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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章 혈귀도마(血鬼刀魔) 대찰영(大刹影) (3/38)
  • 第三章 혈귀도마(血鬼刀魔) 대찰영(大刹影)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린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산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속도가 워낙 빨랐지만 잠깐잠깐 멈춘 사이 달빛에 비친 그의 몸은 나체였다. 구릿빛 피부에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거려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내는 한참이나 발정난 개새끼마냥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이내 어느 한곳에서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 내는 그의 어깨는 심하게 들썩였다.

    뜨거워진 육체와 쉬지 않고 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진정이 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빌어먹을, 마존(魔尊)!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같으니라고."

    일 년이면 극강의 능력을 가지게 만들어 주겠다고 살살 꼬드기는 소리에 넘어가 무공을 익혔더니 정신적으로 너무나 망가져 버렸다.

    마공을 익힌 후유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마인곡에서 어떻게 튀어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밖이었고 벌써 그런 지가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지금처럼 마성이 잦아들면 평소처럼 되돌아오지만 언제 또 자신이 아닌 괴물로 변해 버릴지 몰랐다.

    아직도 뇌가 찌릿거린다.

    "내 마인곡으로 돌아가면 그놈의 허리부터 아작 내 버릴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사내는 지속적으로 마존이라 칭한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쉬지 않고 내뱉어 냈다.

    듣는 이가 있었다면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강한 발음이 섞인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게 없었다면 마존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짙은 복수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에게 마존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마성에 젖어 살생을 쉬지 않고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어졌다.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사내는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동굴 입구로 사내는 들어갔다.

    성인 남자 다섯이 들어오면 꽉 차 버릴 작은 공간이 사내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쪽 구석에서 낡은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마성에 정신이 지배당하고 난 뒤면 항상 나체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정신이 있을 때 산 밑으로 내려가 옷을 훔쳐 미리 동굴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사내는 옷들을 모두 입고는 미련 없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는 마성이 완전하게 멈추는 것을 기다렸다가는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시간이 지나야 할 듯싶었다.

    어떻게든 마인곡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 중간에 다시금 정신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두려움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바다를 이용하여 이동을 할 생각이었지만 재수 없게도 매번 포구 근처만 가면 발작 증상이 일어나서 한동안 이 근처에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제는 동정호를 넘어갈 작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마인곡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는 것만이 마성을 잦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어두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전 사내는 가장 빨리 출발하는 배를 타고는 넓디넓은 동정호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망망대해와도 같은 파란빛 물결을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싶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배를 탔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묘한 긴장감과 조급함이 공존하여 사내를 괴롭혔다.

    '대찰영 인생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사내, 대찰영은 뱃머리에 앉아 거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빨을 세게 다물었다.

    그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다.

    그리고 대찰영의 인생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였다.

    대찰영은 사천성(四川省)에서도 도법으로 알아주는 환도문(幻刀門) 장로인 사자도왕(獅子刀王) 대모수(大暮帥)의 독자로 태어났다.

    환도문은 사천성에 뿌리를 내린 지 사십 년 만에 그 일대는 물론 중원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대한 무가로 성장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십오 년 전 갑작스럽게 멸문지화를 당한 이후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 지 오래였다.

    무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대찰영은 특이하게도 무공을 배우지 않았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부친인 대모수의 뜻이었다. 무림인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아들이 관직에 올라 평범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찰영은 무공 대신 이름 있는 서적들을 읽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었다. 대모수는 자신의 가족들은 항상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게 했었다. 그래서 대찰영은 아버지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대모수는 자신으로 인해 부인과 자식이 피해를 입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환도문이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적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충격으로 대찰영의 모친은 일 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린 그는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대장간에서 먹고 자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책만 읽던 그가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범의 자식이었다. 무인에게는 제 몸과도 같은 병기들을 만지작거리는 작업은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큰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빠르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장간 주인이 가르쳐 준 기술들을 습득해 나갔다.

    그 와중에 대찰영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 왔다. 허나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렇게 스물여덟 살 되던 해 '그'가 대찰영을 찾아왔다.

    "복수를 하고 싶으냐."

    볼일을 보고 싶은 마음에 새벽에 깨어서 밖으로 나온 대찰영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기껏해야 약관을 넘었을 것처럼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런 어린 자가 대뜸 자신에게 한 말이 복수를 하고 싶으냐는 말이었다. 그것도 반말로 그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헛꿈을 꾸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대찰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환도문. 대모수가 죽은 이유가 궁금하고, 복수를 할 마음이 있다면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화월객잔으로 오면 된다."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사라졌다.

