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章 은원 (4/38)

第四章 은원

새하얀 피부로 인해 사내인지 계집인지를 구분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짙은 눈썹은 길게 뻗어 있었고 콧날 또한 날카로울 정도로 솟아 있었다.

이름 모를 나무와 꽃들이 즐비한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하제량은 냄새만으로도 취할 정도로 향내가 가득한 그곳에 한참을 서 있었다.

"원주, 은조(隱鳥)입니다."

또랑또랑한 여성의 전음이 하제량에게 전해졌다.

하제량은 몸을 돌려 한참이나 떨어진 정원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느긋하게 걷느라 꽤나 시간이 걸렸음에도 그를 기다리는 여인의 움직임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이내 하제량이 정원 밖으로 나왔다.

"무후(武后)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자신을 은조라 말한 그녀의 미모는 굉장했다. 우습지만 사내인 하제량과 같이 있으니 그 아름다움이 깎이기는 했지만 절세미색을 겸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래서 전음을 쓸 줄 아는 무림인들 외에는 대화가 되지 않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은조.

그녀는 하제량의 그림자였다.

비록 여인의 몸이었지만 어떤 사내들보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인물이었다. 또한 하제량의 뜻을 잘 살필 줄 아는 자이기도 했다.

"넌 어찌 생각하느냐."

외모와는 다르게 굵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후라는…… 그녀는 믿기 힘듭니다."

"꼭 그녀뿐만이 아니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모두가 믿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란다."

하제량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사신을 들여보내라."

은조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제량은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 평상시에는 잘 입지 않는 예복을 갈아입고 사신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삼십 대 초반, 인상이 좋고 왠지 모를 여유가 묻어나는 인물이었다.

"패천문(覇天門) 주인이신 철혈대제(鐵血大帝) 철대악(鐵大岳) 문주님의 제자 신도천(申屠天)이라 합니다."

정식으로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한 신도천은 하제량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 그 유명한 묵창(墨槍)이 바로 당신이군요."

사천성에서 묵창 신도천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일단은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는 패천문주의 제자라는 뒷배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무위를 본 자들은 그런 비아냥거림은 생각지도 못한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무후의 사신치고는 꽤나 거물급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하제량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겁니다."

"천기원이라는 곳…… 생각 외의 장소에 있더군요."

"아마 당신이 우리 식솔이 아닌 외부인으로서는 최초일 겁니다."

신도천은 유심히 하제량이라는 사내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외모를 살폈다.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피부는 물론이고 특히 선홍빛 입술은 절세미녀가 울고 갈 정도였다.

하지만 신도천은 하제량의 눈빛에 살짝 주눅이 든 상태였다. 뭔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하제량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된 느낌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자신의 속이 모두 하제량이라는 사내에게 빨려 들어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역시 천기원의 주인이 된 사내답구나.'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천기원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집단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천기원이라는 곳이 전설상에만 존재하는 단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수 있었다.

그만큼 신비에 가려져 있는 곳이 바로 천기원이다.

사실 신도천은 지금 자신이 천기원주와 마주 앉아 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지 않았다.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차 한잔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제량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비가 끓인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드시죠."

신도천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채 식지도 않은 그 뜨거운 것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어 버렸다.

혓바닥과 입안 전체가 뜨거운 온도에 데어 버리는 건 물론이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신도천의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을 상대방이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본 하제량 또한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아십니까. 믿던 동료에게 배신당한 기분을. 지금 제가 뜨거운 찻물을 들이켰을 적에 느꼈던 고통은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사마련의…… 원한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뇨. 사마련 이전에 패천문의 감정입니다."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모습이 하제량의 눈에 들어왔다.

패천문 문주의 제자 신도천.

그가 왜 이토록 흥분하는지 하제량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천하를 아우르는 남북천맹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 방파들이 합친 연맹의 개념이었다.

패천문 또한 과거에는 남북천맹이라는 이름 아래에 존재했었다. 사천성을 지배하는 거대 방파 패천문의 위상은 남북천맹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세했다.

특히나 패천문주 철대악과 남북천맹의 맹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이십 년 전 패천문이 남북천맹에서 퇴출당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사이는 극히 멀어졌다.

동료였던 자들의 배신이라는 신도천의 말은 바로 그것을 뜻했다. 권력을 누리던 자리를 박탈당한 패천문은 서서히 그 힘을 잃어 갔고, 심지어 남북천맹에 소속되어 있는 문파들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일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천하와 싸움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사천성에서 가장 강한 네 개의 문파가 연합 체제를 구축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마련이었다.

비록 그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천기원이 생겨난 이래 단 한 차례도 어떤 집단에게 힘을 실어 준 적이 없습니다."

"사마련은 천하를 상대할 작정입니다."

"글쎄요. 상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죠. 허나, 천하를 아우르는 남북천맹을 이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천기원 수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절대적인 진리였다. 신도천은 이를 악물었다.

"한심하군요. 겨우 천기원주라는 자가 이토록 담이 적은 자였다니."

