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전란의 소용돌이
"더러운 새끼."
사군악의 욕설이 사우를 향했다.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한데 사우는 웃는다. 사군악은 그게 더 싫었다. 저 빌어먹을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기분이 나쁜 얼굴이었다. 바로 저 웃음, 살짝 말려 올라간 저 입꼬리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점혈을 당하지 않았다면,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거냐."
"다 너희들을 위한 일이지."
"사우 너 이 새끼!"
"그렇게 승질만 부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 보라고."
사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너희는 마인곡에서 수련한 것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이지 개죽음밖에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대찰영이 으르렁거렸다. 지금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암흑제도에서 벌어진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할 정도로 비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동굴에 사는 쥐를 생으로 잡아먹기도 했다.
불을 피우면 추격자들에게 잡힐까 그러지도 못했다.
인간 이하의 생활로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
버틴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강해지는 것? 다 좋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복수를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방적인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것도 믿고 따르던 사우가 직접 내린 명령이라는 것에 대해 분노를 표하는 것이다.
마인곡을 나온 순간부터 그를 믿고 그의 명령에만 움직였다.
그 대가가 이것이라면 이제는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희가 각자의 복수 대상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냐."
"……."
"무공도 강하지 않은 너희가,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너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은 목숨을 건 생활을 해 봤다는 거다."
담천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최악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누구보다 강하다는 증거다. 너희 세 사람은 지금보다 두 배 세 배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게 있다. 난 그걸 키워 주고 싶은 것이었을 뿐이지."
"그걸 왜 네놈이 결정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이 우리를 훈련시킬 자격을 지니게 된 거죠?"
담천과 대찰영의 말에 사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라고 물으면 마인곡으로 내가 너희를 찾으러 갔을 때부터였고, 난 단 한 번도 그곳에서 만난 자들을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저 앞으로 내 일을 도울 수족 또는 병기라고밖에 말이지."
사우의 말은 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료가 아닌 수족과 병기.
너무나 배신감이 드는 발언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너네들의 몸을 묶고 있는 것들을 모두 풀어 줄 거야. 그 이후부터는 암흑제도를 떠나던지 아니면 쥐뿔 능력도 없으면서 복수를 하려고 가던지, 그게 아니라면 나를 죽이고 싶다는 일념으로 옆에 붙어 있던지. 자유에 맡기지.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들."
* * *
그 시각 천성각 내실에는 율천세와 천무대주 구범악이 함께 자리해 있었다.
"이게 다 반대의견들인가."
"그렇습니다."
율천세는 천지각주의 공석을 그의 아들 석우진을 수장으로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맹에 속해 있는 많은 문파의 수자들이 반대 의견을 보내 왔다. 지금 탁자 위에 쌓여져 있는 서찰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남북천맹이 혈연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능력과 경험이 높은 사람을 앉혀야 한다고 한다. 맞다. 그들의 말이 백번 옳았다.
천지각은 그만큼 중요한 요직이었다.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석우진이 앉을 만큼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허나 지금은 자신의 사람이 필요할 때였다.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 주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 자리는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
율천세는 그 자리에 벗의 자식을 앉히려 했다.
충분한 능력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래도 천지각의 자리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가."
"현재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마태릉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만한 인재는 없겠죠. 허나 천산검문의 측근인 그를 앉힌다는 것이."
"후우."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마태릉이 천지각주의 자리에 앉게 되면 정말로 힘을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로 이 조직을 개편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새롭게 말인가?"
"예. 감찰부를 만드시죠."
율천세의 눈이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언제나처럼 누구에게는 길게,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짧게 느껴질 시간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갔다.
율무천이 폐관에 들어간 지 어느덧 백 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오후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그가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앞에는 일단의 무리가 율무천을 기다렸다.
그들이 그곳에서 기다린 지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는 반면 옷은 너무나 깔끔했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나와 이상이 생길 것을 걱정해 눈은 감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우진?"
