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원점 (14/38)

第七章 원점

바다 위로 물살을 가르는 배 위에는 여수경과 하욱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바람을 맞았다.

차분하게 앉아 목적 없는 곳을 응시하던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이 왔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욱."

"예, 아가씨."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참 좋겠지?"

정말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욱은 쓰게 웃었다.

"그럼 저도 좋겠지요. 그리만 된다면 아가씨의 투정도 기분 좋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예전엔 어쩔 수 없이 웃었다는 거야?"

"아, 아니…… 그것이……."

하욱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며 여수경, 아니 초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욱은 그렇게라도 웃는 그녀를 보며 같이 웃었다.

벌써 사마련주를 만난 지도 열흘이 넘게 지났다. 그동안의 변화라면 초미가 예전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금제가 풀렸다.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다.

헌데 꼭 기쁜 일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초미를 옆에서 지켜보는 하욱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정말이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그때 그 일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살아갈 그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모든 건 초미가 선택한 일이다.

기억을 되찾는 것도, 그로 인해 사마련주의 조건을 들어주는 일도.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제 한 시진이면 도착할 듯싶습니다."

"그래. 하욱도 조금 쉬어."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나 눈을 좀 붙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한숨도 주무시지 못한 것 같은데."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하욱의 말대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원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바로 사마련주의 조건 때문이다.

기억을 되찾아주는 대신에 남북천맹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라는 것이었다.

사마련주는 그녀를 이용해 남북천맹의 상황을 자세하게 지켜보고자 함이었다.

초미는 어쩔 수 없이 그 조건을 들어줘야 했다. 원수들에게 복수를 해야만 하는데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사마련에게 도움을 주는 일밖에는 복수할 힘도 세력도 그녀에게는 존재치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총타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많은 자들이 의심하게 될 것이고, 또한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결정은 그대가 하는 거랍니다.'

사천성을 떠나기 전 사마련주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초미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고 그럼에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

총타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미는 다시금 남북천맹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멋있네요."

"흠! 칭찬에 인색하면 못 쓰오."

지청화는 노인의 말에 생긋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나 공부득(空不得)이 지은 건물들은 모두 최고이니."

그녀는 지나친 공부득의 자신감에도 웃음을 머금었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수년 전부터 많은 자금을 들여 땅을 사들여 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 그 땅 위에 계획했던 건물들이 완공되었다.

몸도 마음도 힘들어하던 요즘 지청화에게는 힘이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문 현판을 향했다.

그곳에는 사마련이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후우."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대연무장이었다.

앞으로 이곳에서는 사마련의 무인들이 각자의 수련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땀과 눈물, 노력은 사마련의 엄청난 힘이 될 거라 믿는다.

"어때?"

"좋습니다. 저보다는 련주께서 흡족해하시니 저는 괜찮습니다."

지청화의 뒤로는 일곱 명의 혈화들이 따랐다.

"수고 많았어요."

그녀는 공부득의 공을 치하했다.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 지은 이가 바로 공부득이다.

그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

공부득은 사천성뿐 아니라 천하에서 알아주는 목수이기도 했다.

"쇤네가 고생을 했습죠."

"감사해요. 약속대로 본련에서 머물도록 하세요. 그리고 한 달 이내로 건물들에 대한 세세한 그림을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지청화와 혈화들은 천화각(天花閣) 안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그녀가 모든 집무와 휴식을 취할 공간이었다.

실내는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수수하지 않게 적당히 꾸며져 있었다.

"홍."

"예, 련주."

"앞으로는 바빠질 거야."

"언제든 하명만 내려 주시면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지청화는 고개를 숙이는 여홍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청화와 혈화들은 그 이후 많은 담소를 나누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련주, 북천휘입니다."

"들어오세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일곱 명의 혈화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북천휘는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읍하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제일 먼저 온 모양입니다."

"그러네요."

뒤이어 철대악과 사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번거롭게 오시라 해서 죄송해요. 오늘 이 장소에서의 회합은 뜻 깊다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 본련의 위상이 이곳으로부터 시작될 테니까 말입니다."