신도천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하제량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어떻게 보면 싸늘하기까지 한 그의 눈빛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개소리! 당신은 지금 겁에 질려 빌빌거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신도천은 냉정을 잃어버렸다. 하제량의 변하지 않는 모습,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그의 화를 돋우기 충분했다.

하제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아니면 처해진 현실에서 도망치고픈…… 뭐 지금의 전 그런 셈이죠."

순순히 인정했다.

현재 하제량은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조부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숨은 원흉을 잡지 못한 채 흐른 며칠 동안은 마음의 부담이 더해졌다.

원주의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어 자신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떠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조부와 부친을 죽게 한 원흉을 잡아야만 한다.

허나 천기원주의 자리는 너무나 벅차고 무겁기만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그 자리는 하제량을 하루하루 지치게 만들었다.

원주의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고 아집이었다.

매 순간마다 고집이 흔들렸고 신념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무후를 직접 만나 보도록 하죠."

"직접 말입니까?"

"천기원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리면 안 되겠죠."

말투에서는 아직도 사마련을 믿지 못하겠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자신의 일은 어느 정도 끝을 냈다고 생각이 들었다.

무후가 만나 줄지는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천기원주가 직접 나선다는 말은 어느 정도 희망이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하제량은 신도천을 물리고 은조를 불렀다.

"직접 중원으로 향할 것이다."

"무후를 만나시려는 건가요."

"사마련의 힘을 느껴 보고 결정을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흑혈대(黑血隊)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전원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

은조는 의외의 발언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사라졌다.

"이름이 사우라 했던가."

* * *

"……."

사우는 한참이나 어느 한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푹.

다친 상처를 압박하고 있는 붕대를 아무 생각 없이 눌렀다.

"아프냐."

"끄어억!"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던 하욱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욱이 조금만 이성적이지 못했다면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허약하기는."

하마터면 팔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할 뻔한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사우는 매정하게도 말 한마디로 하욱을 약골로 만들어 버렸다.

"이봐."

"말씀하십시오."

방 안에는 사우와 하욱 둘뿐이었다.

용수채 전원이 몰살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너와 네가 데리고 다니는 계집 말이야."

"초미 아가씨입니다. 계집이 아니라."

"뭐, 그건 내가 알아서 부를 일이고."

역시나 답이 없는 사내였다.

"이틀 전 그 녀석들이 달고 있던 깃발 용수채 맞나?"

"알고…… 계셨습니까?"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사우라는 사내가 말하니 불길했다.

"수왕이 왜 너희를 죽이려 한 거지? 무슨 원한 관계라도 지었나."

"……."

하욱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언제까지 숨길 건지 궁금한데? 네놈이 속해 있는 단체가 녹림총련이라는 사실 말이야."

"……!"

하욱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뭘 그래 놀래. 그리고 녹림이 뭐 그리 대단한 뒷배경이라고 숨기고 지랄이야."

"어, 어찌 아셨습니까."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거든. 나란 놈은 말이야. 네놈하고 그 계집 주변을 주구장창 따라다니는 놈 중 하나를 골라 가지고 좀 놀았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그 모습이 순진무구하기까지 했다.

녹림총련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그의 말투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녹림총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내인지 의심이 갈 만한 말이었다.

녹림총련에 속해 있는 이들만 모두 모이면 일만이나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인원수만큼은 놀라운 수치였다.

유명한 무가나 중소방파에서 녹림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머릿수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사내는 개념이라는 게 박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녹림지존과 수왕의 대결이라……."

사우의 중얼거림에 하욱의 안색이 나빠졌다.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왕이 직접 초미 아가씨를 납치하려 한 사실이 전 아직도 믿기 힘들 뿐입니다."

"네놈 주인에게도 이 사실이 전해졌을까."

"그럴 것입니다."

"피바람이 불겠군."

"막을 수만 있다면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미 한참이나 늦었지. 용수채가 그리됐으니 말이야."

그랬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 버렸다.

현재로서는 몸을 추스르고 녹림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었다. 함부로 밖을 나갔다가는 언제 어디서 적이 보낸 살수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응?"

"그때 사우 공자와 대찰영 대협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물론 초미 아가씨마저 큰일 났을 겁니다."

"대협은 무슨. 그 새끼 별호가 혈귀도마야. 정신 차리라고. 그런 놈에게 무슨 대협이야.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놈 때문에 아주 골치 아파졌어. 벌써 주변에는 품속에 칼을 들고 있는 놈들 천지인데 말이야."

하욱이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왕의 수하들이 벌써 들이닥쳤습니까?"

"아, 아.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단지 동태를 살피기 위한 애들인 것 같으니까. 그것보다 혈귀도마 그 자식을 쫓는 무리가 많아."

"현상금이 크게 걸려 있으니까 당연하겠지요."

"얼만데."

"황금 백 냥으로 들었습니다."

"멍청한 놈. 겨우 그 정도 몸값밖에 되지 않네."

