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남북천맹
남북천맹의 총타 내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조직들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았다.
하나는 당연히 주인을 지키는 천무대.
그 인원이 몇 명인지 밝혀진 바가 없었고 어디 출신이며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진 적이 없다.
말 그대로 맹주 율천세만을 호위하고 지키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었다.
두 번째로는 총타 내에서 가장 깊숙한 위치에 자리한 천룡원(天龍院)이 있었다. 남북천맹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그곳은 하나의 독립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남북천맹의 원로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숫자는 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맹주 다음으로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북천맹을 대표하는 이각(二閣) 사부(四部) 사전(四殿)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천하의 모든 소식들을 관장하는 천지각(天地閣)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요원들이 보낸 전서구들로 정신없이 바쁜 곳이었다.
그곳에 맹주인 율천세가 나타났다.
천지각의 수장 광풍권(狂風拳) 석지관(釋地寬)의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각 기관의 수장들 중 원로원의 천룡원주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맹주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워낙 방대한 소식들이 오고 가는 천지각의 특성상 수장이 자리를 오래 비우기가 힘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
"둘이 있을 땐 편히 대하라 하지 않았나."
집무실로 들어오는 율천세를 보며 석지관은 미소를 머금었다.
깔끔한 비단옷을 입은 석지관은 광풍권이라는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를 가진 인물이었다.
가지런히 기른 수염을 비롯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정갈함을 잊지 않은 그의 옷차림은 선비처럼 느껴져 전혀 무림과는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석지관의 율천세와의 사이는 한마디로 죽마고우였다. 두 사람의 나이가 벌써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첫 만남은 삼십오 년 전이었다.
천지각이 바쁘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맹주를 호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율천세와 석지관의 친분이 돈독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날 이렇게 찾을 정도면 흔한 일은 아닐 터인데."
율천세가 자리에 앉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석지관에게 말했다.
"반 시진 전에 올라온 보고인데 말이야. 그냥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자네를 오라 했네."
"그래, 무엇인가."
"사천성과 섬서성에서 작은 싸움이 벌어졌네."
율천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일비재한 일 아닌가?"
"자네 말이 맞네. 무림에서는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일이지."
그랬다. 하루에도 무림은 싸움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단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석지관은 끝말을 흐리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싸움이 일어난 장소에 가 본 요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주변의 환경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더군."
"피래미들은 아니었나 보군."
"그렇겠지. 만약 그랬다면 내 선까지도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을 걸세."
"흐음."
"장소가 마음에 걸리네."
"사마련 때문인가."
석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성과 섬서성의 경계 부근에서 벌어진 싸움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본맹의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
석지관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갑자기 율천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혈화가 나타난 것 같네."
"……!"
율천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혈화!
사천성 화월문 문주를 지키는 자들이다. 여인들로 구성된 혈화는 무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무리였지만 지닌바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쫓는 자들이 암기술을 사용했다고 되어 있네. 헌데 천하에서 암기술로 주변 지형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기술은 몇 되지 않지."
"암천폭우(暗天暴雨)."
조용히 율천세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세월이 오래 지나긴 했지만 혈화의 무공을 견식한 바 있지 않은가."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지금은 남북천맹에 속해 있지 않지만 화월문은 과거에 남북천맹 소속이었다.
그리고 현 문주인 천상무후 지청화의 모친이 되는 지예림(池藝林)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삶의 끝을 장식해 줬던 사람이 바로 율천세와 석지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때 혈화의 무공을 직접 견식했던 적이 있었다. 혈화의 대표적인 무공이 바로 암천폭우였다. 하늘 위를 새까맣게 물들였던 암기들이 말 그대로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때 다친 상처가 가끔씩 욱신거린다.
"화월문에서 혈화를 내보낸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자들을 쫓고 있음이 확실하네. 게다가 혈화 외에 다른 무리의 흔적도 있다고 하는데 알 수가 없어. 같은 사마련의 세력인지 말이야."
혈화도 혈화지만 그들이 쫓고 있는 인물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혈화가 암천폭우를 사용했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과 그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지 못할 만큼 정신을 쏙 빼놨다는 사실은 분명 심각한 일이었다.
게다가 혈화와 함께 이동한다는 무리도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큰 우려는 사마련의 존재였다.
사천성 네 개의 문파가 연합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섣불리 그들의 세력을 와해시킬 수 없었다.
현재 무림에서 남북천맹에게 적의를 드러내 보이면 무림인이 아닌 자들에게도 손가락을 받는 세상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스스로 악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남북천맹은 쉽게 저들에게 칼을 뽑아 들 수 없었다. 저들에게 검을 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명분이라는 것이 없었다.
단순히 연합이라는 세력을 구축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했다가는 지금까지 쌓아 온 남북천맹의 색깔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어찌했으면 좋겠나."
"화월문에서 쫓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섬서성은 본맹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장소이지 않나. 이미 천지각의 요원들이 곳곳에 퍼져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걸세. 이참에 사마련이라는 단체에 본맹의 힘을 보여 줘도 괜찮을 듯싶네. 물론 저들이 섬서성에서 사고를 쳤을 경우에 한에서 말일세."
석지관의 의견에 만족한 율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하게 얼굴이 펴진 것은 아니었다.
"귀부(鬼部)를 움직이는 게 어떻겠는가."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흐음. 그래도 이왕 힘을 보여 줄 것이라면."
"자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 하는 것이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피를 봐서는 안 될 텐데 말이야."
"당연하네."
늦은 밤, 무룡단의 복장을 입은 사내가 남북천맹의 총타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무룡단의 무인들이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이토록 은밀하게 총타의 문을 나올 수는 없었다.
