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章 세상으로 (7/38)

第七章 세상으로

넓고 화려한 내실에서는 하제량이 침중한 표정으로 누군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방립을 옆구리에 안착시킨 중년인이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독마궁(毒魔宮) 궁주가 죽었다?"

하제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년인의 보고를 다시금 확인하려 했다.

"그렇습니다, 원주."

"하!"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거짓 보고를 할 리는 없었다. 그는 천기원이 배출해 낸 최고의 정보통이었으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저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전 비밀리에 진행된 독마궁주의 장례식을 제 눈으로 지켜보고 오는 길입니다."

워낙 중대한 일이라 직접 보고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는 말을 일부러 삼킨다. 쓸데없는 사설을 좋아하지 않는 하제량을 알기 때문이다.

하제량은 싸늘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중년인은 한참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

"천하에 어느 누가 독마궁의 주인을 독으로 살해할 수가 있는 겁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중년인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주인은 터지려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천기원의 주인이라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벌써 그 화를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게 천기원의 주인으로서 가장 처음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었으니까 말이다.

독마궁은 감숙성에서는 물론 무림에서 독물과 암기로는 따라올 곳이 없었다. 그런 단체의 수장이 독으로 살해당했다는 건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독마궁에서도 궁주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있는 것이리라.

"후우. 사마련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쪽도 자신들의 정보망을 구축해 놓았을 테니까요."

"……."

하제량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남북천맹에서 손을 쓴 걸까요."

중년인이 물었다.

"배신자를 처단했다?"

"독마궁주는 남북천맹에서도 스무 명 안에 드는 강자입니다. 그런 자를 독으로 죽일 인물은 그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밖에 생각하기 힘듭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지만 하제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북천맹은 그리 호락호락한 단체가 아닙니다. 명실상부 당금 무림을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런 단체가 사마련의 성장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이미 삼 년 전 천기원이 사마련과 손을 잡을 무렵 아니면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차라리 남북천맹에서 손을 쓴 것이라면 이리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 일에 최악의 경우 제삼자의 세력이 개입이 되어 있다면 천기원과 사마련은 바짝 긴장을 해야 할 처지가 될 것입니다."

독마궁은 남북천맹 소속인 문파였다. 그리고 삼 년 전부터 사마련과 천기원이 합심하여 독마궁과 몇몇 문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독마궁주의 독살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하제량으로서는 그동안의 결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셈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달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다만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그를 누가 죽였냐는 것이다.

독천자(毒天子) 유장룡(劉長龍)은 약관의 나이에 독마궁주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역대 궁주들 중 가장 뛰어난 기재로 추앙받던 자이기도 했다. 그런 자를 죽이는 일은 남북천맹에서는 맹주와 부맹주 외에는 가능한 인물이 없었다.

분명 그들은 아니다. 그들이 독마궁주의 배신을 알았다 하더라도 유장룡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제량은 그들이 사마련을 깔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단체 남북천맹은 하늘 위에 올라앉아 땅 아래를 내려다보는 무리들이다. 그들에게 사천성의 사마련은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치 않은 이유로 인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유장룡을 죽이지는 않았을 게다.

단언하건대 분명 그를 죽인 건 제삼의 세력임에 틀림없었다.

"전종(全種)."

중년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천기원의 모든 인원을 사용해서라도 그자를 죽인 놈을 알아오세요."

"알겠습니다, 원주."

분명 쉬운 명령은 아니겠지만 하제량은 그를 믿었다. 자신의 조부를 모셨던 사내, 천기원의 총관 전종을 말이다.

* * *

그 시각 사마련의 수장인 지청화는 홀로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건 외모뿐이 아니었다. 풍기는 기도는 훨씬 더 날카로워졌다.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녀는 들어 올리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실내로 들어서는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들 오세요."

그녀가 맞이한 인물들은 모두 중년인 세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젊은 여인 지청화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련주."

칠 척, 장신인데다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안부를 물었다.

철혈대제(鐵血大帝) 철대악(鐵大岳)이 바로 그의 이름이자 별호였다.

그가 바로 패천문의 문주이기도 했다.

"철 문주는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많이 바쁘셨나 보아요."

"하하! 죄송할 따름입니다. 련주도 알다시피 비밀리에 몇몇 애들을 키우느라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농을 했을 뿐입니다. 철 문주의 노고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지요. 그래 성과는 있으셨나요?"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철대악의 자신감에 지청화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철대악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패천문 무인들이 봤다면 엄청난 이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철혈대제 철대악이었다.