사우는 혀를 찼다. 혈귀도마는 딱 봐도 그 다섯 배가 넘는 액수가 걸려도 잡지 못할 자였다. 익힌 마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진바 능력이 가공할 만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참이냐."

시큰둥한 얼굴로 건네기에는 그 질문의 무게가 무거웠다.

앞으로 어찌한다.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문제는 있는데 답이 없는 꼴이었다.

"수왕이 직접 나설 수도 있습니다."

친형제보다 소중히 여기던 친우가,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 가만히 있을 수왕 원상이 아니었다.

"수왕이 무섭나?"

"물 위가 아니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자가 바로 원상이라는 자입니다. 수년 전 본 적이 있죠. 그가 직접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

"실로 대단했습니다. 일대일 비무를 한다면 제 주군이신 녹림지존께서도 상대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호오."

의외의 말에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사우의 눈에 이채로운 빛이 번뜩였다.

명색이 녹림의 지존이었고 방금 그런 말을 한 하욱은 그의 수하였다. 그것도 측근이었다. 그런 그가 수왕 원상을 칭찬할 정도면 상당한 강자임은 확실했다.

그래 봤자 애들 칼 놀이 하는 정도겠지만 말이다.

"중원에서 순수한 실력만으로도 스무 명 안으로 들어가실 겁니다."

진지한 그의 말에 사우가 킥킥거리며 적나라하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한낱 수적들의 왕인 자가 중원 무림에서 스무 명 안에 드는 강자라는 하욱의 말은 시답잖은 농담에도 섞이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수왕 원상에게 무공을 가르친 자의 이름이 여곤(呂滾)입니다."

"여곤?"

"여곤이라는 자 이름 앞에는 항시 야수마황(野獸魔皇)이라는 별호가 붙지요."

"야수마황…… 야수마황이라."

사우는 어디선가 들어 본 그 명칭을 되뇌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검무제 율천세의 스승, 야수마황 여곤."

"맞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이지요. 현 남북천맹의 수장 율천세와 원상은 사제지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동문수학을 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여곤이 율천세를 가르친 다음 여기저기를 떠돌다 원상을 제자로 삼은 듯싶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하욱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야수마황 여곤은 그 신분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지만 수십 년 전 중원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의 원상을 제자로 삼았고 천검무제라 불리는 율천세와 사제지간이라는 건 정말이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사우에게는 그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감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남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간이 바로 사우였다.

'마인곡 한 번 찾아가기 더럽게 힘이 드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천기원주 하조천이 약속만 지켰어도 이런 일에는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한 혈귀도마 대찰영을 찾아야 했던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수왕이 어쩌고 녹림지존이 어쩌고 하는 일에는 휘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지금이라도 확 혼자서 떠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오래 끌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찰영과 함께 마인곡으로 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자."

"예?"

뜬금없는 사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하욱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가자고."

"어, 어딜 말입니까?"

"북쪽."

"……!"

사우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창가를 가리켰다. 실제로 그 방향이 북쪽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불길한 눈길로 사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안 됩니다, 북쪽은."

"미쳤어, 하욱?"

"제…… 제 뜻이 아닙니다."

대찰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하욱을 노려본다. 하욱은 그런 그녀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사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북쪽은 안 됩니다."

사우가 제안한 북으로 방향을 잡자는 의견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쪽은 수왕의 본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가야 할 방향은 동쪽이었다.

살고자 한다면 그래야만 했다.

'후우.'

하욱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도저히 이 사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자 같았다.

둘 중 하나였다.

백치던가 아니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몽상가이던가.

혼자서도 수왕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고 북쪽으로 가고자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미친 의견을 내놓고 짓는 표정은 왜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이 새끼. 자꾸 얘 네랑 엮이려고 그러는데 적당히 해라."

"……."

대찰영은 사우의 전음을 듣자마자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며칠 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왕채를 만나기 전 자신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다음 날이었다.

"너…… 마인곡에서 왔냐."

"……!"

대찰영은 소름이 끼쳤다.

마인곡은 전설상에나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장소 금단의 영역이었다.

절대 자신이 그곳에서 나왔다는 걸 아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게 세상에 퍼진다면 자신은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럼 복수도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사내의 음성은 세상 그 어떤 이의 것보다 음산하고 두려웠다.

이 사내가 왜 마인곡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두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숨겨야만 했다. 그나마 실내에는 자신과 사우라는 사내뿐이라서 다행이었다.

배 위에서 마성에 젖은 자신을 기절시킨 존재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네놈이 마성에 젖으면 막을 자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담천의 말이었다.

그래서 대찰영은 수틀리면 사우라는 사내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었다.

퍼억!

허리 쪽에 묵직한 통증이 울렸다.

몸이 휘청거렸다.

"사람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인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마인곡이 대체 어딘지 내가 어찌 아느냔 말이오."

"쯔쯧, 연기가 어설퍼."

사우는 다리를 꼰 채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대찰영을 올려다봤다.