무리의 선두에는 석우진이 서 있었다. 그는 율무천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새롭게 개편된 감찰부 부주를 맡게 된 석우진이라 합니다."
그와 그의 뒤에 있던 이들은 무릎을 꿇었다.
율무천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수년 만에 본 석우진이 온 것도 놀라운데 감찰부라니?
"감찰부라는 조직이 있었던가?"
분명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각 사부 사전에는 미약하나 그런 기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세가 약하고 관심조차 못 받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데 의외인 것은 산중에서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다는 석우진이 감찰부라는 곳에 부주라니?
부주라 하면 그곳의 수장이지 않은가.
"아버지께서 수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혈천마성의 흔적을 뒤쫓으시다가 그리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지만요."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와서 듣는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천지각주는 숙부처럼 따르던 자였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는 건 감당하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이제부터 남북천맹 감찰부 부주로 왔습니다. 그리고 감찰부는 율 공자의 가장 측근에서 보필할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찰부라…….'
일단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서였다.
길게 자란 머리를 질끈 묶은 것과 수척해진 것을 제외하곤 율무천의 용모는 깔끔했다.
폐관에 들어가기 전 챙긴 깨끗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덕이다. 하지만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은 오히려 무인으로서 어울리는 외모가 되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는 물론 눈빛 또한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율천세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천지각주께서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었구나. 네가 폐관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홀로 벗을 보낸 슬픔을 보냈다는 생각에 율무천의 마음이 아파 왔다.
"허면 지금은."
"사마태릉이 천지각주로 임명되었다."
"……."
사마태릉이라면 화무홍의 심복이었다. 그런 자가 천지각주로 임명되었다는 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그래서 감찰부를 제 소속으로 배정시키신 거군요."
"그렇단다. 감찰부는 내 진두지휘 아래 새롭게 개편되었다. 앞으로는 일부분이지만 맹주의 권한을 주려 한다."
율천세의 말을 율무천은 바로 알아들었다.
감찰부주를 석우진으로 세운 것과 그들을 자신에게 귀속시킨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이었다.
맹에 속해 있는 모든 기관과 문파들에 관한 모든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조직이 바로 감찰부다.
뿐만 아니라 맹주의 권한을 등에 업고 각종 비리와 중소방파에게 문제를 지적할 수가 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자들이 없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넘어간 것만 해도 수십 건이다. 하지만 감찰부라는 조직이 새로이 편성되면서 율무천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예전에는 감찰부라는 조직이 있었지만 거의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천지각이 감찰부라는 조직이 하는 일을 월등하게 처리했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남북천맹에 실세라 불리는 천산검문의 사람인 사마태릉을 천지각주로 앉힌 대신 감찰부를 수면 위로 띄워 올렸다.
율천세와 천산검문의 암묵적인 거래였다.
빛을 볼 수 있는 천지각에 천산의 사람을 심는 것을 허락했으니 이제 막 떠오르는 감찰부에는 자신의 사람을 심겠노라고.
그렇기에 감찰부에 석우진을 앉힐 때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천지각의 수장으로는 석우진을 앉힐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감찰부의 새로운 개편이었다.
최대한 믿을 수 있는 자들을 그 조직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석우진은 그들의 신뢰를 얻어 냈다.
본격적인 활동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천아."
"예."
"앞으로는 너의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네가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이들을 네 편으로 끌어 품어야 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공자께 보고를 들이겠습니다."
율천세와의 독대를 마치고 나온 율무천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석우진과 마주했다.
"두 달 동안 천산검문에 관해서 조사를 했지만 도무지 먼지 하나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럴 테지. 화무홍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말이야."
치밀하고 냉정한 그가 약점을 잡힐 흔적을 남겨 뒀을 리 없었다.
"그래서 현재 천산검문을 따르는 열 군데의 문파를 중심으로 저희 감찰부원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일풍문이 가장 많은 허점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비연풍(飛燕風) 곽검명이 있는 곳이 맞나?"
