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章 또 다른 준비 (12/38)

第五章 또 다른 준비

천지각으로 오고 가는 정보들에는 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급에서부터 십급으로 분류가 된다.

그중에서 일급은 천지각주 석지관에게 직접 전해진다. 작은 종이에는 일반인들이 알아보지 못할 암호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석지관과 그에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바칠 비조(飛鳥)가 아니면 해석할 수가 없다.

또 한 명이 있다면 바로 맹주 율천세였다.

한 해에 두 번도 전해지지 않을 일급이 석지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밀지를 펼쳐 읽었다.

처음에는 손이 덜덜 떨렸으며 다음에는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다.

며칠 전 맹주의 제자 소립의 사망 소식보다 더 말이다.

석지관은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천성각을 찾았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오랜 벗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나지 않는 석지관이었다.

율천세는 그의 굳은 얼굴과 새하얗게 변해 버린 얼굴색을 보곤 불안함을 느꼈다.

"비조로부터 연락이 왔네."

"……!"

"절강성으로부터 온 소식인데…… 암흑제도라는 섬에서 뭔가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 하네."

"암흑제도?"

그런 섬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절강성이라는 항목이었다.

"절강성이라 하면……."

"맞네. 혈천마성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곳."

율천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설마!"

"진정하게. 아직은 확실한 정보가 아니니.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어. 내 직접 가 볼 것이네."

"자네가 말인가?"

"오늘 당장 떠날 것이니 그리 알게나."

"하지만 지관."

석지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지 않나. 내 부친께서 누구의 손에 돌아가셨는지."

"그럼 천무대주를 데리고 가게. 혼자는 위험하니."

"나도 소싯적에는 한 주먹질 했던 몸일세."

물론 광풍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상대가 혈천마성이라면 혼자서는 너무나 위험하다. 게다가 절강성은 남북천맹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천무대주는 자네를 지켜야지. 나는 따로 생각해 둔 친구가 있으니, 그리 크게 걱정하지 말게나."

생각보다 크게 반대를 하려 하는 율천세를 설득시키기 위해 석지관은 밝은 모습만을 보여 줬다.

율천세는 더 이상 석지관을 만류하지 못했다. 그저 평범하게 벼슬 하나 얻어 세상을 살고자 했던 그가 무인의 삶을 선택하게 만든 혈천마성.

그곳을 향한 적개심이 얼마만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율천세는 석지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 * *

"생각보다 반응이 없는 것 같지 않나요?"

흑색 경장과 새까만 면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말속에는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물씬 묻어 있었다.

"소립이 죽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가요. 천기원주께서는 정말로 그 일 때문에 그녀의 실종이 묻혔다 생각하시나 보군요."

지청화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딱히 없지 않습니까."

지청화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사마련에서도 대충 눈치채고 있는 사실을 자꾸만 천기원주는 모르는 척하시네요."

"하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잔 받으세요."

그녀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은 하제량은 단숨에 들이켰다.

"독이 들어 있어요."

"그렇군요."

"농인 줄 아시네요."

"진짜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해약은 있어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 보시죠."

"뭘 말입니까."

하제량은 태연했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덤덤했다. 자신이 마신 술에 독이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말이다.

"여수경이라는 여인…… 야수마황의 친손녀가 아니라는 사실부터 시작하죠."

"이미 그리 생각하시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제게 확신을 묻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확실한 정보…… 남북천맹에 관련한 작은 소식들을, 말단 무사가 어떤 여인을 정실로 들였는지 첩으로 들였는지 작은 것 하나까지도 원하니까요. 그것이 사마련이 천기원과 손을 잡은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니까 여쭙는 거랍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여수경은 녹림지존을 오랜 시간 아버지라 부르던 존재였다고 말입니다."

"그걸 궁금해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는 왜 야수마황의 친손녀도 아닌 아이를 그렇게 가장해서 녹림의 무리를 척살했는지가 궁금한 것뿐이에요."

"그건……."

"예전부터 거치적거리던 수왕을…… 여수경이라는 여인으로부터 명분을 실어 처리했다는 건가요?"

쾅.

