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章 후예 (6/38)
  • 第六章 후예

    다음 날, 사우는 일어나자마자 홀로 마인곡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마인곡이라는 장소를 칭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찰영과 함께 왔을 때 설치되어 있던 산 초입이 마인곡의 시작이었다.

    마존이 머물렀던 오두막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사우는 한참을 걸어갔다. 신법을 발휘하기도 하고 주변을 구경하며 걷기도 했다.

    오랜만에 와 보는 곳이었지만 주변 지리는 낯설지가 않았다.

    사우가 한참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계곡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벌거벗은 채 이곳에서 마존과 어울렸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사우는 한참을 폭포수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가 걸음을 옮겨 이동한 곳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박고 있는 곳이었다.

    사우는 홀로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무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처음으로 마존과 비무를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패배라는 걸 당하기도 해 본 곳이었다.

    지난밤, 사우는 초호진에게 마존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폐관수련 중인 곳이 어디인지, 하다못해 폐관을 끝내고 나오는 날이 언제인지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하여 이른 아침부터 마인곡 곳곳을 둘러본 것인데, 생각지도 않게 추억에 젖어 버리고 말았다.

    "이풍…… 그대는 알고 있었나. 마인곡이 이 지경이 된 걸 말이야."

    사우는 허공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우에게 형의 죽음을 알려 준 사내, 이풍.

    그는 사우의 친형을 보필하는 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어렸을 적부터 키워 주던 '그'의 친형이기도 했다.

    이풍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인곡으로 가라고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시작은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사실 믿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흑천이라 불리던 자신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리와 상대를 하려면 이들 가지고는 안 되었다.

    물론 예전의 마인곡 전체의 힘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형을 죽인 무리의 힘을 제대로 모르지만 형이 가진 힘을 생각했을 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다.

    짐만 될 자들이면 고향과도 같은 이곳을 초토화시켜서라도 가능한 빨리 마존을 만나고 가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미 그가 기억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없기에.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마존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을 보다 쓸모 있게 다듬을 생각이다.

    어찌 될 것인가는 이제 그들의 능력에 달렸다.

    사우는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돌렸다.

    몇 명 되지 않는 마인곡의 인물들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식성은 여전하시군요."

    대찰영은 혀를 차며 담천을 바라봤다. 그릇에 아예 코를 박고 음식을 빨아들이는 그의 식성에 혀를 내둘렀다.

    "저 계집애 같은 놈이 워낙 요리를 잘해야지 말이지. 내 저놈 때문에 살이 안 찔 수가 없단 말이다."

    그는 자신이 살이 찌는 이유를 다른 이에게 돌렸다.

    대찰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담천이 말한 사내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마인곡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부대낀다면 눈에 띄는 용모를 가진 이였다.

    허리까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의 색이 가장 특이했다. 순결을 상징하는 새하얀 백색이었다. 신선이 따로 없는 묘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복장 또한 하얀 무복이었다.

    삼십 대 중반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어려 보이고 앳돼 보이는 외모였다.

    백검천마(白劍天魔) 사군악(査君惡).

    그의 머리색이 하얗게 변색된 건 사군악이 익힌 빙백투살공(氷白透殺功)이라는 내공 때문이었다.

    현재 마인곡 안에 머무는 이들 중 마존 다음으로 강한 무공 성취를 이루었다 말할 정도로 강자였다.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를 하고 있는데다 평소 말투까지 거친 사군악이었다.

    대찰영은 슬쩍 눈을 내리깔고는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있는 와중에 사우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입니다."

    대찰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사군악에게 말했다.

    사군악이 다가오는 사우를 쳐다봤다. 눈빛으로도 그가 사우라는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대찰영은 살짝 긴장을 하면서 담천의 상태를 살폈다.

    가장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설 것 같던 그는 웬일인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희한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바로 어제 그런 모욕을 당한 걸 참고 있단 말인가?

    대찰영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사우와 무섭게 그를 노려보는 사군악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게 바로 지금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인곡이 개나 소나 다 기어들어 오는 곳인 줄 아나?"

    먼저 선공을 날린 건 사군악이었다. 역시나 말투에는 냉기가 풀풀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사우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사군악의 옆에 앉았다.

    "후우. 네놈은 백검천마 마혁(馬赫) 숙부의 제자구나."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해 대자 사군악이 일갈을 토해 냈다.

    평소 다혈질인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담천과 대찰영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빙백투살공을 익힌 것 같은데 그럼 마혁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을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얼굴도 모르는 그 마혁이라는 자식의 제자라 이건가?"

    "……."

    "난 단지 강해지기 위해서 그 백검천마라는 놈의 무공을 익혔을 뿐이다. 누구의 제자나 되려고 무공을 익힌 게 아니라는 말이지."

    사우는 피식 웃었다.

    "웃기는군. 겨우 머리색만이 바뀌었을 뿐인데 네놈이 강해졌다고 믿는 것이냐."

    사우의 그 말은 사군악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사군악의 손이 낮고 빠르게 사우의 급소를 향해 파고들어 왔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사우가 쉽게 당할 리는 없었다.

    팍, 팍.

    손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휘둘러 사군악의 공격을 막아 내었고 그 반대 손의 공격도 가볍게 막아 냈다.

    "대찰영이 그러던데…… 네놈이 마존의 친구라고 말이야."

    "그런데?"

    두 사람은 허공에 각자 공격한 손과 방어한 손을 대치시켜 놓은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놈에게 보여 주지."

    "무엇을?"

    "네가 약하다는 걸 말이다."

