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章 흔적을 들키다
사우는 율천세와의 대화가 있은 지 이틀 뒤 총타를 나왔다. 바로 떠나지 못한 것은 그날 연무장에 있던 자들 때문이었다.
'겨우 그거밖에 안 되었나. 율무천.'
연무장에 온 자들을 살펴보니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앞으로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율무천은 화진천에게 피해를 주면서 새로운 무룡단을 창설하기 원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적어도 그의 편에 서 있는 문파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자들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번 무룡단원들보다 실력이 한참 떨어진다.
폐관에 들어간 율무천이 우스워 보였던 모양이다.
"아직 사람 다룰 줄 모르는 애송이였네."
사우는 비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다룰 줄 모르면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 설사 된다 하더라도 오래가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율무천은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 폐관에서 나오면 꽤나 열이 뻗칠 일이다.
결단코 자신의 도움이 없이는 맹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위인이다.
"후우. 이제 어찌한다."
총타를 나오긴 나왔다.
그런데 여수경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막막했다. 일단 사천성으로 간 것 같기는 한데…… 아마 지금쯤이면 사마련 쪽에서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 봤자 헛수고일 것이다.
사마련이 여수경을 이용해 남북천맹을 조금이나마 흔들어 보겠다고 시행했을 작전인데 그게 먹히지 않았다.
그럼 여수경이라는 존재가치는 매우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죽일까?
만약 죽인다면 사마련은 녹림총련처럼 세상에서 지워지게 된다. 가뜩이나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사마련일 게다. 명분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건들지 않는 것이리라.
천하를 지배하는 남북천맹과 대적하겠다는 사마련의 수장이 그 정도도 생각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율천세도 여수경이 사마련으로 향하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천지각주 석지관도 마찬가지다.
명분이 생겼음에도 사마련을 치지 않는 건 남북천맹이 제대로 융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의 전쟁은 출혈이 심하기에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안정된 상태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사마련을 없앨 것이 자명한 일이다.
사우는 여수경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이참에 사마련에 대해 조사해 둘 필요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대신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대막검문!
그곳으로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만 한다. 그들이 손을 들어 줄 사람이 화진천인지 율무천인지를 말이다.
* * *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그래? 뭐, 이렇게 느긋하게 바깥바람을 쐬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거겠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말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시비처럼 보이는 여인이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허나 쉽게 다가와 치근덕거리지는 않는다.
허리에 차여진 검 때문이다.
뒷골목에 건달들도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와중에 일반인들이야 눈치를 살피며 힐끔거리는 것이 다였다.
"미안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열 명의 혈화 중 셋이 먼저 떠났잖아."
지청화의 옆에 있던 시비, 아니, 그녀를 호위하는 혈화들의 수장 혈화장 여홍(黎虹)은 고개를 숙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가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혈화장으로서 그 아이들이 련주의 명을 이행하다 죽은 것이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거짓말임을 너무나 잘 안다.
여홍과 아홉 혈화들은 친자매들처럼 성장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서로 살을 부딪치며 울고 웃고 힘든 수련을 버텨 온 사이다.
그런 아이들이 셋이나 죽었다.
내색을 하지 않고는 있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멍이 들고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오히려 련주께 면목이 없을 따름입니다. 련주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지청화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기에 더 미안하고 고마운 것이다.
여홍은 친언니 같은 존재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지청화에게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홍에게만큼은 사마련주의 위엄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다.
여홍과 있을 때만큼은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여긴가?"
"네."
"들어가 보자."
도시 외곽에 있는 객잔으로 두 사람은 들어갔다.
남자들의 시선이 두 여인에게로 모여졌다.
절세라 부를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이 뜸한 이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언니."
"네, 련주."
"쥐새끼들이 좀 많은 것 같아."
여홍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일각 정도가 지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녀의 옆으로 돌아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네, 그 사람."
"가까이 두기에는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천기원주라는 사내는요."
지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그가 지닌 힘을 온전히 사마련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곁에 둬야지."
두 여인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맹주의 자식이 폐관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천산검문도 뭔가 피해를 입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입니다."
"그러게. 율무천이라는 사내가 일부러 무리수를 둬 가면서 만든 작품 같았는데 말이야."
"폐관에서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제대로 붙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지. 화진천은 아끼던 사제를 잃었고 율무천의 선전포고를 받았으니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겠지. 그의 부친이 화무홍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만만하게 보지는 않을 거야. 율무천도."