하제량이 술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지금 나를 농락하는 겁니까!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요!"

"그게 문제인 거랍니다."

하제량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지청화는 그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가 거뒀다.

"왜 천기원주는 본련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이죠?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건가요. 사마련을? 아직도 남북천맹과 대적하기가 두려운 것인가 보군요."

하제량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맞다. 아직도 두렵다. 측정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일궈 낸 천기원이다.

그나마 중원 천하에서 남북천맹 천지각과 쌍벽을 이루는 정보 집단이 천기원이다.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가장 어두운 부분, 음지에서 활약하던 천기원. 자신의 대에서 이제 햇빛을 볼 차례가 온 것이다.

상대는 남북천맹이다.

두렵지 않다면 그게 정상이 아닐 것이다.

만약 사마련의 편에 서서 일이 잘못되면 천기원은 세상에서 지워진다.

그걸 알기에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비록 이 년 전 아수귀옥에서 찾아온 그때부터, 아니 삼 년 전 사마련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여수경이라는 여인…… 녹림의 핏줄입니다. 내 조부께서는 녹림총련의 손에 돌아가셨죠."

"복수를 위해 그녀를 남북천맹에서 빼돌린 것이군요."

지청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속내를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제 손으로 죽입니다."

"글쎄요. 그건 천기원주의 마음이에요. 허나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천기원이 떠안으셔야 합니다."

그녀의 음성에서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하제량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이 짧았음을 느껴야만 했다.

무공도 모르는 여인을 죽이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그런데 그녀의 신분이 문제다.

맹주의 자식 율무천이 사랑하는 여인!

그게 현재 그녀의 신분이다. 그것이 허울뿐인 감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여인을 죽인다면 남북천맹이라는 단체에게 명분을 주는 것이다. 그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해진다.

그들도 원하는 일일 것이다.

결국 녹림총련처럼 세상에 처참하게 지워질 게 뻔하다.

전력으로 봤을 때 사마련은 한참이나 남북천맹에게 밀린다. 충분히 그들을 안에서 뒤흔들고 원하는 날에 원하는 명분을 내세워 남북천맹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들을 도발하여 먼저 공격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들도 원하지 않아요. 지금은."

"아수귀옥."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몰라요. 천기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에요. 그런 그들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를 도울 리 없지 않을까요? 오늘 원주를 뵙자고 한 것은 그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악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에요."

그녀에게는 한 가지 철저한 신념이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자신을 도울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분명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여수경이라는 여인…… 죽이면 안 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판단하셨으리라 믿겠어요."

이번에 보인 그녀의 미소는 따스했다.

적개심을 조금은 거둔 마음이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 * *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사군악은 귀를 후벼 팠다. 도대체가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놀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섭선을 들고 있는 주문룡이라는 사내는 그걸 무시했다.

"쇄암왕 주문룡……."

담천이 중얼거렸다.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

그는 십이무룡 중 삼왕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강자에 꼽힌다.

그런 자가 천하삼대루의 주인이기까지 하다.

"제 이름이 생소하실 겁니다. 쇄암왕의 이름이 주문룡이라는 건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니까요."

뱃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주문룡이 담담이 설명했다.

쇄암왕 주문룡은 혈천마성의 사람이다.

쇄암왕이라는 별호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것이기도 하다.

혈천마성 성주의 가장 측근이기도 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남북천맹의 귀부와 같다.

혈천마성 내에서 반역을 꿈꾼다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자들을 잡아내거나 또는 적들의 깊숙한 곳에 침투하여 간부들을 암살한다.

그런 자들의 왕을 쇄암왕이라 칭한다.

헌데 혈천마성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많은 이들이 혈천마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죽었고 산 자들도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쇄암왕이다.

혈천마성의 성주를 비롯해 그의 측근들이 모조리 참살을 당할 적에도 남북천맹의 손에 잡히지 않았던 쇄암왕이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외모 또한 알려진 바 없었고, 정말 말 그대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워낙 그 위명이 자자하고 혈천마성에서조차 성주 다음으로 강하다 칭함받던 쇄암왕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십이무룡에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전 제삼대 쇄암왕입니다."