    "키키킥!"

    사우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입술까지 비틀어 가며 비웃기 시작했다.

    사군악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찰영, 가서 그놈을 가지고 와라."

    대찰영은 사군악이 말한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인곡에서는 살생을……!"

    "그 개 같은 마존의 명령은 그놈이 있을 적에만 따르는 것이 좋을 게다."

    사군악이 으르렁거리자 대찰영은 어쩔 수 없이 어딘가로 몸을 움직였다.

    "다시는 그 망할 주둥이로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해 주겠다."

    "얼마든지."

    그래도 사우는 웃었다.

    대찰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고생깨나 하고 있었다.

    백검천마 사군악이 자신의 애병인 빙백마혼검(氷白魔魂劍)을 쥐고 있는 모습은 그가 마인곡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사군악과 그나마 친하다는 벗 담천의 말을 빌리면 그가 검을 든 건 살생을 할 때가 아니면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사우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안 되었다.

    첫 만남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대찰영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철천지원수도 아닌 이상 이런 전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군악이 들고 있는 검은 녹지 않는 얼음, 눈이 그치지 않는 설산 깊숙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얼음을 깎아 만들었다는 검이다.

    대찰영과 담천은 멀찌감치 떨어져 나와 두 사람을 응시했다. 만약 이 사실을 마존이 안다면 사군악이 어떤 형벌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마인곡이라는 곳을 한 번 들어온 이상, 그리고 마존이 준 무공을 익힌 직후 마존의 명령은 곧 하나의 법이었다.

    그게 바로 마인곡에 머무는 이들에게 무공비급을 전수해 준 그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헌데 사군악은 지금 그것을 깨려고 했다.

    평소 거칠고 까칠한 성품을 가진 그였지만 한 번도 마인곡에 머무는 이들과 이렇게까지 싸움을 벌인 적이 없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사군악 저놈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거든. 그리고 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놈인 줄 알지. 게다가 그런 행동을 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있거든. 그런데 문제는 저 녀석이 얻은 그 힘이 단기간에 그것도 생판 얼굴도 모르는 자가 만들어 낸 걸 따라 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야, 사우라는 저 사내의 짧은 대화 속에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니. 저놈에게 자존심은 제 목숨이야."

    "조용히 해라, 담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사군악의 귀에 들어갔고 이내 싸늘한 그의 음성에 조용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자, 그럼 어디 한바탕 놀아 볼까."

    사군악이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사우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무기가 없지만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기도만으로 벌써 무기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상대는 마존보다 더 강한 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마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저 사내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어차피 같은 인간인 이상 붙어 봐야 승패는 알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빙살참륙검식(氷煞斬戮劍式) 제삼식, 빙룡섬(氷龍閃)!

    사군악이 들고 있는 검선에서 냉기가 어리더니 엄청난 한파를 동반한 채 사우에게로 그 기운이 덮쳐들어 왔다.

    콰콰콰쾅!

    온 땅을 얼려 버릴 듯한 기세였지만 정작 사우는 그 자리에서 몸을 비킨 지 오래였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사우는 사군악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푸른 빛이 서려 있었다.

    대찰영과 담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그 빛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장법이 무엇일까."

    담천이 혼자 중얼거렸다.

    사우의 두 손에서는 푸른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불꽃처럼 말이다.

    그러곤 사군악의 검과 그의 두 주먹이 맞붙었다.

    도저히 검과 인간의 주먹이 맞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내공이 약한 자들이 들었다면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소음이었다.

    특히나 이들 중 가장 내공이 약한 대찰영은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이겨 내야만 했다.

    사우는 사군악의 검법이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가 힘이 들어 꽤나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그 정도냐!"

    사우는 배를 향해 들어오는 그의 빙검을 주먹을 이용해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놀고 있는 왼손으로 사군악의 턱을 대각선에서 내리찍어 내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군악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사실 사우의 이런 방어법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청살귀주장(靑殺鬼蛛掌)을 극성까지 익히게 되면 푸른 빛이 일렁거리는 것이 특성이었다. 위력은 웬만한 돌이나 쇳덩이는 무 베듯 가를 수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군악이 휘두르는 검에도 그와 비슷한 검기가 서려 있었다. 그럴 경우 상대의 검과는 맞부딪치는 걸 피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손이 통째로 날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가 냉철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은 같잖기 때문이었다.

    담천은 물론 사군악은 철궁마와 백검천마라는 별호와 무공을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그 전에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견식한 바 있는 사우로서는 그다지 강하지도 않은 이들이 너무 같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위력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형을 죽인 놈들을 혼자서 찾기는 너무나 버거웠다. 이들의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쿨럭!

    사군악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이빨 몇 개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입안에는 비린내 나는 핏물을 머금었을 테고.

    사우는 씩 웃었다.

    대찰영이나 담천처럼 한 방에 기절하지 않아 기특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보여 주지. 나와 네놈의 차이를."

    서슬 퍼런 기세가 사우의 몸 주변을 감싸고 그 기도는 세상을 모두 집어삼킬 듯했다.

    "대체 얼마나 두들겨 맞으면 이리 되는 것인지."

    초호진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내려다보는 곳에는 사군악이 시체마냥 누워 있었다.

    온몸에는 붕대를 감고서 말이다.

    "대체 그 사우라는 자는 이 자식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리 만들어 놓은 것이야."

    초호진은 대찰영과 담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걸 듣고 난 초호진은 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었다.

    "그자…… 괴물이었습니다."