"허면…… 련주께서는 언제쯤."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그녀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차분하게 때를 기다린다. 분명 준비하고 기다리면 그 기회는 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아이인가."
지청화는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는 일남 일녀를 보자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
"이렇게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은 이미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지청화가 앉아 있는 장소까지 정해져 있었기에 처음 보는 만남에도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수경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지청화예요."
하욱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인 둘이 나와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에게 접촉한 사람은 사내였으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이 사마련주 천상무후 지청화라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의 거물급 여인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수경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무림인의 여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기에 영 무지하지는 않았다.
율무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사천성에 기반을 둔 남북천맹에 반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이다.
그게 사마련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무리의 주인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분에게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예.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녹림총련 련주의 자식이었다는 걸 들었어요. 그때 제 이름이 초미라는 사실도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
"권호께서 설명하신 것이 전부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땐 지금 소저는 강제적인 금제로 인해 기억을 못하시는 것으로 보여요."
"금제……요?"
"네."
"그게 사실입니까?"
"인간의 정신력은 그리 약하지 않지요. 부친께서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하더라도 기억상실에 걸리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판단을 내렸죠."
"그렇다면?"
"남북천맹에 담오(覃吾)라는 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금제술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하더군요."
여수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충격이었다.
"제가…… 그 금제를 풀어 드리죠."
"정말인가요?"
"단…… 조건이 있어요. 그건 소저의 기억이 되돌아오면 그때 말씀 드리죠."
감숙성(甘肅省) 대막검문.
그 시작은 남북천맹이 결성되기 아주 이전부터였다. 혈천마성이 중원을 지배할 적에도 대막검문은 건들지 못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저 멀리 감숙성에 있어서일까?
아니다. 당시 혈천마성이 전성기를 이룰 때에도 감히 대막검문을 핍박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 사대검문 중 대막검문을 가장 낮게 본다.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대내외적으로 아무런 활동하는 바가 없다. 얼마 전 총타에서 열린 소천회의에 문주가 직접 찾은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남북천맹의 힘을 뒤에 업고 돈이든 권력이든 쟁취하고 빼앗을 법도 한데 전혀 없으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게 당연하다.
허나 무림인이라면 그들의 눈과 귀를 거슬리게 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는 목숨을 포기한다.
대막검문은 감숙성 난주(蘭州)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중원에서 서역으로 가는 통로에 위치해 있다. 난주의 지배자 대막검문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있다.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알아서 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중원과 서역을 오가는 너무나도 많은 상인들과 상인단체들이 그들에게 뒷돈을 대 준다. 그 재물이 너무나도 많이 쌓여 지하에 파묻어 둔다는 소문까지도 있다.
강한 무인들도 많다.
그들은 막대한 재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문파를 지키는 무인들에게 투자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대막검문의 속해 있는 무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순수 무인들만 삼백여 명 정도 된다.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같은 사대검문의 천산검문과 보천검문의 무인들은 일천이 넘는다.
그런데 숫자가 적다고 무시하지 못한다.
소수정예.
한 명 한 명의 무공은 일당백의 수준이다.
"대막검문이라."
커다한 현판이 걸린 정문에 다다른 사우가 중얼거렸다.
대막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사대검문은 물론 맹주조차 이들의 눈치를 살핀다고 한다. 이들이 후계자 쟁탈 싸움에 끼어들면 폭풍의 핵이 되는 것이다.
"쩝."
입맛을 다시며 정문 앞에 서 있는 무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봐."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대막검문인데……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하겠지?"
빈정거려도 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철저하게 수련된 자들이다.
삼류라면 감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다.
"가서 너네들 담당에게 전해라. 남북천맹 율무천의 대리인이 찾아왔다고."
대막검문의 가신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자리였다. 물론 그래 봤자 남자들이고 일곱 명밖에 되질 않는다.
좌우로 세 명씩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당연히 대막검문의 문주 제천검신(霽天劍神) 서문륭이다. 중후한 인상을 지닌 그는 무인이기보다는 평범한 농부처럼 보였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복장도 수수했다.
오히려 문주인 그보다도 다른 가신들의 복장이 더 화려하다.
"같은 공간에서 머무는데도 각자의 일에 전념하시느라 자주 못 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잘들 지내셨는지요."
서문륭이 좌우를 둘러보며 안부의 인사를 건넨다. 한 달의 한 번씩 모이는 이 자리는 혈족끼리의 침목 모임이었다.
"형님께서는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 아무래도 가문이 평안하고 대막검문의 내실이 튼튼해지니 그럴 수밖에."