능글맞은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대찰영은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제안 하나 할까."

여전히 웃고 있는 사우의 말이었다.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지는 그 마성을 억제시켜 줄 방법을 알고 있는데."

"하하! 지금 날 바보 천치로 아는 것이오? 겨우 그따위 말로 나를 설득시키려 하다니."

"마인곡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사우는 귀를 후비며 말했다.

"……!"

대찰영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난 마인곡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다."

"난 마인곡이 어디 있는지 모르오."

"그래?"

"그렇소."

사우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알 때까지 처맞는 수밖에."

그때 사우의 모습은 대찰영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얼굴로 남게 되었다.

아직도 그날 얻어맞은 걸 떠올리면 대찰영은 몸서리를 친다. 어찌 그렇게 표 안 나게 구석구석 아프게 때리는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이 사내와 눈을 마주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냥 한없이 작아지고 주눅이 들었다.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인곡으로 직접 안내해 줘야만 했다.

나름 위안을 해 보자면 목숨(?)도 구하고 마성을 억제시키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이 사내가 그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인곡은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혼자서 찾아갈 수가 없으니 약속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초미라는 여인과 그의 수족으로 보이는 사내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모친의 유품을 자신이 잃어버렸다.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녀가 슬픔에 젖었다면 그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안전해질 때까지 보호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사우라는 사내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마인곡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 좋지도 않은 곳을 찾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자."

하욱이 사우에게 물었다.

이제 이 사내와 대찰영이 곁을 떠난다면 많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두 사내가 없었다면 벌써 이틀 전 자신은 물론 초미의 안전에 이상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욱은 절대로 이 두 사내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실 사우로서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왕 원상의 사부가 누구인지를 알았거나 몰랐거나 상관은 없었다.

자신감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북쪽으로 가고 싶지만 방향을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초미와 하욱을 떨어트려 놓으려면 녹림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물론 자신이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잔뜩 쫄아 있는 빌어먹을 대찰영 때문이었다.

초미는 불안감으로 인해 하루 종일 끼니를 걸렀다.

그녀로서는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혼이 날 때 느꼈던 그런 느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용수채의 채주 유우량의 수하들을 만난 직후부터 느낀 마음의 불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모습들을 직면하니 그 이후부터는 평소처럼 행동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깊은 좌절감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하욱이 죽을 뻔한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을 지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켜 주지 못하는 본인의 무기력함은 우울증으로까지 번져 갔다.

비록 겉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본 하욱은 그녀가 얼마만큼 괴로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혼자 이겨야만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초미는 혼자만의 외로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낯선 여행도 좋지만 자신으로 인해 하욱이 부상을 당하자 언제까지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여행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을상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어이, 꼬마."

고개를 돌려 볼 것도 없이 바로 사우라는 인간의 음성인지를 알았다. 묵직하니 기품 있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가진 그였지만 하는 말마다 가볍고 거칠어서 별로 좋게 생각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요."

그래도 명색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녀라도 함부로 반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기 저 녀석 팔이 왜 저렇게 된 것 같으냐."

"……."

너무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초미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선두에서 대찰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그의 등으로 초미의 시선이 머물렀다.

뭐랄까. 뜬금없지만 갑자기 하욱의 등을 바라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했다. 오빠처럼, 삼촌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지내 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 때문에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주 그래 왔던 것 같았다.

자신이 벌인 사고를 그가 항상 수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쌀쌀맞게 대하고 한 번도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놈이야."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갑자기 이 사내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곁에 있다는 건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라고 해 두지."

사우의 손이 초미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평상시 같으면 앙칼지게 소리치며 뭐라고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혹여나 지금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사우는 잠시나마 과거를 떠올렸다.

분명 자신에게도 지금 초미라는 아이가 느꼈던 좌절감이나 자괴감을 뼈저리게 느꼈던 나날이 존재했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초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것뿐이다. 누구보다 그 감정을 잘 알기에 말이다.

사우에게도 어린 시절 초미에게 하욱처럼 그런 존재가 따랐다.

그는 사우가 태어난 직후부터 함께했었다. 사우에게 그라는 존재는 아버지 이상이었다. 늘 친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사우는 항상 외로웠다.

형에게 무공 수련을 가르친 노고수들은 사우에게 입버릇처럼 말해 오던 게 있었다.

'형님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더 수련을 가하십시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십니다. 공자께서는 더욱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언제나처럼 비교 대상이었다. 형이란 존재는.

태어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율적인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해서 무공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남들을 해치고 싶은 생각도, 그런 걸 배워서 최고가 되어야 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형과 그들은 강해져야 한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기 바빴다.

어린 사우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에 목말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남을 죽이는 법을 공부했고,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곧 무서운 체벌이 가해졌다.

그렇게 온통 강해지라는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반항도 쉼 없이 해 왔었다. 그럴 때마다 사우의 옆에 수족처럼 존재하는 그가 피해를 봤다.