"괜찮더군요. 올 때 보니 지리적 여건도 나쁘지 않고."

평소 무뚝뚝하여 칭찬을 모르던 사가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다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네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겁니까?"

"아뇨. 아직은 아니에요. 저희는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을 적에 움직일 거랍니다."

철저한 성격을 지닌 지청화였다.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아직도 사마련의 힘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세 명의 문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신들의 힘은 미미했다.

각자의 색이 뚜렷한 자신들의 힘은 하나로 묶여야만 했다. 그 중심이 사마련이고 또한 그 수장은 지청화였다.

그녀가 아직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이번 회합을 연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현재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예요."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바꿨다.

이제부터는 련주로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다.

"천기원주로부터 얻은 정보가 있어요. 현재 남북천맹에서 율무천이 다음 맹주가 될 것을 경계하는 자들의 명단을 입수했어요."

그녀는 미리 준비한 종이를 꺼내 보였다.

"이자들은 모두가 한 문파의 수장들입니다. 열화문(烈火門)의 속흥량(束興良). 용검문(龍劍門)의 소하천(召河天). 일풍문(日風門)의 곽검명(郭劍明). 절검문(切劍門)의……."

생각보다 남북천맹은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맹주의 자식이 다음 맹주의 자리에 오르는 걸 원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더 위험한 것은 그들의 문파가 작은 곳이 아니라 대방파로 분류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천산검문에서 맹주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사가훈."

"예, 련주."

"이들을 포섭하는 데 힘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음살문은 본련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죠. 그리고 이들을 포섭하려면 가장 은밀하고, 가장 빠르고 정확한 자들이 필요해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하세요. 재물이 필요하면 가져다 쓰시고요."

"존명."

"자, 다음은 철 문주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천기원과 힘을 합쳐 살락원주를 그리 만든 자들의 흔적을 찾아내세요."

살락원주 철유라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었다.

바로 담천, 사군악, 대찰영을 쫓다가 거의 반주검이 되어서 발견이 되었다.

지금은 요양 중에 있지만 그 일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철대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명령을 기다리던 바였다.

"다음은 북 문주."

"예."

"북 문주께서는 혈천문의 모든 병력을 이곳으로 이동시키세요."

"……!"

"왜 그러시죠?"

북천휘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이자 지청화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정도 마음가짐도 없이 남북천맹을 꺾을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처음 뿌리를 내린 장소를 떠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빨리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놀랄 만했다.

"지금까지 혈천문이 지니고 있던 장부들과 기밀문서들은 모두 소각하세요. 그 작업이 끝나는 대로 병력을 이끌고 본련의 총타로 모이세요."

"그리하겠습니다."

북천휘의 얼굴에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두들 잘 들으세요. 이제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해요. 저들처럼 사분오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패천문과 음살문도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제가 말한 일들을 처리하세요."

"존명."

"유라는…… 어떤가요."

지청화는 철대악과 바깥에서 산책을 했다.

아직 새로운 건물들을 모두 둘러보지 못했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련주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철유라가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지청화는 사천성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 다섯 명을 패천문으로 보냈다.

절정의 무인이 부상을 당해 자체적으로 치유를 못할 정도면 굉장히 심각한 상태일 것이었다.

걱정으로 잠을 설친 지가 꽤 되었다.

하지만 정작 찾아가 그녀의 얼굴을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철유라는 지청화를 멀리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시간에 비례하여 마음의 거리도 멀어졌으리라.

"그자들…… 대체 정체가 뭘까요."

천기원의 힘으로도 알아내기가 힘이 든 건 의외였다.

환도문의 복수를 원한다는 것 말고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살락원의 추격을 피하고, 혈화 세 명의 목숨을 취할 정도면 무공 실력도 대단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혈화 세 명도 전심을 다해 싸워야 철유라와 대적할 정도였다. 그만큼 강한 그녀를 쓰러트린 건 정말로 놀랄 일이었다.

