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폭풍전야
남북천맹 총타가 발칵 뒤집어졌다.
천지각으로부터 전해져 들어온 한 통의 소식 때문이다.
무룡단의 전멸!
그리고 그곳에는 율천세의 제자 청안검객 소립이 부단주 신욱의 시체와 함께 있다는 것.
맹주의 혈육 율무천의 직속부대 무룡단이 전멸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다. 헌데 청안검객 소립이 신욱과 혈투를 벌인 흔적이 목격되었다는 건 더 큰 충격이었다.
"진정하게."
천지각의 수장 석지관은 직접 맹주를 찾아와 이 소식을 전해 줬다. 분명 엄청난 분노를 터트릴 것을 알기에 바쁜 와중에도 직접 온 것이다.
"소립…… 그 아이가 정말로 신욱과 서로 피를 봤을 것 같나."
"앞뒤 정황상……."
"아니. 아닐세. 소립은 화진천의 아이일세. 비록 내 제자이기는 하지만 그 녀석과 자량은 화진천의 사람이지. 그런 소립이 화진천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을까?"
율천세는 화진천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애초에 배제했다.
그는 제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심계가 깊은 아버지와는 달리 머리를 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화를 낼 때에는 불같이 화를 내고 차가워질 때는 확실하게 얼음장처럼 변한다. 어떤 상황이던지 간에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녀석이 바로 화진천이다.
"화진천은 제 아비와는 다른 놈이야."
"하지만 보고 배운 것이 있지 않은가."
석지관의 말에도 율천세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신욱과 소립이 아닌 다른 무룡단원들은 누구의 소행일 것 같은가."
"흔적이 너무나도 깔끔하네. 도저히 어떤 무공을 썼는지 알아낼 수가 없어. 현재 현장을 찾아서 분석 중에 있지만 아무래도 흉수를 찾는 일이 힘들 것 같네."
"분명 무천 그 아이의 짓일 것이야."
"단순히 무룡단을 밖으로 빼내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인가?"
율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선 내 허락 없이 무룡단을 밖으로 보낼 이유가 없어."
"너무 억측이 아닌가."
"아닐세. 그 아이는 맹주가 되려 하고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손과 발이 필요하지. 적이라 생각하는 화진천을 몰아세움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무룡단을 정리한 것이지."
솔직히 석지관은 벗의 생각에 그리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던 율무천은 이런 행동을 벌일 정도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 잘못일세. 삼 년 전 그때 내가 그 아이를 바꿔 놓았어."
긴 탄식이 율천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금씩 변하던 아들이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지금과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은 율천세로서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찌한다.'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석지관은 율천세가 상념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후우. 작은 일이 아니니 모두를 불러 모아야겠지."
"알겠네."
"부맹주를 포함 사대검문과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사흘 안으로 총타에 올 것을 명하게."
* * *
"이번에 제대로 당했구나."
실내에는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향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곳은 한 가문의 수장이 머무는 공간이다.
그것도 검으로는 천하를 내려다보는 천산검문의 가주 화무홍이 먹고 자고 집무를 보는 곳이었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새까맣다. 그의 성품을 대변하는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적당한 크기의 이마는 굉장히 반듯했으며 눈썹은 짙고 굵다.
중년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은 젊어 보였다.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른 체형도 아니었다. 호리호리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허나 풍기는 기도는 풍채와는 비례되지 않았다.
"소립이 죽었습니다."
화무홍의 앞에는 화진천이 있었는데 두 부자가 내뱉은 말들은 뭔가 어울리지가 않았다.
화진천은 부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시켰다.
소식을 듣자마자 화진천은 화무홍에게 불려왔다.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킬 시간도 없이 말이다. 지금 그의 마음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형제처럼 지내던 소립이 죽었다는 내용은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시신을 보기 위해 본가를 떠날 생각이었다.
"맹주께서 소환 명령을 내리셨다고 하는구나. 이제 이틀하고 반나절 정도가 남았구나. 너도 갈 것이냐."
"소립의 시신을 봐야겠습니다."
"그 아이는 죽었다고 하지 않더냐."