"맞습니다. 비연풍 곽검명은 어린 시절부터 화무홍을 따랐다고 합니다."
"합니다는 빼도록 하지."
"……."
"앞으로 나에게 전하는 보고는 사실이라 확인되었거나 완벽하게 자신할 수 없으면 보고하지 말게."
과거 자신이 알던 율무천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석우진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계속하겠습니다. 공자께서도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일풍문은 지금처럼 대방파로 취급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근 십 년 동안 지금의 부와 힘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모두가 알 것입니다. 일풍문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산검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요. 조사는 거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석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풍문이라는 이름 아래로는 하나의 상단이 존재합니다. 표사들은 대부분 일풍문 무인들이죠. 곽검명의 아들 셋 중 막내는 이미 도시에서 개망나니로 유명하고 크고 작은 사고만 해도 수십 번은 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석우진의 보고는 반 시진 가까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이 일풍문에 관한 보고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 정파라는 가면을 쓰고 벌인 추악한 범죄들이 석우진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율무천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개가 아님을 느꼈다.
'남북천맹이 이토록 더럽고 추악한 곳이었나.'
* * *
"날씨 한번 좋구나."
장마철 동안 한껏 내린 비가 그치자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여상은 피곤함을 가시게 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오른 표행길이라서 그런지 피로감이 더 쌓이는 듯했다.
이제는 모든 표사들의 우두머리인 총표두가 된 여상이 직접 표행에 나선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물건들이기에 그가 직접 나선 것이다.
반 시진가량 휴식을 취하곤 다시금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예전과는 달리 아무런 긴장이 되지 않았다. 처음 표행을 나설 때는 너무나 가슴이 떨려 식사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말이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그런 감각이 무뎌졌을 수도 있다. 허나 그가 진정 긴장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표사들과 섞여 있는 무림인들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과 다른 표사들도 공통적인 무공을 익히고는 있지만 함께 하고 있는 자들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그들은 사천성 제일의 문파 패천문의 무인들이었다. 특히나 무인들을 이끄는 자가 패천문 문주의 제자인 신도용이라는 것이다. 호검랑(虎劍浪) 신도용.
무림에 관심이 많은 그였기에 신도용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패천문 문주의 제자가 되었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외당주라는 자리에 있게 된 그였다.
그런 신도용이 직접 호위를 맡아 주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표행을 가는 길목 중에서 세 번째 마을을 만났다.
여상은 지켜야 할 물건을 실은 마차를 머물 객잔 뒤편에 세웠다. 그리고 표사들 스무 명을 대기시킨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다.
점심을 거른 상태였기에 교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이 드십시오."
"고맙소."
여상은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신도용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갔다.
그는 무림에 대한 동경이 큰 사내였다. 더욱이 신도용 같은 무림고수와 함께 할 수 있는 경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용상회가 사마련이라는 곳에 귀속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쨌든 여상은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물었다. 물론 그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만 물었다.
다행히 신도용은 그의 질문을 성심성의껏 대답해 줬다.
그렇게 교대로 수하들까지 식사를 모두 마치자 일각이라는 시간 동안 휴식 시간을 줬다.
사흘 안으로 목적지까지 도착을 해야만 했기에 오래 머물 시간은 없었다.
그저 주인에게 예쁨을 받는 길은 하나뿐인 몸뚱이를 굴리는 길밖에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라붙는 자들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잠시 주변을 살피고 간다."
신도용은 수하의 보고에 여상에게 출발 시간을 늦추라 요청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워낙 그의 표정이 어두워 여상은 그러겠노라 했다.
여상은 갑자기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커헉!"
문밖에서 들린 소리와 동시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이 부서지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대거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냐!"
여상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급히 검을 찾았다. 불행히도 조금 멀리 떨어진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빌어먹을.'
안으로 밀고 들어온 인원은 총 다섯.
혼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쉬익!