바로 사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돈영(混沌影)을 극성으로 익힌 사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는 인물은 남북천맹 내에서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건물의 지붕을 타기도 하며 어두운 골목을 지나갔다. 그러다 이내 밝은 도심으로 몸을 나타냈다. 헌데 놀라운 것은 걸친 옷도 생김새도 사우가 아닌 다른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역용술을 이용하여 삼십 대 초반의 평범한 사내로 얼굴을 바꿔 버린 것이다.
사우는 망설이지 않고 커다란 주루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인 만큼 사람들이 가장 붐비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간단한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은 시간이었기에 혼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 사우는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다.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는 그의 앞에 누군가가 와서 착석했다.
"어이, 벌써 와 있었구먼!"
허름한 복장의 촌부는 너무나 반가운 표정으로 사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무 덜떨어진 얼굴 아니냐."
사우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소리는 다른 내용이었다.
"하하! 오늘은 내가 좀 일찍 왔네!"
"그러는 네 얼굴이나 좀 어떻게 해 봐라. 볼에 난 그 점은 정말이지 못 봐 주겠다."
촌부의 얼굴로 가장한 마존이 웃으면서 사우에게 전음으로 답했다.
"어때, 천지각에서의 생활은."
"생지옥이다. 열흘 넘게 두 시진 이상 자 본 적이 없으니."
"천하의 모든 일들이 그곳으로 모이니 그럴 수밖에."
사우가 촌부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쭉 들이키게!"
두 사람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입 밖으로는 다른 내용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오늘 천지각으로 온 소식 중에 사군악과 담천, 대찰영의 내용이 있었나 봐. 석지관이 율천세를 호출해서 긴히 이야기를 나누던데."
"……."
"사마련에서 녀석들을 잡으려고 꽤나 강한 놈들을 붙였나 봐. 석지관에게 보고서가 넘어 가기 전에 어렵게 훑어봤는데 싸움으로 인해 주변 지형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어."
"놈들이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사마련은 그리 가벼운 존재가 아니야."
"어쨌거나 녀석들은 무사한가."
"그런 것 같은데. 아마 쉽게 사마련의 추격자들을 뿌리치지는 못할 거야. 천지각주 석지관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갈 정도면 만만한 일이 아닐 테니까."
사우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겠지. 지옥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이니까."
"너의 그 지독한 훈련에도 살아남았는데 겨우 사마련의 추격자들에게 죽으면 억울하기도 할 거야."
마존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 *
마차는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산자락을 내려가고 있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사군악이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평소에도 그리 자주 웃거나 밝은 표정을 유지하는 사군악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심각해 보였다.
"빌어먹을."
나름대로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마련을 너무 우습게 봤다.
어찌 알았는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자들을 보내 왔다. 그것도 생각보다 엄청난 자들을 말이다.
벌써 두 차례의 격전이 벌어졌다.
여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세 명과 검은 무복으로 가려 입은 놈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의 힘이 실로 강했다.
특히 세 명의 여자들이 다루는 암기술은 자칫 잘못했으면 골로 갈 뻔했다.
만약 사우와 함께 했던 삼 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제대로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시체가 되었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이틀 동안은 기척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섬서성으로 들어섰고 이제 조금 있으면 서안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남북천맹의 총타가 있는 서안 말이다.
이미 저들이 손을 쓰기에는 늦은 상황이다.
이곳에서 피를 봤다가는 당장에 남북천맹의 힘이 가해질 테니까 말이다.
부르르!
이미 서안은 목적지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일행이 묵을 숙소도 미리 예견되어 있던 장소다.
사군악과 담천, 대찰영이 숙소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사우가 남겨 두고 간 서찰이었다.
절강성 항주로 가라. 그곳에서 환희루(歡喜樓)의 주인을 만나라.
사군악의 이마에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실룩거렸다.
"지금 이 새끼가 장난치나!"
마인곡을 나와서 시키는 대로 했건만 기껏 이뤄 놓은 건 겨우 독마궁 궁주의 죽음뿐이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대찰영이 울분을 토해 낼 일이었다.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대상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 절강성으로 가라니.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환희루의 주인을 만나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담천은 무거운 몸을 의자에 묻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안으로 오는 길에 마주친 예기치 않은 추격자들의 공격으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덕분에 긴장이 풀린 지금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데 다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어찌할 테냐."
자신보다, 사군악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바로 대찰영이었다.
누구보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 냈다.
투살기라는 내공법을 익힌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텨 내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인고의 노력이 없다면 말이다.
대찰영은 그런 투살기를 대성한 인물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말이다.
"사 년…… 오 년을 넘게 기다려 온 복수입니다. 조금 늦어진다 하더라도 참아 낼 수 있습니다."
사천성에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냉철해진 것이다.
추격자들과 손을 겨뤄 본 이후였기에 이런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사마련이라는 단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 참아 내라. 너의 지독한 분노심을 키우고 키워 상대를 만났을 때 터트려라. 그래서 너의 원한을 풀어라."
세 사람은 그날 바로 서안을 떠나 절강성으로 향했다.
* * *
탁!
펼쳐져 있던 백색 섭선이 제자리를 찾았다.
섭선을 들고 있던 사내는 조용히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 깔끔하게 정갈 된 머리는 뒤로 묶여 있다. 굵고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며 이목구비는 뚜렷하여 언뜻 보기에는 사내라고 보기 힘이 들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내가 타고 있는 배는 천천히 푸른 물 위를 갈랐다.
"보이는구나."
사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을 바라봤다.
암흑제도(暗黑諸島)!
아마 백오십 년 전이었을 것이다.