하나뿐인 동생 서원우(西元宇)를 보며 그는 따스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동생은 중원을 다녀왔는데 괜찮았는가?"
서원우는 삼 개월 전 대막검문을 떠나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며칠 전 돌아왔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답답했던 차였는데 좋은 경험을 하고 왔지요."
서원우는 바람처럼 떠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한 곳에 머물기를 꽤나 어렵게 느끼기도 했다.
서문륭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좌측을 살폈다.
우측에는 서원우와 그의 아들 둘이 앉아 있었다.
좌측은 그보다 연배가 높은 자들이었다.
서문륭의 숙부들이었다.
"요새 백명이가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뿌듯하시겠습니다. 일숙."
그에게는 세 명의 숙부들이 있었다.
태어난 순으로 일숙, 이숙, 삼숙으로 불렀다.
서문륭과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인물은 허연 백발의 노인이었다.
대막검문에서 모든 무인들을 총괄하는 총감 직책에 있는 서자평(西滋平)이었다.
서자평에게는 늘그막에 낳은 자식이 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서백명이었다. 노쇠한 아비를 대신하여 조만간 뒤를 이어 총감의 자리에 앉을 아이기도 했다.
자식의 칭찬에 서자평의 얼굴에 밝은 기색이 떠올랐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약관의 나이인 녀석인데 과분한 칭찬은 아직 때가 아니옵니다."
"그런가요. 하하! 전 그저 일숙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이가 그리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서문륭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중 그의 표정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소문주께서도 천하의 기재가 아닙니까."
"하하! 이숙이 이 조카를 놀리시려는군요."
"놀리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서지황(西志晃)의 말에 서문륭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녀석은 숙부님들께서 칭찬하실 재목이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대막검문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자신의 아들이 부끄러웠다.
아우의 자식들이나 숙부들의 자식들과는 달리 대막검문 직계 자손으로서의 품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분명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골이기는 하나 성정이 게으르고 노력할 줄도 모르는 아이다.
"헌데…… 륜(倫)이는 어딜 갔습니까."
삼숙의 질문에 서문륭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아마도…… 아도왕을 따라 외부로 나갔을 것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이런 날이라도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숙부님들이 이해해 주십시오. 워낙 제멋대로인 아이이니 말입니다."
서문륭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늦은 밤 서륜과 아도왕 서패우는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 녀석 뭐지."
"목숨이 서너 개는 되나 보지요."
헌데 두 사람은 검은 그림자 하나가 대막검문 담을 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정말 신출귀몰한 몸놀림이다.
두 사람의 경지가 높았기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대막검문 무인들의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몸놀림이라면 알아차리기 힘이 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죽음의 문턱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두 사람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몰라도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있었다.
온통 비밀스럽게 감싸여진 대막검문을 염탐하려 한다던가 아니면 그 안에 존재하는 재물을 탐하는 자들.
그런 자들은 들어왔다가 몸 성히 돌아가지 못했다.
서륜과 서패우는 당당한 보폭으로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수하들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침입자의 경지가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질책은 사기만 떨어트릴 뿐이다.
서패우는 서륜이 기거하는 곳까지 따라와 함께했다.
"오늘 왜 그러는 거야. 평소처럼 다르게."
서륜이 서패우를 흘기며 올려다봤다. 워낙 장신이라 눈을 일직선으로 보며 대화하기 힘들다.
"아버지가 나를 좀 쫓아다니래?"
"아닙니다."
"그럼 뭐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나 하고."
평소에는 서륜 혼자서 움직였다. 어딜 가든지 수하들을 붙이지 않는다. 또 서륜 본인이 그걸 거부한다.
몰래 따라붙으면 반병신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늘 혼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도왕 서패우가 따랐다.
그였기에 참은 것이다.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검을 들었을 것이다.
"도련님."
"왜.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나가. 피곤하니까."
서륜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대꾸했다.
"왜 그러고 사십니까."
정색을 하고 입을 여는 서패우의 말에 서륜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어때서."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밖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요."
"재밌잖아."
"문주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셔."
"하!"
서패우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이 뭐가 부족해서 시장에서 물건이나 팔면서 지내시느냐 이겁니다. 저는 그게 너무 답답합니다. 그 잘난 능력으로 조금 더 큰일을 하셔야 합니다."
서륜이 피식 웃었다.
"대막검문에는 인재가 많잖아. 나 말고도 다른 놈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삼숙들도 계시고."
"무인은 강자가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걸 내가 모르나?"