그럴수록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일단은…… 천기원주에게 말해 놨어요. 그 아이가 발견되고 살락원 무인들의 시체가 발견된 절강성을 샅샅이 뒤지라고요."

"련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지청화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둘이 있을 적에는 조금만 저를 편하게 대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제가 어찌 련주께."

철대악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

"어머니께서 남북천맹의 손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뭐라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를 용서하려무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그거였어요. 어차피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걸 알고 계셨다면서요. 문파 간의 돈독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셨을 아버지기에 용서를 하라고요."

철대악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앞서 가던 지청화가 고개를 돌리자 철대악도 얼굴을 돌렸다.

자신의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어머니도 저도…… 이제는 용서했어요."

"고맙…… 고맙습니다."

떨리는 철대악의 목소리가 진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패천문과 화월문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철대악과 지예림은 혼례를 맺고 지청화를 낳았다.

하지만 철대악에게는 그 전에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었고 수년 뒤 첩으로 들여 철유라를 낳았다.

철대악은 지청화가 태어난 뒤로는 화월문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지청화는 자신의 아비가 누구인지 열 살 때 알았으니 부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의 눈물을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코끝이 찡하고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버지."

그 한 단어가 지청화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철대악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

"청화야."

그리고 처음으로 그가 딸의 이름을 불렀다.

* * *

천지각 내실.

"대체…… 어딜 간 겐가."

율천세는 벗이 쓰던 책상 위를 손으로 쓸었다.

구슬픈 음성이 공허하게 공간에 울려 퍼졌다.

혈천마성의 부활을 의심하며 떠난 석지관의 연락이 끊겼다.

총타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하루 한 번꼴로 전서구로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던 그의 연락이 끊긴 지 사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현재 천지각의 각주 자리는 공석이었다.

물론 천지각은 수장이 없더라도 무리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석지관이 워낙 기반을 잘 다져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헌데 정작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석지관이 없으면 그는 눈과 귀가 닫히고 막힌 것과 진배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도 싫지만 죽마고우인 그가 혹여 잘못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된 생활이 힘들어졌다.

천하에 퍼져 있는 천지각 요원들이 그의 행방을 쫓았다. 수일 내로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자꾸만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이 묘한 불안감.

율천세는 조용한 석지관의 집무실을 둘러본 뒤 실내에서 사라졌다.

율천세는 바쁘게 돌아가는 천지각 건물을 나와 이동했다.

"대주."

"예."

그의 앞에 흐릿하게 신형이 드러나더니 천무대주 구범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관 그 친구가 데려간 아이가 누구냐."

"이름은 서준. 천지각으로 들어온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서준……."

천지각이라는 단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신분조회를 받아야만 했다. 나이와 출신, 가족관계, 더 나아가 집안의 조상이 누가 있었는지조차 말이다.

그건 정말이지 기본적인 심사일 뿐이었다.

신분을 확인되면 다음에는 성격적인 부분을 검사받는다.

참을성이 많은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여성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대부분 돈 없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자들이 천지각으로 스며든다.

상급 정보를 취급하는 자들은 따로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된다. 수십 가지의 고문을 받으면서 보안을 얼마만큼 유지하는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석지관에게 가장 신뢰받는 비조라는 사내는 그걸 모두 통과한 자였다.

누구보다 사람을 믿지 않는 석지관이었다. 그런 그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신참을 데리고 나갔다는 건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의 실종과 분명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게 율천세의 생각이었다.

"흠."

율천세는 자신의 거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보고는 침음 성을 흘렸다.

그녀는 여수경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버님께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드리는 인사라서 죄송해요."

사부의 손녀라는 신분을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아들이 연정을 느끼는 상대였다. 허나 가까이 두기에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대외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그녀의 신분은 사부의 손녀딸이었는데…… 그게 진실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여곤의 손녀가 아니라 녹림총련 련주의 진짜 딸이 맞았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왜 자신의 사부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녹림을 부수려 했을까.

알 길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받은 충격도 컸지만 제자의 질문에도 여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바깥 구경을 하고 왔어요. 허락도 없이 나가 죄송해요."