검이 허공을 갈랐다.
머리를 숙여 간신히 피하자마자 탁자가 있는 곳까지 굴러서 다가갔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목 밑으로 서늘한 칼날이 다가왔다.
그 순간 창문이 부서지며 신도용이 날아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여상의 목에 검을 들이댄 자의 목을 베었다.
명불허전!
그의 검은 실로 빨랐다.
괜히 패천문주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검을 아래로 떨어트리고 복면인들에게 다가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기세만으로 저들을 압도하는 듯했다.
신도용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적마다 복면인들이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건 일종의 작전이었다.
"쿨럭!"
신도용의 걸음이 멈춰졌다.
뒤에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여상의 심장 쪽에 검 끝이 튀어나온 모습이 보였다.
즉사했다.
그걸 지켜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엄청난 기세로 복면인들의 연환공격이 가해졌다.
"고개를 들어라."
복면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피곤죽이 되어 있는 신도용의 고개를 수하가 들어 올렸다.
신도용은 풀린 눈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넨 자를 올려다봤다.
복면인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물건을 벗었다.
"난 남북천맹 맹주이신 천검무제의 제자 검괴 은자량이다. 내가 오늘 용상회의 표행을 건드린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니 넌 너의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자꾸만 천산검문의 사람들을 건들지 말라고 말이다. 이것은 경고이며 앞으로 다시 접근을 한다면 그땐 남북천맹 전체가 나설 것이라고 말이다."
신도용은 점혈이 풀리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의원을 불러 치료해 주고 살려서 보내라."
"알겠습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은자량을 따라 사라졌다.
이제는 어엿하게 확실한 독립 체제를 구축한 사마련!
네 개의 문파가 힘을 합쳐 이뤄 낸 결과물이 사마련인다. 헌데 이제는 네 개의 문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점점 세를 불려 나가고 있다.
사천성을 물론 운남성, 귀주성까지 크고 작은 문파들이 접촉을 해 오며 그 무리 안에 끼길 원했다.
남북천맹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전쟁은 원치 않았다.
물론 율천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저들이 자신들에게 적의를 드러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검을 뽑아 들었다고 다 적이 아니다.
저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모였을 뿐이다.
모두가 한때는 남북천맹에 있었던 한 식구였다.
그런 그들과 피를 보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현 중원 무림의 남북천맹은 군림하는 단체였다. 처음 탄생하게 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서로 검을 휘두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율천세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화무홍.
그는 지금의 분위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남북천맹이 조금씩 나약해져 가고 있는 이유는 피를 흘릴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별 같지도 않은 사마련이라는 단체가 떡하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북천맹에 권위에 도전하는 곳이 사마련이었다.
그런 곳을 지금까지 방치해 두는 일은 불씨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것도 늦은 일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섬멸해야만 한다.
사천성뿐 아니라 운남과 귀주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그들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수년 안에 현재와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해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화무홍은 그들을 멸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생각을 가진 이상 행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게 화무홍의 방식이었다.
검괴 은자량을 시켜서 사마련에게 자금을 대는 용상회의 표행할 물건과 표사들을 처리했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들은 천산검문과 관련된 자들에게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게다가 용상회라는 상단의 영업 확장도 어느 정도 제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점점 북으로 올라와 자신들과 배를 함께 탄 상단들과도 경쟁을 벌이려 하니 싹을 잘라 버려야만 했다.
화무홍은 그들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천산검문의 발전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전란의 시대는 영웅을 만드는 법이다.
그 영웅은 화진천이 되어야만 했다.
화무홍이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천하를 울릴 명성을 얻고 그 틈을 타서 맹주의 자리에 앉힐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맹주와는 다른 길을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전쟁은 화무홍의 의지대로 실현되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맹주인 율천세가 막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혈천마성이라."
사마태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저히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뿌리를 뽑았다고 하는 혈천마성의 부활이라니.