"직접 제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화진천은 화무홍을 노려봤다.
"내가 왜 네놈을 맹주의 제자로 들어가게 했는지 아느냐."
"……."
"보고 배우라는 얘기였다. 맹주 율천세의 자식 율무천을 보면서 네 스스로 자극받아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화무홍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안으로 깊숙하게 집어넣을수록 생존율은 커지는 법이지."
그는 화진천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지금 율무천은 확실하게 변해 있다. 예전에 네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지.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삼 년 전이었던가.
화진천은 소립과 은자량을 통해서 율무천을 암살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마 율무천은 살수가 소립과 은자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헌데 밝히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인데 어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지 짐작이 어려웠다.
화무홍은 그런 행동을 저지른 화진천을 엄히 벌하여 수개월 동안 바깥출입을 일절 못하도록 함으로써 혹시 모를 율무천의 대응에 대비했다.
"율무천은 용의 새끼다. 비록 지금은 그를 받치는 힘이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날개를 달고 비상할 용상이다. 잊지 말거라. 넌 천산검문의 자식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을 나 화무홍의 핏줄임을 명심해라."
풍기는 기운만으로는 절대 율천세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충만하고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강한 힘을 갖추고 있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었다.
화진천은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지금처럼 대드는 행동은 그런 감정을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
속은 벌벌 떨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따스한 감정은 태어나 한 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대신 뜨거웠다. 근처에 다가가기라도 하면 살갗이 데일 것같이 말이다.
"나와 함께 총타로 간다. 가서 이번 일을 꾸민 놈에게 너의 마음가짐을 전해 주는 것도 좋을 테지."
그날 저녁 화무홍은 화진천을 포함해 자신의 직속 무인들을 대동한 채 가문을 떠났다.
* * *
퍼억!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삼 장여나 밀려 나갔다.
사군악은 몸 안에 있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입가에는 핏물이 흘러내린다.
"지독한 년."
그는 자신의 배에 주먹을 갈긴 여인을 독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봤다.
어지럽혀진 머리카락 사이로 사군악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모란혈녀 철유라였다.
그녀는 지독하리만치 사군악 일행을 쫓았다.
한 번 표적을 삼은 무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부친 철대악으로부터 귀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철유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철유라가 들고 있는 검날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모두 사군악의 것이다.
그의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사이사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군악은 가냘픈 소녀의 외모를 지닌 저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지독한 수련을 거쳤으면 이렇게 독해질까.
벌써 맘 편하게 잠을 못 잔 지 나흘이 지나갔다.
사천성을 떠나면서 쫓아오던 무리가 끊임없이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무리를 이끄는 이가 저 독한 계집이라는 걸 알았다.
표정 하나 없이 칼을 휘두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름 악다구니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신이지만 차원이 다른 상대를 이번에 만났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시체가 총 열 구나 되었다. 모두 자신의 손에 죽은 자들이다.
함께 이동하고 있던 담천과 대찰영은 꽤 먼 거리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 두 사람 걱정은 많이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을 쫓는 놈들의 실력이 상당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을 어찌 할 정도는 못 된다.
다만 문제는 눈앞에 있는 여자다.
마치 나무 인형과 검을 섞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상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꽤나 상대하기 힘든 적임에는 틀림없다.
스르륵.
철유라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앞으로 쏘아져 갔다. 사군악은 몸을 뒤로 뺐다.
원래 자신이 적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방법이었다. 평소대로 했다면 벌써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을 것이다.
상대는 너무나 거칠었다.
공력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무공을 사용해 대니 거기에 맞섰다가는 체력이 금세 바닥나 버릴 것이다.
철유라가 익힌 검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종류의 것이다.
그녀가 익힌 사검류는 지독한 혈기가 어리는 것이 특징이다.
사검류(死劍流) 사루혈(死淚血).
철유라의 몸이 공중에 떴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수십 바퀴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회전할 때마다 검붉은 검기가 아래에 있는 사군악에게로 내리꽂혔다.
사군악은 미처 피할 시간을 놓쳤다. 대신 공력을 실어 검의 손잡이를 둥글게 회전시켰다.
쿠쿠쿵!