"천이가 없으니 네가 외로움이 클 터. 개념치 말아라. 다만 네가 정녕 천이 그 아이를 생각한다면 일언반구도 없이 하는 외출을 삼가도록 하여라."

"네."

"그래. 그럼 편히 쉬려무나."

율천세는 꾸벅 인사하는 그녀를 지나 자신의 거처로 들어왔다.

서재로 들어온 그는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편한 침실이 있었지만 두 발 뻗고 자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천무대주입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구범악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는 천천히 율천세에게 다가와 그의 책상 앞에 작은 서찰을 내려놓았다.

율천세는 구범악의 눈을 바라봤다. 구범악은 고개를 떨궜다.

천지각주 사(死).

작고 새하얀 종이 위에는 그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아……."

가슴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뭉클 치밀어 올라왔다.

코끝이 찡하고 눈앞이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방금 전…… 천지각으로 도착했습니다."

구범악은 여전히 율천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차마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주군의 슬픔이 전해진다.

공기가 천근만근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신은."

"열흘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준비를…… 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구범악이 재빨리 몸을 돌리는데 율천세의 말이 이어졌다.

"그 친구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에게도 연락을 취해 주게나."

"존명."

구범악이 깊게 읍을 하고 사라졌다.

"자네를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미안하네."

남북천맹의 모든 이들이 상복을 입었다.

그날은 모두가 슬퍼했다.

남북천맹의 눈과 귀를 담당했던 천지각의 수장 석지관이 뒷골목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 일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모두에게 슬픔으로 다가왔다.

석지관의 명성은 총타 내는 물론 남북천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인자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일처리만큼은 냉철하고 정확했다.

수하를 제 피붙이처럼 아끼며 격려해 줬다.

그런 그가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총타로 돌아왔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꺼먼 관 속에 누운 채 총타의 정문을 향해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가 울렸다.

맹주인 율천세는 물론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 천룡원의 원로들까지. 총타 주변에 있는 중소방파의 주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 모두가 석지관의 임종을 지켜보며 슬픔에 잠겼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두 명이 있었다.

율천세와 이십 대 중반의 미공자였다.

"그만 쉬시지요."

"……."

율천세와 젊은 사내 뒤로 구범악이 다가왔다.

끼니도 숙면도 취하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해가 지면 나흘째로 접어든다.

두 사내 모두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진(眞)아."

메마른 율천세는 젊은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석우진(釋于眞).

세상에서 석지관이 남기고 간 유일한 혈육이었다.

"이제 나는 다 슬퍼하였다."

"……."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조금 힘이 드는구나."

"……."

"이 늙은이를 배려해서 네가 먼저 자리를 떠나면 안 되겠느냐."

석우진은 아무런 대답 없이 아비의 무덤을 응시했다.

"숙부."

"그래."

"아버지는 혈천마성을 증오하셨죠. 제 조부께서 그들의 손에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런데 제 아버지는 다시금 고개를 드는 그들을 찾아 나섰다가 돌아가셨고요."

"……."

"이제 전 어찌하는 것이 옳을까요."

지금껏 첩첩산중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부친의 죽음으로 세상을 증오하려는 증상을 보인다.

좋지 않다.

꼭 과거 석지관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무림에 발을 딛지 말라고요. 저도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잠시 말을 멈춘 석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헌데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숙부께 청이 하나 있어요."

"말해 보거라."

"저를…… 천지각 각주의 자리에 앉혀 주세요."

"진아."

"숙부…… 숙부께서 그리 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전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부탁드려요."

율천세는 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수십 년 전 젊은 석지관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리고 천지각의 수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혈천마성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잘해 줬다.

율천세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루…… 하루만 더 있다가 내려가겠습니다."

율천세는 어쩔 수 없이 구범악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이게 저 아이의 운명인가."

율천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맹주의 날개가 찢어져 없어졌군요."

석지관의 사망 소식은 이미 중원 천지로 퍼져 나갔다. 석지관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리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천지각의 각주라는 것과 맹주의 오랜 벗이라는 게 더 유명했으니까.