남북천맹이라는 커다란 세력이 생기기 전 전 무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혈천마성(血天魔城)이 있던 섬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에도 주변이 안개로 뒤덮여 있다. 마치 하루 종일 어둠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하여 그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새롭게 탄생한 남북천맹의 힘이 혈천마성을 무너트렸다. 벌써 육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이후 혈천마성의 뿌리를 이어받았다고 선언한 많은 사파의 무리들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혈천마성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들의 척살대상 일호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무림에서는 금기시되어 있는 단어였다. 육십 년 전 일이라고는 하지만 남북천맹과 혈천마성의 전쟁 과정은 아직도 수많은 이야기꾼들을 통해서 전해지곤 했다.
물론 한없이 과장된 것들도 많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넌 어찌 생각하느냐."
사내는 타고 있던 배가 뭍에 거의 다 왔을 즈음 조용히 중얼거렸다.
"……."
그의 뒤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중년인에게 물었다.
중년인은 초췌한 얼굴에 오른쪽 귀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분에게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
그래도 중년인은 말이 없었다.
사내는 작게 미소를 그렸다. 언제나 변함없는 중년인의 모습이 새삼스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내와 중년인은 말없이 섬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걷자 새까맣게 어둡던 주변이 밝아졌다.
빛의 밝기도 밝아졌지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고요하기만 하던 암흑제도에 인적이 끊긴 지는 꽤나 오래전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금단의 영역 암흑제도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초저녁이면 인부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과거 혈천마성의 잔해들을 뜯어고친다.
하나, 둘, 셋 건물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중년인과 암흑제도로 들어온 사내, 쇄암왕(碎暗王) 주문룡(朱文龍)은 그 광경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적(伊的)."
"예."
묵직한 저음이 중년인 이적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녀석들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으냐."
"열흘이면 도착하실 것입니다."
"지금 속도라면 일 년 안에 공표할 수 있겠지. 혈천마성의 부활을."
주문룡은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 * *
퍼억!
율무천의 발길질에 무룡단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크윽!"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목검으로 쓰러져 내리려는 몸을 지탱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어서 일어나라!"
율무천의 일갈이 터졌다.
무룡단이라는 조직이 정식으로 생긴 이후 그들만의 연무장이 생겼고 훈련은 율무천이 총괄했다.
그는 사흘에 한 번씩 무룡단원들을 상대로 비무를 했다. 일대일로 할 때도 있고 두 명이나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인정사정없이 단원들을 대했다. 평소에는 친근하게 수하들을 다뤘지만 비무 때만은 달랐다.
단지 들고 있는 무기가 목검이라는 것만 달랐지 실제 혈전을 치르듯이 매정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사내가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윽고 목검이 여러 차례 휘둘러지며 율무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그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공격이 너무 단조롭다."
단원의 공격을 여유 있게 막으며 율무천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랬더니 사내의 공격이 조금 변화를 가지기 시작했다. 단조롭던 검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허나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빠악!
율무천의 목검이 사내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두 번째로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목검이라 우습게 여기지 마라.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 목숨 줄 끊는 건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나와 비무를 할 때는 목숨을 걸고 하라."
냉랭한 그의 음성과 함께 짧은 비무가 끝이 났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하는 율무천을 보며 사내는 주눅이 들었는지 고개만 푹 숙였다.
"이번엔 누가 나와 비무를 하겠느냐!"
율무천이 정렬해 있는 무룡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쉽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제,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무리들 사이로 쭈뼛거리며 누군가 나왔다.
율무천의 눈에 이채롭게 빛났다.
"이름이 무엇이냐."
"연청문의 제자 진소백이라 합니다."
"흐음, 그런가. 목검을 들어라."
자신감 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율무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 여수경이 이름을 물었던 적이 있는 단원임을 상기했다.
진소백을 가장한 사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목검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하압!"
율무천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개 단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충 움직일 수도 있었다. 허나 그는 인정을 두지 않았다.
결코 자신의 수하들을 약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목검이 잔상을 남기며 진소백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빠악!
내공이 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막긴 막았지만 몸이 중심을 잃고 몇 발짝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진소백은 일부러 신음을 흘리며 겨우 막았다는 것을 겉으로 보였다. 율무천의 공격은 일방적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 하지만 조금 전 단원과는 달리 당황해하면서도 곧잘 막아 냈다.
비무는 일다경 정도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목검을 든 팔을 내렸다.
비무를 지켜본 무룡단원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다경이라는 시간이 그리 짧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주인 율무천을 상대로 이토록 호각을 다툰 인물이 있었던가?
있다면 아마 부단주밖에 없을 것이리라.
그런데 일개 단원, 그것도 들어온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진소백이 나름대로 의외의 성과를 내 버렸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진소백이 깊게 읍을 하며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율무천은 그의 등 뒤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무룡단원들을 해산시켰다.
마른 수건으로 이마를 닦던 율무천의 곁으로 일대를 담당함과 동시에 무룡단 부단주를 맡고 있는 신욱이 다가왔다.
"연청문의 제자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흐음. 연청문이 저 정도의 무인을 배출해 낼 줄은 몰랐는데."
"마음에 드셨습니까."
율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진소백만큼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낸 단원은 없었다. 율천세가 교육시켰다는 무룡단이 약한 것이 아니다. 율무천이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한 것이다.
명색이 율천세의 자식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강자들 중에 그보다 어린 이는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가 매정하게 휘두른 목검을 일다경 동안 받아 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노려보기만 해도 주눅이 든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소백이라는 아이는 목검을 들기 전과 후에 차이가 많았다. 결코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무룡단은 강해져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율무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대막검문(大漠劍門)에서는 연락이 왔느냐."