    대찰영은 멍한 눈길로 사군악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와 사우가 싸우는 모습을 본 이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런 자가 왜 마인곡을 방문한 것인지."

    담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군악 형님은 괜찮으시겠지요?"

    "모르겠구나. 몸도 만신창이지만 일단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나도 장담은 하지 못하겠구나."

    "후우."

    육안으로 살펴도 사군악의 상태는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인곡에서 마존 다음으로 강한 그가 이 지경이 될 것을.

    세상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웬만한 고수들과 다퉈도 뒤지지 않을 그라고 생각했던 이들 세 사람은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혈룡 그 자식은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대찰영과 사우가 마인곡에 온 이후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이를 대찰영이 찾았다.

    "원체 남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녀석이지 않느냐. 어디선가 홀로 제 무공을 다듬고 있겠지."

    "가만…… 그러고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물끄러미 사군악을 보던 담천이 말했다.

    "열흘 남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고 있는 초호진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보다 그가 폐관수련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그리되었습니까."

    "벌써라니. 너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지난 시간을 마존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약속하지 않았느냐. 자신이 폐관에서 나오면 밖으로 나가겠노라고. 그래서 우리들의 피맺힌 원수를 갚는 데 앞장서겠노라 말이다."

    마존과 사우를 제외하고 마인곡에서 머무는 이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그들이 마인곡으로 들어온 이유는 다름 아닌 복수를 위함이다.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복수 대상자는 다르지만 이들은 한 몸과도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마존이었다.

    * * *

    며칠 밤낮을 술을 진탕 마시며 취하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과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난생처음 패배라는 걸 느껴 본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자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제량아.'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나가는 말로 할아버지가 그리 말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뜻을 내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그 말이 지금 하제량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맞다.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상대에 대한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도 천기원의 핵심 무력을 이용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전멸!

    흑혈대는 하루아침에 한 사내에 의해서 모두 죽어 버렸다.

    자신의 경솔한 판단으로 인한 결과치고는 엄청난 피해였다. 흑혈대는 천기원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무력단체였다. 조부의 선조 때부터 육성한 무인들이다. 그들을 만들어 내는 데 들인 시간과 자금은 엄청났다.

    변명을 하자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흑혈대 전원을 박살 낼 인간이 있다는 건 상상을 못했던 일이다.

    그들이면 웬만한 중소방파들을 괴멸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던 하제량으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밖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후께서 오셨습니다."

    은조의 전음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기운이 단번에 달아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이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제량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의외로 검은색 경장 차림이었다.

    천상무후(天上武后) 지청화(池靑花).

    삼십 대 초반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면사로 가려져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반갑습니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하제량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천에 오셨다는 정보는 입수했는데 도통 찾아오시질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그녀는 한 단체의 절대자라 하기에는 특이할 정도로 검소해 보였다.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말투 또한 나긋나긋하면서도 조용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정확하게 발음했다.

    무공을 익히게 되고 거친 무림인들과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뚝뚝하고 차갑게 변하기도 할 텐데 그녀에게서는 절대로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제량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천상무후 지청화라는 인물에 대해서 제대로 된 조사가 부족했다.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는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갑작스럽게 천기원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그만두죠."

    하제량은 그녀의 눈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꽤나 딱딱한 음성이었다. 여자라고 얕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사마련의 련주가 된 그녀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죠. 저도 의외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서요."

    역시나 그녀는 당돌하게 맞받아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사마련의 눈과 귀가 되어 주세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전 사마련이 무엇을 믿고 남북천맹을 향해 칼을 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련의 전력을 의심하는 것인가요."

    "천기원의 힘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망이네요. 천기원의 정보력이 겨우 그 정도라니."

    하제량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천기원과의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해도 되겠군요."

    하제량은 웃음을 거두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모든 걸 얻거나 모든 걸 잃거나 하는 두 종류의 결과만이 존재하는 그런 도박 말이다.

    하제량은 그녀가 지금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사마련에 속해 있는 네 개의 문파는 사천성에서 유명했다.

    혈천문(血天門), 화월문(花月門), 패천문(覇天門), 음살문(陰殺門)이 그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천상무후 지청화는 화월문 이십칠 대 문주이기도 했다.

    사천성 일대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남북천맹과 비교하기에는 조족지혈이었다.

    어림잡아도 사마련 전체 힘의 열 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남북천맹이다. 물론 이것은 대외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고,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힘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 허세가 아니고 뭐겠는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낀 하제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앉으세요."

    사람의 음성에서 이토록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올 수 있을까.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제량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패가 좋지 않음에도 판돈을 키우고 계속 밀어붙이는 건 도박을 잘 모르는 자들의 가장 큰 실수이지요."

    "하하! 지금 저보고 하는 소리인 겁니까."

    "많은 걸 알지는 못해도 천기원이 웅덩이에 오랜 시간 고여 있는 썩은 물에 지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요."

    명백한 도발이었고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제량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에 비해 지금 상대는 천기원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현재 천기원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린 주인의 대한 불신이 전염병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하제량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천기원은 과거에 누리던 황금기가 한참이나 지나 이제는 서서히 지는 해나 다름없었다.

    하제량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염원이자 궁극적인 목표는 천기원을 예전의 천기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특히나 천기원 전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입장에서 사마련과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것은 엄청난 고민이 따르는 일이었다.

    반면 사마련이 이미 전성기를 지나 아래로 꺾이는 천기원을 탐내는 건 그들의 정보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중원 곳곳에 숨어 있는 정보원들의 능력은 가히 중원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단체가 바로 천기원이다.