강함의 상징이었고 한 문파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사천에서도 가장 거칠다는 패천문의 문주였기에 문도들 앞에서는 항시 근엄하고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곤 했다.

그런 그가 지청화를 대하는 모습은 꽤나 의외였다.

"련주, 그동안 잘 지내시었소?"

혈의 장포를 입은 중년인의 인상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청화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따스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럼요. 북 문주께서도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시네요."

지청화는 혈천문(血天門)의 문주 혈월마성(血鉞魔星) 북천휘(北天輝)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이내 갈색 빛의 무복을 입고 코 밑까지 복면으로 가린 인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음살문(陰殺門) 문주 살천객(殺千客) 사가훈(史架勳)이 바로 그의 정체였다.

이로써 실내에는 당금 무림에 새로운 반항을 일으킬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바로 사마련의 핵심 세력인 네 개 문파의 수장들이 모두 모였다.

이들은 공통점은 모두가 사천성 출신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남북천맹이라는 단체에 머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무너트리고 자신들의 세상을 구축하려는 자들이기도 했다.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세 명의 중년인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지청화가 입을 열었다.

"꽤나 충격적인 일이더군요."

철대악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조금 전 웃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근심이 가득했다.

"독마궁주는 그리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니지."

평소 말이 없고 과묵한 사가훈의 말이었다. 스산하기까지 한 그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금 무림에서 독마궁주를 살해할, 그것도 살수를 흉내 내어 죽을 인물이 몇이나 될까요."

지청화가 최고의 살수 집단이라는 음살문의 문주 사가훈에게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독마궁주는 독으로서 힘을 얻은 독마궁의 궁주다. 그런 자가 독으로 살해당했다는 건 믿기 힘이 들었다. 그런 정보가 있지만 애초에 사실무근이라 결론짓고 물어본 것이다.

어쨌든 독으로 죽였건 검으로 죽였건 독마궁주는 살해당했다.

독마궁의 눈뜬장님들만 있는 건 아닐진대 궁주가 죽은 걸 반나절이 지난 다음에야 알아차렸다. 살수의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가 아니라면 어떤 무공이던 간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전해진 정보에 의하면 어떤 무공 초식이 아닌 순수하게 검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하니 살수일 것이라는 확신이 커졌다.

"내가 최후의 절초를 쓴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음살문은 명색이 최고의 살수 집단이 아니던가. 그런 단체의 수장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믿기 힘이 들었다.

"내가 언제 겸손 따위를 나불거리던가?"

사가훈의 눈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로서도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제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을 깎아내리면서 한 발언이었다.

그것을 지청화가 제대로 받아들여 주지 앉자 화가 난 것이다.

"흠. 련주께서 아직 자네를 잘 몰라 하는 말씀이시지 않나. 그리 까칠하게 반응할 필요가 무에 있어."

철대악이 중재에 나섰다.

지청화는 사가훈의 날카로운 반응에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 반응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세 사람의 눈에는 모두 읽혔지만 말이다.

지청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하나는 무인의 자존심을 건들인 것이고, 또 하나는 사가훈이 자신의 존재를 아직도 부정하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요. 죄송하네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시길."

그녀는 애써 웃으며 현재의 상황을 넘겼다.

"그럼 사 문주께서는 독마궁주를 죽인 자가 누구일 것이라 생각하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사가훈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찝찝한 놈들이 있지."

"호오, 놈들이라 하면 둘 이상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지금 나를 비꼬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지금은 공적인 공간의 공적인 자리였다.

존칭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방금 전처럼 자신에게 했던 험한 말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지청화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아냥거리듯이 사가훈의 말을 받아친 것이다.

'빌어먹을.'

사가훈은 이를 악다물었다.

별 같지도 않은 계집이 련주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모습 자체만으로 짜증이 나는 그였다.

그녀의 친혈육이라는 이유만 없었더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어허, 어서 말해 보시게. 련주께서 묻지 않으신가."

철대악은 지청화와 사가훈으로 인해 싸늘해진 분위기를 빨리 바꾸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가훈이 말하는 그들의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전 피로써 맹세한 사마련의 련주입니다."

지청화는 전음으로 사가훈에게 경고를 보냈다. 더 이상의 무례함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사가훈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녀의 존재가 불만이지만, 지청화의 말대로 그녀는 사마련의 련주 천상무후의 직위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두 달 전에 음살문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셨던 적이 있으셨습니다."

