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章 무룡단의 전멸 (10/38)
  • 第三章 무룡단의 전멸

    "날이 너무 좋지 않아?"

    여수경은 기지개를 폈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은 늦잠을 잤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일어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아니면 몸 상태가 나쁘다거나.

    하지만 오늘은 둘 다 아니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지겨운 일상에 지쳐 눈을 떴음에도 몸을 움직이기가 싫은 날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모양이다.

    "아가씨, 그냥 나가시면 어찌해요."

    남북천맹 맹주의 자식인 율무천의 정인이었다. 그런 여수경이 가꾸지도 않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외출을 하는 일은 보기 좋지 않다.

    시비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으며 잔소리를 해 대었다. 하지만 여수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에휴. 앞으로 맹주의 정실부인이 되실 분께서 이런 곳엔 왜 자꾸 오신답니까."

    시비의 한숨이 길어졌다.

    여수경이 찾은 곳은 연무장이었다. 율무천의 직속 무력기관인 무룡단원들만의 연무장 말이다.

    그곳에는 매일같이 빠지지 않고 무룡단원들이 무를 단련하고 있었다.

    "저 사내 이름이 뭐라고 그랬더라."

    여수경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얼마 전 율무천과의 재회에서 눈에 띄었던 무룡단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글쎄요. 물어보고 올까요?"

    "아니, 아니다.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시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의 이름을 왜 궁금해하는 것일까.

    '궁금해 미치겠어!'

    아무에게도 내색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 내고 싶어 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말이다.

    여수경은 점점 집착하고 있었다.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적에는 지금 남북천맹의 총타 안이었다.

    낯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지내야만 했다.

    아침이면 일어나고 밤이면 잠이 들었다.

    하루 세끼는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지금 같이 있는 시비를 제외하곤 일체 누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때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잠자리와 제 시간이면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말이다.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세 명의 사내가 방문했다.

    할아버지 여곤, 남북천맹의 맹주, 그리고 율무천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그동안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녀가 녹림총련이라는 단체에 납치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라고.

    하지만 녹림총련은 세상에서 지워졌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삼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말이다.

    한 일 년쯤 지나자 스멀스멀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갑자기는 아니었다.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한 꺼풀 한 꺼풀씩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나는 누구일까부터 시작해서 평소의 버릇들 또는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얼굴들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손녀라고 부르는 조부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과거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선가 많이 봤다고 느껴지는 사내를 만났다.

    무룡단의 새로운 단원이라고 하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분명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이 되는 얼굴이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 그 사내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어볼 계획이었다. 물론 자신을 알고 있다면 먼저 말을 걸어왔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은 맹주의 사부 여곤의 손녀였고 비공식적이지만 율무천의 여인이었다.

    당연히 말단 단원으로서는 다가오기 힘든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래서 직접 말을 걸어 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단원들의 눈빛은 달갑지가 않았다.

    비록 실외에서 하기는 하지만 무인들의 수련을 허락 없이 지켜보는 일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단주의 여인, 누구도 불만 섞인 말을 표출하기는 힘이 들었다.

    "반가워요. 저를 아시……!"

    "나가 주시죠."

    '커헉!'

    단주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일개 단원이라는 자가 그녀더러 나가라고 말을 내뱉었다.

    모두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그 주인공, 진소백을 바라봤다.

    연무장 주변은 담벼락으로 가려져 있는 위치에 있었다. 높은 곳에서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구경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여수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미쳤구나! 어찌 감히 아가씨께!"

    마치 자신이 능욕을 당한 듯 시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하지만 진소백이라는 단원은 떳떳했다.

    뒤에서 구경하던 단원 중 하나이자 같은 방을 쓰는 소필호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 하는 짓이냐, 자식아."

    조용히 귓속말로 했지만 귀가 있다면 들을 수 있는 정도의 목소리였다.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여기는 무인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입니다. 차라리 몰래 훔쳐보던가, 이렇게 대놓고 구경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어이구, 두야!"