    아무리 그들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아직도 자신들과 같이 이들과 접촉하여 정보를 얻으려 하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천기원과 힘을 합친다면 사마련은 정말로 남북천맹과의 전쟁을 벌여 볼 만했다.

    "부친의 존함이…… 하사의(何思義) 맞나요?"

    그녀는 오늘의 만남을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한 필승의 패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 반응한 하제량의 눈빛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의 소행이라던데…… 맞나요?"

    "……."

    "그렇게 노려보실 것 없습니다."

    천기원에서 하제량의 친부 하사의라는 존재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여겨져 왔다. 하조천의 뒤를 이어야 할 그 존재는 숙명처럼 여기던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는 어느 날인가 불현듯 먼지처럼 비명횡사했다. 천하의 모르는 것이 없다는 천기원도 그를 죽인 흉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녀가 쉽게 말해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청화의 대답 여부에 따라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사마련과의 융화가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제량은 침묵을 유지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 * *

    사우와 대찰영이 마인곡에 나타난 지 칠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의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군악의 간호를 초호진과 담천, 그리고 대찰영이 번갈아 가면서 해 줬다. 겉으로 드러난 부상도 부상이지만 내상을 크게 입어 사군악은 회복하는 데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물론 그가 무인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지 일반인들 수준에서 봤을 때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동안 이들 네 사람 앞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둘 있었다. 사군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우와 혈룡검마(血龍劍魔) 무진(舞塵)이었다.

    사우는 원래 제멋대로라고 하더라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던 무진의 부재는 꽤나 의외였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설마 이 자식 사우라는 자와 만나서 싸우다 죽은 것 아니야?"

    농담과 진담을 섞은 말이 담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물론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본인도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담천은 요 며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사군악의 병간호 때문만은 아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남자들만이 사는 이곳 마인곡에서 사군악은 꽤나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담천과 초호진에게 있어서만큼은 마존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바로 사군악의 요리 솜씨 때문이다. 웬만한 객잔에서 요리를 총괄하는 주방장 정도의 실력을 지닌 그는 불룩 튀어나온 담천의 배를 만든 장본인이었고 초호진에게는 훌륭한 안줏거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물론 그의 싸가지 없고 때로는 차가운 독설을 참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까짓것 욕 몇 마디 듣는 대가치고는 사군악이 내놓는 음식들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째 누워만 있으니 제대로 된 끼니도 술 안줏거리도 없었다.

    "쩝."

    담천은 입맛을 다셨다. 사군악이 정신을 차리면 뭘 가장 먼저 해 달라고 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 중이었다.

    "마존이 나오면 우리는 바로 마인곡을 떠날까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대찰영이 물었다.

    "글쎄다. 바로 떠날지 아니면 몇 년 더 머물지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진 형님은 그리 알고 계시던데요. 마존이 나오면 바로 나간다고."

    "그 녀석이야 원체 성질이 급하니."

    담천은 혀를 찼다.

    "차 한잔할 테냐."

    오두막 안에 있지만 밤공기는 차가웠다. 대찰영은 속에 따뜻한 게 들어가면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크지 않은 오두막은 사군악과 담천이 함께 쓰는 숙소였다. 담천은 자연스럽게 준비를 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내왔다.

    "마존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라."

    "……!"

    식히기 위해 후후 불던 대찰영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강해지는 걸 원한 건 저였으니 할 말은 없죠."

    대찰영은 늘 입버릇처럼 마존을 뒤에서 씹어 대며 살아왔다. 그에게 속아 마공을 익히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마인곡 내에서도 죽을 고비를 꽤나 넘기는 상황까지 있었다.

    마인곡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난해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는 자가 바로 대찰영이었다.

    혼자 이겨 내기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하는 게 있니."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찰영은 예의상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많이는 생각나지 않네요. 다만 엄하시고 무뚝뚝하셨던 것만은 기억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꽤나 서글픈 현실이었다.

    "그렇구나. 아직도 복수를 하고 싶으냐."

    "……."

    대찰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그의 부친이 세상을 뜬 지 십칠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리 강한 복수심이 들었다 하더라도 한풀 꺾이기 마련이다.

    "왜…… 그리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무림의 일이란 크건 작건 간에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싸움이 시작되지."

    "갑자기 왜……."

    "그냥 물어본 것이다. 이제 조만간 마존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지. 그 전에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각자의 사연 속에서 각자의 복수를 꿈꾸고 있다. 그런 우리를 한 자리에 모아 묶은 자가 바로 마존이지. 그 또한 지독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단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마음. 마존과 형님을 따라 마인곡으로 오던 첫날의 마음……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조금은 불공평한 관계들이지. 우리는 말이다. 한 사람의 복수를 해 주기 위해 여럿이 모여 힘을 합쳐야 한다. 그 와중에 죽을 수도 있어. 본인의 복수는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후회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허나 대찰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대답을 대신했다.

    담천은 웃었다.

    그가 고맙고 또 기특했다.

    "내가 지금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담천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

    "나도 못 믿겠는데.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나."

    그 옆에 있던 초호진마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 된 게 아니라 저 인간이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은데요."

    대찰영은 아예 상황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다.

    "아∼."

    너무나 상냥한 표정으로 그릇에 담긴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사군악의 입안으로 집어넣고 있는 사우를 본 세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로 사우가 밀어 넣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는 사군악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도대체 뭘 처넣었기에, 이리 맛이 떫은 거야!"

    우물우물 입안의 것을 몇 번 삼킨 그의 반응은 너무나 냉담하고 거칠었다.