"철선문(鐵仙門) 문주를 살해하라는 것 말인가요?"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기에는 꽤나 부적절한 말들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그거라면 이미 음살문에서 조용히 처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련주께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철선문 문주는 우리가 죽인 게 아닙니다. 내 수하들이 그를 암살하러 갔을 적에는 이미 그의 명줄이 끊긴 뒤였지요."

"그게 정말인가?"

철대악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주 깨끗한 솜씨였다고 합니다. 그 녀석들은 본문에서도 가장 최고의 살수들. 그런 녀석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철선문 문주의 암살을 했던 자와 이번 독마궁주를 그리 만든 자가 동일인물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벌써 다섯 곳이나 되는 문파의 문주 또는 간부들이 암살당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말없이 있던 북천휘가 사가훈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데 왜 저는 모르고 있었죠?"

"사천성과는 정반대쪽 위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암살 대상을 빼앗긴 이유로 인해 조사를 했기에 알 수 있었습니다."

"헌데, 왜 제겐 바로 보고를 하시 않으신 거죠?"

"중요하다 생각지 않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가훈의 태도가 괘씸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감정싸움은 이익보다 실이 더 많았다.

지청화는 시선을 북천휘에게로 돌렸다.

"일은 어디까지 진행되어 가고 있나요."

"련주께서도 아시다시피 남북천맹의 벽은 너무도 견고하고 두꺼워 조금 시일이 더 걸릴 듯싶습니다."

"그런가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그런 말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니 개의치 마세요.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일입니다.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죠. 오늘은 그걸 말씀드리고자 모이시라 한 겁니다."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서두르지 마세요. 사마련의 힘은 강합니다. 하지만 저들도 강하죠. 저들의 빈틈이란 빈틈은 모조리 찾으세요. 그리고 우린 그 틈을 이용해 천천히 무너트릴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사마련이 탄생한 이유를 말이에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어느 대장부 못지않게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세 명의 중년인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숙였다.

독천자 유장룡이 죽었다. 독마궁이 나은 최고의 기재 유장룡이 말이다.

집안의 주인이 죽었으니 독마궁이 발칵 뒤집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의외로 독마궁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유장룡의 장남 유가량(劉佳良)은 이 일을 일단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소문이 나도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다만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부친의 사망에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늘같은 유장룡이었다. 아버지이기 전에 같은 무인으로서, 무인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말이다.

그런 부친의 죽음은 유가량의 이성을 마비시켜 놓았다.

"독살이 맞습니다."

독으로 천하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독마궁의 궁주가 독살이라니!

"하하하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는 밤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지금의 현실을 믿을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반드시 흉수를 잡아내야 합니다."

유가량은 뒤에서 들리는 어느 존재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야. 그냥 혼잣말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마."

유가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에 있던 존재를 물렸다.

그리고 그는 계속 비를 맞으며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지붕이 있는 건물로 들어오자 그는 품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냈다.

십오 년 전 환도문이 빚졌던 것을 갚으러 왔다.

서찰을 쥐어 든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유가량은 서찰에 적힌 글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십오 년 전 갑작스럽게 멸문을 당한 환도문. 그들이 그리된 데는 바로 독마궁의 힘이 컸다는 것도 말이다.

당시 궁주였던 자신의 부친이 직접 만들어 낸 극독을 이용했다. 그것을 복용한 환도문은 적들의 침입에 제대로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모조리 개죽음을 당했었다.

허나 그때 그 일은 어떤 단체에 의해서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사마련…… 패천문."

그들이 의뢰를 한 것이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들도 남북천맹에 속해 있었기에 도움을 준 것이다.

"생존자가 있었던 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일을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그것도 독에 있어서 전문가인 독천자를 독으로 말이다.

유가량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적은 독마궁을 알지만 자신은 적의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두려움으로 인해 심장이 두근거린다. 밤인데다 비가 와서인지 아니면 무서움으로 인한 것인지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서찰을 품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버지의 희생만으로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의 복수가 끝났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독마궁을 통째로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유장룡은 곧 독마궁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를 그토록 허망하게 보낼 정도라면 유가량이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책을 마련할 필요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니, 독마궁에게는 사마련이라는 비상통로가 있었다.

지청화와의 만남이 있은 후 철대악은 자신의 집인 패천문으로 돌아왔다. 패천문은 사천성 성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파가 생겨난 지는 벌써 오십 년이 지났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패천문은 명실상부 사천성 절대문파로 성장했다.

그 덕분에 남북천맹이라는 소속에 잠시나마 몸을 담글 수가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문주,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나를 찾아온 것이냐?"