수련을 게을리할 때마다 또는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타나지 않는 횟수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그라는 존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우는 그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몰랐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일들을 자신에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 년 정도가 흐르자 사우는 태어나 한 번도 나가 보지 않았던 바깥세상을 탐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먹은 이상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성격이었기에 사우는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나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도 함께했다.

설레고 흥분된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형의 수하들이 사우를 잡으러 왔고 그를 무참히 도륙했다.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도 있구나, 라는 걸 그제야 사우는 배우게 된 것이다.

늘 함께 있어서 몰랐던 그의 죽음은 성품을 바뀌게 했다. 행동을 바뀌게 했다. 그를 그토록 죽였어야만 했는지 형에게 따지지도 못했다.

형이 무서웠다.

인간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가 무서워 숨어들었다. 소중한 이의 생명을 앗아 간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어린 시절 사우는 그랬다.

그리고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형이라는 산을 넘겠노라고.

그만한 강함을 얻겠노라고.

그래서 그의 죽음을 형에게 따지겠노라고.

힘이 없으면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족쇄가 채워진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괜한 과거가 떠올랐다고 투덜거린 사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영원히 잊지는 못하겠지만 연연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한 상념에 민망한지 사우는 바닥의 돌을 하나 걷어찼다. 누군가를 맞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퍼억!

그런데 누군가의 머리에 맞았다.

"어떤 자식이야!"

바로 대찰영이었다.

안휘성 구화산을 시작으로 강서성 남창까지의 목적지를 둔 거대 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가던 방향인 남창으로, 또 다른 행렬은 호북성과 호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섬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십 년 만인가?"

초웅천의 머리카락이 바람으로 인해 어지럽혀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바람을 느끼는 듯했다.

"너무 본채에만 머무신 듯하십니다."

그의 옆에 있던 투호, 손평(孫平)이 말을 받아쳤다.

"그런가."

초웅천은 오랜만에 나오는 외출임에도 불구하고 얼굴빛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왜 그랬을 것 같으냐."

긴 행렬의 길이는 상당히 길었다.

족히 육칠백 정도의 인원이었다. 그 선두에는 초웅천과 투호 손평, 그리고 한 사내가 이동을 이끌고 있었다.

"뭔가…… 수왕을 뒤에서 지휘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새하얀 백색 무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의 말이었다. 무복과도 어울리게 피부색이 남자치고는 뽀얗고 인상적인 외모를 꼽자면 코 모양이 매부리코라는 것이었다.

설호(雪虎) 신도명(申屠明). 삼십 대 초반으로 오호장 중 한 명이었다. 신도명은 투호 손평보다는 나이가 어렸고 하욱보다는 많았다.

오호장에서 서열은 둘째였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여 초웅천이 아끼는 수하 중 하나였다.

"만약 있다면 그자는 실로 무서운 자이다."

"하지만 현재 본련과 적대시할 만한 무림 단체는 존재치 않습니다."

신도명의 말에 초웅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 딸아이를 노리는 일을 벌일 정도면 웬만한 자들은 아닐 터. 게다가 수왕을 이용할 정도면."

초웅천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십 년 만에 본채를 떠나 그것도 이 정도의 인원을 데리고 출사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그는 딸아이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하욱과 그 주변에 있는 수하들로부터 만날 약속 장소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채를 출발하여 나뉜 행렬은 오호장 중 셋째인 마호(魔虎)가 팔백 명이라는 인원을 이끌고 수왕의 본채를 치기 위하여 떨어져 나갔다.

용수채가 전멸했다. 녹림지존의 딸을 건드린 대가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초미의 주변에 있던 두 사내 때문이라고 들었다.

덕분에 딸아이는 무사했지만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은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상황이었다. 앞뒤 사정을 모르지만 녹림은 수왕을 용서하지 못한다.

지존의 딸을 납치하려 한 것은 전쟁의 선전포고와도 다르지 않았다.

전면전은 불가피하게 된 상황이란 말이었다.

딸아이를 무사히 품에 안으면 바로 전쟁을 벌일 작정이었다. 초웅천의 눈빛에는 결연함마저 보였다.

믿었던 의동생의 배신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꼈던 동생이 바로 원상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초웅천과 투호, 설호가 선두에 서 있는 무리는 강서성 남창이라는 도시를 목적지로 잡고 있었다.

사우 일행은 강서성 남창에 이틀째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마른 체격과는 다르게 무지막지하게 입안으로 음식물을 집어넣는 사우.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걸신들린 듯이 접시를 비우는 대찰영의 모습은 묘하게 비슷했다. 그리고 잘 어울렸다.

초미는 입맛이 없는지 젓가락질 몇 번을 하고는 말았다. 하욱도 마음이 불편한지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안 먹을 거냐."

사우가 옆에 앉은 초미의 음식을 눈독 들였다.

초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사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빼앗아 가 버렸다.

'후우.'

하욱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가뜩이나 끼니를 자주 걸러 초췌해져 가는 초미였는데 그걸 빼앗아 가니 울화통이 치민다.