    그 모습에 사우는 씩 웃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의 내단으로 만든 죽이니 그냥 처먹어라. 네 몸이 빨리 나아야지 내가 제대로 된 끼니를 때울 것이 아니냐."

    "인면지주? 마인곡에 그런 게 있었습니까?"

    마인곡에 늦게 들어온 대찰영으로서는 지리를 잘 모를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한 두세 마리 정도 사는 것으로 안다. 지금 마존이 폐관수련하러 들어간 장소 근처에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담천의 설명 덕분에 초호진과 대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면지주는 머리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거대한 거미로서 수천 년을 묵어 영성을 띤 흉악한 맹독성 기수다. 그런 인면지주의 내단을 복용하게 되면 엄청난 내공의 증진을 이룰 수 있다.

    하물며 내상은 물론 육체적인 상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치될 것이 뻔했다.

    "고작……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끼니를 채워 줄 자가 없어서?"

    인면지주의 내단이 들어 있다는 걸 듣고는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 뒷말이 사군악의 심기를 건드렸다.

    때린 놈이 달려와 무릎 꿇고 사정해도 용서를 해 줄지 안 해 줄지 고민할 판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성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건 저 녀석들에게나 줘야겠네."

    사우가 그릇을 빼앗으며 초호진, 담천, 대찰영을 보며 말했다.

    대찰영이 그 말을 듣고는 눈치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초호진과 담천도 마찬가지였다.

    "야! 야 인마! 알았으니까 이리 줘."

    일단은 몸이 낫는 것이 급선무였다. 며칠 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조심해라. 내가 만들어 먹인 음식에 네놈을 죽이는 독약이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

    사우가 지어 준 인면지주의 내단이 섞인 약을 먹고 난 사군악은 약 하루 만에 몸을 털고 일어섰다. 그 덕분에 사군악이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한답시고 차려 놓은 상다리는 휘어질 지경이었다.

    도저히 첩첩산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며칠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맛본 초호진, 담천, 대찰영, 사우는 미친 듯이 접시들을 비워 가기 시작했다.

    주로 이들의 식사 장소는 사군악이 만들어 놓은 모옥 앞이었다. 날이 추울 때는 안에서 먹지만 요즘 같은 날씨라면 늘 밖에서 먹곤 했다.

    "저 녀석이 혈룡검마냐."

    그때 저기 멀찌감치서 다가오는 이를 보며 사우가 대찰영에게 물었다.

    마치 핏빛으로 물들인 게 아닐까 싶은 혈포가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잘 벼른 칼날 같다는 느낌이었다.

    왠지 사군악과 비슷한 느낌이 났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었다.

    특히나 그의 행색이 그런 느낌을 더욱 부각시켜 주기 충분했다.

    "저 새끼는 나타날 때마다 옷이 저 모양이야."

    사군악은 쌍소리를 뱉어 내며 혈룡검마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름 음식의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로서는 자신의 요리를 맛보러 온 사람의 복장이 불량함은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두 번도 아니다. 며칠씩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저렇게 나타나는 꼴을 보면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다들 오랜만이오."

    사내는 발을 땅에 질질 끄는 것이 습관이었다. 게다가 어깨마저 축 처져 있다.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꾸벅 형님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낯선 이가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잘 먹겠소."

    외적인 모습으로 봤을 때도 가장 어린 나이의 혈룡검마의 말투는 꽤나 어른스러웠다.

    "진아……."

    오랜만이라는 말과 잘 먹겠다는 말만을 하고는 대가리를 푹 숙인 채 접시에 코를 박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런 그를 담천이 조용히 불렀다.

    그래도 초면에 인사라도 나누고는 밥을 먹는 게 좋다 판단한 담천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마존의 친구인 사우를 대접함에 있어서 소홀해서는 안 되었다.

    "웃긴 놈일세."

    비쩍 마른 놈이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혈룡검마 무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속 식사에만 집중할 뿐이다.

    "저 녀석 원래 밥 먹을 때는 귀를 닫고 사는 별종입니다."

    사우는 신기하다는 듯 무진의 머리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다시금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노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조용히 입안에 뭔가를 넣기 바빴다.

    한참이나 지난 뒤 먹는 걸 가장 빨리 멈춘 것은 늦게 온 무진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오?"

    그제야 낯선 사람 사우를 발견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마존의 친구시란다."

    사군악이 비꼬며 말했다.

    "그 양반에게도 친구가 있었소?"

    "뭐, 그런가 보지."

    다음 말을 할 때도 사군악의 얼굴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사우라는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준 음식으로 빨리 완쾌를 하긴 했지만 자신을 죽도록 쥐어 팬 건 그가 아닌가.

    마존의 친구만 아니라면 다른 이들과 합세하여 죽여 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다고 그를 이길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군악이 단언하건대 폐관수련에 들어간 마존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끝을 보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겠다던 마존이 나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본인 스스로에게 약속한 걸 지켜서 나온다면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사우는 엄청난 강자였다.

    당금 무림에서 사우가 어느 정도 위치에 해당하는 고수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마인곡에 들어온 지 삼 년이나 되었다.

    그 전에 사군악은 일개 낭인에 불과했다.

    물론 그의 과거는 꽤나 이색적이다 할 수 있었다.

    친부인 사금조(査金鳥)는 황족들을 호위하는 태양군(太陽軍) 소속이었고, 어머니가 없는 가정사 때문에 부친과 그의 동료들 틈에서 자라 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닥친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천애 고아가 된 사군악은 황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한 무공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중소방파에 제자나 무인으로 들어갈 실력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상단의 호위무사로 들어갔다. 그때가 사군악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당시 그가 실력을 인정받아 들어간 상단은 섬서성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천화상가(天華商家)였다.