    대찰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청년의 어린 음성이 환청처럼 떠나질 않았다. 자신이 환도문 대모수의 자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헌데 저 청년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 환도문을 저리 만든 자들이 자신을 해하기 위한 계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살려고 악착같이 버틴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기에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대찰영은 다음 날 청년이 오라고 한 장소로 향했다.

    물론 대장간 주인에게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의 짐과 그동안 모은 돈을 챙긴 뒤였다.

    청년에게는 동행자가 있었다.

    살짝 뚱뚱한 몸매인데다 살짝 찢어진 눈매에 눈과 입이 크고, 코는 낮고 뭉툭한 자였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낮의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가 반짝거렸다는 거였다.

    청년의 뒤에 있던 대머리 사내는 대찰영을 쳐다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굉장히 그 눈빛이 불쾌해 한마디 하려는데 청년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나를 따라 오면 수년, 아니 단 일 년이면 강해진다."

    "……."

    대찰영은 청년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왔다.

    무공을 배운 적도 없고, 배우기에도 늦은 자신에게 일 년이면 강해질 수 있다는 저 자신감 있는 눈빛과 말투는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헌데……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냥 얼굴만 봐도 자신보다는 어려 보이는 자에게 당연하게 존대가 흘러나왔다.

    "나? 그냥 앞으로 마존(魔尊)이라고 부르면 된다."

    청년은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같은 남자를 보며 표현하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대찰영은 그의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안 물어보냐?"

    대머리가 대찰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 이름은 담천(潭泉)이라고 한다."

    마존이라고 부르라던 청년이 등을 돌렸고 담천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보았다. 담천의 등에 거대한 철궁이 메어져 있는 것을.

    "후우."

    그게 벌써 이 년 전 일이었다.

    대찰영은 그때 자신이 내린 결정에 극심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혼자서 과거를 회상하던 대찰영은 선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빛의 속도로 뭔가 자신의 면상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분명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고 피하려 했다. 확실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지만 그건 대찰영의 착각이었다.

    빠악!

    정확하게 콧등을 가격당했다. 무슨 물건인지는 알지도 못했다.

    정통으로 맞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이 몰려와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 준 인물을 찾았다.

    해맑게 처웃으면서 자신의 주변을 알짱거리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씩씩대는 십대 중후반의 어린 소녀였다.

    대찰영은 소녀의 오른발에 신이 없는 것을 보고는 자신을 맞춘 물건이 그녀의 신발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힘이 쫙 풀리면서 잊고 있었던 고통이 다시금 밀려들어 왔다.

    하지만 더 미치겠는 건 자신들의 실수로 고통 받은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저 두 남녀는 말이다.

    "이봐, 청년."

    대찰영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젊은 사내를 불렀다. 허나 쳐다도 보지 않는다.

    사내의 손에는 여자들이 머리에 꽂는 비녀가 들려 있었다.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인 대찰영이 딱 봐도 굉장히 고가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남매로 보이는 저 인간들이 장난을 치는 것에 자신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 시작했다.

    "이봐, 친구!"

    그래도 점잖은 말투로 불렀다. 다만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어이!"

    그래도 대답이 없자 대찰영은 약간 거친 말투를 사용했다.

    "어이, 거기 꼬맹이!"

    젊은 사내가 이죽거리며 다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고 소녀는 그런 남자의 뒤를 쫓았다.

    "저 핏덩어리가 진짜!"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대찰영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몸을 날렸다.

    나무로 만든 배의 바닥을 살짝 찼을 뿐인데 그의 몸이 붕 떠올라 순식간에 젊은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뭐냐."

    "이리 내놔, 사우!"

    젊은 사내, 사우가 달리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자 초미는 급히 그의 손아귀에서 비녀를 빼앗았다.

    사우는 눈앞에서 갑자기 자신의 길을 막아선 대찰영을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살폈다.

    "이 건방진 노무 새끼 같으니라고!"

    대찰영의 입에서는 듣기 거북한 쌍욕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자신이 화가 무진장 나 있다는 걸 상대에게 확인을 시켜 줬음에도 눈앞에 젊은 놈은 멀뚱하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놈의 버릇을 고쳐 주겠노라 다짐했다.

    짜악!

    허나 오른쪽 볼이 화끈거리는 건 바로 대찰영 본인이었다.

    사우는 대찰영이 손을 올린 순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뺨을 먼저 때린 것이다.