석지관은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총타를 떠났고 안휘성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지역은 그가 알기로는 혈천마성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문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석지관이 데리고 나갔다는 천지각의 요원이었다.
천지각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사내를 데리고 나갔는데 혼자만 목숨을 잃었다.
그 사내는 총타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자가 혈천마성의 첩자일 확률이 꽤나 높을 것이다. 그렇기에 석지관이 일부러 데리고 나가 처리하려다 되레 당한 것이리라.
사마태릉은 그렇게 결론을 지어 버렸다.
두 달이 넘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계속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는 자신이 그가 하려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천지각을 나와 천성각으로 향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절강성 주변으로 천지각의 주요 요원들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가."
"또한 혈천마성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 암흑제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곳으로 배가 드나들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헌데 근 일 년 동안 다니는 사람이 드문 밤늦은 시각에 여러 대의 배들이 그곳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흠……."
율천세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자리를 잡았다.
요즘 그의 얼굴에 그늘이 사라질 줄 몰랐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아직 저 또한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한 혈천마성의 부활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혈천마성의 구 할 이상은 그때 모조리 본맹의 힘에 굴복당했네. 그리고 대부분이 도륙을 당했지."
그때는 율천세가 태어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천룡원에 머무는 원로들에게도 들었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쇄암왕이라는 자가 유일하게 목숨을 보존했다 들었지."
"삼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쇄암왕이라는 이름은 후손에게도 전해져 내려오네. 현재 십이무룡 중 아도왕, 용호왕과 더불어 삼왕에 속해 있지."
율천세는 시비가 가져온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굳이 입에 갖다 대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과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네. 내 생각이지만 그들은 예전만큼 힘을 회복하지는 않았을 것이야."
"허면?"
"비밀리에 절강성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조금 이른 것이 아닐런지요."
율천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지금 더 늦은 상황일 수도 있어. 그들이 언제부터 준비를 해 왔는지는 알 수가 없지 않나."
"그렇군요."
"비밀스럽게 움직이게. 사대검문과 사부 사전 중에서 선별하여 움직일 것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성각 지하로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석실이 존재했다.
그곳에 율천세와 사부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모이라 한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정말 혈천마성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까?"
운부(雲部)의 부주 적유(赤劉)의 질문이었다.
삼십 대 후반의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율천세를 바라봤다.
"아직 완전히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허나 그 가능성이 굉장히 크지. 그래서 이번에 너희를 부른 것이다."
"구룡천부(九龍天部)가 가겠습니다."
구룡천부!
남북천맹 핵심 조직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있는 곳이 구룡천부다.
인원은 소수정예, 부주를 포함한 열 명이 다였다.
율천세가 단언하건대 그들 열 명이면 작은 문파 하나쯤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힘을 지니고 있다.
"구룡천부는 당연히 투입될 것이야. 가장 앞장서도록."
"존명."
구룡천부는 강하기도 하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수련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한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닌 진정으로 적이라 생각하고 수련한다.
다른 조직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여 줄 것이다. 율천세가 가장 신뢰하는 조직이 구룡천부이기도 했다.
"귀부는 어찌할 것이냐. 당연 천룡원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맹주께서 천룡원에 귀부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해 달라 전하신 것을 들었소. 하지만 아직까지 전달받은 사항은 없소이다."
"흠, 그런가. 허면 이번 작전에 투입될 곳은 구룡천부와 운부가 될 것이다. 신검부는 원래가 전투 조직이 아니니 말이다. 사전에서는 검살전 절반이 투입될 것이니 그리 알거라."
"소공자께서도 가십니까."
"아마도 그리할 것이다. 만약 천이가 참전한다면 그때는 귀부가 그 아이를 호위하여야 할 것이야."
"그건 원주께서 명을 내리셔야 하오."
귀성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딱딱했다.
"신검부주."
"예, 맹주."
사십 대 중반의 신검부주 조현(趙玄)이 대답했다. 신검부는 어린 후기지수들을 발탁하여 수련시키는 곳이었다.