"그래도 좀 드셔야 합니다."

"됐어. 괜찮으니 하욱이나 많이 먹어."

며칠째 힘없는 모습의 연속이었다.

대찰영은 소면의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두 사람을 곁눈질로 살폈다.

"정말 녹림지존이 소녀의 부친이십니까?"

대찰영은 바로 어제 그녀의 친아비가 초웅천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꽤나 놀라웠기에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왜 무섭냐. 사실 얘가 귀가가 늦어진 건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네가 남의 물건을 훔쳐 갔으니까 쟤가 집으로 못 돌아간 거 아니야."

"비약이 너무 심하십니다."

사우는 대답 대신 잘 소화되었다는 증거로 트림을 입 밖으로 뱉어 내었다.

'한 놈도 아니고…… 스무 명 정도 되나.'

사우는 물을 입으로 밀어 넣으며 주변을 탐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대도시에서 유독 자신들의 존재를 인위적으로 숨기려 하는 자들이었다.

'몇 명은 대찰영 때문이고, 몇 명은 녹림, 또 몇 명은 수왕의 수하들.'

대충 그렇게 세 종류의 인간들이 며칠 전부터 주변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우로서 참기 힘든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며칠 두고는 봤지만 더 이상은 용납하고 싶지가 않았다.

'소화 좀 시키고 올까.'

"조용히 그냥 따라 나와라."

대찰영에게 전음을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별일 아니니까 쉬고 있어. 쥐새끼들 좀 처리하려고."

"……!"

현상금 사냥꾼으로 이름을 알린 지 벌써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북곽(北郭)의 나이는 올해 마흔이 되었다. 처음 무공이라는 걸 배운 곳은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동네에서는 유명한 곳이었다.

재능이 있는 덕분에 그곳이 문을 닫은 후에 홀로 무공을 수련했음에도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삼류는 벗어날 정도로 말이다.

딱히 별호는 없지만 도를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어 스스로를 도귀(刀鬼)라 칭하고 있었다.

그는 강서성에 혈귀도마라는 자가 나타났다고 한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 다섯 명과 그 일행을 뒤쫓고 있었다. 혈귀도마라고 해서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을 멀리서나마 보니 어느새 그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유심히 혈귀도마와 함께 있는 일행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낮이었지만 건물들 사이에 가려진 그늘 사이로 그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런데 창가에 앉아서 밥을 먹던 혈귀도마가 일행 중 한 사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귀는 맞은편 골목에 있던 일행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도귀의 눈빛을 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에서 나와 거리로 나섰다.

그 순간 도귀도 움직였다.

그런데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낯선 사내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의아한 눈길로 위를 올려다봤다.

어디서 봤더라?

얼굴을 올려다보니 낯설지 않았다.

"아……!"

혈귀도마라는 도귀 자신이 잡으려 했던 사냥감의 얼굴이었다.

"커헉!"

거친 손이 목젖을 움켜쥐자 숨이 턱 막혀 버렸다.

게다가 워낙 힘이 좋은지라 그 상태에서 발끝이 땅으로부터 일 장이나 떠올랐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자 도귀의 명줄은 끊겨 버렸다. 너무나 허망하게 말이다.

"바로 다음 놈들 처리한다, 실시!"

빌어먹을 사우의 음성이 들리자 대찰영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거리 곳곳에 숨어든 관찰자들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했다. 일격필살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한 번의 손짓과 발짓으로 그들의 급소를 노렸다. 사우와 대찰영에게는 그들의 숨을 거두는 일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우가 불쾌하게 여기던 쥐새끼들이 어느 정도 처리가 될 즈음 사우는 길을 가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오고 가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자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얼굴만으로는 구별해 내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복장은 남성이 입는, 그것도 무인들이 즐겨 입는 무복이었다.

눈처럼 하얀 무복에 붉은 테두리가 인상적인 부채를 한 손에 쥔 그는 웃고 있었다.

사내의 눈은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반갑습니다."

분명 그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이가 저자임에 틀림없었다.

"네놈…… 누구냐."

사우는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힘의 비해서 작은 양이었지만 중원에 나와 이 정도로 힘을 쓰려고 한 적은 없었다.

"당신을 죽이러 온 하제량이라 합니다."

보는 눈이 많은 도시를 벗어났다.

갑자기 경공을 발휘해 도망치는 사우를 대찰영이 뒤쫓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잡초들만이 즐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사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대찰영을 뒤돌아봤다.

"뭐 하러 쫓아온 거냐. 귀찮게."

"설마 나와의 약속을 깰 참은 아니겠지?"

존대에서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답지 않게 진심으로 분노를 내고 있는 것이다.

"멍청한 놈."

사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대찰영을 쳐다봤다.

그때 대찰영은 갑자기 급변한 공기와 분위기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급작스럽게 주변을 바꿔 놓은 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하다.'

천천히 여유롭게 나타나는 무리의 강한 기운으로 인해 숨이 차올랐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말이다.