    사군악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천화상가에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말단 무사에서 호위무사들을 총괄하는 대관의 직위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불과 사 년 만의 일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사군악은 천화상가의 주인인 유기호(柳氣浩)의 셋째 딸 유란(柳蘭)과도 정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유기호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기호의 뜻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군악과 유란은 이미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군악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혼을 두 달 앞둔 상태에서 사군악은 상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천화상가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천산검문의 문주와 그의 아들이자 차기 문주가 될 무리가 그들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천산검문과 천화상가는 돈독한 사이로 지내 왔고 이번 방문은 화진천의 짝을 천화상가의 여식으로 자기네들끼리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천화상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의리가 좋다고는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은 천화상가의 위세를 더욱 드높여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천산검문 문주의 장남이자 남북천맹 맹주의 제자이기도 한 화진천을 사위로 얻으면 날개가 달린 꼴이니 유기호는 단번에 승낙했다.

    물론 화진천과 짝을 이룰 상대는 사군악과 정혼을 맺기로 약속한 유란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빛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화진천이 한눈에 반할 만큼 말이다.

    유기호는 당장에 살수들에게 의뢰해 사군악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에게 이번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일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군악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살수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은 그는 무사히 천화상가로 돌아왔다.

    하늘의 장난일까. 꼭 그날이 화진천과 유란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사군악은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권력에 눈이 먼 유기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란의 심적 변화는 사군악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유기호는 그녀에게 화진천과 혼례를 치를 걸 강요했고 그렇지 않는다면 사군악의 명줄을 끊겠노라 협박을 한 것이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군악의 분노는 엄청났다.

    그동안 보여 줬던 무공과는 차원이 다른 살인 기술로 천산검문의 무인들을 죽이고 단번에 화진천에게까지 짓쳐 들어가 그의 한쪽 눈을 앗아 갔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사군악은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칼로 난도질을 당했고 겨우겨우 실낱같은 목숨만을 건진 채 버려졌다.

    그 이후부터 사군악은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낭인이 되었고 그 와중에 마존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복수심이 뼛속까지 스며든 인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시간 안에 마인곡에서 마존 외에 가장 강한 무인이 되었다.

    앞으로 이곳을 나가는 일만이 남았다.

    혼자서 나갈 수도 있었지만 상대는 홀로 싸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도움을 주는 이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군악은 마존이 나오기를 누구보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혈룡검법(血龍劍法)은 몇 성까지 익혔지?"

    사우가 무진을 보며 물었다.

    무진은 그의 질문에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의 시선이 사군악에게 향했다.

    "어린 시절 이곳에 자주 오셨다고 하는구나."

    그제야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성까지는 무리 없이 펼칠 수 있소."

    나름 자신 있게 대답하는 무진이었다.

    하지만 사우는 혀를 찼다.

    "네놈이 익히는 혈룡검법의 육성은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경지이다. 그 이후부터 진짜 혈룡검법의 위력이 나타나지."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혈룡검법은 아무나 익히지 못하는 검법이오."

    "네놈도 복수를 원하나."

    무진이 이번에는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지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마음뿐이오."

    "그게 누구지."

    "남북천맹의 부맹주."

    무진은 짧게 대답했다. 이번엔 사우가 담천을 바라봤다.

    그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사자검문(獅子劍門)의 문주 사자천황(獅子天皇) 단위광(單威光)."

    담천 대신에 무진이 대답했다.

    "그자가 강하냐."

    "내 아버지가 인정한 강자이오. 그를 꺾는 건 내 숙명이고."

    사실 지금의 무진이 지닌 실력으로는 남북천맹의 부맹주를 이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한참이나 뒤떨어진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무진은 마인곡에서도 유명한 무공광이었다.

    자기 스스로의 몸을 학대하다시피 혹사시키는 것으로 알아줬다. 무진이 며칠 동안 안 보이는 이유는 홀로 자신의 무공을 갈고닦기 때문이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단련한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서 말이다.

    무진은 오직 남북천맹의 부맹주를 순수한 실력으로 이기고 싶은 열망 하나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사우는 묘한 눈길로 무진을 쳐다봤다.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 강해진다는 것 말이다. 게다가 뚜렷한 목적까지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시간을 갖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각자의 시간이 누구보다 많다. 뜻밖의 외부 손님인 사우 때문에 벌어진 일 때문에 며칠씩 함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서로가 자주 왕래하지 않으며 지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웃긴 일이지만 이들은 뭔가 하나로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건 바로 그 끝에 있는 복수였다.

    서로가 태어난 장소와 살아온 과정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지만 목적이 같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지하고 믿게 되어 버렸다.

    사우는 흩어지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어느 한 곳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도 자신을 믿는 어느 한 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좀 기어 나와라. 지루하다."

    사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저건, 좀 잔인하지 않냐?"

    담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초호진은 술병의 주둥이를 입가로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 어쩔 수 없지."

    담천과는 달리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오늘로 며칠째지."

    사군악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야. 벌써 삼 개월 정도 된 것 같네."

    "찰영, 저 녀석 강해지고 있는 거 맞겠지."

    뭔가 부러운 눈초리로 초호진이 말했다.

    "마존이 늦는군."

    순간 사군악의 눈에 살기가 엿보였다.

    약속한 날이 한참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석 달째 마존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사군악은 몸이 근질거려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반 죽도록 얻어맞고 있는 대찰영과 그를 후려 패는 사우를 바라봤다.