철대악이 패천문으로 돌아오자마자 총관이 하는 말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대악은 귀중한 손님들이 오면 내주는 건물로 들어갔다.

"유 공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철대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독천자 유장룡의 아들 유가량이었다.

지금쯤 부친의 죽음을 애달파하고 있어야 할 그가 자신을 찾아올 까닭이 없었다.

"대체 어쩐 일이시오?"

유가량과의 안면은 있었다. 독마궁은 사마련의 편에 들기로 이미 합의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현재 사마련의 속해 있는 문파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특히나 독천자 유장룡과 철대악은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

"큰일 났습니다, 철 문주."

철대악이 맞은편에 앉자 유가량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앞에 펼쳐 보였다.

철대악은 그가 건넨 서찰을 훑어보더니 예상대로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어떤 놈들이!"

성질 같아서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분을 삭이며 씩씩거렸다.

"환도문은 당시 모조리 죽었소. 생존자는 전무한데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철대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죽인 흉수는 분명 환도문과 관계된 자입니다."

"허어! 이럴 수가!"

철대악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외당주 신도용(申屠用)을 데리고 와라!"

잠시 후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남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외당주 신도용 문주를 뵙습니다."

"십오 년 전 환도문을 공격할 때 네가 진두지휘하지 않았느냐?"

신도용은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환도문 사건의 진상을 아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패천문 안에서도 문주와 몇몇 수뇌부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십오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꺼내지 않았던 문주가 갑작스럽게 환도문에 대해 말하니 긴장한 것이다.

"분명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찌 환도문이 그리된 것에 독마궁이 개입되어 있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는 것이냐!"

"……!"

신도용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린아이, 늙은이, 그리고 환도문 내 시비들까지 모조리 도륙했다. 흔적 따위는 절대로 남기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문주. 제 목숨을 걸고서 맹세할 수 있습니다. 당시 환도문 주변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물론 사방으로 진법을 펼쳐 생존자가 없도록 방치했습니다. 결단코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신도용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하여 철대악도 더 이상의 추궁은 하지 않았다.

"환도문이 멸문을 당한 데 있어 독마궁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는 자가 있는 것 같구나. 이번 독마궁주를 살해한 놈들이 바로 그자들인 것 같아."

신도용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마른침을 연달아 삼키는 것이 불안으로 가득 차 보인다.

그가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환도문 사건에 독마궁이 연관되어 있는 걸 안다면 패천문 또한 연류된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패천문의 안위뿐만 아니라 현재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틀어지게 된다.

"앞으로 이를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어찌 한단 말이오.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을 잡아야 하오."

철대악은 솥뚜껑만 한 주먹이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지만 사실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허허!"

짙은 탄식이 철대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환도문은 명색이 사천성 제일의 문파였다. 분명 그러했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천성을 넘어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대문파였다.

당연히 남북천맹이라는 소속에 묶여 있었다. 십오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북천맹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단체였던 곳이 바로 환도문이다. 물론 패천문과도 교류가 활발했다. 철대악은 환도문 문주 위지명(慰遲明)과도 절친했다.

십오 년 전 남북천맹의 회의를 느끼던 철대악과 지금의 사마련을 구축한 문주들은 환도문을 끌어들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남북천맹을 배신하지 않았고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훗날 적으로 마주칠 환도문을 애초에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흔적 따위는 남기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속해 있는 환도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남북천맹에서도 수사를 하기 위해 인물들이 나타났지만 소용없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사가훈의 음살문 전체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독마궁의 힘도 한몫을 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남북천맹에서 알게 된다면 사마련은 그들과의 싸움을 조금 일찍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지금까지 사마련의 존재를 몰라서 가만히 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명색이 정도를 걷는 남북천맹,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군중들에게 평화를 약속했다.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도용."

"예, 문주."

"즉시 신도청에게 전해라. 정예 무인 오십을 대동한 채 새로운 유 공자를 독마궁까지 안전하게 뫼시라고."

"알겠습니다."

"단, 무인이라는 걸 감춘 상태여야 한다."

외당주 신도용이 나가자 철대악이 침중한 얼굴을 풀지 못한 채 말했다.

"일단 독마궁으로 돌아가 계시오. 혹시 몰라 내 제자 놈과 본문의 무인들을 붙여 주는 것이오. 그곳에서 독마궁을 재정비하시고 내 연락을 기다리시오."