"정확히 스물다섯."

사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대찰영은 그 숫자를 듣고 나서 믿기지 않는 얼굴이 되었다.

분명 감싸고 도는 기운은 그 백배의 숫자라 할지라도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넓은 평지에는 서서히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찰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도대체 이토록 강한 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사우의 상태를 살폈다.

'미, 미친놈!'

웃고 있었다. 두려운 나머지 미친 것이리라.

대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렇게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몸은 알아서 챙겨라. 거치적거리지 않게 말이다."

저게 며칠을 동행하며 동고동락한 자에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냔 말이다.

"당신이…… 사우라는 자인가요?"

도시에서 마주쳤던 자가 무리들 가운데서 흘러나왔다.

"하조천의 손자가 네놈이냐."

"제 조부께 들으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런데 말이야. 네놈에게는 할배가 되는 자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치고는 거창하지 않아?"

하제량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조잡한 변명을 하시는군요. 본인의 목숨이 그리도 아까우신가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설마 네놈 조부가 죽은 것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걸로 착각하는 건가? 천기원이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나 보군."

"닥치십시오."

진득한 살기가 하제량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긴장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천기원의 흑혈대는 강하니까 말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는듯했다. 그리고 이내 폭발적인 탄력으로 그들이 덤벼들었다.

"병신같이."

사우는 앞뒤 재지 않고 논리적이지 못한 하제량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하조천이 칭찬하던 그 손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이라고는 하지만, 이백오십 명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정도의 무인들을 키워 내는 건 분명 시간과 엄청난 황금이 든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솔하게 자신을 판단하여 적으로 돌린 하제량의 그릇은 형편없었다.

사우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아서 피해라."

대찰영은 사우의 두 손가락에서 엄청난 기운이 모이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몰리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 네놈이 냉철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수밖에.'

그의 두 손에는 푸른 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청섬멸절(靑閃滅絶)!

피어오르던 푸른 빛이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떠한 비명도 어떠한 소음도 나오지 않았다.

빛이 사라졌을 때 주변은 시체들로 가득했다.

땅바닥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이라고는 사우와 대찰영, 그리고 먼 곳에서 두려운 눈빛으로 떨고 있는 하제량뿐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또한 대찰영도 마찬가지.

'대, 대체 이게 어찌 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지금 저 사우라는 사내가 강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직접 몸으로 느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어나 이런 무공은 본 적도 없거니와 이야기로도 들어 보지 못했었다. 스물다섯 명의 무인들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조리 명줄을 끊어 놓다니.

그것도 대찰영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트린 강자들이었다.

절대로 인간의 경지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하제량도 매한가지였다. 대찰영보다 그의 충격이 더 컸다.

누구보다 흑혈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조부인 하조천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조직이었다. 천기원의 원주가 직접 관리 감독하는 게 흑혈대였다.

그 시간과 들인 황금은 엄청났다.

"하……하하하하!"

기가 막혀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도저히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저 사우라는 사내는 말이다.

미치도록 화가 났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가 치밀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등신 같은 놈. 네 조부가 왜 너 같은 놈을 차기 천기원주의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뭐 그런 논리인가?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라고 네놈을 과대평가하고 뭐 그런 거야?"

사우의 독설이 하제량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혀 들어왔다. 꽂힌 정도가 아니라 살점들을 후벼 파는 뭐 그런 고통들이 밀려 들어왔다.

'천기원이라!'

대찰영은 천기원이라는 단어에 신경이 쏠렸다.

피바람 부는 중원 무림에서 오랜 시간 존재하는 무림 단체. 그리고 천하 곳곳에 눈과 귀가 달려 모르는 것이 없다는 신비문파.

지금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가 천기원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우라는 사내와 연관이 있다는 건 대찰영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조천이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냐."

"……."

모르지 않았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진료를 맡던 의원을 협박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조부를 그리 만든 자가 그럼 당신이 아니라는 겁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네놈은 믿을 것이냐?"

"……."

입을 닫아 버린 하제량을 지켜보며 사우는 혀를 찼다.

'멍청한 노인네. 저런 놈을 손자라고 천기원주의 자리에 앉히다니.'

이미 죽어 버린 하조천의 경솔한 선택에 사우의 불만이 컸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손쉽게 죽어 버렸지만 딱 봐도 검은 그림자들이 뿜던 기운들은 엄청났다.

스물다섯 명이었지만 그 기세는 상당했다.

사실 그들을 상대할 때 청섬멸절을 쓸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일일이 상대했더라도 모두 저리되었을 것이다.

청섬멸절은 가히 절대적인 살인술이었다.

비록 흑혈대를 상대할 때는 가진바 오 할밖에 쓰지 않았지만 그 위력은 천하 그 누구도 이겨 내지 못한다 할 정도였다.

이것은 사우 본인과 그의 형 흑천만이 다룰 수 있는 직계 혈통만이 익히는 무공법이었다.