    한, 두 달 전부터 멀쩡하던 대찰영이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대찰영에게 듣기로는 사우가 만들어 준 약으로 인해 마성에 젖는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대찰영이 익힌 투살기는 그 기운이 강맹하고 흉포하여 강한 초식을 구사하려 하면 이성을 잃게 되곤 했다.

    한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상으로 돌아오기가 힘이 든다.

    두 달 동안 벌써 수차례였다.

    그때마다 사우가 대찰영을 진정시켰다. 정말이지 눈 뜨고 봐 주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자신이 얻어맞은 건 그냥 애교로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마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네, 젠장."

    사군악의 귀에 담천의 말이 들려왔다. 누구보다 마존을 믿고 신뢰하는 자가 담천이었다. 헌데 그마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존은 그럴 각오를 하고 폐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리 꾸물거리는 것이냐.'

    "자! 밥 먹자!"

    사우가 손을 툭툭 털면서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초호진은 그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대찰영이 피 떡이 되어 축 늘어진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네가 만든 그 약이 효능이 떨어진 거냐?"

    "그럴 리가!"

    사우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도대체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초호진은 빈 술병의 주둥이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담천과 사군악도 매우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훈련을 시키는 중이라고 할까."

    사우는 쓰러진 대찰영을 일으키려고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담천을 슥 보며 내뱉었다.

    "훈련?"

    걸음을 내딛던 담천이 멈춰 서서는 되물었다.

    "마성으로 인해 지배되면 인간으로서의 이성은 마비가 되지. 그것은 곧 인간이 아닌 짐승과도 다름없는 게 되는 셈이지. 대화를 통해서 알아듣는 건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짐승처럼 변한다면 매를 들어야 하는 것이야."

    사우 본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대찰영이 다시금 발작을 한 데에는 그가 준 약의 효과가 있었다.

    예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사우가 제조법을 바꿨기 때문이다.

    당연히 약의 효능으로 강한 무공을 펼칠 때도 무리가 없었던 대찰영의 마성이 폭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우는 마인곡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먼저 대찰영을 훈련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투살기라는 내공심법은 익히기가 까다롭고 그 후유증이 크긴 하지만 완벽하게 길들이기만 한다면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었다.

    사우가 생각하기로는 그렇게만 된다면 대찰영은 지금의 열 배 가까이 강해질 수가 있게 된다.

    그래 봤자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 겨우 될 듯 말 듯 하겠지만 말이다.

    "뭐, 뭐야. 왜 웃고 지랄이야!"

    갑자기 혼자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우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머금자 사군악은 흠칫 놀랐다.

    '흐흐, 대찰영 다음은 네놈이다.'

    사우의 눈빛은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삼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달라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사우의 거처가 생겼다는 것 정도? 아니다. 마인곡에 있는 이들과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진 것과 남들 모르게 대찰영의 성취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

    사우는 사군악의 모옥 뒤편에 자신의 거처를 잡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내부는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우는 평소와는 다르게 내부를 스윽 훑어봤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훑어보던 사우는 피식 웃더니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만 나와."

    "오랜만이야, 사우."

    낯설지 않은 음성, 사람을 취하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영롱한 목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결정을 내리기 힘든 뭐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오로지 사우밖에 존재하지 않던 공간에 새하얀 무엇인가가 사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존재하는 얼굴은 새하얗기만 하다. 분가루를 묻힌 것처럼 말이다. 분명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어린 소년이었다.

    피부색과는 상대적으로 새까만 무복을 입고 있었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우는 그 소년을 보며 씩 웃었다.

    "변한 게, 없네."

    "너도 마찬가지야, 사우."

    "생각보다 늦었네."

    "그렇게 됐어."

    사우는 물끄러미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설마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건 아니지?"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불쾌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눈빛으로.

    "뭐, 조금은 그렇게 보이네."

    "하하!"

    소년은 웃으며 사우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야기를 해 볼까. 마인곡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고서 찾아온 거 아닌가?"

    "아니.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오랜만에 왔더니 많은 게 달라져 있더군."

    "모두 죽었어. 싸그리."

    분명 마존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폭발하려는 기세를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행위였다.

    "서준(西俊)……."

    "오랜만이네. 그 이름. 그런데 사우, 그 이름 육 년 전에 버렸어. 아버지와 숙부들을 묻던 그날."

    사우는 순간적으로 마존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얘기 들었어. 그놈이 죽었다며."

    "이풍 그자가 여기까지 찾아왔었나?"

    "그가 그러더군. 곧 네놈이 이곳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이야."

    "망할, 여우 같은 놈."

    "너는 믿는 거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건 안 믿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그 녀석이 살아 있으면 찾으면 되는 것이고 만약 죽었다면 그놈을 죽인 자들을 찾으면 돼."

    "찾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죽는 거지. 내 손에."

    단순명료했지만 결코 쉽지도, 가능성이 높은 일도 아니었다. 천하의 그를 죽인 자들이다. 물론 그가 죽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마존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의 사우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우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지금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죽인 자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그 일에 마인곡의 힘을 빌리려고 직접 찾아왔나?"

    "양심이 없구나, 마존. 과거의 마인곡이라 하더라도 그 힘은 미약하지. 어쩌면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럼?"

    "이풍 그자가 그러더군. 그를 죽인 자들을 알려 달랬더니 마인곡으로 가면 될 것이라고."

    "이곳에 오면 흉수를 알 수 있다?"

