 막아 낼 인물은 다섯이 넘지 않는다.

"……!"

헌데 진천남이 연화불멸을 막았다.

그저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연꽃이 모두 사라졌다.

"으음. 아직 사부만큼이나 연화검법을 다룰 줄 모르는군."

진천남은 율천세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천남은 마치 예전부터 연화검법을 봤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연화불멸이라…… 생각보다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답례는 해야겠지?"

스멀스멀.

진천남의 검이 검은 연기를 잔뜩 먹었다.

갑자기 공기가 바뀌는 착각이 들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은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당장이라도 터질 듯 요동쳤다.

율천세는 이런 기분을 예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무공을 가르쳐 준 여곤에게서였다.

아주 어릴 적 태산처럼 느껴지던 여곤의 기세가 지금 진천남에게서 전해지고 있었다.

폭검절식(爆劍絶式), 제사식인 광폭섬(廣幅閃)!

진천남의 검에 횡으로 그어지더니 빛이 번쩍거렸다.

빛보다 빠른 공격이다.

"크아악!"

뭔가 빛이 번쩍이더니 왼쪽 팔이 뜨끔거렸다. 그랬을 뿐인데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 팔이 보인다.

율천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싱겁게 끝이 난 싸움이었다.

남북천맹 맹주 율천세가 진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사내가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결말이었지만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 하하하!"

고통으로 몸부림쳐도 부족한 상황에서 율천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는 덜 비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검무제라…… 중원 놈들은 이름 한번 거창하게 지어 주는가 보군."

진천남은 여전히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절대강자라 추앙받는 사내를 무너트린 사람치고는 너무나 담담한 반응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지."

"음? 질문을 할 정도면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군."

"네놈이 어찌 연화검법을 알고 있는 것이냐."

진천남은 연화검법의 파훼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리 한 번에 공격을 막아 낼 리 없었다.

"쯔쯧. 눈치가 없군. 아직도 눈치를 못한 것인가? 네놈이 사부라 부르던 자, 야수마황 여곤은 본 옥의 사람이다."

"……!"

율천세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흑천살막을 받치고 있는 검옥의 사람이다. 여곤은 말이다. 그리고 내 수하라는 말이지."

"닥쳐라. 내가 네놈에게 졌다고 해서 내 사부까지 능멸하려는 것이냐."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

하지만 낯설지 않은 익숙한 음성이 들리자 그 믿음은 산산이 조각나 흩어져 버렸다.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노인이 보였다.

"사…… 사부님?"

수왕의 세력을 세상에서 지우고 나서는 폐관에 들어선 사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속였단다."

충격적인 말, 이미 팔이 잘려 나간 고통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어떻게……!"

"믿지 못하겠지만, 아주 예전부터 이 세상은 흑천살막에게 지배되어 오고 있었다. 남북천맹이 생기기 전에는 혈천마성을, 혈천마성이 생기기 전에는 천외성(天外城). 천외성 전에는 신화궁(神話宮)!"

율천세는 태어나 처음 듣는 곳의 이름들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혈천마성?"

"그렇다. 혈천마성 또한 흑천살막이 뒤에서 만들어 낸 곳이다. 하지만 그들이 흑천에게 반심을 품자 그들을 없애기 위해 남북천맹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오면서 이렇게 충격적이고 이토록 믿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천룡원주도 우리 쪽 사람이다. 하지만 곧 죽겠지. 본막을 배신했으니까 말이다. 너와 나눈 대화로 인해 이런 결말을 초래하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거라."

스르륵.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푸욱!

검 끝이 눈에 보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군."

"큭! 크크크큭!"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네 손에 죽게 되어 기쁘구나."

"죄송……합니다."

천무대 수장 구범악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한때나마 모셨던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자, 이제 살가륵 그놈을 사냥하러 가 볼까."

진천남은 잔인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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