그의 검에서는 푸른 빙막이 생성되어 철유라의 공격을 막아 줬다.
한빙벽(寒氷壁).
그가 익힌 빙살참륙검식에서 유일하게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충격을 온전하게 흩날릴 수는 없었다. 땅을 디디고 있던 발이 한 움큼이나 파여 들어갔다.
'역시나 거칠구만.'
그래도 살이 찢어지면서 검을 섞은 결과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나 보다.
하지만 그건 사군악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공중에 있던 철유라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났을 때는 사군악의 등 뒤였다.
"크아악!"
사군악의 등에서 피보라가 치솟았다.
목에서 긁어내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사군악이 쓰러졌다.
반사 신경을 최대한 발휘해서 피하려 하지 않았다면 즉사 했을 것이다. 허리가 두 동강 난 상태로 말이다.
쓰러진 사군악의 위로 철유라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올랐다. 이제 끝을 보려는 셈이었다.
그런데 뛰어오른 그녀가 다시 한 번 몸을 틀었다.
철궁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담천과 대찰영이 온몸에 피범벅을 하고서 등장했다.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 사군악은 두 사람 외에 낯선 이가 하나 있는 것을 봤다.
이십 대 후반에 새하얀 섭선을 들고 웃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환희루의 주인 주문룡이라 합니다."
사내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그려졌다.
절강성 항주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수많은 풍류객들은 물론 선비 고승들이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발길이 끊기지 않는 도시였다.
환희루는 항주의 중심가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도 서쪽으로 서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기에 불철주야로 술을 찾고 풍류를 찾는 이들이 넘쳐 났다.
마치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세워진 황금빛 전각은 그 위용이 실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전각의 가장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황제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환희루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전각은 총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일반 서민들이 주 고객이 되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위급 간부들이 여행을 와서 머무는 숙소와 귀빈실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환희루 주인과 그의 측근들, 그리고 환희루에서 일하는 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 전각 가장 높은 곳에는 환희루 주인이 머문다.
환희루주가 머무는 층에는 방이 네 개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에 낯선 이들이 사흘째 투숙 중이었다.
사군악, 담천, 대찰영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점심을 마치고 각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자신의 도를 관리하던 대찰영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머리 굴린다고 답이 나올 것 같으냐. 여기 온 지 사흘이 지나가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놈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사군악이 약간 짜증이 섞인 투로 대꾸했다.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바깥을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만 있었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건 자신의 등에 상처를 남긴 상대의 대한 분노였다.
죽음을 면하긴 했지만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세 사람은 밖에서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환희루주 주문룡이라는 사내.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복장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적색 무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황(凰)이라는 글자가 금색 수실로 박혀 있었다.
상징적인 것이기라도 한 듯 첫 만남 때와 다름없이 오른손에는 섭선이 들려 있었다.
"그동안 편히 쉬셨는지요."
그는 세 사람을 보며 웃음을 머금은 채 안부를 물었다.
세 사람은 사흘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음식은 상다리가 휠 정도로 차려져 들어왔고 술 또한 맛과 향이 일품인 것들이었다. 바깥출입과 여자를 불러들이는 것만 뺀다면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바쁘신 분이길래 사람을 방구석에 처박아 두고 이제야 나타나시는 건가."
삐딱하게 고개를 튼 채로 사군악이 문 앞에 서 있는 주문룡을 노려봤다.
"글쎄요. 그쪽이 제대로 느끼시지 못할 만큼 이곳 환희루는 바쁘게 돌아간답니다. 전 이곳의 주인, 당연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 않을까요?"
"환희루…… 대단한 곳이지."
사군악도 담천도 대찰영도 알고 있었다.
천하에서 환희루와 같은 곳이 두 개나 더 있다. 월궁루(月宮樓)와 금악루(金岳樓)가 그곳이다.
천하삼대루에 속해 있는 환희루, 월궁루, 금악루의 주인들은 천하의 황금을 쓸어 담는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규모나 벌어들이는 수입은 상상을 초월한다.
천하삼대루 중 금악루는 현재 남북천맹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곳의 주인이 남북천맹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다.