    마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

    사우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존의 반응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인곡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물었지."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자들과 관련이 있나 보지?"

    "이풍이 너에게 전한 말에서 진실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다면 말이지."

    사우는 잠시 마존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엄청난 이야기를 하려고 이리도 뜸을 들인단 말인가. 성격 급한 사우가 이내 재촉을 하려던 찰나 마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은 못 참으니."

    마존은 재촉하는 사우의 바람대로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화월선자."

    "……!"

    사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 아버지. 그리고 마인곡에 머물던 서른네 분의 숙부들의 목숨을 앗아 간 이가 바로 화월선자야."

    화월선자!

    이백 년 전 마인들을 모두 섬멸한 말 그대로 전설상에나 전해지는 신 같은 절대자. 그리고 마인곡이라는 장소를 탄생시킨 자이기도 하다.

    "그자가 그러더군, 자신은 화월선자의 후예라고."

    사우는 둔탁한 무엇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그 새끼가 무슨 이유로 마인곡을?"

    "그야 모르지. 어쩌면 화월선자의 후예인 본인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방해가 되는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마인곡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아니. 마인곡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곳이지. 화월선자의 후예라면 가진 힘이 강할 게 분명한데 마인곡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사우의 말에 마존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말은 너무나 직설적이었지만 완벽하게 들어맞는 답이었다. 허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분명 마인곡의 힘은 세상을 흔들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나약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저력을 보여 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생각은 주관적인 점이 많이 내포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화월선자…… 화월선자."

    사우는 화월선자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 무공으로 천하를 아울렀던 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자가 바로 화월선자다.

    "그러니까…… 그 녀석을 그렇게 만든 놈이 화월선자다?"

    "확실한 것은 못 돼."

    "아니. 확실해. 화월선자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남았지?"

    "살려 주더군."

    사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자신감인가."

    "뭐, 그럴지도 모르지. 어린 네놈이 뭘 할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어."

    하지만 사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뭔가 분명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필 왜 마인곡 수장의 혈육을 살려 두었을까. 절대자의 입장에서 단순하게 느끼려는 경계심이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다. 누구보다 가장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자들은 자비심이라는 걸 버려야 한다. 사우가 그에게 배운 것 중 철칙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었다.

    화월선자의 후예라고 하는 자가 그런 점을 허투루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가 있다. 마존을 살려 둔 이유 말이다. 하지만 당장에 그 이유를 알아낼 방도란 없었다. 눈치를 보니 마존 또한 알지 못하는 듯하다. 어쩌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존은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폐관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한 것이 있다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화월선자의 후예를 만나면 그때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숙부들의 무덤 앞에 그놈의 피로 원혼을 달래 줄 것이라 수천 번도 더 다짐했다.

    사우는 생각을 정리하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설마 그 녀석…… 혼자 마인곡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

    마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꽤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혼자의 몸으로 마인곡의 무인들을 도륙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현재 사우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로써 사우는 그가 화월선자의 후예가 확실하다는 걸 실감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자로 꼽히는 무림맹주도 마존의 부친에게는 현저히 부족한 실력임을 감안했을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나 이름밖에 들어 보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그와 맞붙을 상상을 하니 온몸의 피가 주체를 하기가 힘이 들었다.

    "설마 네가 여기저기서 주워 온 저 녀석들로 화월선자를 상대할 생각은 아니겠지."

    "……."

    솔직히 마존은 바로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저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각자의 복수가 끝나면 어찌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 이후부터는 자신이 강제적으로 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마존은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주기로 했지, 자신을 도와 화월선자와의 싸움을 함께하자고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삼 년."

    "……?"

    뜬금없는 사우의 말에 마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기 밖에 나뒹구는 놈들 삼 년 안에 지금의 두 배로 강하게 만들어 놓으마."

    "내가 아는 사우는 남을 가르치는 일에는 흥미가 없을 텐데."

    "사람은 좀 변하는 법이거든."

    "화월선자가 그 녀석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어."

    "아니. 이풍 그자가 마인곡으로 가 보라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리고 이풍은 화월선자의 등장도 알고 있었겠지."

    "네 말대로 저들은 약해. 충분히 강해질 가능성은 있겠지만 너의 능력이라면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을 텐데."

    "그들도 그놈을 죽인 자들과 한통속일지도 모르지. 무서워서가 아니라 쉽게 그런 놈들에게 죽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 개죽음은 당하기 싫거든. 주인을 물어 죽인 개들의 마지막 형벌은 내가 내려 줘야 하거든."

    마존은 사우가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의 형을 얼마나 따르고 존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사실 마존으로서도 충격이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던 그였다. 이 세상 모든 무인들이 달려든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강했고 철저하게 냉정했던 사람이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눠 본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늘 마존에게는 꿈에서도 꾸고 싶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 주곤 했다.

    사우의 모습을 보면 그와는 다르지만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엉뚱하고 돌발 행동을 잘하는 모습은 다르지만 무인으로서의 성장 과정, 그리고 적을 상대할 때의 철저한 계산과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행동력.

    물론 마존은 그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기에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딱 세 번의 만남 속에서 본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우와 소름 끼치게 닮아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사우는 분명 예전과는 기도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이리라.

    자신감에 차 있을 만도 했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이 당신께서 정하신 피의 율법이라고."

    "그리고 넌 그 대를 이어 받아 그 피의 율법을 집행할 생각이고."

    사우가 마존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삼 년이라고 했지? 기대하고 있으마. 그리고 내가 폐관에서 다시금 나왔을 때는 네놈하고도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나오도록 하지."

    "후훗,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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