"대막검문에서 문주 외에는 도련님이 가장 강하십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맹주의 아들 율무천과 천산검문의 화진천…… 그 두 사람은 도련님의 상대가 안 됩니다. 맹주가 율무천을 폐관에 집어넣고 화진천에게는 죄를 묻지 않은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분명 화진천에게도 뭔가 처벌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죠. 그건 곧 핏줄이 아니더라도 맹주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것이죠."
서륜은 전혀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너무 앞서 가서 생각하지 말라고. 맹주가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지 않는 이상은 가능성이 없어."
"아뇨. 단 일 할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 볼 만합니다."
"그래서 나보고 맹주의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
"오랜 숙원입니다. 대막검문의."
"후우."
서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가만히 두질 않는다. 자신은 그런 고리타분한 자리에 앉기가 싫었다. 무공을 배운 것은 그저 재밌고 즐거워서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고 성장하는 게 즐거웠다.
결코 맹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자꾸만 자신을 정상으로 끌어올리려고만 한다.
아버지도 아도왕도, 집안의 가신들도 말이다.
그게 싫어 무공을 등한시해 왔다.
성격도 비뚤어졌다.
자유로운 것이 좋았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아까 담을 넘던 그 녀석 말이야. 뭘 노리는지는 몰라도 지금쯤이면 밖이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말이야."
그저 서패우의 잔소리를 듣기가 싫어 말을 돌린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툭.
어둠을 이기려는 촛대가 놓여 있는 둥근 탁자였다.
그곳에 율무천을 증명하는 패가 던져졌다.
"율무천의 대리인."
사우는 짧게 말하며 자신을 보며 웃는 중년인을 바라봤다.
"대리인치고는 꽤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나 보군. 내 거처는 일류라 칭함받는 아이들이 지키고 있는데."
중년인, 서문륭은 새파랗게 어린 놈의 짧은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수하들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나 지나치네."
"그런가. 나름 중원에서는 알아줄 아이들이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우는 침입자였고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자네를 실망시켜서 미안하네."
사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 사내…… 자신을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심장이 쿵쾅거린다. 몰래 담을 넘어 들어올 적에도 흔들림 없던 심장이다.
"나는 자네를 아는데…… 사유환(史幽丸)의 동생…… 사우."
"……!"
사우의 몸에서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폭발적인 살기가 터져 나왔다.
서륜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터진 엄청난 굉음에 감았던 눈을 떠야만 했다.
'녀석인가.'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대막검문의 담을 넘은 자가 살아남을 확률은 일 할도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소리는 침입자가 자신의 존재를 들킨 것과 진배없다.
침입자를 본 것이 반 시진 정도가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다. 그때까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 말이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무복을 갈아입었다.
이미 밖은 난리가 났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백주대낮처럼 불빛들이 새어 들어왔다.
무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도련님, 패우입니다."
"들어와."
서륜이 막 검을 챙길 때 서패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문주께서 계시는 곳을 침입했다고 합니다."
"호오. 대단하네."
"헌데…… 문주께서."
"응?"
"출혈이 있으십니다."
서륜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그는 뭔가 엄청난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단언한다. 아버지가 무림에 절대 강자라 칭함 받는 남북천맹 맹주 율천세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것을.
오로지 순수한 무공만으로도 아버지는 중원천하제일이다.
서륜은 그렇게 믿었고 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보게 만든 인물이 나타났다.
서륜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층 창문을 넘어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아버지!"
대막검문의 무인들과 가신들이 몰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앉아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외적인 상처보다 내상을 입은 듯했다.
서문륭의 가장 옆에는 검호각(劍豪閣)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켠 채로 그의 곁을 지켰다.
"륜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평소 서륜에게서 볼 수 없는 다급함이었다.
서자평 또한 어두운 얼굴이었다.
"살수가 침입했던 모양이다."
"그놈은 어디 있죠."
서륜은 아버지 서문륭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운기행공에 들어갔으니 금방 일어서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미 본문의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미 암혼전(暗魂殿) 무인들이 흉수를 쫓았다. 물론 암혼전수도 나섰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막검문의 암혼전은 가장 신법이 뛰어난 자들을 선별하여 조직한 곳이다.
게다가 그들은 신법뿐만 아니라 특수한 살수 교육까지도 이수한 자들이다.
흉수를 잡는 데는 두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륜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상까지 입을 정도로 무리를 할 정도면 엄청난 고수일 것이다.
암혼전이 상대하기 힘들 게 뻔하다.