대를 이어 온다는 쇄암왕이다. 주문룡이 바로 삼대째 비기를 이어 오는 장본인이다.

"그럼 혹시……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저곳이."

대찰영이 불안한 음성으로 질문을 건넨다.

"맞습니다. 혈천마성의 부활을 알리는 장소…… 암흑제도입니다."

"……!"

사군악, 담천, 대찰영 세 사람은 입을 다물 줄 몰랐고 눈을 감지도 못했다.

신세계!

또는 천상의 낙원!

안개에 감춰져 있던 암흑제도에는 엄청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로지 야생의 환경이 기다릴 줄 알았건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다. 열 개가 넘는 엄청난 건물들을 보는 내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각양각색 높낮이도 다르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절강성 동쪽에 존재하는 작은 섬에 이런 환경이 준비되어 있을 줄.

"대체 이게 다 뭐냐."

사군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서 가는 주문룡을 향해 물었다.

헌데 그는 묵묵부답으로 그저 걸을 뿐이었다.

"게다가 대체 저자들은 또 뭐고."

주변에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자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들이 풍기는 기도는 가볍지가 않다.

"궁주를 뵙습니다!"

커다란 담벼락을 지나 커다란 전각 하나가 있었다. 그 앞에는 약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예를 취하고 있었다.

모두가 주문룡을 향한 예였다.

'보통이 아니구나.'

한 명 한 명이 지나오면서 봤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흑마궁(黑魔宮)이라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문룡의 눈에는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혈천마성의 그림자와 같은 자들…… 흑마궁의 궁주는 바로 쇄암왕이었죠."

바로 저들이 쇄암왕을 따르는 혈천마성의 그림자들이었다.

"저를 보필하는 이적입니다."

중년인 이적이 포권을 취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세 사람은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안으로 들어가죠."

실내에는 주문룡과 이적, 사군악, 담천, 대찰영이 앉았다.

"앞으로 세 분은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실 겁니다."

"당분간?"

"네."

"사우의 명령인가?"

"그분의 명령이 맞습니다."

"허! 그럼 앞으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겠네."

"이곳에서 잠시 머무시다 남북천맹 총타로 가게 되실 겁니다."

"우리가?"

"네. 하지만 그다음 계획은 저도 모릅니다."

"정말로 혈천마성을 부활시킬 작정인가."

담천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는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뭔가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 주문룡의 말이 전부가 사실이라면 더더욱 큰일인 것이다.

혈천마성이 이름 모를 산골 삼류문파도 아니고 천하를 좌시했던 곳이다.

그 이름 아래 피가 강을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남북천맹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혈천마성의 세상이었다.

그런 곳이 부활하려 한다.

비록 다시금 부활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아닌 일이지만 말이다. 더 불안한 건 그 중점에 사우가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놈의 머릿속에는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지 열어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신의 볼일을 다 마친 주문룡은 이적을 통해서 세 사람이 머물 숙소를 배정해 줬다.

수년 동안 마인곡에서 생활하던 세 사람에게는 너무나 안락한 분위기의 잠자리였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찝찝하다.

몸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씻겨지지가 않는다.

"이거 우리 뭔가 큰일에 휘말리는 것 같은데."

말끔히 씻고 제대로 차려입은 사군악의 모습은 굉장히 신비스러웠다. 백발에 백색 무복을 입은 그는 신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후…… 혈천마성이라니요. 이건 솔직히 말이 안 돼요."

대찰영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있는 문파에서 자라온 것은 아니지만 환도문은 정도를 걷는 단체였다.

귀동냥으로 혈천마성의 대해 들어 본 적도 있는 듯하다.

대찰영뿐만 아니다. 아직도 무림에서 혈천마성의 이름은 두려움 그 자체로 남아 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에서 소문으로, 작은 이야기에서 전설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중심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일단은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주문룡이 말한 것처럼 남북천맹 총타로 가게 된다면 사우를 볼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사우 그 녀석과 의견을 나눠 보자."

"빌어먹을 새끼.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야."

마인곡을 나온 이후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저 전서구로만 명령을 내린다.

사군악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런 감정은 버려야 한다.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쉽지가 않았다.