"사람이 와 있다 들었습니다. 지금 처소에서 주군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없던 율무천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부단주."
"예."
"어쩌면 말이야…… 무룡단을 새로 정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실을 다지려면 내 수족은 필히 강해야 하니까 말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조만간 계획을 올려 보겠습니다."
"그래. 부단주만 믿겠네."
신욱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남북천맹 네 개의 기둥 사대검문!
산서성(山西省)의 보천검문(補天劍門).
하남성(河南省)의 천산검문(天山劍門).
호북성(湖北省)의 용호검문(龍虎劍門).
감숙성(甘肅省)의 대막검문(大漠劍門).
하나같이 이름만 들어도 천하가 들썩일 명문 있는 검가이자 검의 대표라 할 정도로 문파였다.
이들 사대검문 출신의 무인들은 남북천맹의 중요한 요직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아도왕(餓刀王) 서패우(셕佩宇).
지금 대막검문을 대표해서 그가 율무천과의 독대를 하고 있었다.
팔척장신에 골격은 엄청나게 커서 위압감만으로 사람을 질식사시킬 것만 같았다.
"맹주의 건강이 심히 좋지 않으시다 들었습니다."
굵직한 음성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율무천은 쓰게 웃었다.
"소문이 벌써 그리 났나요."
"사대검문은 물론 맹에서 중요한 문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실정이지요."
"후훗. 그렇다면 숨기지 않겠습니다. 아버님께선 현재 천무신공(天武神功)을 대성하기 직전까지 가셨다 실패하셨습니다."
"……."
"그 결과 단전이 파괴되셨죠."
"……!"
서패우의 부리부리한 눈이 부릅떠졌다.
"크크크큭!"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믿을 수 없다는 태도가 아니면 하지 못할 행동이다.
"괴상한 농을 좋아하시는군요."
"글쎄요. 농이라 하기에는 조금 수위가 높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율무천은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이런 반응은 예견했으니까 말이다.
"남북천맹의 맹주께서 이제는 한낱 범부의 지나지 않다는 걸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믿고 안 믿고는 아도왕의 선택이죠. 그리고 대막검문의 수장께 그대로 보고를 드리는 것도 아도왕께서 하실 일이고 말입니다."
서패우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분간하기 힘이 드는 모양이다.
완전히 무시하기에도 완전히 믿기에도 석연치 않은 내용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본문의 사신으로 온 제게 말씀하신 이유는 대막검문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원하시는 건 맹의 머리가 되고자 하시는 거겠죠."
율무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대는 천산검문이겠고요."
다시 한 번 율무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패우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사대검문…… 아니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스물아홉 개의 중소방파 모조리 자신들의 문파에서 맹주가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율무천은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막검문은…… 지금 당장 공자의 제의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
율무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도왕 서패우는 대막검문의 수장 서문륭(西門隆)의 심복이었다. 서열로 따지자면 대막검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권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그런 신분 때문인지 방금 내뱉은 발언은 무게가 상당했다. 돌려 말한 것뿐이지 숨은 뜻은 대막검문도 자신들의 사람을 맹주의 자리에 앉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신들의 혈육 또는 가문이나 문파에서 키운 제자가 맹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남북천맹이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율씨가문이 맹주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만약 율무천이 다음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사 대째가 된다.
율천세까지는 맹주의 후보 자리에 오를 만한 인물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허나 율무천과 화진천은 용호상박이었다.
하나는 유했고 하나는 불같았다.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가 바로 율무천과 화진천의 관계였다.
율무천은 삼 년 전 녹림을 토벌할 때 화진천이라는 사내의 광기를 맛봤다. 그는 자신이 현실에 안주할 때 미치도록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전장을 누비는 모습을 본 순간 율무천은 위기감을 느꼈고 그 이후 맹주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버렸다.
그래서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일들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 맹주님의 자식입니다. 아도왕의 의견은 곧 대막검문의 뜻이겠지요.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 율무천은 분명한 뜻을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내가 맹주의 자리에 오를 확률이 단 일 할이라도 있다면 전 반드시 맹주가 될 것입니다."
율무천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서패우는 잠시나마 율무천이라는 사내의 눈빛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짙은 광기를 보았다.
오로지 무에만 심취해 있던 맹주의 자식은 이제 권력을 맛보려 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앞으로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질 싸움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서패우였다.
"놀라운걸! 어리버리한 네놈이 단주님에게 비무를 도전할 줄이야."
소필호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진소백이라는 녀석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 것에 흥분해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진소백은 얼굴까지 붉히며 수줍어했다.
"아니. 아니야. 아무리 무룡단이 현 맹주님께서 직접 조직하시고 훈련시켰다 하더라도 그 실력들이 부족해. 내가 이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솔직히 단주님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수준들이 약한 편에 속하지."
진소백을 가장한 사우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소필호라는 자는 무룡단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 무룡단에 입단을 하자마자 사우가 놀란 것은 너무나 오합지졸들이 모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검무제가 직접 만들었다는 조직치고는 너무나 처참할 정도였다. 물론 남북천맹만 벗어나도 꽤나 알아주겠지만 말이다.
추측컨대 천검무제는 일부러 일정 부분 부족한 자들만을 모집한 듯했다. 앞으로 맹을 이끌어 나가야 할 혈육에게 내준 숙제였을 것이다.
사람을 다루는 법, 자신에게 목숨을 걸 수 있는 수하를 얻는 법, 그리고 지닌바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법 등을 말이다.
"벌써 삼 년이 지났지만 말이다. 아직까지 무룡단은 제대로 체계가 잡혀 있지 않다."