    소필호가 이마를 감싸 안았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그래도 그렇지, 주군의 여자한테 이렇게 무안을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소필호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전음을 이용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여수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적지 않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나 보네요. 예의에 어긋났다면 사과드릴게요."

    이자들은 율무천의 수하들이었지 자신의 수족은 아니었다. 당연히 사과를 해야만 하는 상황임을 깨달은 여수경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무룡단원들은 지금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스러워했다.

    "소저께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시니 더 이상의 불미스러운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감사한 일이네요."

    여수경은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고 시비는 생각했었다. 율무천에게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수경의 태도는 너무나 지혜로운 것이다. 이 자리에서 더 크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욕을 먹는 건 바로 율무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웃으며 점잖게 사과를 대신한 것이다.

    "후우.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여수경은 진소백에게 말하면서 소필호를 쳐다봤다. 눈치 빠른 그는 즉시 주변에 있던 무룡단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지난번에 한번 뵌 적이 있었지요. 그때 성함을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요."

    "연청문 제자 진소백입니다."

    "아, 이제 기억이 나네요. 다름이 아니라 혹 저를 남북천맹 총타가 아닌 장소에서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진소백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요. 소저께서 복건성에 위치하는 본문을 방문하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요."

    여수경은 실망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사우?'

    "그럼 전 이만."

    돌아서는 진소백의 등을 보며 여수경이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혹시 사우라는 이름을 아시나요?"

    되돌아가던 진소백의 걸음이 멈춰졌다.

    돌아보는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연무장을 벗어난다.

    "사우? 사우가 누군데요, 아가씨?"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그 이름이."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여수경이 연무장을 방문했을 적부터 멀리서 지켜보던 율무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금제가 풀려 가는 건가."

    "아직은 아닌 듯 보입니다."

    "알아봐. 그리고 진소백이라는 녀석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데리고 오도록 하고."

    "존명."

    "아, 잠깐.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저 녀석과 그녀가 과거에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봐."

    명령을 하달 받은 신욱이 자취를 감췄다.

    진소백은 신욱의 율무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율무천은 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진소백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앉으세요."

    그는 항상 무룡단원들에게 하대를 했다.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율무천과 단원들은 주종관계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율무천은 진소백을 하대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진소백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율무천이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원주께서 보내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율무천은 진소백이라는 사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진소백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렇습니다."

    "숨기지 않으시는군요."

    "이미 공자께서 들렀다 가신 걸 전해 들었습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하십시오."

    "여수경이라는 여인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율무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언제부터 알던 사이였습니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습니다. 삼 년 전에 일면식이 있었죠."

    "삼 년…… 삼 년 전이라."

    그렇다면 그녀가 초미로 살아가던 시절을 알고 있으리라. 헌데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는 척 넘어갈 의도로 짐작이 된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시죠."

    "원주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어버이 같으신 분입니다."

    "어버이라…… 무공도 원주께 배운 것이겠군요."

    진소백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율무천은 잠시 질문을 멈췄다. 천룡원주 살가륵에게서 무공을 배웠다면 어줍잖은 실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천룡원주를 진심으로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면 믿을 만할 것이다.

    살가륵은 율무천의 아버지 율천세가 맹주의 자리에 오를 때도 큰 힘이 되어 준 존재였다. 그리고 현재 맹에서도 살가륵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무인 살가륵을 존경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원주께서 저를 도우라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당신도 그 뜻을 따를 작정이고요."

    "하하! 난 그분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겐 무공 스승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지금 공자의 말에는 어폐가 있네요. 그것도 아주 상당하게 거슬리는."

    웃음을 머금던 진소백의 표정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난 그분의 개가 아니라는 거죠. 그분께서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율무천의 낯빛이 굳어졌다.

    이 사내 뭔가를 원하고 있다.

    "거슬렸다면 사과드리죠. 좋습니다. 아무래도 뭔가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세요."