"맹이 가진 힘에서 사 할 정도는 맹주가 지니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게 절반으로 떨어진 셈이지."

화무홍은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차분했다.

"이보게, 태릉."

"예, 문주."

천산검문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사마태릉(司馬太楞)이 그의 앞에 있었다.

화무홍의 가장 측근이며 천산검문의 군사직을 일임하고 있는 이가 사마태릉이다.

율천세에게 석지관이 있다고 하면 화무홍에게는 사마태릉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었다.

천산비룡(天山飛龍) 사마태릉.

그는 화무홍과 같은 연배로 선조 때부터 천산검문의 주인을 모시던 가문의 사람이었다.

냉철한 머리와 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화무홍과는 성격과 품은 뜻이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본맹에서 천산검문이 차지하는 힘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 생각하는가."

"오 할입니다."

사마태릉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말했다.

평소 웃음이 없던 화무홍이 그의 말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런가…… 틀렸네."

"……!"

"만약 진실로 본문의 힘이 맹에서 차지하는 위력이 오 할이 넘었다면 벌써 나 화무홍이 맹주의 자리에 앉았을 걸세."

"하지만 문주."

"태릉, 천산의 힘은 강하네. 허나 그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삼 할 그 이상은 아니네."

"대막검문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사대검문에서 유일하게 본문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 대막검문이지. 또한 아직도 맹주를 따르는 이들이 많은 곳이 남북천맹이지. 본문을 따르는 이들도 적지는 않지만 남북천맹은 수많은 중소방파가 모여 만든 집합체. 그 힘의 시발점인 율씨의 핏줄은 나약하지 않지."

그는 진심이었다.

천산검문의 자긍심이 누구보다 강한 화무홍이 내뱉은 말이라고는 믿기 힘이 들었다.

사마태릉은 얼굴을 굳혔다.

지금 자신의 주인이 이런 말을 내뱉는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천이 그 아이가 폐관에 들어간 것은 내 명령이었네. 나는 말이야…… 남북천맹을 다시 세우려 하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갈아치우고 다시 과거의 영광을 이어 갈 생각이네."

화무홍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처음이다.

"천산을 따를 자들에게 확인을 받아 오게. 수장의 피로서 맹세한 서약서를 가져오게, 태릉."

"문주의 명을 받드나이다."

사마태릉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 * *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는다.

담천은 암흑제도로 온 이후 살이 급격하게 빠져 있었다.

그는 시냇물이 흐르는 강가 옆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얼굴은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옷들은 넝마처럼 찢어져 있었는데 사이사이 다친 상처들이 딱지가 앉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이러고 쉬고 싶었지만 담천은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켰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금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이들 때문에 신형을 날려야만 했다.

이미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이동은 굉장히 느렸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쾌속이겠지만 추격자들에게는 너무나 느렸다.

이윽고 담천의 앞으로 두 명이, 뒤로는 세 명의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원래는 열 명이었는데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반으로 줄어져 있었다. 모두 담천이 저세상으로 보냈거나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체력은 지칠 대로 지쳐 있지만 담천은 의외로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담천은 검을 들었다.

죽인 사내에게서 빼앗았던 검이다.

검 끝을 정면으로 향했다가 이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뒤에 있던 자들이 바짝 뒤쫓았고 앞에 있던 두 명은 자신들의 검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담천은 정면의 둘에게 검을 횡으로 그었다.

우윳빛 검기가 뿌려졌다.

콰쾅!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짠 공격이었다.

폭음과 함께 뿌연 먼지들이 일어났다.

담천이 노린 상황이었다.

재빠르게 앞에 있는 자의 허벅지를 베었다.

비명은 터지지 않았다.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방법부터 배웠을 것이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녀석들이었다. 다섯 명을 처리했지만 그때마다 비명은 들은 적이 없었다.

지독한 종자들이다.

한 명 한 명이 암흑제도로 오기 전 사마련에서 보낸 무리와 실력이 비슷했다.

담천은 달리는 와중에 목뒤로 날아오는 칼날을 피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양쪽으로 두 명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담천이 갑자기 몸을 멈춰 세웠다.