그들이 익힐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성질을 발견하여 전수하고 지도하는 곳이 신검부였다.
"추천할 재목이 있는가."
"두 명 있습니다."
"호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실전 경험을 심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은데."
"준비시키겠습니다."
"때가 되면 내가 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게 오늘 밤이 될지 이틀 후가 될지는 모른다. 다만 그때가 되면 모두 은밀하게 총타를 빠져나가야 한다."
"존명!"
* * *
"두 달 만에 돌아오는구나."
패천문주 철대악이 수하들과 함께 사마련 총타의 정문을 지났다. 그는 사마련주 지청화의 명령을 받고 패천문의 터전을 모조리 정리한 상태에서 사천성을 떠났었다.
살락원과 접전을 벌인, 그리고 유장룡을 죽인 자들을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결과는 그의 표정에서 바로 드러났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패천문의 비밀병기들인 살락원을 격파시킨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다.
"련주께서 계시느냐."
"예. 철 문주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음."
철대악은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이미 실내에는 지청화와 북천휘, 사가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철 문주."
련주의 명을 듣고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들이다.
"회포는 나중에 풉시다."
웃으려 애쓰는 그의 얼굴이 지청화는 안쓰러워 보였다. 이미 그가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걸 보고 받았다.
"오늘 회담은 정식으로 사마련이 조직 개편을 완료했음을 알려 드리려 해서 모이시라 했어요."
"……."
세 사람의 얼굴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먼저 세 분은 본련의 호법(護法) 직책에 봉해졌습니다."
호법은 한 문파의 수장을 지키는 자들을 일컫는다.
련주인 지청화를 제외하고는 가장 서열이 높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간의 서열은 존재치 않았다.
세 사람은 어느 정도 수긍하고 만족하는 눈치였다.
"단, 지금의 혈화들은 여전히 제 직속이에요. 그 점을 잊지 마셨으면 해요."
그 말은 곧 호법이라 하더라도 그녀들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오직 련주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패천문, 혈천문, 음살문이라는 문파의 호칭은 폐지시키도록 하겠어요. 본련은 이제부터 연합이 아닌 하나의 단체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지난번 잃은 살락원의 인원은 음살문 출신 살수들로부터 채워질 것이에요."
"준비시키겠습니다."
"인원을 더 늘릴 생각이에요. 살락원은 본련의 가장 강력한 단체로 키울 것입니다. 인원은 총 칠십. 사 호법께서 정리해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제가 임의대로 배치시킬 것입니다."
그녀는 빠르게 자신이 세운 조직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마련의 조직도는 크게 외각과 내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각은 사마련의 총타를 외적인 일을 하는 곳으로 공격을 주목적으로 했다.
외각은 삼대(三隊)로 이루어지며 멸천대(滅天隊), 혈천대(血天隊), 화예대(火禮隊)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각은 사마련의 안쪽 일을 도맡는 곳으로 구성되었다.
총 사전(四殿)으로 조직되었다. 신화전(神火殿), 검호전(劍豪殿), 창무전(蒼武殿), 천기전(天氣殿)이 사전이었다.
"앞으로는 굉장히 바빠질 것이에요. 운남과 귀주에 있는 다른 문파들도 빠르게 흡수할 것이고요. 그 점을 유의해 주세요. 그리고 용상회에서 본련으로 보내려던 물건이 탈취되었어요. 검괴 은자량의 짓이라고 하네요."
"본련을 도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존심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미 손을 써 놨어요. 이제 사마련은 하나의 단체로서 구성이 갖춰져 있습니다. 남북천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사흘 뒤 다시 한 번 회담을 열 것이에요. 그때 본격적으로 남북천맹을 상대할 의견을 묻도록 하죠."
사마련이 이제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상대는 남북천맹이다.
너무나 오랜 시간 무림을 지배했던 그들과의 전쟁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흑천』 제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