    이 사내가 탐나는 것은 아니다. 진소백이라는 사내 뒤에 있는 살가륵이라는 배경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 내가 공자를 도와주는 대가(代價)입니다."

    "……!"

    율무천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지금 밖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공자의 심복 말고 바로 공자의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는 그림자."

    그런 삶을 원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허나 그런 삶이 갖다 주는 건 외로움과 비참함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공자가 맹주가 되면 그때 비로소 빛을 보게 해 주면 됩니다."

    진소백이 내뱉은 말의 뜻을 율무천은 이해했다.

    율무천은 진소백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과연 이자가 바로 며칠 전 순둥이처럼 자신의 목검을 받아 든 자와 동일인물인지 구분하기 힘이 들었다.

    율무천은 이런 부류의 사내를 처음 본다.

    맹주의 자식인 자신에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자가 이렇게 당당한 것도 색다르게 다가왔다.

    호기심 반, 의심 반이라는 감정이 얽히고설킨다.

    과연 이 사내를 믿고 일을 맡겨도 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사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천룡원주를 믿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느냐."

    "신원이 불명확한 자입니다."

    율무천의 물음에 신욱이 대답했다.

    "원주가 내게 보낸 인물이다."

    "사실…… 원주의 신분도 그리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말이다. 원주의 힘이 없었다면 지금의 아버지도 지금의 나 율무천도 없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지. 그리고 그분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셨다."

    신욱은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율무천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후우. 일단은 그 사내를 내 밑에 두기로 했으니 그리 알거라."

    "알겠습니다."

    신욱은 대답을 하곤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율무천에게 내밀었다.

    "대막검문에서 온 서찰입니다."

    율무천은 서찰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 계획에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하는군."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제천당(帝天堂)?"

    "대막은 사대검문 중에서도 가장 비밀이 많은 곳입니다. 새로 육성된 조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까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무룡단을 없애고 이들을 내 직속으로 썼으면 하는 바람인가 본데."

    "불가합니다."

    "그렇지…… 나를 뒷받침해 주는 세력들의 무인들을 선별해 새로운 무룡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사흘 뒤, 무룡단 전원을 총타 밖으로 내보낸다. 하나둘씩 천천히."

    "존명."

    '사우…… 사우라.'

    그녀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속으로 사우라는 이름을 되뇌기만 했다.

    탁.

    "……!"

    시비가 내려놓은 찻잔이 탁상에 부딪히며 소음을 내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응?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만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지 얼굴빛이 좋지가 않다.

    "할아버님께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으시지?"

    "뭐, 그렇죠. 몇 달씩이나 안부 소식을 묻지 않으시네요."

    여수경의 조부가 되는 여곤은 삼 년 전 그녀를 남북천맹으로 데려온 이후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 이후 서찰로만 안부를 묻고는 했지만 최근엔 그것마저 끊긴 지 오래다.

    맹주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말이다. 아마도 여곤은 율천세의 상태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답답함이 더 거세졌다.

    할아버지라도 뵐 수 있으면 속 시원하게 물어나 볼 수 있을 터인데.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이 가득하다. 게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후우.'

    결국 찾아가 하소연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여수경은 시비도 대동하지 않은 채 율무천의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거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을 지키던 무인들의 말에 의하면 잠시 출타 중이라 했다.

    짙은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항상 바쁘게 살아가는 율무천의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여간 힘들고 외로운 일이 아니다. 같은 공간 안에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워낙 방대한 크기의 공간이다.

    게다가 수개월 전부터는 급작스럽게 바빠지기 시작한 그다.

    다음 대 맹주 자리에 오르기 위한 준비 작업 때문이다. 지금까지 율무천의 집안이 맹주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천산검문 수장의 아들 화진천.

    여수경은 그 사내를 두 번 본 적이 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는 화진천이라는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곁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눈길을 마주한 순간 소름이 돋았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런 사내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퉈야 하는 입장인 율무천이기에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여수경은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오면서 오고 가는 남북천맹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초미 아가씨."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채로 이동하는 자들과 스치자마자 전음이 들려왔다.