"……?"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이다…… 오늘 네놈이 보여 준 비무 때문에 앞으로 너의 미래에 밝은 등불이 켜질 수 있다는 것이야."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소필호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우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어쭈, 이놈 봐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듣는 걸 보니 아주 순둥이는 아니구나!"
남북천맹에 소문이 나돌았다. 천검무제의 자식이 후계자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소문 말이다.
그렇기에 율무천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단체 무룡단을 재정비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는 현재의 무룡단은 무리였다.
특히나 그가 넘어야 하는 커다란 산 화진천은 막강한 뒷배경과 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무룡단이라는 단체의 물갈이가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그런 상황에서 단주와의 비무에서 강한 인상을 전해 준 진소백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때 방문을 열고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같은 무룡단의 단원인 그는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야기 들었습니까, 형님?"
"뭘 말인가."
"아도왕 서패우가 총타를 방문했다는 것 말입니다."
"대막검문의 아도왕?"
"그렇습니다! 하하! 내가 무룡단에 입단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대막검문의 아도왕 서패우를 존경한다는 사내가 무룡단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자가 그인가 보다. 아니면 그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도왕 서패우는 분명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하고 유명한 인물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았다.
일제(一帝) 일황(一皇) 삼마(三魔) 삼왕(三王) 사신(四神)!
그들을 통칭하여 십이무룡(十二武龍)이라 불렀다.
아도왕 서패우는 삼왕의 속하는 자였다.
그는 화려한 가문도 유명한 고수의 제자도 아닌 상황에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낭인 출신으로 대막검문의 문주에게도 큰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를 동경하고 선망하는 이들은 많았다.
특히 도를 무기로 쓰는 이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천하에서 그만큼 도라는 병기를 잘 쓰는 이가 없다고 하는 말이 나돌 정도로 말이다.
'슬슬 후계자 자리를 노리기 위해 편을 모으는 것인가.'
진소백은 소필호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앞으로의 생각을 정리했다.
여섯 명의 원로원이 머무는 천룡원!
남북천맹 총타 내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천룡원은 높고 긴 담장 안으로 모두 네 개의 건물이 존재했다.
삼 층짜리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나무로 만든 오두막뿐이었다.
건물들 뒤로는 높은 산이 존재했고 주변은 자연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화려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남북천맹의 총타 내에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 안으로 율무천과 무룡단 부단주 신욱이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이군."
율무천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릴 적에는 유별나게 이곳을 드나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천룡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후우."
오랜만에 와 본 천룡원의 공기는 맑고 상쾌하기보다는 무겁고 답답했다.
남북천맹의 맹주가 되기 위해선 천룡원의 속해 있는 여섯 명의 원로들 중 과반수, 이상이 허락해야만 가능했다.
물론 남북천맹의 간부급 수뇌부들의 찬성표도 받아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원로원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도 없었다. 비록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기 모여 있는 여섯 명 원로들의 인맥은 상당했다.
그러나 오늘은 자신의 편을 만들고자 온 것은 아니다. 천룡원주가 율무천을 불렀기 때문이다.
"부단주는 밖에서 기다려라."
신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율무천은 잠깐의 심호흡을 하곤 삼 층짜리 건물로 몸을 집어넣었다.
"무천입니다, 원주."
건물의 가장 끝 층에 홀로 존재하는 방문 앞에서 율무천이 자신이 왔음을 보고했다.
"들어오거라."
율무천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 가득 주름을 품은 노인이 그를 맞이했다.
창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들을 맞고 있던 노인은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주름이 더 깊게 파였지만 율무천은 그 모습이 징그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대도천신(大刀天神) 살가륵(薩伽勒).
지금은 잊혀져 가는 존재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살가륵이 약관을 갓 넘었을 때만 해도 무림은 지금의 평화를 찾아보기 힘이 들었다.
당시에는 남북천맹이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혈천마성이 무림을 지배했었고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남북천맹이 생겨났다.
수많은 혈천마성의 무인들을 죽였다.
지금 남북천맹의 태양전(太陽殿) 무인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던 살가륵은 한마디로 전설이었다.
성인 남자 몸통만 한 대도를 쥐고 뒤흔드는 그의 무위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에는 남북천맹의 초대 맹주보다 그의 명성이 더 널리 퍼졌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지금은 아도왕 서패우가 도라는 병기에 있어서 정상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살가륵의 무위에 비하면 그는 핏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였다.
"많이 컸구나. 몸집도 그렇고…… 풍기는 기도 또한 날카로워졌어."
친손자가 장성한 모습을 본 것처럼 살가륵은 흐뭇하게 율무천을 바라봤다.
십 년 만의 만남이었다.
비록 총타 내부에 살고 있지만 천룡원의 원로들은 담장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다. 사람들과 섞이지도 않으려 했다. 그저 외출을 한다 하면 건물 뒤편에 존재하는 산이 전부였다.
생각보다 깊고 커서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취미생활을 즐기곤 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니다. 바빴을 테지. 맹주의 자식이라면 응당 이런 노인네들이 노는 곳에는 올 시간이 없어야 하지."
살가륵은 얼굴에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다른 원로 분들은 출타 중이신가요?"
살가륵이 자리를 권하자 율무천이 앉으며 물었다.
"그저 하릴없이 산 구경이나 하고 있겠지."
"많이 야위셨네요."
"세월에 장사가 있겠느냐."
살가륵의 나이가 여든이 넘었다. 하지만 외모는 십 수 년은 더 젊어 보인다.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중년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역류하는 일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너무나 오랜만의 만남이어서인지 조금은 어색한 것은 당연하다.