돈은 곧 권력이고 권력은 곧 돈이다.
절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변하지 않는 법칙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환희루는, 아니, 천하삼대루에 속해 있는 곳은 엄청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사람은 환희루가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그걸 알면서도 사군악은 사내의 태도에서 불쾌감을 느껴야만 했다. 사내놈이 눈웃음이나 흘리면서 대화를 하다니.
꼭 사우를 보는 것 같다.
"사우와는 어떤 관계요?"
"글쎄요. 그분께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그분…… 그분이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천하의 환희루주가 사우를 그분이라 부른다. 황제조차 부럽지 않은 사내가 말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사우가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었던가?
"자, 이제 저와 함께 가 보실 장소가 있습니다."
"어딜 가자는 것이지?"
"가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 * *
율천세는 오랜만에 총타를 나와 산을 올랐다.
이른 새벽이었다. 그가 총타를 빠져나왔을 적만 해도 주변은 새까만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남북천맹의 총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율천세는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봤다.
"삼 년 만인가."
그의 뒤로 적포를 입은 중년인이 나타났다.
천산검문의 주인 화무홍이었다.
그 또한 혼자였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요."
"무심한 친구 같으니."
"하하! 죄송합니다, 맹주. 부족한 천산검문의 수장으로서 아직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겸손이 지나치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법이네. 천하의 천산검문이 어찌 부족하단 말인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까이 오겠나."
율천세의 부름에 화무홍이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다가왔다. 두 사람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겉은 같은 곳을 내려다보지만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물론이지요. 초대 맹주와 현 사대검문의 초대 수장들이 모여 남북천맹을 결성한 장소가 아닙니까."
"그분들은 혈천마성을 상대하기 위해 맹을 창단하신 거지."
"……."
"이보게, 무홍."
"예, 맹주."
"난 아끼던 제자를 잃었네. 그 슬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또 다른 제자를 벌하여야만 하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자네의 반성을 듣고자 꺼낸 이야기가 아니야. 비록 재주는 나보다 자네가 더 많았지만 난 맹주가 되었지. 본맹의 율법이지. 율씨 성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맹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 허나 이제부터는 그것을 바꿔 보려 하네. 썩은 물은 고이기 마련이지 않나."
율천세는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엄청난 발언을 내뱉은 사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화무홍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할 말을 잃었다.
"가지. 사람들이 기다릴 텐데 말이야."
율천세의 집무실에는 열네 명의 사내들이 자리해 있었다.
꽤나 큰 크기의 집무실이었지만 그 많은 이들이 들어와 앉으니 비좁게 느껴졌다.
"지금부터 소천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남북천맹은 한 해 중 네 번의 회의가 있다.
종류는 대천회의와 소천회의로 나눠진다.
대천회의는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스물아홉 개의 중소방파의 수장들이 모이는 행사였다.
소천회의는 지금처럼 남북천맹에 수뇌부들 사대검문을 비롯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 총 열네 명이 모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번 소천회의는 갑작스럽게 소집된 것이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 율천세의 둘째 제자 소립이 죽었다."
화무홍과 대화를 나누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천하를 다스리는 패왕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열네 명의 사내들은 그런 그의 기세에 숨을 죽인다.
"석지관."
"예, 맹주."
"이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고하라."
석지관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천지각주 석지관. 조사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좌중을 훑어보며 자신이 정리한 내용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율천세는 석지관의 보고를 들으면서 앉아 있는 이들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모두가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하수가 아니다.
하나같이 실력 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율천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내 석지관의 보고가 끝이 났다.
"유천묵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율천세가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첫 질문을 건넸다.
용호검문(龍虎劍門) 문주 용호왕(龍虎王) 유천묵이다. 십이무룡 중 삼왕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온화한 얼굴을 지닌 유천묵은 묘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천지각주가 보고한 것이 진실로 앞뒤 정황이 맞는다면 그 책임은 필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첫째 죽은 소립의 죄는 그의 가문에게 물어야 하겠지요. 둘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립은 천산검문 화진천 공자의 심복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 맹주님의 제자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유천묵의 말에 살짝 발끈한 사내의 말이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유천묵은 검살전주 반요진(潘嶢眞)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적지 않은 나이에 검살전주의 자리에 오른 사내였다. 서른 초반의 외모를 지닌 그는 고수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지만 배경이 좋았다.