    여수경은 급히 몸을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간 무리들을 뒤돌아 봤지만 그들은 제 갈 길들을 가고 있다.

    여수경은 불현듯 지금 자신의 귀에 들린 것이 무림인들이 쓰는 전음이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공을 모르니 상대를 찾을 수도 없었다.

    "아가씨께서 자주 가시는 정원에 제 흔적을 남겨 뒀습니다. 부디."

    마지막 부디라는 단어에는 왠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여수경은 방향을 돌렸다.

    그날 밤, 총 열 명의 사람들이 남북천맹 총타에서 은밀하게 빠져나갔다. 그중 아홉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무룡단원이었다.

    그들은 단주인 율무천의 명령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한 명은 자신의 시비 복장을 한 채 분장을 하고 빠져나간 여수경이었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정문으로 향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담을 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사내와 함께 그가 준비한 통로로 몰래 빠져나갔다.

    여수경은 중년인의 뒤를 쫓았다.

    총타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그는 말이 없었다. 여수경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내는 자신의 정원에 작은 서찰을 떨어트려 놓았다.

    그 안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남북천맹의 힘으로 몰락한 녹림총련 련주의 자식으로 성장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믿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하고 싶어서 사내와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경솔하셨습니다."

    "……!"

    "제가 만약 아가씨를 해치려 마음먹었다면 그리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렇게 지혜롭지 못하십니까. 낯선 사내를 이렇게 쉽게 따라오다니요."

    여수경은 이름 모를 사내의 말속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내 몸 하나 지킬 정도의 무예는 갖추고 있지요."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북천맹 총타에 왔을 적부터 기본적인 무예를 수련받아 왔다.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현재 아가씨는 율무천의 정인입니다. 남북천맹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이들이 보냈다면 아가씨가 익힌 무예 정도는 가볍게 이길 것입니다."

    그러더니 사내는 난데없이 무릎을 꿇었다.

    "기억을 잃어버리셨다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하욱이라 합니다, 초미 아가씨."

    "내 이름이 초미였던가요?"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욱이라는 이름도.

    갑자기 또 머리가 지끈거려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증거를 보여 주세요. 당신이 나를 보필하던 사내라는 것을."

    여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욱은 일어서서 웃통을 벗었다.

    그녀는 그런 하욱의 행동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옷이 벗겨지자 울룩불룩한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욱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그녀가 자신의 등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문양은 분명 아가씨의 옥체에도 있으실 겁니다."

    여수경의 눈에 빛이 났다.

    그의 등에는 붉은 호랑이가 문신으로 박혀 있었다.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하욱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녹림총련의 련주 녹림지존을 모시는 오호장 중 권호 하욱 이렇게 미련하게 목숨을 부지해 왔습니다. 인사를 드립니다."

    하욱은 고개를 숙였다.

    "이 문양은 련주와 하나뿐인 혈육이셨던 초미 아가씨, 그리고 련주를 보필하는 오호장에게만 각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살아서 남북천맹에 있는 것이죠?"

    "너무나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이곳을 멀리 벗어나는 것이 다급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조금 더 이동하자 하욱이 준비해 놓은 두 필의 말이 있었다.

    "어디로 가죠?"

    "사천성으로 갈 것입니다."

    "사천성?"

    "예. 그곳에 저희를 도와줄 이들이 있습니다."

    하욱은 말 엉덩이를 걷어차며 힘차게 출발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율천세는 중년인의 보고를 받았다.

    "무룡단이 총타를 빠져나갔다?"

    "그렇습니다, 맹주."

    맹주 직속이면서 그의 호위를 총 책임지고 있는 천무대주 천섬검(天閃劍) 구범악(具範岳)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보고를 받자마자 눈을 감아 버린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아는 맹주 율천세는 겉으로는 위엄 있고 무뚝뚝하지만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율천세가 지금처럼 자신의 화를 억누르는 모습을 보인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자식에 관련한 문제인지라 그런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특히나 크게 신뢰하던 자식이 몇 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한 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기에 더더욱.