    고개가 돌아가고 뒷걸음질 쳐진 대찰영은 순간 당황해 버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복부에 뭔가 묵직한 것이 꽂힘과 동시에 허리가 꺾여 버렸다.

    목구멍 안에서 쓴물이 분비되어 입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동시에 콧속이 시큰해져 왔다.

    이렇게 단순한 주먹으로 배를 얻어맞아 본 적이 언제였을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무공을 배운 자신이 새파랗게 어린 청년의 주먹 한 방에 정신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찰영은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몸을 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사라지는 사내의 등을 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이 춥지는 않았기에 실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자신이 정신이 들었다는 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쪽팔려!'

    대찰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다물었다.

    무공을 배우고 연마한 지는 불과 이 년이 채 되지 않았다. 허나 대찰영의 무공 수위는 일류에 다다라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가 익힌 마공의 특성 때문이었다.

    몸 안에 내공이 없는 자에게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이 생기게 되고 노력 여하에 따라 그 두 배, 세 배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마공이었다.

    투살기(透殺氣)!

    누가 창안해 낸 내공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투살기는 마공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는 그런 내공심법이었다.

    어쨌든 그런 대단한 것을 익힌 자신이 한낱 어린놈의 주먹질 한 방에 기절을 했으니 마존이 아는 날에는 수년 동안 놀림 받을 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찰영은 자신을 이렇게 눕혀 버린 젊은 놈이 평범한 자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감각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피해라, 도망쳐라, 위험하다, 라고 말이다.

    "야, 야!"

    누군가 자신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아찔해졌다. 그 녀석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끼니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쿵쾅거린다.

    "정신 챙긴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 일어나라."

    대찰영은 그 음성이 악마의 그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소름이 끼쳤다. 왜 무슨 이유로 그러한지는 머리로 판단을 내리기는 힘이 들었다.

    "지금 내 손에 쇠몽둥이가 하나 들려 있는데 말이다. 내가 셋을 세기 전까지 눈을 뜨지 않으면 네놈의 거기를 후려칠 테니……."

    사우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대찰영의 상체는 정확히 직각으로 세워졌다.

    정말로 협박이 아닌, 이놈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것이다.

    대찰영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사우는 실내의 문을 열고 밖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사우의 부름에 들어온 이들은 하욱과 초미였다.

    "깨어나셨군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욱이 먼저 인사치레를 건넸다.

    대찰영은 하욱을 살핀 다음 초미를, 그다음에는 사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사우에게 시선이 닿았을 적에는 눈썹이 일그러졌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무명소졸인 하욱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제가 모시는 초미 아가씨입니다."

    대찰영은 다시금 하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육 척은 넘어 보일 듯한 장신의 사내를 올려다보니 목이 뻐근하다.

    얼굴 생김새는 산적 두목같이 생겼는데 말투는 굉장히 정중하다는 게 꽤나 특이한 점이었다.

    "초미 아가씨를 포함해 저희 일행이 대협께 실수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해 주십시오."

    "……."

    하욱이 직접 고개를 숙였다.

    대찰영은 눈만 껌뻑거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요?"

    "악양(岳陽)입니다."

    대찰영의 눈이 뒤집혀졌다. 분명 놀라서 그런 것이다.

    악양이라면 자신이 호북성으로 넘어가기 전 잠시 쉬어 가려던 곳이었고 타고 있었던 배의 목적지도 악양이었다.

    그런데 그 소요 시간이 하루 반나절에서 늦으면 이틀이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은 것이다. 겨우 주먹질 한 방에 말이다.

    대찰영은 그럴 리 없다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저희 일행이신 사우 공자께서 직접 사과를 드릴 것입니다."

    하욱의 시선이 사우에게로 날카롭게 쏘아졌다.

    사우는 그의 눈빛을 피하면서 얼굴을 구겼다.

    "미안하다. 내 성격이 워낙 지랄맞아서."

    "어휴."

    하욱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것도 사과라고 하고 있는 저 인간이 일행이라는 점이 답답했다.

    허나 사과를 받는 당사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혹여 자신이 기절한 이후에 충격으로 마성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허나 그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자신이 한번 마정에 젖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막을 수 있는 자는 전무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배가 침몰했을 것이 분명했다.

    "알, 알겠소. 조금 쉬고 싶으니 그만 방에서 나가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사과를 쉽게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행은 당황스러웠지만 축객령에 그만 방을 나왔다.

    사우와 하욱, 초미는 대찰영의 방에서 나와 자신들의 거처로 향했다.

    그리고 둥근 탁자에 셋이 앉았다.