바로 천산검문이다.
화진천과는 친분이 두터우며 화무홍이 가까이 두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때는 화무홍이 직접 제자로 받아들이려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반요진은 잘생기진 않았지만 이목구비의 선이 굵었다. 특히나 눈매가 날카로웠다.
"화진천 공자를 맹주님의 제자라는 신분에서 박탈해야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내가 술렁거렸다.
"허면 맹주님의 자제 분이신 무룡단주 또한 처벌을 받아야 하겠군요."
"맹주님의 허락도 없이 무룡단을 움직인 율무천 공자에게도 벌을 내려야 합니다."
반요진과 그의 옆에 있던 태양전주 우검학(宇劍鶴)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율천세의 눈이 빛났다.
회의를 연 이유는 화진천과 자신의 자식 율무천의 죄를 묻기 위해 수뇌부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었다.
허나 작은 목적이 또 하나 있다면 내 사람과 적의 사람을 구분할 목적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문들로 인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자신의 눈으로 각인시킬 참이었다.
"귀성(鬼聖)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실내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의 별호는 귀성이다.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이 안에서 유일하게 율천세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사내, 귀부의 수장이었다.
"율무천 공자와 화진천 공자에게 공평하게 벌을 내려야 하오."
이 자리에는 천룡원주가 자리에 있지 않았다.
곧 귀성이라는 사내가 존대를 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것을 잘 알기에 그의 말투에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귀성의 발언에 많은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율무천 공자에게는 무룡단을 맹주의 허락 없이 이동한 죄를. 소립의 가문에게는 무룡단과 대립한 소립의 죄를. 그리고 화진천 공자에게는 사제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죄를."
"화 공자가 소 공자의 사형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매일매일 감시해야 하는 분은 아니외다. 지금 귀부 부주의 말은 이번 일을 화 공자께서 지시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들리오."
귀성을 노려보는 이가 바로 보천검문(補天劍門)의 주인 적화진(赤花嗔)이었다.
그는 귀성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맹주인 율천세를 바라봤다.
"맹주께서는 이번 일을 어찌 결정하실 생각이신가요."
율천세는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주목했다.
"그대들의 의견을 더 듣고 싶다."
한 시진 동안 율천세의 명령으로 수많은 설전이 오고 갔다. 그리고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율천세의 최종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내 결정은……."
천명(天命)이 떨어졌다.
율천세의 제자 소립과 무룡단 전멸이라는 사건을 두고 열린 소천회의의 결과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물의를 일으킨 율무천은 백 일의 폐관수련이 정해졌고 소립과 그의 가문은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것이 율천세의 최종적인 명령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와는 조금 달랐다.
많은 이들이 화진천 또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율천세와 화진천이 서로 적대관계라는 사실은 남북천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다르게 본다면 그가 벌을 받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단지 소립의 사형이라는 신분만 없다면 말이다.
그리고 율천세는 그런 이유만으로도 화진천을 벌할 수가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화진천을 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도 한다.
무룡단은 그가 아들에게 선물한 단체였다. 그런 곳이 둘째 제자의 손에 없어졌다.
그 책임은 대사형인 화진천에게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다른 쪽에 있었다.
분명 사건 현장에는 남북천맹에서 정말 실력 있는 부검자를 보냈을 것이다.
무룡단 부단주가 소립의 독문검법인 청운검법에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풀리지 않는 의혹은 다른 무룡단원들이다.
소립 혼자서는 그들을 어찌하지 못한다.
신욱과 일대일로 싸우는 것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 결과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동귀어진을 감행했을 것이고 말이다.
헌데 무룡단원들의 시체를 살펴본 결과 누가 어찌 죽였는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 없는 무공이란 말이다.
그런 점에서 화진천은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화진천이 자신의 권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무력기관은 직속인 혈도대뿐이다.