    "자네는 알겠나."

    "……."

    "무천 그 아이가 왜 무룡단원들을 그토록 은밀하게 밖으로 빼돌리는지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남북천맹 총타에 속해 있는 무력기관들이 밖으로 나가려면 맹주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한다. 그런 규율을 어길 시에는 사부(四部) 중 하나인 귀부가 움직인다.

    아니, 말을 정정해야겠다.

    반란 세력으로 파악되면 움직인다.

    총 일곱 명으로 구성된 귀부는 남북천맹 전체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맹에 속해 있는 단체들 중, 반기를 들거나 비리를 저지른 자들을 처단하는 어둠의 기관이 바로 귀부였다.

    하지만 귀부는 맹주의 명령으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천룡원 직속이 바로 귀부다.

    원로들의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귀부를 움직일 수 없다.

    율천세는 귀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했다. 천룡원주 살가륵은 결코 율무천을 잡기 위해 귀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친손자처럼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식의 허물을 그대로 덮어 주는 건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이 있는 녀석인지."

    탄식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구범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율천세가 허락해 줄 리가 없다.

    "이게 다 내 잘못이야. 후우."

    삼 년 전 율천세는 녹림의 토벌을 명령을 이행하고 온 아들과 제자의 성과를 살폈다.

    아주 상극이었다.

    아들은 많은 이들을 살려 주었다.

    반면 제자 화진천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륙을 일삼았다.

    율천세는 화진천이 아닌 아들을 나무랐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 맹주의 자리의 앉히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허나 적들을 생각 없이 살려 준 행동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군중들의 칭찬과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지만 분명 위험한 행동임에는 틀림없었다.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적을 살려 주는 일은 성품이 착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멍청하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이다.

    율천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검을 들이대는 적은 가차 없이 죽여야 한다. 아니면 완전하게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칼밥을 먹고 사는 무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율무천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굉장히 화를 냈다. 그것도 화진천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후 율무천은 바뀌었다.

    권력에 관심이 없던 그는 남북천맹의 수뇌부들과 안면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조금씩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맹주라는 자리가 이토록 허무하고 힘이 없는 자리인 줄은 몰랐네."

    율천세는 자조 섞인 웃음을 보였다.

    남북천맹은 너무나 거대한 세력이다. 맹주의 권위가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너무 많은 기관과 속해 있는 문파만 스물아홉 개가 된다. 사대검문만 하더라도 각 가문 가주들의 힘은 맹주를 뛰어넘는다.

    한마디로 허울뿐이라는 소리다.

    "모든 촉각을 그 아이에게 집중하게."

    "존명."

    다른 무룡단원들이 삼삼오오 조를 이루어 목적지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우만은 홀로 움직였다. 그게 편해서 율무천에게 허락을 맡은 것이다.

    '팔자에도 없는 명령을 따르고 있네.'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형과 사부 외에는 천하 누구도 자신에게 명령이란 걸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처해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 버렸다.

    사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현재 모습이 말이다.

    사우는 율무천을 맹주의 자리에 앉힐 생각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대검문에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맹주 자리를 꿰차고 앉을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속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더라면 박장대소를 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다. 욕지거리를 내뱉고 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우는 그런 미친 짓을 하려 한다.

    힘이 필요하다. 대상은 다름 아닌 남북천맹이다. 현 무림을 다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곳 말이다.

    단단한 암벽과도 같은 남북천맹이지만 그건 겉의 모습뿐이다. 너무나 많은 단체들이 속해 있다 보니 결속력이 떨어진다.

    그 틈 사이로 끼어들어 흡수하려는 것이 사우의 목적이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흑천살막은 사우도 모르는 중원 천지 곳곳에 퍼져 나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천맹이 무림이라는 곳의 지배자이지만 그 뒤 어둠 속에는 흑천살막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심연의 어둠 속에서 세상을 조종하고 있는 단체다.