    "당장이라도 내 물건을 찾고 싶어 혼났어."

    초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잘 참으셨습니다, 아가씨. 그놈은 마공을 익힌 놈입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배 위에서처럼 말썽을 부릴 게 분명합니다."

    하욱은 사실 대찰영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첫 번째로 걱정이 되었던 건 초미였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거나 표정 변화가 생길까 걱정이 많았다.

    하욱은 사우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한편으로는 그가 무섭기까지 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특히나 무림이라는 곳은 기인이사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사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는 그런 존재였다.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이미 경험을 해 봤지만 실제 그의 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배 위에서 대찰영이 폭주를 일으켰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었다.

    짙은 마기는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았다.

    범상치 않은 그 기운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사우였다. 하욱은 단언할 수 있었다. 대찰영이 마성에 빠졌을 때 느꼈던 공포는 자신의 주인을 처음 대면했을 때와 똑같았다는 것을.

    중원 무림에서 강하기로 따지면 스무 명 안에 들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 바로 자신의 주인임을 상기했을 때 대찰영의 무공은 배 위에 있던 이들의 목숨을 모조리 앗아 갈 힘이 있었다.

    그런데 주먹패 우두머리를 했다는 이 젊은 사내는 그런 대찰영을 때려눕힌 것이다.

    아직도 대찰영이 폭주할 당시를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는 하욱이었다.

    "얼굴 닳겠다."

    "아, 죄송합니다."

    몰래 훔쳐봤다고는 하지만 딴생각을 하느라 자신의 시선이 사우를 적나라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사우는 하욱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을 또랑또랑한 눈길로 쳐다보는 초미에게 한 말이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당돌한 질문이었고 어찌 들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종류였다. 하지만 사우나 초미나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예법을 중요시하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다.

    사우는 당황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입가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저자…… 위험한 사내입니다."

    "호남성 일대에서는 현상금까지 걸려 있다지?"

    "그래서인지 주변의 거치적거리는 자들이 따르는 듯싶습니다."

    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뜻 모를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혈귀도마를 쫓는 자들, 그리고 그 외에 떨거지들도 있지."

    하욱은 그 말의 뜻을 바로 깨닫지는 못했으나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초미의 부친이 심어 놓은 수하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하욱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초미의 눈치를 살폈다.

    사우는 그런 하욱의 태도를 지켜보며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귀찮아지겠어."

    "……."

    * * *

    "낯선 놈들과 동행을 하고 있다?"

    중년인은 수하로부터 받은 보고로 인해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가씨를 주변에서 따르는 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사내 둘이라?"

    "예. 그중 한 사내는 한 사흘 정도 전에 배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허, 이 개구쟁이 자식 같으니라고."

    자신 몰래 산을 내려간 딸아이가 걱정이 되어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그였다.

    비록 강한 것으로는 상위권에 속하는 권호 하욱이 따르고 있었고 딸아이 주변으로 심복들을 심어 놓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무림이라는 곳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세상이었기에 더더욱.

    중년인은 방금 보고를 한 사내를 물렸다.

    그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내가 들어왔다.

    "련주를 뵙습니다."

    삼십 대 초반, 육 척 장신으로 골격이 크며 눈썹이 짙고 각진 턱을 지닌 사내였다.

    "어쩐 일이냐."

    부르지 않으면 거의 찾아오지 않던 사내이기에 의구심이 들 만도 했다. 게다가 그가 찾아올 정도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살짝 긴장도 되었다.

    "하욱에게로부터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근처를 따르는 아이들이 아니고 말이냐?"

    "예."

    딸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하욱에게서 직접적으로 연락이 왔다는 말에 중년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해 보거라."

    "초미 아가씨 곁에 붙어 있는 사내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사롭지 않다?"

    하욱은 지닌바 무공이 그리 높은 사내는 아니었다. 그런 그를 딸아이에게 맡긴 것은 그 아이가 자신보다 하욱을 더 잘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욱의 장점이라면 상황 판단력, 위급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과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잘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위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

    하욱이 인정할 정도의 사내가 딸아이 곁에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사내의 이어진 말로 인하여 중년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정도란 말이냐."

    "주목할 만한 인물은 확실한 듯싶습니다. 아가씨께서 쫓고 계시는 혈귀도마와도 한판 붙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그 사내가 압도했다고 하더군요."

    중년인도 혈귀도마에 대해서 소문은 익히 들어 왔던 터였다. 호남성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인, 소문에는 그자가 마인곡이라는 곳에서 튀어나왔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성격상 소문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재밌는 사실은 지금 아가씨와 함께 있는 두 사내 중 하나가 그 혈귀도마라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내가 잡은 것인가?"