헌데 남북천맹이 보낸 부검자가 혈도대의 무공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리 만든 곳은 어디일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남북천맹이라는 얼굴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잡아와 만천하에 흉범을 잡았음을 발표하고 목숨을 취해야만 한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중원 천지에 무력단체가 어디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 수만 개의 조직이 존재한다. 그곳을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율천세에게 남은 숙제이기도 했다.
그날 밤 율무천은 사우를 불렀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그는 율무천의 앞에 나타났다.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들었어."
순간 율무천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원래 이게 내 본연의 모습이니까 말이야."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말을 놓는 사우를 보며 율무천은 살기를 뿌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맹주 외에 자신에게 말을 낮출 자들은 없다. 비록 사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만 사우의 말투는 심기를 거스를 만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벨 수는 없었다. 내일이면 자신은 폐관수련에 들어가야만 한다.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다.
남북천맹 맹주가 내린 천명이다. 거부할 시 혈채를 내놓아야만 한다.
거부할 힘이 없다면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폐관에 들어가 있을 동안 손과 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내다.
"사우."
"……."
"내 이름이라고."
"후우. 그래 기억해 두지. 사우."
율무천은 화를 꾹 눌러 안으로 삭혔다.
"내 정인이 사라졌다."
"여수경……이라는 여인 말인가."
"그래. 알고 있다시피 내일 난 폐관에 들어가야만 하니 네가 좀 데리고 와 줘야겠어."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억도 잃은 그녀가 왜 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지."
사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했지만 질문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는 방법이 빠르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해."
"후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우의 반말에 율무천은 또다시 화를 억눌렀다. 엄청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입꼬리까지 올라간 사우의 얼굴을 보자니 화가 치솟아오른다.
"내가 없는 동안 화진천…… 아니 천산검문을 살펴 줘야겠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여기 적혀 있는 자들을 찾아가.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율무천을 뒷받침해 주는 자들인가."
종이에 적힌 인물들을 대충 훑어보며 사우가 중얼 거렸다.
"그렇다고 해 두지."
"나보고 여기를 들쑤시라는 이야기는…… 하하! 불안한가 보지?"
율무천의 신형이 움직였다.
팍!
사우의 목줄을 뜯어 버릴 기세로 뻗치던 그의 손이 막혔다.
"난 말이야…… 누가 내 몸을 건드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
"한 번만 더 건방을 떨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린다."
"내가 원래 그런 말을 좀 많이 듣는 편이야."
율무천은 전혀 기가 죽지 않는 사우를 노려봤다.
그러곤 그에게 품에서 금패를 꺼내 던졌다.
"나 율무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을 만날 때 네놈이 나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 줄 물건이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사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 봐도 될까?"
몸을 돌리려던 사우가 멈칫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네 정인이라는 여자 금제에 걸린 건가."
"……!"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당황한 율무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뭐, 아니면 말고."
사우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으드득.
그가 사라진 공간에는 율무천이 이를 가는 소음만이 울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자."
화진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보였다.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시원시원한 얼굴에 가지런한 치아 덕분에 화진천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이 웃게 하기에 충분했다.
헌데 율무천에게는 아니다.
악귀의 웃음처럼 보였다.
하얀 이빨은 독사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경계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저 살심만이 가슴 안을 가득 채웠다.
삼 년 전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로 화진천을 마주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대한 복수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화진천의 심복인 소립을 희생양 삼아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과는 조금 달랐다. 화진천 또한 함께 처벌받을 결과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 일이라는 폐관 수련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동안 화진천이 어떤 수작을 부려 놓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믿을 사람이라곤 갑작스럽게 건방져진 사우라는 놈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처리는 의외로 깔끔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무룡단 일을, 그것도 소립의 목숨까지 취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다.
"소천회의 결과는 나도 들었다. 그 전에 소립의 죽음에 대해서는……!"
"선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하하!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글쎄요. 꼭 아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 선물의 보답은 조만간 드린다는 건 잊지 마십시오."
웃고 있던 율무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기대하지. 그대의 선물 말이야."
화진천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과거에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대나무처럼 곧은 사내, 화진천이기에.
그런데 이제는 완전하게 맞먹으려 든다.