    흑천살막의 사람들이 어느 단체 어느 인물로 존재하는지는 사우조차도 아는 자들이 몇 없다. 그중에 한 명이 살가륵이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알 수 없는 사실은 흑천살막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아마 알고 있을 것이란 확률이 높겠지만 말이다.

    사우는 섬서성을 떠나 사천성과 감숙성 경계 부근인 도시에 도착했다. 지금까지는 빠르게 이동을 하느라 노숙을 했지만 이젠 목적지까지 거의 도착했다.

    더러운 몸을 씻고 편안하게 쉴 객잔을 찾아 금액을 지불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깔끔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사우는 밖의 기척을 살폈다.

    율무천은 아직 완전히 자신을 믿지 못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수하를 붙여 놓은 것이고.

    "부단주, 신욱이라 했던가. 미행하는 법이 어설퍼."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기에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총타를 빠져나오면서부터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척을 숨긴다고 나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다. 절로 비웃음이 걸린다.

    사우는 동경 앞에 서서 역용술을 펼쳤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사우 본래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난번 마존을 만났을 적 그때 그 얼굴은 아니었다. 한 번 했던 얼굴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았다.

    '율무천…… 꽤나 잔대가리 굴릴 줄 아는 놈이야.'

    방문을 나서면서 사우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밤 율무천의 명령으로 진소백을 미행하던 신욱은 그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신욱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있던 그는 웅크렸던 몸을 펼쳤다.

    그리고 건물들의 지붕을 타면서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진소백이 머무는 곳에서 일각 정도를 달려 낡고 볼품없는 뒷골목에 도착하자 미련 없이 몸을 집어넣는다.

    오물 냄새와 갖가지 쓰레기로 가득 찬 실내로 들어선 신욱은 허름한 문짝을 밀고 들어갔다.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보인다.

    그는 성큼성큼 아래로 향했다.

    벽면으로 이루어진 지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각으로 형성된 공간에는 나무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었고 자리 하나에는 신욱을 맞이하는 자가 있었다.

    청안검객 소립이 바로 그다.

    율천세의 제자 중 하나이자 대사형인 화진천을 따르는 소립이 신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는 삼 년 전이나 현재나 얼굴이 많이 변하지 않아 있었다. 앳된 얼굴이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 물론 그와 한 번이라도 검을 섞은 자들이라면 그리 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신욱은 그에게 예의를 취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참으로 희한한 풍경이었다.

    서로를 적이라 생각하는 율무천과 화진천의 측근들이 이렇게 일대일로 만난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했다.

    "대사형께서 일이 어찌 되어 가는지 알아오라고 절 보내셨습니다."

    "율무천은 현 무룡단을 지우고 새롭게 조직원을 구성할 생각이오. 그리고 전서구로 말씀드렸다시피 장소는 이 근처이고 말이오."

    "허면 그 대상은 누굽니까?"

    신욱은 소립의 말을 잠깐 알아듣지 못했다.

    "무룡단을 처리하는 대상과 그리고 그 누명을 뒤집어씌울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흠. 일단 무룡단은 대막검문의 제천당이 도와주기로 연락이 왔소. 헌데 아직 어느 곳으로 화살을 돌릴지는 의중을 모르오."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신욱.

    그의 말투에서 이미 율무천의 수하가 아님을 선포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가요.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왜 율무천이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굳이 무룡단을 밖으로 돌려서 모두 없애려 하는 행동은 위험하다는 걸 알 텐데요."

    "내가 만약 율무천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돌려 막았을 명령이오."

    당연하다. 만약 지금의 사실이 남북천맹 내에서 퍼져 나간다면 다음 맹주가 되는 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수족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이려 하고 있다. 의와 정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파의 우두머리가 남북천맹이다. 그런데 맹주의 자식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 점이 소립은 이해하기 힘이 들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뭔가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다.

    "혹 그대를 의심한다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럴 리는 절대 없소."