    "배 위에서 접전을 벌였다고 내용에 적혀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제 딸아이가 방황을 접고 돌아올 일만 남았으니 말이다.

    "헌데, 왜 이제껏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냐."

    "아직 찾으시고자 하는 물건을 찾지 못한 듯싶습니다."

    "못난 녀석."

    제 어미가 남기고 간 유품이 소중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그것에 집착하는 게 보기 안쓰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사내들 품에서만 자라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이제는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깊었다.

    "하욱은 혈귀도마를 배 위에서 마주할 줄은 몰라 그가 혹시 호남성을 벗어날까 수왕에게까지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흐음."

    장강수로십팔채의 우두머리인 수왕 원상(元常)은 중년인의 의동생이었다. 허나 지닌바 성격이 올곧고 고집이 세어 자신이 탐탁지 않은 일은 그 누가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주지 않는 자였다.

    "그래도 일단은 혈귀도마가 잡혔으니 조만간 돌아오겠지."

    "하욱에게 답을 했습니다. 빠른 시일 안으로 아가씨를 뫼시고 본련으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잘 지시했다."

    "제가 직접 아가씨를 모시러 내려가 볼까요."

    중년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보다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다. 그 녀석은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말을 따르지 않지. 오직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아이다."

    "그런 면은 련주를 쏙 닮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가? 사내아이였다면 내 뒤를 이어 중원 천지 모든 산맥을 다스리는 녹림총련(綠林總聯)을 이끌 아이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녹림총련!

    안휘성 구화산에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을 중심으로 그 일대는 물론 중원의 산맥을 지배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열세 개의 준독립적인 조직들로 세력을 형성한 뒤 이들의 연합으로 조직된 거대 단체가 바로 녹림총련이다.

    그리고 지금 녹색 장포를 차려입은 중년인의 정체가 그 녹림총련의 련주, 그리고 녹림을 총지휘하는 녹림지존(綠林至尊) 초웅천(楚熊天)이었다.

    분명 녹림총련의 미약한 시작은 산적질을 하던 무리들로부터 출발했지만 아주 오래전 초웅천의 선조가 녹림을 지배하면서부터는 일종의 거대 방파로서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어 버렸다.

    덕분에 현재 무림에서 녹림총련을 우습게 아는 자들은 없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 열다섯이 있는데, 그중에 초웅천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봤을 때 그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욕심보다는 딸아이의 행복을 바랐다. 그래서 그 아이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길 원했고 말이다. 물론 초웅천이 아버지라는 이유로 완벽하게 평범해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초웅천은 그녀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밖으로 떠돌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벌써 몇 번의 마찰이 있기도 했다.

    그러다 제 어미의 기일을 어찌 알고는 어머니의 묘를 찾아가겠다고 나섰다. 말릴 수는 없었다.

    어미의 기일을 챙기겠다는데 어찌 말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믿을 만한 하욱을 붙였고 그 주변으로 실력 있는 수하들 여럿에게 미행을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물론 그 아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무림이라는 곳이 워낙 험하여 불안해서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초웅천은 사내가 전해 준 소식에서 대부분을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딸아이의 옆에 있다는 혈귀도마를 잡았다던 그 사내에게만큼은 호기심이 생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무인으로서 가진 특유의 직감이라고나 할까.

    "흐음……."

    녹림지존이라는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너무나 선해 보였다. 농사나 지을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봐, 투호(鬪虎)."

    련주인 초웅천이 아끼는 다섯 사람을 오호장이라 불렀다. 다섯 호랑이, 그중 실력으로 첫손에 꼽히는 사내가 바로 초웅천과 대화를 나누던 자, 투호였다.

    "예, 련주."

    "그자 말이야. 혈귀도마를 이겼다는 그 사내에 대해서 좀 알아보거라."

    "명을 받듭니다."

    그가 물러난 뒤에도 초웅천은 쉽게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 * *

    "귀찮아졌네."

    사우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살살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나를 잡으러 온 자들이란 말이오?"

    대찰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건 둘째 치고 지금 저희가 배 위에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욱은 난색을 표했다.

    작은 선박 하나를 구해 북으로 넘어가던 그들은 수적들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일단은 저들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인데.'

    사우와 혈귀도마에게는 모시는 초미 아가씨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정확하게는 초미의 뜻이었다.