율무천에게 살가륵은 친할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원로들 중 가장 그를 따랐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율무천이 익힌 무공 중에서 진천선풍퇴(震天旋風腿)라는 각법이 있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 살가륵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도법에 있어서 중원 최강이라 불리는 살가륵이었지만 권장지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요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말이 많더구나."
"……."
"천산검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사대검문의 수장 격인 천산검문은 잔인한 검을 쓴다."
율무천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잔인한 검!
살가륵이 말한 그 단어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깊이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천맹과 혈천마성의 전쟁, 그중에서 가장 절정이었다는 시간 속을 보낸 사내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자신의 힘을 보여 줬던 노장의 그 말은 가볍지 않다.
율무천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 갑자기 땀이 배었다.
"광무황(光武皇) 화무홍(華務泓)은 네 아비보다 더 강한 인물이다. 단순히 무공이 아닌 심계가 깊은 자이지. 무리를 거느린 수장의 차이는 그것에서부터 난다. 그런 면에서 네 아비인 율천세는 화무홍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런 화무홍이 자식을 어찌 키웠을 것 같으냐."
일황에 속하는 광무황 화무홍은 천산검문의 수장이고 천봉장 화진천의 부친이었다.
살가륵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수하를 거느리고 하나의 단체를 이루려면 무공도 중요하다. 허나 살가륵의 말대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했다.
물론 율천세도 맹주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세간의 평은 화무홍에게 확실히 기울어져 있었다.
"연청문의 제자 진소백이 너의 휘하 무룡단에 있을 것이다."
"……!"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율무천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신분을 속이고 있는 녀석이다. 내가 일부러 너에게 보낸 것이다."
"허면……?"
"연청문의 제자라는 건 거짓이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니 곁에 가까이 둬라."
율무천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 그 아이는 누구입니까."
"그것까지 말을 해 줄 수는 없구나. 다만 앞으로 네 앞날에 도움이 될 아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단다."
"감사합니다, 원주."
"이 할애비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구나.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지금의 무룡단은 터무니없어.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조만간 그리할 것입니다."
"그래, 그래."
볼일을 마친 율무천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살가륵 홀로 남았다.
그런데 율무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우더니 사람의 형체를 한 사내가 나타났다.
"공자."
"말해."
놀랍게도 살가륵의 앞에 있는 이는 진소백으로 위장하고 있는 사우였다.
사우는 능글맞게 웃으며 살가륵을 마주 보고 있었다.
"친손자같이 키운 아이입니다. 그리고 남북천맹은……!"
"다치게 하지 마라?"
"후우.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저놈을, 남북천맹을 쓸어버리겠다고 했던가."
"그건 아니지만."
천하의 살가륵이 손자뻘 되는 젊은 사내에게 반말이나 듣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현실성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용해 먹으면 끝인 녀석들이야. 화월선자의 흔적만 잡으면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거지."
살가륵의 눈빛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누구의 혈육인지 알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동생!
자신 따위는 우러러보지도 못한 위치에 있던 사내의 친혈육이다.
"이봐. 살가륵."
"말씀하십시오, 공자."
"언제부터 당신이 남북천맹의 개가 된 거지?"
"……."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살가륵은 침묵을 유지했다.
"몸이 떠났다고 마음마저 떠나면 큰일 나지."
사우는 웃고 있었다.
살가륵은 그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정말이지 살가륵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까무러칠 광경이다. 천하의 대도천신이 새파랗게 어린 사내에게 벌벌 떨다니.
"조심하는 게 좋아.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준 그곳과 남북천맹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위험하거든."
살가륵의 사부가 누구인지는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물론 그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에게는 거짓 사실을 알려 준다. 그가 나타났을 적 무공은 상당했다. 사부 없이 홀로 이루기에는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했다면 믿어 주는 이들이 없었을 것이다.
"늙은이는 목숨에 대한 미련을 버린 지 오래랍니다."
"아, 그래? 하지만 난 지금 당신에게 목숨이 얼만 큼 중요한지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야. 신의? 의리? 뭐 그딴 거 나도 믿진 않지만 최소한 머물던 무리의 머리가 죽었는데 맹숭맹숭 가만히 앉아 있는 당신이 꼴 보기 싫어서 충고하는 것뿐이야."
미소를 품은 얼굴과는 달리 몸 밖으로 거친 기운들이 흘러나왔다.
"명심하죠. 공자도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살가륵의 말이 무슨 뜻인지 사우는 알고 있었다.
"충고로 보답하는 건가? 뭐, 고맙게 받아들이지."
사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다시금 홀로 남은 살가륵은 어느새 맺힌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조심하십시오. 한때나마 모셨던 주군의 동생이기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린 살가륵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면 분명 무림은 피의 강을 이룰 것이다.'
흑천살막!
당금 무림에서 그런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과연 존재할까.
없다. 알 리가 없다.
단 한 번도 이름을 알린 적이 없으니까.
그들은 어둠 속에서 기생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세상을 조종한다.
자신들의 사람을 무림 곳곳에 배치해 놓는다.
그들은 배치된 단체의 아주 높은 위치에서 흑천살막의 명령만을 받으며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현재 남북천맹이 무림 최고의 단체이긴 하지만 흑천살막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전 무림인들이 달려든다 하더라도 흑천살막을 세상에서 지울 수는 없다.
단편적인 예를 꼽자면 바로 살가륵이 있다.
그는 무림에서 전설로 이름을 남긴 대도천신이었다. 그런 그를 이길 수 있는 인물이 흑천살막 이름하에 모인 곳에는 이십이 넘는다.