"감숙성 전체를 포위하세요."
"……!"
서자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륜아."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시지 못할 경우 나 서륜이 대막검문 문주의 직계 혈통이므로 전권을 이양받을 수가 있습니다."
"……!"
"아도왕!"
"예."
"정예 오십을 끌고 나가 난주에 존재하는 포구(浦口)들을 지켜라."
"존명."
"일숙께서는 다른 숙부님들과 함께 본문과 아버님을 지키세요. 백명!"
서자평의 아들 서백명이 무릎을 꿇었다. 평소와는 다른 서륜의 기세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나와 함께 서른 명의 무인들을 데리고 흉수를 찾는 데 주력한다."
"존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늦은 밤에 일어난 소란이었다.
'젠장.'
수로를 이용하려던 사우의 계획이 막혀 버렸다.
벌써 포구 다섯 곳이 대막검문의 무인들에게 통제되고 있었다.
사우의 성격상 그냥 밀어붙이고 배를 타고 떠나면 된다. 숫자가 백 명이든 이백 명이든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이 건드린 자가 대막검문의 문주 서문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흑천광무(黑天光武)."
사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얼마만큼의 강하고 무서운 상대인지도 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알아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대막검문의 문주가 그일 줄도 상상치 못했다.
사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중원으로 혼자 떨어진 이후에 사람에게 구천제혈신검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구천제혈신검의 초식을 펼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뼈를 묻었을지도 모른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제 그가 흑천살막으로 연락을 취할 것이다.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이다. 그것도 율무천의 대리인이라는 신분으로 있다는 것도.
이제 그들에게 신분을 들켰다.
저들이 작정하고 덤빈다면 천하 그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없다는 걸 사우는 알고 있었다.
다시 남북천맹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했다.
'후우.'
사우는 주변을 살피다 이내 신형을 감췄다.
* * *
"입에 맞는가."
"예, 뭐. 그럭저럭 먹을 만합니다."
석지관과 젊은 사내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석지관은 맹주 율천세에게 허락을 맡고 혹시 모를 혈천마성의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총타를 떠났다.
혼자는 아니었다.
천지각이라는 건물 안에서 함께 일하던 수하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가 바로 앞에 있는 사내였다.
젊은 사내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얼굴이 어려 보였다. 늘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 것 빼고는 평범한 축에 속해 있었다.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보내는 천지각이기에 더 눈에 띄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안휘성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먹어 보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군."
입맛이 까다로운 석지관도 만족시킬 정도로 음식의 맛은 일품이었다.
석지관의 앞에 있는 사내 마존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뒤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왜 석지관은 마존을 함께 데리고 절강성까지 나온 것일까.
식사가 끝나자 석지관은 짐이 놓인 방으로 올라갔고 마존은 숙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천천히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사우 님으로부터 온 연락입니다."
검은 그림자는 마존에게 작은 서찰 하나를 건넸다.
마존은 그 내용을 읽고 난 뒤 바로 그 자리에서 불태웠다.
"중요한 내용인가 보군, 그래."
"글쎄요.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죠."
마존은 석지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객잔을 나올 적부터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을 안휘성까지 데리고 올 이유 또한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지각은 그런 곳이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불순한 목적을 지니고 총타로 스며든 것을 말이야."
석지관의 몸에서 강맹한 기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가요."
마존은 희미하게 웃으며 싸울 준비를 했다.
사우가 보낸 서찰에는 총타를 빠져나가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 틀어진 것이리라. 그러니 이제 석지관을 쫓을 이유는 없었다.
그를 죽이던지 아니면 유유히 몸을 빼내던지 그건 자신의 선택이다.
마존은 등을 보이기는 싫었다.
결국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대신 죽이지는 않으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석지관의 발이 마존의 허벅지를 향했다.
후웅.
하지만 마존의 몸이 붕 떠올라 벽을 박차고 공중에서 회전함으로 공격을 피했다. 뒤이어 마존의 검초가 석지관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쉬시시식.
순식간에 하나의 검 끝이 다섯 개로 늘어나 그의 몸을 난자하려 달려들었다.
허나 석지관이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조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상대가 누구든 찢어발길 기세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내지를 적마다 터지는 바람 소리는 엄청났다.
괜히 광풍권이라는 별호가 붙은 게 아니다.
그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마존의 옷을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마존의 옷은 넝마가 되기 직전이었다.
검과 주먹의 싸움.
누가 보더라도 날카로운 병기인 검이 우세할 것이라 사람들은 믿는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경우가 있다.