묵창 신도청은 패천문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게다가 정예 무인 오십이라면 웬만큼 고수가 아니라면 덤비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이다.

유가량은 철대악의 배려로 인해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신도청의 무공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목격했었다.

명색이 패천문 문주의 제자였다. 당연히 신뢰와 믿음이 가는 것이리라.

유가량은 마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패천문으로 오는 이틀간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두통과 눈의 피로가 상당했다. 독마궁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피로를 풀어야 했다.

덜커덩.

이제 막 잠을 청하려는데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유가량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단지 마차가 급정거를 했을 뿐인데 말이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마차가 바로 움직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적입니다."

신도청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적이라니!

설마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라는 말인가? 유가량은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생각에 잠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그는 독마궁을 앞으로 이끌어 갈 사람이었다. 그것을 상기하니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을 가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패천문 무인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유가량은 전신을 찌르는 엄청난 살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차를, 아니 유가량을 호위하는 오십 인의 무인들과 신도청마저도 그 기운에 압도되어 있었다.

신도청은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지독한 기운은 느껴 보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이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자신의 병기를 든 손에 힘을 줬다.

적들이 자신들의 기운을 내보낸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손에 땀이 흥건하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사부님.'

신도청의 시선이 어딘가로 꽂혀 정지했다.

어둠을 입은 듯 새까만 복장을 한 세 명의 무리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마치 그것이 악귀의 형상과도 흡사하다고 느꼈다.

그들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신도청은 수하들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누구냐. 누군데 길을 막아서는 것이냐!"

당당하게 소리를 쳤지만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려 왔다.

돌아오는 대답 따위는 없었다. 세 명 중 하나의 손에는 철궁이 들려 있었는데 들고 있는 손이 올라가면서 철궁도 딸려 올라왔다.

신도청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묵창을 가슴 앞에 세웠다.

"모두 목숨을 걸고 유 공자를 지킨다."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린 신도청은 땅을 박차고 세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오십 인 중 삼십 명가량의 패천문 무인들이 따랐다.

나머지는 유가량의 곁에서 그를 호위했다.

피잉!

철궁에 끼워져 있던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공기를 찢어발기며 신도청에게로 날아들었다.

'이런 미친!'

화살이 날아오는데 이처럼 엄청난 압박을 가해 올 줄은 몰랐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일반 화살이 아니라 철궁과 더불어 쇳덩어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력까지 실려 있으니 절대로 맞상대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덕분에 그의 뒤를 바짝 쫓던 무인에게로 그 물건이 꽂혔다.

퍼억!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는 믿기 힘든 소음이 울렸다.

살집을 비집고 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육체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는지 화살을 맞은 무인은 그대로 명이 끊겼다.

"대가리부터 잡으라고, 멍청한 새꺄!"

철궁으로 공격을 가한 사내 귓가로 거친 전음이 들려왔다. 가면 속 그의 얼굴은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저놈이 피한 걸 어쩌란 말이냐."

담천은 사군악의 구박에 가만히 있지 않고 반박했다.

"삼 년 동안 변한 게 없구나. 아이고!"

"주둥이 그만 나불거리고 저 유가량이라는 놈부터 사로잡아라."

그 순간, 담천의 좌측에 있던 사군악의 신형이 땅으로 꺼지는 듯하면서 유가량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져 갔다.

시산혈해!

피를 흘리는 인간의 시체가 정확하게 오십일 구!

그렇다면 분명 시산혈해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상황을 표현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인간의 피로 얼룩진 땅에서 피어오르는 혈향은 주변을 온통 가득 메웠다. 그 근처에는 웬만한 비위를 가진 자가 아니라면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부르르!

그런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는 일단의 무리.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철대악은 자신의 우악스러운 주먹을 떨었다.

"깔끔한 흔적입니다. 도저히 어떤 무공을 썼는지 알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문주."

외당주 신도용이 조용히 상황을 보고했다.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누가 감히 패천문을 이리 농락하는 것이야!"

철대악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 위력은 가장 옆에 있던 신도용과 그 뒤로 있던 외당의 무인들에게 전해졌다.

몇몇은 그의 기운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버티는 무인들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무기는 모두 세 종류입니다. 검, 도, 그리고 궁입니다."

신도용이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서 내뱉었다. 아무리 그가 외당을 맡고 있다지만 철대악의 기운을 제대로 맞받아칠 정도의 힘은 없었다.

"그 외의 것은 발견하기 힘이 듭니다. 헌데……."

"헌데?"

"궁이라 추정되는 물건이 이상합니다."