지금도 각 단체의 간부나 수뇌부들 중 흑천살막의 무리가 숨어들어 있을 것이다.
바로 살가륵처럼 말이다.
그가 어떤 임무를 받고 남북천맹에 숨어들어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존재는 간세에 불과하다.
'하나하나씩 잡아 족치면 알게 되겠지.'
사우는 천선공(天仙功)의 구결을 외움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듯이 남북천맹이라는 커다란 무리가 무림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반기를 들 세력이 사마련이다.
굵직한 것은 그 두 단체뿐이다.
사마련에서 보낸 추격자들에게 애를 먹고 있는 사군악과 담천, 대찰영을 보니 사마련의 전력도 약하지 않은 듯싶다.
남북천맹은 사마련의 존재를 알면서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만간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쯤은 충분히 만들 수가 있었다. 허나 중요한 문제는 여러 중소방파의 연합체인 남북천맹이 꽤나 오랜 시간 유지되면서 생긴 불협화음이다.
결속력과 단결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수십 년째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조금씩 분열되어 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다음 맹주 자리를 놓고 벌이는 후계자 싸움이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맹주의 친자식 율무천과 천산검문의 장남 화진천.
하지만 그 두 사람만이 맹주의 자리에 앉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문파에서 젊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가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고 싶어 할 것이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후계자 싸움 때문에라도 남북천맹은 쉽게 사마련을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마련은 녹림총련과는 차원이 다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사마련에 속해 있는 문파들은 한때나마 같은 맹에 속해 있지 않았던가.
'아마 그곳도 그 녀석의 자리 때문에 피바람이 불고 있겠지.'
형, 우상, 그리고 넘어야 할 산이었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흑천살막은 전쟁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흑천을 죽이고 화월선자라는 놈이 흑천살막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 남북천맹에 마존과 함께 들어온 이유는 화월선자의 흔적을 쫓기 위함이다. 천하의 모든 정보들이 오고 가는 이곳이다. 마인곡을 단 혼자서 초토화시켰다는 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화월선자가 흑천을 죽였다면 현재 자신의 힘으로 덤볐다가는 필패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하다.
"후우."
사우의 이마는 땀방울들로 범벅이 되었다. 운기행공만으로도 체력이 절반 이상 떨어진다.
매일 아침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운기행공에 들어간다.
천선공은 천하에서 능히 제일이라 불리는 신공이다. 이 세상에서 천선공을 익힌 사람은 딱 세 명이었다.
사우와 그의 형인 흑천, 그리고 두 사람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
사부가 말하길 천선공을 대성한 자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대성하기 까다롭고, 익힌다 하더라도 그 힘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흑천살막에서 쫓겨난 뒤 수년 동안 천선공이라는 신공만을 파고들었지만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답답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현재 육성까지 끌어올린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천하에서 무공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던 사우의 형 흑천도 겨우 칠성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허나 요즘 들어 급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형을 죽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화월선자. 그리고 혹시 모르는 흑천살막의 수뇌부들과 맞닥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천선공이라는 신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무공들은 인세에서는 가히 절대적인 것들이다. 익히기만 하면 그 누구도 적수가 없다.
특히나 구천제혈신검(九天制穴神劍)은 흑천살막에 속해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침을 흘리고 탐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검법이다.
천선공과 구천제혈신검은 흑천살막의 주인에게만 이어지는 무공이었다. 흑천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이들이라면 절대로 전수되지 못한다.
삼 년 전 사우가 천기원의 새로운 주인인 하제량과 그 수하들과의 접전에서 쓴 청섬멸절 또한 흑천의 피가 흐르는 자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었다. 그것을 썼다는 건 흑천살막에게 흑천의 동생 사우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노출되었다는 건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인곡에 있던 시간 때문인지 아직 손길을 뻗치진 않지만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나타날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나 익힐 수 없는 신공과 검법이다.
초절정무인들이 아니라면 그 무공의 구결들은 한낱 요상한 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에 흑천살막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만이 심공과 검법을 노릴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살가륵과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다. 한 명 한 명이 살가륵보다 열 배는 강하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 중원에 등장만 해도 천하는 술렁일 것이다.
화월선자…… 그리고 흑천살막, 그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사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 볼까.'
* * *
성무검법은 총 여섯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초식이 바로 자홍성락(紫紅星落)이다.
하늘 위에서 별이 떨어진다.
그것도 자홍빛의 별들이 우수같이 떨어져 내린다.
가장 아름답고 파괴적이다.
한 번의 공격을 펼쳤을 뿐인데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사람에게 쓴다면 어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살인적인 기술, 다수의 인명을 한 번에 해치는 데는 너무나 탁월한 초식이다.
"아름답군요."
근처에 사람이 나타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진 않는다. 다만 불쾌할 뿐이다.
"당신이라는 사람, 점점 예의가 없어지네요."
무인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건 칼부림까지 갈 수 있는 그런 행동이다.
하제량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지청화는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하제량을 노려봤다.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냈음에도 하제량은 유유히 그 눈빛을 받아들인다.
"무슨 일이죠."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바쁘실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죠? 패천문 문도를 도륙한 흉수를 아직 잡지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하제량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지청화를 보며 웃었다.
"천기원은 정보기관이지 무력을 쓰는 곳이 아니죠. 련주께서 보내신 혈화와 패천문에서 보낸 살락원이 그들을 쫓는데 제가 바쁠 이유는 없습니다."
하제량은 이동하는 지청화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씀은 잘 하시네요. 하지만 천기원에 흉수를 쫓는 일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흘린 땀을 빨리 씻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저 사내는 자꾸만 쫓아온다.