    사실 초미 아가씨의 신분을 말하기만 한다면 또는 지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적들의 간부가 자신을 알아본다면 주목을 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욱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 주변을 에우고 있는 열 척의 선박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용수채(龍鬚寨)!

    새하얀 바탕에 갈색 빛이 감도는 수실로 박힌 글자에는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맙소사!'

    하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똥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장강수로십팔채에서 수왕 원상의 측근 중 하나인 수풍도(水風刀) 유우량(柳祐良)이 이끄는 휘하 세력이 바로 용수채였다.

    열여덟 개의 채주들 중 그 지위가 세 번째로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용수채가 직접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은 하욱에게 심각하게 다가왔다. 혈귀도마가 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은 본인이었지만, 수왕 원상은 자신이 내키지 않으면 그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자였다.

    아무리 의형이자 녹림총련의 련주인 초웅천의 수하인 자신이 부탁하였고, 그것도 련주 딸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원상이라는 사내는 수하를 아끼는 마음이 애틋하다고 익히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속하는 용수채를 움직일 정도로 혈귀도마를 잡아야 할 이유는 그에게 없었다.

    '불길하다.'

    냉철한 판단력은 분명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너무나 위험했다. 배 위에서의 경험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일류를 넘어섰을 것이라 예상되는 사우와 혈귀도마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들 또한 수전은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었다.

    반면 저들은 수전의 능통한 자들, 괜한 반항은 엄청난 피해를 입기에 충분했다.

    하욱은 지금의 사태를 어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수왕이 단지 혈귀도마를 잡아내기 위한 그래서 용수채를 움직인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용수채의 채주 유우량은 자신의 병기인 대도(大刀)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 때문인지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녹림과의 전쟁이라…….'

    사십 대 초반의 그는 학문을 익히는 선비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절대로 물 위에서 타인의 목숨을 끊거나 물건을 빼앗는 수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헌데 눈빛만큼은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깡마른 체격이지만 병기는 제 몸의 두세 배는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도를 들고 다닌다.

    '누굴까.'

    그는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도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려봤다. 눈 밑에 드러난 흉터와 살기 띤 눈빛만 아니라면 참으로 평온한 인상이었다.

    '누가 수왕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수왕 원상이라는 자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유우량 본인이었다.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배 위에서 세상의 빛을 본 두 사람이었다.

    형제? 아마 친혈육보다 더 깊은 정을 지닌 것이 사실일 것이다. 두 사람을 아는 자들조차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인격이 갖춰지기도 전부터 알던 원상이었다. 비록 현재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의 우정이었다.

    눈빛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알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지,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말이다.

    녹림의 주인 초웅천의 수하 오호장의 권호 하욱에게서부터 받은 서찰을 본 원상이 명령을 내렸다.

    '가서 녹림의 계집, 그리고 하욱을 산 채로 잡아 와라.'

    그때 원상의 눈빛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용수채는 자신이 거느리는 무리였지만 수왕 원상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본채를 떠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원상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이백이나 되는 수하들을 직접 이끌고 남하했다. 그리고 하욱과 그가 모시는 초웅천의 딸아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루 반나절, 드디어 사냥감들이 나타났다.

    북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수로에 대기시켰던 절반의 수하들이 가지고 온 소식이었다.

    물 위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가 바로 원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수왕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붙여 준 것이고 말이다.

    그런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는 인물이나 단체가 과연 몇이나 존재할까.

    유우량은 수하들이 초미라는 계집과 하욱을 데리고 오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현 무림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단체는 단 하나였다.

    천검무제(天劍武帝) 율천세(律天世)가 맹주의 자리에 있는 남북천맹(南北天盟)이었다.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거대한 군림세력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실질적으로 당금 무림은 그들이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중소방파들은 모두가 남북천맹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고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뜻을 펼치려고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남북천맹의 압력이 들어갔다.

    일백 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지배자를 넘어서 보겠다고 머리를 일으켰던 문파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처참하게 짓밟히기 일쑤였다.

    남북천맹이 생겨난 지 근 오십 년 동안은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그 안에서 수천수만 명의 은원관계가 파생되어 왔고 덕분에 무림은 혼란한 시절을 보내 왔다.

    하지만 거의 십오 년 동안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물론 작은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문파 간의 전쟁은 없었다.

    '남북천맹은 아닐 터.'

    유우량은 원상에게 접근한 검은 그림자가 남북천맹이 아니라는 데 확신을 두었다.

    천하를 아우르는 그 거대한 단체는 자신이 속해 있는 장강수로십팔채는 물론 많은 인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녹림을 거들떠도 보지 않아 왔었다.