마인곡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 사우가 이런 말을 했었다.

'많은 시간 기다려야 할 거야. 너희들이 상대할 적들은 그리 쉽지가 않으니까.'

그는 답답했는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섬이라서 그런지 어둠이 빨리 찾아왔다. 그것도 짙게.

머무는 숙소에서 창문을 열자 주변 지형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건물들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끝에는 항구가 보였다.

"음?"

일부러 이곳의 존재를 가리기 위해 불은 환하게 켜두지 않는 것 같았다. 안개마저 끼었지만 항구 쪽에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온 듯 보였다. 사군악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새로운 식구인가."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날이 밝자마자 사군악은 홀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잠자리가 편하다고 해서 잠이 잘 오는 건 아니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얼굴이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다 시커먼 놈들투성이로구나."

주변에는 흑마궁 무인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저것들은 잠도 없나."

물론 나름대로 규칙적인 교대를 하겠지만 어떻게 된 게 같은 인간이라는 느낌이 오질 않는다. 눈빛들이 하나같이 날카롭게 빛이 난다.

사군악은 저들과 칼을 섞는 걸 상상이라도 한 듯 몸서리를 한번 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잠도 일찍 깬 터라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터벅터벅 목적지 없이 걷기를 일다경.

신법을 발휘하기도 하고 평범한 보폭으로도 걸으며 주변을 구경했다.

아침이고 밤이고 안개는 언제나 끼어 있었다.

꽤나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섬이다.

사군악은 걸음을 걸으면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계집이 이끄는 무리 때문에 잠이며 끼니며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바쁘게 지냈다.

적지 않은 나이를 살아오면서 그렇게 목숨을 건 추격전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있다.

꽤나 오래전 천화상가의 무인들에게 쫓겼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천산검문 화진천의 눈 한쪽을 빼앗았다가 죽음의 문턱도 경험해 봤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복수라는 칼날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비상식적으로 강해진 자신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감은 조금씩 상실되고 있었다. 과연 화진천을 죽일 수 있을까.

그때는 천운으로 그의 눈을 빼앗았던 것이다.

당시 화진천보다는 자신이 실전 경험이 많았을 때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기습적이었기 성공했던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때의 화진천과 현재는 다르다.

지금은 만천하에 자신의 위명을 떨치는 무인이 되어 있었다. 녹림총련을 정벌할 때 참여함으로써 그 위세를 떨쳤다.

"후!"

아직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톡톡.

"좋은 아침이죠?"

피부의 소름이 쫙 돋아났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두들기며 나타난 이의 음성이 누군지 안다.

"주문룡!"

사군악은 스르륵 신형을 앞으로 쏘아 나갔다.

"보기보다는 담이 작으신 분인가 보군요."

백색 섭선을 펼쳐 든 그는 웃고 있었다.

사군악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칫 상대가 조금이라도 악감정을 가졌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 어제 제가 깜박 잊고 드리지 않은 말이 있어서요. 숙소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 한참이나 찾았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얼른 꺼져라."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장에 놀란 것이 부끄러웠는지 사군악의 말투는 한층 더 거칠어져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어제 봤던 주문룡과는 풍기는 기도가 다르다.

입고 있는 옷도 다르다.

무공을 수련할 때 입는 무복에다가 팔과 다리는 철갑으로 감쌌다.

눈빛도 다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

사군악은 본능적으로 허리에 차여 있는 검을 만졌다. 다행히 챙겨서 나왔다.

"사우가…… 그 빌어먹을 사우가 그따위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냐?"

"그 전에는 절대로 암흑제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라는 명령도 있으셨습니다."

순간 주문룡의 섭선이 흔들렸다.

허공을 가르며 수많은 잔상들을 남겼다.

깡!

부채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섭선에 공력을 실어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든 것이다.

"무혼수라선(無魂修羅扇)이라는 무공이 있습니다. 과거 쇄암왕이 혈천마성에서 강한 무인으로 꼽히게 만든 무공이죠."

주문룡의 몸에서 검붉은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하늘 위로 치솟아오른 건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공중으로 올랐다가 땅으로 처박힌 것은 사군악이다.