"……."

"흔히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궁을 쓰는 자들은 화살을 이용하기 마련인데 시체들을 확인한 결과 날카로운 것이 아닌 뭉툭한 것이 몸에 박힌 듯합니다."

"일반 화살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힘을 동반하였는지 도저히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철대악은 다시 한 번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훑어봤다.

"몇 명으로 추정되느냐."

"궁이라 추정되는 것 말고는 사용된 병기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검이고 하나는 도입니다."

"몇 명이라 물었느니라."

"파악이 불가합니다."

쿵!

철대악의 오른 발바닥이 땅을 한번 찼을 뿐인데 지천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신도용은 그런 철대악의 반응에 고개를 들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 파악만으로 그는 패천문의 외당주 몫을 톡톡하게 해낸 셈이다.

그만큼 패천문 무인들을 살해한 흉수들의 실력은 가늠하기가 힘이 들 뿐 아니라 자신들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철궁…… 철궁이라."

철대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원 무림에서 철궁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철궁이라 단정 지은 것은 신도용이 일반 화살이 아닐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화살이 아니라면 쇠로 만든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화살을 날리는 데 철궁이 사용되었으리라.

"유가량은 납치를 당한 것 같으냐."

"예.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봐도 찾지 못했습니다."

"독천자를 살해한 놈들이겠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기가 막혀 더 이상 화도 낼 수가 없었다. 감히 패천문의 무인을 이토록 도륙하다니. 무림의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까무러치고 놀랐을 일이다. 이것은 패천문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전면전을 하겠다는 행동이었다.

'도대체 누구냐!'

지금은 당장 알아낼 수 없지만 기필코 찾아내야만 한다.

"천기원주에게 전해라. 오늘 하루의 시작을 기점으로 아니, 며칠 전부터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사천성에서 수상한 무리가 있으면 즉시 나에게 전하라고."

"명을 받듭니다."

신도용이 고개를 숙였다.

"……."

이후 아무런 말이 없자 신도용은 즉시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도용."

"예, 문주."

"미안하구나. 동생을 잃은 너에게 슬퍼할 시간마저 주지 못해서 말이다."

"……."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마."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희 두 형제 패천문의 제자로 받아들여질 때부터 이미 목숨은 저희들 것이 아니었습니다. 패천문을 위해 죽은 동생도 기꺼워하고 있을 겁니다."

신도용의 손에는 동생의 애병인 묵창이 들려 있었다. 들고 있는 손에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두 형제의 우애가 얼마나 깊은지는 철대악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무공을 전수받은 제자였지만 신도용에게는 마지막 남은 혈육이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반드시 찾아내어 네 동생과 패천문이 흘린 핏값을 받아 낼 것이다."

* * *

천기원에 비상이 걸렸다.

총관 전종은 천기원의 모든 정보망을 사천성 일대에 집중시켰다. 패천문 문주로부터 강압적인 의뢰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패천문 문도 오십일 인을 도륙한 흉수를 잡아내라는 그의 의뢰는 전종으로서도 꽤나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한 실력자가 쉽게 모습을 드러낼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고 패천문은 사마련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현재 천라단(天羅團) 일급 소속 아이들 사십여 명이 사천성 일대에 포진해 있으며, 중경과 귀주, 그리고 운남성으로 천라단 총원의 절반이 침투해 있습니다."

천기원이 탄생된 이래 전후무후한 일이었다.

천라단은 천기원의 총관인 전종 휘하 직속 부대이다. 천기원주 하제량의 귀로 들어가는 보고들 대부분이 천라단 소속 정보원들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만큼 지리에 익숙하고 정보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한 시진 간격으로 나에게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전종은 자신이 우두머리로 있는 천라단의 부관인 막운(莫雲)에게 명령을 하달한 뒤 잠시 몸을 의자에 묻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패천문 문도들이 사망한 것은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철대악에게 의뢰가 들어온 시각은 그날 늦은 밤이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그 시간에 천라단은 비상체제로 돌입하여 사천성 일대는 물론 주변 세 개의 성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흉수에 대해 아는 건 최소 삼 인이라는 것과 철궁을 사용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유가량을 납치했다는 것.

그나마 그들을 추적하는 데 용의한 점이 하나 있다면 자신들에게 신상이 알려진 유가량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이미 시체로 변해 있을지 모른다.

"후우."

그들을 어찌 찾아낸단 말인가.