무림인들의 싸움이 그렇다.
몸 안에 지니고 있는 내공의 차이, 그리고 얼마만큼의 실전 경험을 지니고 있는지의 차이.
주먹이 검을 이길 수 있다는 건 그 차이에서 판가름이 난다.
석지관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가 좋다고, 맹주의 벗이라고 천지각 각주라는 요직에 앉은 것이 아니다.
두뇌와 무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게 석지관이다.
쾅!
마존의 복부에 드디어 석지관의 주먹이 박혔다.
마존의 몸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혈천마성이 보냈느냐."
음성이 차가웠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석지관의 눈빛은 마존을 향했다.
"크크큭."
입안에 핏물이 고여 있는 상태에서 웃었다. 그러니 턱 밑으로 핏물이 흘러내린다.
"네놈을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만 네놈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하니 잠시만 살려 두마."
마존의 시선이 그의 뒤를 향했다.
"이곳은 안휘성…… 남북천맹 부맹주가 있는 구역이기도 하지. 나 혼자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말을 하던 석지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살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 부맹주에게 연락을 취해 무인들을 배치시켜 놓아 달라 연락을 취했었다.
그런데 지금 뒤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다.
석지관은 마존이 웃는 모습을 보고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라서."
검은 그림자들이 주변을 감쌌다.
그들은 마존이 석지관의 계획을 알고 세워 둔 주문룡의 수하들이었다.
마존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이, 이놈!"
"비조라고 했던가. 그놈은 이미 잡혔다는 걸 알려 드리죠. 저승길 가시는 길 외롭지는 않으실 겁니다."
* * *
"놓, 놓쳤습니다."
쾅!
서륜은 탁자를 부숴 버렸다.
흥분한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보였다.
침입자를 허용한 것만으로도 용납하기가 힘이 든 일이다. 그런데 재물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대막검문의 주인 서문륭과 대적하려다 도주한 자가 있다. 그건 대망신이었다.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 무인이야 없을 리 없지만 서륜은 그것이 너무나도 강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막검문 아래 모인 무인들은 그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다.
"이틀 전 낮에 율무천의 대리인이라는 사내가 찾아왔었다 합니다."
서륜은 그날 밤 그 일이 있기 전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알아내기를 원했다.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는?"
"정문에서 경비를 서던 무인은 자신들의 상관에게 보고를 했지만 그자는 무시했다고 합니다."
"율무천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찾아올 리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건가."
"그렇습니다.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했다가 일이 벌어지자 겁이 났는지 수하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모양입니다."
"아도왕이 알아서 처벌을 내려."
"알겠습니다."
"살수는 아니라는 말인데."
서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지금 즉시 총타에 있는 자들에게 알아봐. 율무천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존재하는지."
"존명."
아도왕이 물러가자 서륜은 생각에 잠겼다.
서륜은 아버지에게 내상을 입힌 자가 낮에 찾아왔다가 돌아간 율무천의 대리인이라고 확신했다.
뭔가 아버지에게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는데 무시를 당하자 밤에 몰래 찾아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율무천의 대리인과 피를 볼 이유가 있던가?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없다.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않으시던 아버지다.
그런 분이 쉽게 흥분하여 살검을 휘두를 일은 거의 전무하다.
게다가 더 의아스러운 건 대리인의 무공 실력이다.
아버지에게 내상까지 입힐 정도면 초일류의 고수다.
그런 자가 율무천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빌어먹을."
서륜은 머리를 감싸 안아 쥐었다.
아침 햇살이 밝았다.
사우는 햇빛이 비치는 창문을 열고는 자연스럽게 바깥을 내다봤다.
벌써 난주에서 머문 지 열흘이 지나갔다.
대막검문 무인들이 주변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한풀 꺾인 시점이다.
그들에게 걸리지 않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
목격자가 있다 하더라도 밤인데다가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면 알아볼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서서히 감숙성을 빠져나갈 때가 된 것이다.
그날 밤 사우는 은밀하게 감숙성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목적 방향을 잡아 움직였다.
* * *
"흑천의 동생이 살아 있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북하게 만들었다.
마치 검 끝으로 철판을 천천히 긁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이 비추는 곳에는 세 명의 노인이 엎드려 있었다.
그중 한 노인이 대답했다.
"흑천광무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율무천의 대리인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토록 찾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있었군."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다시 숨은 놈을 무슨 수로 찾는다."
"잠시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길 원하십니까."
"그러도록 하지."
그걸로 끝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세 명의 노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