"으아악!"

고통에 지른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악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볼이며 이마며 모래가 묻어 있다.

입안에는 가득 핏물이 고여 있었다.

반대로 주문룡은 너무나 여유롭다.

"형편없는 사람이었네요. 당신은."

여전히 그의 몸에는 검붉은 기류가 걸쳐 있었다.

스멀스멀.

사군악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더 욕심을 부려 성장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만이고 자만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일각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인곡을 나와서 한 번도 쉬웠던 상대가 없다. 사마련에서 보낸 계집은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쇄암왕. 도대체가 어느 정도 강해져야 이 괴물들과 호각을 다툴 수 있는 것인가.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제대로 검 한 번 뽑아 보지 못한 채 수십 대를 얻어맞았다.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골백번도 죽였을 것이다.

사군악이 검을 뽑았다.

"호오. 꽤나 명검이네요. 주제에 맞지 않는 물건은 화를 부르는 법인데."

주문룡은 쉬지 않고 사군악을 도발했다.

혀 놀림으로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허나 산전수전 다 겪은 사군악이 그런 도발에 흥분할 리가 없다.

'반드시 죽인다. 그리고 사우 네놈도!'

짙은 살기를 동반한 채 사군악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가 세 걸음도 걷다가 멈췄다.

주문룡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무더기로 나타났다.

주문룡 한 명도 전력을 다해도 이길까 말까 한 상황에서 그들은 재앙과도 같았다. 허탈한 마음에 다리가 풀린다.

"살고 싶으면 도망치세요."

어린아이를 달래듯 주문룡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네? 살고 싶으시다면 어서 뒤로 돌아 도망가시면 됩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쯔쯧. 그리 자존심을 부리다 죽으면 그걸 사람들이 뭐라 부르는지 아시나요?"

주문룡은 잠시 말을 멈췄다.

"개죽음!"

"……!"

"그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요? 천산검문의 화진천을 죽이겠다고 하셨나요?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면 그게 이루어질까요? 단 일 할의 가능성이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도망가세요. 비록 외딴 섬이지만 어느 정도 살아남을 확률은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맞다.

도망쳐야 한다.

살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수년을 기다려 왔다. 저 사내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 그만한 힘도 가지고 있다.

만약 여기서 죽으면 정말로 개죽음밖에는 되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뒤에는 아무런 존재가 없다.

다행히도.

자존심을 버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다.

등 뒤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같은 시각 대찰영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

'일부러 기척을 흘리는 놈이 셋.'

대찰영은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는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세 놈이에요."

"사군악에게도 붙었을까."

"그런 듯해요."

"이런 젠장. 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담천은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살이 많은 편에 속한데다가 도망 오느라 너무 힘을 쓴 탓이다.

살을 에우는 살기에 눈을 뜬 순간부터 추격전이 벌어졌다. 이미 주변에는 사군악이 없었다. 오면서 벌써 두 놈이 죽어 나갔다.

"설마 사우의 명령일까요."

"그럴 리가……."

주문룡은 분명 사우를 그분이라 불렀다. 저 정도의 재력과 무력을 지닌 이가 사우를 그리 부를 정도면 충성심이 강할 것이다.

분명 대찰영의 의견에도 타당성이 있다.

둘 중 하나다.

사우가 이런 행동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거나 주문룡이라는 사내가 애초에 사우와 한 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거나.

담천은 대찰영과 신법을 발휘하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만약 주문룡이 사우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처음 만난 순간 자신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나 지쳐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제 사우가 지시를 내렸다고 생각하는 게 정확하다. 그런데 문제는 왜였다.

수련이라면 마인곡에서도 징그럽게 받아 온 자신들이다. 더 필요한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것인가, 사우는?

"세 명에서 열 명으로 늘었다."

"큰일이에요. 이곳 지형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도망만 다녀야 하는지."

"찰영."

"네."

"흩어진다."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 지금부터 우리는 살수가 되는 것이다. 사냥감이 되어서는 안 돼. 우리가 저들을 사냥한다."