작심하고 숨어 버린 그들을 찾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하루에도 유동인구가 수백 수천씩 왔다 갔다 하는 사천성과 그 일대 지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수의 인원을 찾는 일은 너무나 버거웠다.

하지만 찾아내야만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천기원의 힘을, 천라단의 위력을 저들에게 여실히 드러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일이다.

전종은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그들을 잡아내야만 한다. 그게 바로 자신의 의무였으니까 말이다.

* * *

툭.

사군악은 자신이 쓰고 있던 투박한 가면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얼굴을 구겼다.

삼 년 전과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굳이 뽑으라면 머리색이었다. 새까만 검은색으로 염색이 되어 있었다.

"염병, 얼굴에 땀띠 나겠다."

"대체 이따위 거추장스러운 건 왜 쓰라는 건지."

옆에 있던 담천도 사군악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이 집어 던진 가면은 화려했다. 얼룩덜룩 짙은 색감이 가득 칠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의자를 세운 뒤에 앉았다. 몇 시진 만에 앉아 보는지 몰랐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뭐 하냐."

자신들의 은신처에 도착하여 쉬고 있는데 구석에서 대찰영이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이 왔음에도 쳐다보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불만인 사군악이 물었다.

대찰영의 손에는 녹색 빛깔을 띠는 원형 물체가 있었다. 너무나 조그마한 것이어서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우가 이것의 이름을 멸신독(滅神毒)이라 지었더군요."

"이름 한번 거창하군."

"그럴 만도 하지. 천하의 독천자를 죽인 물건이니까."

사군악의 투덜거림에 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신마저 멸할 수 있다는 멸신독.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정확하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만독불침의 육체를 지녔다 하는 독천자를 한 번에 독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봤음에도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멸신독은 초록색 원구의 형태였다. 날카로운 물체로 그것을 째면 그 안에서는 녹색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평범한 인물의 피부에 그것이 닿게 되면 화상을 입게 된다.

독천자를 죽일 때는 그것을 사군악의 검 끝과 대찰영의 도 끝에 묻혔다. 소량이었지만 독천자를 암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멸신독이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면 지금 세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독천자를 죽이기 한 달 전부터 그곳 근처에서 계획을 세웠고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사우에게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냐."

"예."

대찰영은 짧게 대답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독천자를 죽인 이후부터였다. 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든 걸 바치며 지켰던 환도문의 멸문. 그것을 주도한 이들이 현재의 사마련이라는 단체라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안에 속해 있는 문파들은 바로 환도문과는 교류가 두터운, 한때나마 남북천맹이라는 거대한 연맹에 속해 있던 자들이 아닌가.

동료들의 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대찰영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왜…… 유가량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까요."

무미건조한 대찰영의 말에 담천이 얼굴 표정을 굳혔다.

"글쎄다. 뭔가 이용할 목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명령을 내린 거겠지."

"명령은 무슨."

명령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거슬리는지 사군악이 인상을 썼다.

"죽이면 안 될까요."

"……!"

갑자기 지독한 살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사군악과 담천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죽이지 않으면 제가 미쳐 돌아 버릴 것 같습니다."

담천은 대찰영이 갑작스러운 분노로 인해 또다시 폭주를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자신과 사군악의 힘만으로는 그를 저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인곡에 사우가 들어온 이후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장 강해져서 나온 아이가 바로 대찰영이었다.

투살기를 대성으로 익혔고 독문도법인 혈우멸절도(血雨滅絶刀)의 다섯 가지 초식 모두를 극성까지 익힌 상태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에서 일류라 칭함받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면 마성에 젖어들지 몰라 담천은 대찰영의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라."

"유가량을 죽이려면 죽여라. 하지만 당장 네놈 혼자서 사마련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해야 한다면 하겠습니다."

"감정에 휘둘려서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담천은 평상시와 너무나 다른 말투와 눈빛으로 대찰영을 설득했다. 아무리 대찰영이 삼 년 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단신으로 단체를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나 사마련이라 하는 엄청난 조직을 상대로는 말이다.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다. 그저 분노한 감정에 휘둘려서 생각 없이 뱉은 말일 것이다.

"패천문주 철대악이 어떤 인물인 줄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사군악은 젊은 시절 천하를 떠돌아다닌 경험이 있으며 상단에 몸을 담은 적도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에서 그나마 무림이라는 곳에 잘 아는 이가 바로 사군악이었다.

"철혈대제 철대악은 무림에서 최강자로 꼽으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지. 네놈 따위가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그를 이길 수는 없어. 우리가 패천문 문도 오십일 인을 도륙했다 하더라도 그건 패천문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지. 그 안에 철대악이 아끼는 제자가 있었다. 전면전은 우리에게 불리해."