"하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가는 일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다섯 명을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주 무기는 철궁이었다.

주로 원거리 병기를 이용하는 자들은 주로 권장지각을 따로 수련한다.

병기가 없을 적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담천은 양손의 엄지와 검지, 중지를 세웠다. 나머지 두 손가락은 바닥으로 말아 쥐었다.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모두 죽인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세가 그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호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주문룡의 눈이 반짝였다.

사냥감의 강력한 반발을 지켜보고 있자니 흥미가 생긴 것이다. 세 명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자이기에 더욱더 말이다.

"제일 먼저 잡힐 줄 알았는데 말이야."

주문룡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대찰영과 사군악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문룡은 씩 웃어 보이며 다시 담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호왕투권(虎王鬪拳)이지."

"호왕투권."

주문룡의 옆에는 어느새인가 마존이 서 있었다.

사군악과 대찰영의 눈이 흔들렸다.

사우와 함께 남북천맹에 있던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에 놀란 것이리라.

"굉장히 위험한 권법이지. 담천은 철궁을 쓸 때보다 호왕투권을 펼칠 때 포악해지고 단단해지지."

"별종이군요."

"아마 네가 나서야 할 거야. 저 다섯으로는 못 잡아."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죠."

담천의 손이 상대의 어깨를 박살 내 버렸다.

이번에도 비명은 없었다.

곧바로 정강이로 명치를 걷어차 버렸다.

즉사.

담천은 미련 없이 다음 먹잇감을 쳐다봤다.

일각이라는 시간 안에 남은 네 명을 죽여야 한다. 지금 체력으로는 호왕투권을 그 이상 쓰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것도 호왕투권의 최대 단점 때문이다. 내력이 엄청나게 빨리 고갈된다는 것이다.

담천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터져 나왔다.

인간이 아닌 한 마리 흑호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스르륵.

"이제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죠."

담천의 앞에 주문룡이 나타났다.

"죽인다."

담천은 그 말을 내뱉으며 무작정 주문룡에게로 덤벼들었다.

검은 권풍이 주문룡의 가슴과 복부를 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주문룡의 섭선이 그것을 가볍게 막아 냈다.

담천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땅으로 꺼지듯 빠른 속도로 주문룡과 격돌했다.

담천은 주먹과 발을 이용해 사정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주문룡은 섭선과 쾌속의 보법만으로 그의 공격을 피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요."

실망했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주문룡은 담천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사냥감이 지쳐 있었다. 흥미가 떨어졌다.

권풍이 일어나며 담천의 공격이 멈추지 않았다. 가히 폭풍이 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기세였다.

아마 공격이 끝날 즈음 담천은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주문룡은 서서히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낼 수도 있는데 마지막 남은 사냥감이라 그런지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

다 같이 모여 기다려야 할 사람이 곧 오기 때문이다.

주문룡의 신형이 뒤로 빠르게 빠지더니 섭선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워낙 쾌속이라 잔상이 남는다.

주문룡의 무혼수라선은 엄청난 속도를 자랑한다. 웬만한 고수들조차 눈으로 쫓기 힘이 들 정도였다.

섭선이 그의 손을 떠나 담천의 어깨, 손목을 가격했다.

모두가 주문룡의 내력으로 움직인 것이다.

담천은 아픔보다는 놀라움이 컸다.

만약 주문룡이 검을 이용했다면 그것을 무림인들은 이기어검이라 부를 경지였기 때문이다.

'이기어검!'

담천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적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순간 검은 인영들의 칼날이 그의 양 허벅지를 베었다.

"크아악!"

"정확히 십칠 일 하고 반나절이 걸렸네요."

사군악, 담천, 대찰영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추격전 동안 버틴 시간이었다.

점혈을 당한 터라 세 사람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쇠사슬에 묶여 잠든 모습은 너무나 더럽고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흠. 사우가 곧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나요?"

"예."

"그럼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러시죠. 저들의 쇠사슬을 풀어 주고 깨끗하게 씻긴 다음에 점혈을 풀어 주거라."