    신욱은 자신 있는 어조로 소립의 의견을 묵살했다. 더 이상의 의심은 용납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율무천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처리할지 지켜보도록 하죠. 은밀하게 움직여 주세요. 그리고 율무천이 새롭게 영입한 그 사내에게서도 눈길을 거두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리다."

    잠시 후 소립이 조용히 사라졌고 신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그러곤 그곳에 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얼굴을 바꾼 상태였다.

    "율무천이 아주 꼴통은 아닌 모양이야."

    그는 뭐가 재밌는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무룡단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소는 이름 없는 산중턱이었다.

    그들은 무슨 임무인지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짐작컨대 비밀 작전에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래서 그럴까. 단원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엿보였다. 긴장감이 감돌아서 그런지 며칠 만에 만난 동료들 사이가 조용하기만 하다.

    "부단주를 뵙습니다!"

    그런 와중에 무리를 이끌 부단주 신욱이 나타났다.

    "모두 모였나?"

    "한 명이 오질 않았습니다."

    "한 명?"

    "예. 진소백이라는 녀석입니다."

    신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객잔에서 출발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일각의 시간을 기다린다."

    꽤나 긴 시간이다. 침묵 속에서 신욱이 허락한 시간이 흘렀다.

    '오는군.'

    진소백의 모습이 눈에 나타났다. 물론 그전에 기척으로 느낄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헌데 진소백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신욱의 눈이 경계를 띠었다.

    진소백의 뒤에는 백옥 같은 피부에 혈색 무복을 입은 자가 따르고 있었다. 굉장한 장검을 들곤 땅에 질질 끌면서 걷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육척이나 되는 장신의 사내가 한쪽 손에는 누런 호리병을 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세 사람이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신욱은 율무천을 탓했다.

    신분도 근본도 모르는 자를 믿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현재 무룡단이 그리 강한 단체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정도는 된다. 게다가 숫자는 일백이 넘는다.

    겨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 놈에게 질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진소백이라는 놈이 오히려 측은하기까지 하다.

    신욱의 뒤에 있던 무룡단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진소백을 알아본 동료들의 동요가 심했다.

    그들도 무인이었다. 지금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이는 그동안 알고 있던 진소백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살기를 피우며 가까이 다가오는 진소백은 적이라는 사실을.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진소백, 아니 사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사냥이라고 해 두지."

    신욱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봐, 초호진."

    "왜."

    사우는 취기로 인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초호진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신욱을 가리켰다. 아니 신욱과 무룡단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다.

    "조져."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초호진은 술병을 던져 깨트렸다. 그러곤 옆에 있던 혈룡검마 무진이 동시에 신형을 감췄다.

    한 호흡을 들이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두 사람이 신욱과 무룡단원들 코앞에 나타난 시간은 말이다.

    "그럼 난 쥐새끼를 잡으러 가 볼까."

    사우 일행과 신욱, 무룡단원들이 칼부림을 일으킨 장소에서 십 장 거리에 소립이 있었다.

    그는 일류무인이다. 그 정도의 거리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소립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심히 혼란스러웠다.

    "설마…… 율무천 그놈이."

    "대가리가 나쁘지는 않구나."

    "……!"

    소립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소립은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온 자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재빠르게 날렸다.

    그는 율천세의 제자 세 명 중 가장 경공이 빨랐다. 남북천맹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말이다.

    허나 사우에게는 너무나 느리다. 그래서 지루하다.

    순식간에 소립의 앞에 등장했다.

    길목을 막힌 소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 무룡단의 앞에 나타난 세 명의 사내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한 것치고는 너무나 시간이 빨랐다.

    "누구냐."

    "진소백이라고 알려나. 부단주 놈이 보고를 했다면 알 수도 있을 텐데."

    소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놈이구나!'

    신욱의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다.