    물론 수왕 원상도 그들과 적대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피하며 지내 오기 바빴다.

    "채주, 아이들이 오고 있습니다."

    부채주의 음성이 들려오자 유우량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하들이 보였다.

    "반항은 하지 않겠다?"

    그의 눈이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오호장의 권호라면 지닌바 무공이 얕지 않은 자였다. 이미 예전에 그의 실력을 경험한 바 있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욱을 포위하러 갔던 아이들이 모두가 멀쩡했다.

    그것은 하욱이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다는 걸 뜻했다.

    두 가지 추측을 내릴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존재가 무공을 익히지 않고 있는데다가 여인이라는 것이 약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원상이 자신들을 산 채로 잡을 것을 명령했다는 걸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용수채의 깃발을 봤다면 어느 정도 예감은 할 수 있겠지만 수왕과 녹림지존 초웅천은 의형제 사이였기에 그런 의심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수하들에게 별다른 피해가 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유우량의 시선이 하욱과 그의 옆에 있는 소녀를 지나 낯선 두 사내에게로 향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낯선 사내들이 동행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할 정도의 인물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 자들이었다면 이렇게 순순히 끌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까지 끌려가기만 할 거야."

    언덕 위에 유우량의 모습과 그의 남은 수하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하욱에게 사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배 위에서는 한판 붙자는 사우와 대찰영이 성화를 부렸지만 배 위인데다가 초미의 안전을 위해 하욱이 반대를 하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우는 하욱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성격 같아서는 대찰영의 뒷덜미를 잡아서 무작정 목적지를 향해 가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대찰영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출발을 하기 전, 성격 급한 사우가 대찰영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배 위에서 자신에게 한 대 맞은 이후 충격으로 마성이 폭발하여 자신이 다시 막아선 것을 말이다.

    물론 단둘이 있을 때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욱과 초미로부터 대찰영은 왜 그들이 혈귀도마를 찾아 헤매었는지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찰영은 초미가 찾는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빼앗을 당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번 마성에 젖으면 당시의 기억들은 잊어버리게 되고 입고 있던 옷들마저 다 걸레 쪼가리가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당연히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전후사정을 모두 들은 대찰영은 깊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미는 의외로 훌훌 털어 버렸다.

    찾을 수 있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만 빼앗은 사람이 그 물건을 어디에 둔지 모른다면 그건 찾을 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불가능한 일에 집착을 하는 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배우지 못한 행동이었다.

    비록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성격상 아픈 일은 쉽게 털어 버리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그래서 초미와 하욱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조금 더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그리고 사우와 대찰영은 자신들만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북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헌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수적들에게 포위를 당한 것이다.

    그때도 사우는 대찰영만을 데리고 도주를 하려 했지만 초미에게 빚이 있는 대찰영의 고집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대항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하욱의 말대로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다칠 것을 대찰영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욱은 불안한 눈빛으로 유우량을 바라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뱃사람으로 사는 삶과는 다른 얼굴을 지녔다고 생각이 들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뭘 말인가."

    묻는 질문에 유우량은 태연하게 반문했다.

    "수왕의 명령입니까. 초미 아가씨를 붙잡아 놓으라고요?"

    "내가 그런 것까지 자네에게 보고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많이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아무리 당신이 용수채를 이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수왕이라 할지라도 초미 아가씨를 건드리면 련주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말입니다."

    하욱은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수왕이 초미 아가씨를 노리는 것일까. 녹림과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제삼자의 세력이 녹림과의 전쟁을 시도하려는 의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록 남의 것을 빼앗는 산적들의 무리가 그 시작이었지만 현재 녹림은 거대 방파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다.

    그런 녹림과의 전쟁이라, 그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결과였다.

    하욱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만약 자신의 그런 망상이 현실로 일어난다면 무림은 다시금 피의 전쟁으로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빨리 결정해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성질 급한 사우가 짜증이 가득 섞인 음성으로 대찰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대찰영은 신중한 성격인지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욱이 수적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와 눈을 마주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아마도 전음으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리라.

    "두 분……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먼저 사우에게 그다음으로는 대찰영에게 하욱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씩씩한 성격이지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초미가 자신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 빚이 있으니 갚을 차례가 되었소."

    대찰영이 자신의 도를 뽑아 들었다.

    "오지랖도 넓다."

    사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이런 귀찮은 상황은 질색이었다. 마인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저 인간이 필요한지라 참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초미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하욱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바로 유우량이었다.