"그렇죠. 바쁘다면 한없이 바쁜 곳이 천기원이죠. 련주께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들렀습니다."
지청화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하제량과 눈을 마주했다.
"일다경 후에 듣도록 하죠."
지청화의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하제량의 앞을 혈화 두 명이 막아섰다.
"뭐, 그러죠."
"후계자…… 싸움을 이용하자는 말인가요."
하제량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그건 본련에서도 생각해 본 적 있는 내용이에요."
빈틈이라고 찾아보기 힘들던 거대한 벽은 작은 균열이 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집단 세력이란 우두머리가 있기 마련이고 누구나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려 한다.
위로 올라가려 하는 경쟁구도가 단체를 강하게 하기도 하지만 자칫 밑바닥부터 흔들리기도 한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현재 남북천맹이 그러하다. 흔들리고 있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철옹성의 벽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물론 남북천맹이라는 세력과 적대시하고 있는 사마련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모든 눈과 귀가 남북천맹을 향해 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하제량이 뜬금없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삼 년 전…… 남북천맹과 녹림과의 전쟁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줄 아시는지요."
"야수마황 여곤의 손녀딸인 여수경이 녹림에 납치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야수마황의 친손녀 여수경은 그 뒤로 남북천맹 총타에 머물고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천검무제의 아들 비천옥룡 율무천이 여수경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러니까 삼 년 전에 녹림총련의 련주와 맞닥트린 적이 있었죠. 개인적인 이유로 말입니다. 세간에는 녹림이 여수경이라는 여인을 납치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더군요. 당시 지금의 여수경이라는 여인은 초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녹림지존을 아버지라 부르더군요."
"납치가 아니었다?"
"그런 셈이죠.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녹림지존의 친딸처럼 커 온 존재입니다. 그런 그녀가 하루 사이에 야수마황의 손녀딸로, 그것도 납치라는 명목하에 녹림에 묶여 있는 셈이 된 것이죠."
잠시 하제량은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천천히 하시죠."
호기심이 동한 지청화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삼 년 전 저와 천기원 전체는 녹림지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의 행적을 빼놓지 않고 쫓았습니다. 초미라는 여인이 아비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 남북천맹으로 가게 되었죠. 뭐, 아비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때 초미의 가장 측근인 사내가 살아남았죠."
"그 사내를 천기원에서 데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실 차례군요."
하제량이 크기 웃음을 터트렸다. 영리한 여인이다. 괜히 사마련의 련주가 아니다.
"역시나 련주이십니다. 맞습니다. 이름은 하욱. 초미라는 여인이 녹림지존의 품을 떠난 시간 동안 그녀를 보필했던 사내이죠."
"지금까지 제게 말한 내용은 그 사내에게서 들은 것이겠군요."
"대부분이 그렇긴 합니다만 절반 이상은 천기원의 힘으로 알아낸 것이죠."
괜히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여인은 천기원을 자신들의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향이 짙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가는 언젠간 크게 한번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더 듣고 싶은데요."
잠깐의 상념으로 인해 대화가 끊어졌다.
하제량은 말을 이어 나갔다.
"하욱이라는 사내를 통해서 그녀를 남북천맹에서 나오게 할 생각입니다."
"그녀를 나오게 해서 율무천을 유인할 생각인가요?"
"그다음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죠. 그녀를 납치할 생각입니다. 물론 율무천은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총타를 빠져나오겠지요. 물론 소리 소문 없이 나올 것입니다. 후계자 싸움에 본격적으로 몸을 내민 율무천이 약점 잡힐 일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정인을 구하는 일이 약점 잡힐 일인가요?"
"현재 내실이 흔들리고 있다는 건 남북천맹의 수뇌부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천맹 맹주의 자식이 다른 세력과의 불화를 만든다면 어떻겠습니까."
"문제가 생기겠죠."
"바로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는 사마련의 세력과의 부딪침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잠시나만 동맹을 맺어야 할 세력이 필요하겠네요."
역시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여인이었다. 하제량은 말이 잘 통하자 기분 좋게 웃었다.
"천산검문이죠."
"손을 써 놓으셨나 보네요. 얼굴에 자신감이 넘치시는 걸 보니."
"조만간 보고 상황을 전해 드리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
"초미라는 여인, 아니, 여수경은 야수마황 여곤의 손녀가 아니던가요? 손녀가 납치가 되었다는데 가만있을까요."
"야수마황은 삼 년 전부터 폐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지요. 그리고 어차피 그가 손녀의 납치 사실을 알고 날뛴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번 계획은 그저 명분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니까요."
지청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분…….'
그것은 곧 세간의 이목, 특히나 수많은 군중이 누구의 편에 손을 들어주느냐가 관건인 문제였다.
"계획을 수정하죠."
"……?"
지청화의 눈이 반짝였다.
"납치는 안 됩니다. 녹림과 같은 꼴이 되면 곤란하겠죠?"
그녀는 웃었다. 아름답지만 차갑다.
"그렇군요. 제 불찰입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좋은 의견을 내주신 것으로 봐드리죠."
"하하하!"
하제량이 웃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하제량이었다.
"그들이…… 련주께도 왔었습니까."
"……!"
지청화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거센 폭풍이라도 맞은 듯 세차게 뒤흔들렸다.
순간 지청화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설사 하제량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른 척했어야만 했다.
"사마련과 본 천기원은 이제 한 배를 탄 몸입니다. 그들은 제게도 찾아왔었습니다. 련주께도 찾아간다 그러더군요. 그게 벌써 이 년 전 일이었지요."
"아수귀옥(阿修鬼獄)."
지청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