청섬멸절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행적을 뒤쫓는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고. 스스로가 흑천의 혈육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청섬멸절을 펼쳐 보인 것이다.

하제량은 자신이 하조천을 죽였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이리라. 하제량은 명색이 하조천의 손자, 사우가 독설을 뱉었지만 혈육을 잃은 상태였기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다.

"하조천이 정확히 언제 죽었지?"

"당신이 할아버지를 만났던 그 시각."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도 예측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뭐, 그렇다면 천기원 원주 하제량으로서는 사우를 범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하조천의 관계가 어떻지?"

사우는 마치 심문을 하듯 하제량에게 질문을 건넸다.

하제량은 대답이 없었다.

조부와 저 사내가 어떤 관계인지는 몰랐다.

"하조천은 마령호에게 물려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마령호!"

하제량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정작 어떤 독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령호를 누가 키우는지는 알겠지."

"녹림총련!"

하제량은 두 주먹이 으스러져라 쥐었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어 핏물이 흐를 정도였다.

"설마 그놈들이 하조천을 그리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흐음, 생각보다 꼴통은 아니구나."

하제량은 단언할 수 있었다. 조부인 하조천이 어찌 마령호에게 물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녹림의 정보력으로는 천기원주가 있는 장소를 포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도대체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묘하게도 하제량은 더 이상 사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부정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제량은 자연스럽게 그의 무위를 본 순간부터 그가 거짓말을 할 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한 강함을 가진 채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건 네가 찾아내야 할 일이겠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사우는 하제량의 말을 가볍게 맞받아쳤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을 텐데."

하제량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할아버지가 마령호에 물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몰랐을까, 안 이상은 녹림총련을 가만둬서는 안 되었다.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들이 왜 조부를 건드렸는지, 왜 천기원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 단죄를 내려야만 한다. 그로 인해 그들이 얻어야 할 이익에 대해서 파헤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누구입니까. 그대는."

"누가 하조천의 핏줄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질문을 해 대는군."

사우는 씩 웃었다.

"네놈에게 말해 줄 의무 또한 없거니와 네 조부인 하조천과의 인연을 생각해 오늘은 멀쩡하게 보내 주마. 허나 혹 다음번에도 이런 식으로 싸가지 없이 덤볐다가는 네놈…… 황천길 구경시켜 주는 것만은 내가 약속하지."

눈빛만으로 이토록 기가 질려 본 적이 있던가?

조부인 하조천에게서도 이런 지독한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한 수 배워 갑니다."

하제량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그는 오늘 깨달았다. 그동안 천기원에 갇혀 있으면서 너무나 좁은 시야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비록 심혈을 기울인 흑천대가 전멸했지만 천기원의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녹림의 우두머리가 남창으로 올 것이다. 볼일이 있다면 잘 찾아보도록."

하제량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조부인 하조천도, 그의 위 선조들조차도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천기원은 사우의 형 흑천이 다스리는 '그곳'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하제량이 녹림의 세력과 맞붙는다 하더라도 사우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초미와 하욱은 거치적거리던 존재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녹림지존이 오면 그들과는 헤어지게 될 터이니 속은 시원했다. 다만 전음으로 말한 이유는 대찰영이 들으면 귀찮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쯤 지 아비가 도착해 초미와 하욱을 데리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 가자."

하제량이 사라진 뒤 사우가 대찰영이 있는 곳을 돌아봤다.

그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사우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제량과는 달리 대찰영은 청섬멸절의 기운을 가장 가까운 데서 느꼈었다.

이미 다리의 힘이 풀린 상태였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왜 마인곡으로 가려 하는 것일까. 그 안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일까?

마존 그 자식도 저 인간을 이기지 못하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마성을 멎게 해 줄 약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저 인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대찰영은 심장이 차가워짐을 느껴야만 했다. 사우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땅바닥을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타인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아! 마인곡에 대해서 물어보는 걸 잊어버렸다."

"……?"

하욱과 초미와 식사를 했던 객잔으로 왔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점소이가 그들이 남기고 갔다는 서찰 한 장을 건네줬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갑자기 사라져 작별의 인사를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형식적인 말만이 적혀 있었다.

"제대로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도 못했는데."

대찰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꽤나 상심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런 대찰영의 심사와는 다르게 사우는 연신 거친 말을 내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실수를 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기원의 힘을 빌린다면 마인곡의 위치는 알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다시금 하제량과 연락을 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전무했다.

허나 사우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현재 천기원의 힘으로도 마인곡의 위치를 아는 것이 힘이 드는 게 현실이었다.

"그만 갑시다."

"어딜 말이냐."

"어디긴 어딥니까. 마인곡이지."

"아직 약을 주지도 않았는데?"

거래 조건이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가자는 대찰영의 말에 사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마인곡을 도대체 왜 그토록 가려고 하는 거요?"

"……."

사우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누구 좀 만나려고."

"그러니까 그게 누굽니까."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라 사우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살짝 긴장했다.

"벗……. 꽤나 오래된 벗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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