    신욱은 자신의 사형의 사람이다. 신욱이 대사형에게 보고를 하기 전에는 항상 자신을 거친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율무천이 새로운 사람을 얻었다고 말이다. 천룡원주 살가륵이 추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살가륵과 율무천은 친분이 두터우니까. 헌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부단주 놈의 보고.

    그 말은 눈앞에 사내가 신욱과 대사형이 내통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크게 본다면 율무천도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함정이다!'

    생각을 떠올렸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순간 풍압이 밀려 들어왔다.

    후왕!

    상대의 발목이 목 언저리를 향해 날아왔다.

    막아야 했다.

    공격을 막으려고 손목을 들어 올렸다.

    헌데 상대의 발이 방향을 틀어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리가 반쯤 꺾이더니 삼 장여를 붕 떠서 날아갔다.

    "커헉!"

    속에서 피가 역류하여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충격에 소립은 정신을 못 차렸다. 마른 바닥을 적시는 피는 분명 자신의 것이다.

    자신의 피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이러면 싱겁지."

    사우가 귀를 후비며 소립에게로 다가갔다.

    소립은 자꾸만 무너지려는 무릎을 곧게 펴려 노력했다.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내뱉었다.

    소립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우를 향해 검 끝을 세웠다.

    "율무천이 나를 죽이라 하던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아니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하려나?"

    사우는 능글맞게 웃으며 상대를 도발했다.

    으드득.

    소립은 이가 으스러져라 악다물었다.

    자존심을 망가트린 놈을 살려 두라는 것을 배운 적은 없었다.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청운검법(靑雲劍法)은 소립의 독문검법이다.

    그의 가문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소문파였다. 소립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남북천맹 안에 끼지도 못하는 작은 시골 무가였다.

    소립의 부친이 전대 맹주 직속 천무대 부대주로 취임하면서 가문의 위상이 달라졌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청운검법을 열 배 스무 배로 끌어올렸다 할 정도로 소립의 부친은 기재였다.

    그런 부친의 영향을 받은 덕에 소립은 강하게 클 수 있었다. 덕분에 현 맹주 율천세의 제자가 될 수 있었고 말이다.

    소립은 청운검법을 팔성까지 펼칠 수 있었다.

    청운검법은 모두 일곱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검로로 치고 들어올지 예측하기가 힘이 든 것이 장점이었다.

    "제오초 청엽폭풍(靑葉暴風)."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두르자 검 끝에서 예리한 검기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초식 명 그대로 푸른 잎이 폭풍처럼 적을 쓸어버릴 기세였다.

    콰콰콰쾅!

    사우가 그걸 두 눈 뜨고 맞을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소립은 사우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러곤 미련 없이 검을 휘두르며 몰아 붙였다.

    그런데 아무리 휘둘러도 옷깃도 스치지 못한다.

    사우는 그런 소립의 공격을 피하며 혀를 찼다.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너무 힘이 들어가 있고 흥분하거나 긴장하여 실력 발휘를 못하고 있다.

    율천세의 제자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영 기대 이하다.

    사우는 반격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소립의 손목을 한순간에 낚아챘다.

    그러곤 몸 안쪽으로 깊게 끌어 들였다가 일순간에 밀어내 버렸다.

    중심을 잃은 소립이 비틀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사우는 자신의 흥을 돋우지 못한 상대에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검은 바람이 불었다.

    흑풍철각(黑風鐵脚)!

    검을 들고 있지 않을 때 사우가 사용하던 각법이다.

    단언하건데 만년한철이라 할지라도 부숴 버릴 파괴력이 있다.

    하물며 인간의 육체는 가루로 만들어 버릴 각법이다. 아무리 몸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소립의 허리가 또다시 한 번 꺾였다.

    더 이상의 소음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 소립의 생이 끝이 나 버렸다.

    "어이, 사우! 우리도 끝났는데."

    뒤에서 초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껏해야 일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신욱을 포함한 무룡단 전체가 두 사내의 의해 목숨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흔적은 깨끗하게 지우고 신욱의 시체를 여기다 박아 놔."

    "그러면 되는 거냐."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