"존명!"

"적응하기 힘들겠는데. 쩝."

초호진은 입맛을 다시며 양옆으로 쭉 줄을 서 있는 사내들을 둘러봤다.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봐."

"왜."

"저 시커먼 놈들은 뭐야."

앞에서 당당하게 팔자걸음으로 걸어가는 사우에게 물었다.

"적이요?"

옆에 있던 무진이 묻는다.

"네놈 눈에는 검 찬 놈들은 다 적으로 뵈니?"

"그것이 무림이오."

"잘났다, 아주."

초호진이 빈정거리며 사우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여기가 어디냐니까."

"뭘 그렇게 계집애처럼 말이 많아. 따라와 보면 알 것을."

이곳이 암흑제도라는 사실을, 과거 혈천마성이 이 장소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면 까무러칠 것이다.

아직까지 초호진과 무진은 알지 못했다.

뭐 중요한 사실이라 알려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피곤해서 말을 하기가 귀찮았을 뿐이다.

세 사람이 포구를 지나자 그들의 뒤로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뒤따랐다. 거의 오십여 명의 인원이 그렇게 따르니 꽤나 장관이 연출되었다.

초호진은 몸서리를 쳤다.

저들이 모두 여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징그럽소."

뒤를 힐끗 본 무진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초호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네놈도 남자구나."

무진은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며 앞을 응시했다.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쇄암왕이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야."

"이적, 인사드립니다."

주문룡과 이적이 사우의 앞에서 깊게 허리를 숙였다.

너무나도 정중한 태도에 초호진과 무진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우가 멀쩡한 두 남자에게 이런 인사를 받을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시죠."

"그럴까."

여전히 팔자걸음으로 사우는 주문룡과 이적을 따라갔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던 섬이라고 생각했지만 잘 훈련된 무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엄청나게 화려한 건물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남북천맹만큼은 아니지만 잘 해 뒀네."

사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본성의 힘을 빼앗아 가 만든 곳이 지금의 남북천맹의 총타입니다. 언젠가는 다시금 찾아와야 할 곳이기도 하고요."

주문룡이 말한 찾는다는 표현에는 무너트린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물론 그만 알고 있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본성?'

초호진은 주문룡이라는 사내가 내뱉은 그 단어가 귀에 걸렸다.

무림정세에 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현재 무림에서 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단체는 없는 듯했다.

사군악과 담천, 대찰영이 처음 이곳에 와서 주문룡과 대화를 나눴던 공간에 도착했다.

모두가 착석을 했다.

"마존?"

자리에 앉자마자 안으로 마존이 들어왔다.

그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초호진과 무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북천맹에 있지 않았소?"

사우에게는 분명 그리 들었었다.

"쫓겨났어."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더라고. 천지각주라는 사내가 말이야."

"죽였나?"

"어."

해맑은 소년의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였다 말하는 마존의 모습은 소름 끼쳤다.

사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지금쯤 남북천맹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천지각주의 죽음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일대 살수 조직들의 멸망이 눈앞에 훤하다. 뿐만 아니다. 눈과 귀를 담당하던 기관의 수장이 죽었으니 사대검문은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인물을 앉히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게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

"지금은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사우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배어 나왔다.

대막검문에서 흑천의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그들의 손이 닿아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들의 손이 뻗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사대검문 중 대막검문까지일 줄은 몰랐다.

대막검문은 앞으로 중요한 요충지였고 아껴 두려던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남북천맹의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 되었다. 엉뚱한 곳에 힘을 빼게 해서도 안 된다.

헌데 천지각주의 죽음으로 인해 남북천맹은 그 뿌리마저 흔들릴 게 뻔했다.

"내가 실수를 했네."

마존은 금방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 석지관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부른 남북천맹 무인들로 인해 더 큰 피를 흘렸을 것이다.

자칫 덜미를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우도 그 점에 대해서는 질책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질질 끄는 건 그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대막검문이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이상 남북천맹을 떠났어야만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

모두가 그의 혼잣말을 들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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