괜히 사천성의 강자라 불리는 패천문이 아니다. 사천성은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었지만 예전부터 어떤 문파도 감히 무시하지 못하는 강자들을 배출해 내었고 단결력과 날카로움이 있는 단체들이 넘치는 지역이다.

그런 곳을 혼자의 몸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망상을 품는 대찰영이 한심해 보였다. 아무리 감정에 휘말려서 내뱉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담천이 대찰영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두르자."

지금 이들은 사천성과 섬서성 경계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위치해 하고 있었다.

꽤나 멀리 도망쳐 왔다고는 하지만 패천문이 눈에 불을 켜고 흉수를 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괜히 꼬리를 길게 늘어트려 봐야 이득 될 것은 없었다.

세 사람은 그날 밤 창가를 통해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 주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이 녀석들이었나."

그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곤 새장에서 잘 훈련된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하늘 위를 맴돌던 전서구가 사내의 어깨로 내려와 안착했다.

철대악은 전서구를 통해진 소식을 접하자마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악한 놈들."

그는 서찰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어깨는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섬서성으로 향한다 하는구나."

철대악의 뒤에는 세 사람이 시립해 있었다.

한 명은 외당주 신도용이었다.

"제가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검은 방립을 쓴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흑풍도(黑風刀) 신철(伸哲).

그는 패천문 문도이긴 했지만 언제나 어둠 속에서 철대악을 보필하는 사내다. 중원에서는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고 패천문 내에서도 그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오로지 철대악의 명령만을 들으며 그의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존재였다.

"쉽게 내리실 결정이 아닌 듯합니다. 련에 속한 다른 문파들이 이번 일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학사풍의 중년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백면군자(白面君子) 심천악(沈天岳).

현재 패천문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실질적인 인물인 그의 발언은 신철의 의견을 묵살하는 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다. 아무리 신철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특히나 목표물들이 이동하는 곳은 섬서성이다. 바로 남북천맹의 총타가 있음은 물론 그곳은 어떤 장소라도 남북천맹의 시선을 피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들이 남북천맹의 소속일 경우 패천문과 남북천맹은 서로 피를 봐야 할 것입니다."

"시기상조로군."

철대악이 침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본문의 입장만을 내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도용."

"예, 문주."

"본문의 일을 다른 문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더냐."

"련주께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언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혈천문 문주께서도 거사를 치름에 있어 작은 희생은 묻어 두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문주…… 제가 나서겠습니다."

신철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음살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더냐."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놈들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철대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살문은 본련의 가장 비밀스러워야 하는 조직이다. 절대로 세상 밖으로 먼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곳이지."

철대악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정답이 나오질 않았다. 자신의 제자가 죽었다. 그리고 오십여 명의 문도가 도륙당했다. 중요한 건 그 흉수의 꽁무니를 잡았다는 것인데 검을 들지는 못한다는 게 답답했다.

섬서성에서 피를 보게 되면 남북천맹에서 조사를 나오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게 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흉수가 남북천맹에서 보낸 자들이라면 전쟁은 불가피해진다.

준비를 해 가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필패였다.

"하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용."

"예."

"천기원주에게 전해라. 그놈들의 행적을 쫓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하루 간격으로 나에게 보고하라고."

"알겠습니다."

철대악은 흑풍도 신철을 바라봤다.

"그들을 준비시켜라."

"……!"

신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하오나, 문주. 그들은……."

"패천문 문도 오십이 죽어 자빠졌다. 내 수족들의 죽음을 묵인할 정도로 매정한 인간은 못 되지. 나란 놈은."

철대악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라면 반드시 흉수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음살문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 남북천맹과의 관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심이……!"

"그만!"

심천악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철대악이 음성을 높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심천악의 혈색이 새하얘졌다.

"더 이상의 반발은 패천문의 수장으로서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난 그들의 어버이다. 어찌 내가 자식의 죽음을 그냥 넘어간단 말이냐."

철대악은 잠시 말을 멈추곤 흥분을 가라앉혔다.

"오랜만에 딸아이를 보고 싶기도 하구나. 신철, 어서 가거라.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고 함께 하산하여 섬서성으로 함께 가거라."

"존명."

신철의 신형이 스르륵 사라졌다.

'뭔가 불길하구나.'

심천악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철대악의 등을 바라봤다.

< 『흑천』 제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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