감히 맹주의 자식인 자신에게 말이다.
율무천은 오늘 폐관수련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직 새벽 동도 트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부름이 있었기에 천성각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화진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율무천도 이를 갈며 갈 길을 갔다.
화진천은 총타의 입구로 향했다.
그를 맞이하고 있는 건 붉은 물결이었다.
"하고 왔느냐."
"예."
"그래. 잘 참았다."
화무홍은 아들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을 게다. 형제처럼 아끼던 사제의 죽음은 아들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뒤에는 혈도대가 시립해 있었다.
검가로 명성을 떨친 천산검문에서 오로지 도라는 병기만을 사용하는 단체.
"천아."
"예."
"기억하거라. 네가 당한 치욕과 복수심을. 그리고 잊지 말아라. 너의 가슴에 새기고 뼛속에 새겨라. 이 아비가 약속을 하나 하마. 내 죽기 전에 너를 남북천맹의 용좌에 앉히겠노라고."
그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화진천은 아버지의 말을 믿었다.
선전포고는 하고 왔다.
이제 율무천을 죽이고 자신이 용좌에 앉으면 된다. 천산검문은, 아버지는 그럴 힘이 있다.
'내 다시 총타를 찾을 때는 나의 손이 네놈의 목을 딸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갑자기 사라졌다?"
"네."
"흐음."
사우는 여수경이 머물렀던 방을 둘러봤다.
"따로 만난 사람은 없고?"
"아가씨는 율 공자 외에는 따로 만나시는 분들이 없습니다."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갑자기 총타를 빠져나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 중 하나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았거나 그녀를 아는 인물과의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사우는 후자라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그녀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다. 아마 금제를 걸었을 게다.
사람이 기억을 잃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봤다면 말이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율무천을 떠 본 결과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이 확실해졌다.
'누굴까.'
녹림총련의 사람일 것이다. 특히나 그녀와 친분이 가까운.
'율무천은 항복을 하는 자들은 목숨을 살려 줬다고 했지.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수뇌부는 모조리 죽였을 것인데. 살아남은 놈이 있나 보군.'
사우는 홀로 고민하다 머리를 박박 긁었다.
'천하의 사우가 계집이나 찾고 있고. 한심하구나.'
그는 여수경이 머물던 곳을 나왔다.
"조용하군."
오늘 새벽 율무천이 폐관에 들어갔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백 일 뒤에나 면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천회의를 위해 사대검문을 비롯해 이각 사부 사전의 수장들이 모였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벌어졌었지만, 율무천의 정인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우는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렸다.
"마존이 일하는 곳이 저쪽이었던가."
천지각 안으로 들어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율무천이 건네준 금패를 보여 줌으로 쉽게 출입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불쾌한 표정들과 의심의 눈초리는 숨기지 않는다.
천지각은 굉장히 넓었다.
그 안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
"글쎄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참."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마존이 전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사우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안내를 받아 천지각주의 집무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우라 합니다."
석지관은 사우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율 공자의 대리인이라?"
"예."
사우는 금패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 줬다.
"확실히 맞긴 한데 말이야."
그런데 여기는 왜 왔냐는 눈빛이었다.
바쁜 가운데 귀찮은 물건을 하나 건네받은 것 같은 표정이다.
"율무천 공자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쭤볼 일이 있어서 말이죠."
"말해 보게."
"여수경 아가씨의 행방을 쫓으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흐음."
천지각의 눈과 귀는 사방팔방 퍼져 있다.
집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떤 무인이 그날 밤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지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서남으로 향하셨네."
"아무도 잡지 않았나 보군요."
"본맹에서 여수경 아가씨는 그저 율무천 공자의 여인 외에는 그리 큰 의미가 있는 분이 아니지."
"그런가요."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련인가.'
서남쪽이라면 사천성이다. 그리고 그곳은 사마련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갑자기 그녀가 사천성으로 갈 이유는 없다.
천지각 건물을 나왔다.
갑작스럽게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곧 비가 내릴 모양이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왜 여수경이라는 여인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야수마황의 손녀딸인 그녀를.
율무천의 정인이라는 그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