담천이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 * *

남북천맹 총타에 존재하는 전각들 중 하나에 누군가가 올라가 있었다. 사내는 지붕 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임에는 틀림없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그의 위로 백색 전서구가 배회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깊게 잠이 들지 않았었는지 금세 눈을 뜨고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서구는 그의 손목 위에 우아하게 앉았다.

"하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사우는 내용을 살폈다.

"벌써 시작한 건가. 성질도 급하지."

전서구의 내용은 암흑제도에서 온 것이다.

주문룡이 자신이 보낸 세 사람의 교육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랬다.

정말 사우가 세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헌데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의 문턱까지 왔다 갔다 하게 할 생각이었다. 또 그렇게 명령을 내렸고.

다른 이들도 아닌 세 사람에게만 그리한 것은 간단하다.

그 세 사람은 초호진이나 무진과는 달리 지닌바 잠재력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끌어올려 주기 위한 방책일 뿐이었다.

주문룡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분명 짧은 시간 안에 큰 효과를 보여 줄 것이다.

한껏 기지개를 펴고 난 사우는 지붕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음?"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땅에는 그림자가 졌다.

"한참 찾았네."

"맹주님을 뵙습니다."

사우는 황망하게 예를 취했다.

"자네가 천이 그 아이의 대리인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잠시 나 좀 보세."

율천세는 사우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분명 그가 거주하는 천성각은 아니다.

"요새 천무대 아이들하고 태양전 녀석들이 불만이 많네."

사우는 대답 대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특히나 태양전 아이들이 시끄러워. 자꾸 이상한 녀석이 신경 쓰이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말일세."

태양전은 총타를 지키는 무인들을 통트는 기관의 이름이다. 그리고 율천세가 말한 이상한 녀석은 분명 사우가 틀림없었다.

"뭐, 지시받은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천이 녀석의 대리인이니까."

율천세가 가고 있는 곳은 연무장이 있는 장소였다. 과거 무룡단이 쓰던 장소였다.

"저기 저 사람들이 보이나?"

"예."

"천이 그 아이가 굉장한 짓을 저질러 놓고 갔더군. 새롭게 무룡단을 창설한다? 저기 모여 있는 자들이 누군지 아나?"

"남북천맹 각계각층에 존재하는 무인들로 알고 있습니다."

"호오. 자네 작품이었나 보군. 저들을 끌어 모은 거 말이야. 물론 밑그림은 천이가 그린 것일 테고."

율천세는 흥미롭다는 듯 연무장에 모인 이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사우는 그의 그런 모습에서 짙은 분노라는 감정을 읽었다.

어떤 조직이 생겨나고 그 안에 있던 인원들이 교체되는 과정은 맹주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게 통하지 않는 곳은 귀부뿐이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맹주의 권위를 무너트렸다.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되겠나."

"사우라고 합니다."

"사우…… 사우라."

들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누구와의 인연을 갖고 있기에 아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만 먹는다면 지하뇌옥으로 끌고 가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했다. 풀어야 할 실타래가 많기에 다른 곳에 크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더욱이 자식인 율무천의 대리인.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피붙이의 뜻을 이행하는 사내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

"여수경이라는 아이를…… 찾아와 주게."

"맹주로서 내리는 명령인 겁니까."

"아니네. 자네가 앞으로 모실 그 아이의 아비로서 내리는 부탁일세."

사우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사우는 여수경을 데려오라는 율무천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조금 더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율천세에게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냥 넘기기 힘들다. 명색이 남북천맹의 맹주다. 그의 명령은 천명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물론 사우가 그의 명령을 꼭 들을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의 눈에 거슬려 봤자 이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무리인가."

"아닙니다. 맹주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고맙네. 천이 그 아이도 기뻐할 걸세."

사우는 목례로 답을 대신했다.

다른 이들이 이런 장면을 봤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만큼 무례한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율천세는 너그럽게 넘어갔다.

아들의 수하라서?

아니다. 남북천맹에 속한 무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율천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왜 사우에게만 특별한 선처를 보이는 것일까.

그건 오로지 율천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가 보게."

사우는 조용히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도대체가 어떤 신분이기에…… 천룡원주께서.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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