    짜증난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우는 자신에게 덤비는 사내의 목을 가볍게 꺾어 버렸다.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아마 싸움을 할 때 사우처럼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육체의 한계가 와서도 아니었고 까다로운 상대를 만난 것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귀찮을 뿐이었다.

    사실 예전의 신분이었다면 이런 하찮은 놈들과 대화조차 섞을 일이 없었다. 아니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마저도 불쾌했을 것이다.

    그게 사우의 옛날 신분이었다.

    황제도 부럽지 않았던 그때.

    그런 자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왔으니 만사가 권태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이 진짜!"

    사방에서 몰려드는 날파리들을 떨쳐 내느라 사우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들어도 안 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몰려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우의 등 뒤에 있는 자는 바로 초미였기 때문이다. 수장의 명령에 그녀를 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꼬질꼬질하게 생긴 매가리 하나 없게 생긴 사내놈이 커다란 벽이 되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형체가 보이지도 않았다.

    빠드득.

    뼈가 부러짐과 동시에 동료였던 사내들의 스산한 비명 소리가 고막을 후벼 팠다. 두려움에 뒷걸음도 치련만 그들은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과도 같았다.

    유우량이 평소 수하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허나 그런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 허무하게끔 보이고 있었다. 사우의 무력은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한껏 귀찮다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자들의 목과 팔다리를 인정사정없이 부러트리는 그의 모습은 전귀와도 같았다.

    사우가 그렇게 초미를 지키고 있을 때 하욱은 유우량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용호상박이라는 표현이 적당할까?

    하욱과 유우량은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노리며 그것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주먹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 있는 사내 하욱과 아버지의 유품인 도 하나로 용수채를 이끄는 유우량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두 사내의 싸움은 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기가 없는 하욱으로서는 유우량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 들 수밖에 없었다.

    유우량이 휘두르는 팔을 잡고는 그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뭔가 둔탁한 뼈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유우량의 몸이 휘청거린다. 드디어 틈이 생긴 것이다. 하욱은 그 순간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릎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유우량의 도 때문에 승부를 보지 못했다.

    보법으로 황급히 피한 하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빠진 숨이 폐를 찢어 놓는 듯했다.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정신은 또렷해지고 있었다.

    유우량은 내심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녹림의 오호장 중 그 실력이 가장 낮다고 평가받고 있는 자가 바로 권호 하욱이었다.

    허나 오늘 직접 이렇게 손을 섞어 보니 생각 외로 강하다고 판단되었다.

    하욱은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수련을 해 왔다. 그것도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아는 오호장들에게 처절하게 짓밟히면서 말이다.

    그렇게까지 강해지려 하던 것은 바로 녹림의 왕인 초웅천이 그에게 직접 초미의 호위를 맡겼기 때문이다.

    녹림을 떠나오기 전이 아니라 초미가 아장아장 걸음을 배울 때였다. 그에게 있어서 초웅천은 하늘이었고 그런 초웅천이 내린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신념으로 힘을 키운 것이었다.

    유우량이 놀라고 있는 건 자명한 일이다.

    게다가 유우량은 지금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표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우였고, 또 하나는 대찰영이었다.

    그 두 사람으로 인해 이미 주변은 푸른빛 잔디 본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유우량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서서히 피 묻지 않은 도를 들어 올렸다.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었다.

    이마는 물론 옷 안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이토록 긴장을 하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천천히, 그리고 순간적으로 확 튀어 나가 버렸다.

    반면 하욱은 여유롭게 호흡을 가다듬고 유우량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상대 쪽에서 마음을 제대로 먹고 공격해 들어올 듯한 기세였다.

    상대는 무기를 들었고 자신은 맨주먹이었다. 그랬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하욱의 무릎이 푸른 잔디 위에 닿았다.

    어깻죽지가 찢겨져 나가 뼈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자신은 목숨을 건졌고 상대는 죽었다.

    유우량의 죽음.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하욱은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앞으로 다가올 그 무엇인가에 몸서리를 쳤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음성이 들려왔다.

    초미의 비명 섞인 목소리였다.

    비록 좋은 상황에서의 음성은 아니었지만 살아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친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끼는 소녀를 위해 지금 이 고통을 체감하고 있는 것이리라.

    허나 아깝지는 않았다.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복부가 터져 버려 내장이 흘러나온 상태에서 쓰러져 있는 유우량의 시신에 고정되었다.

    마지막 일격으로 인한 결말이었다.

    "지저분하게도 죽였네."

    사우가 혀를 끌끌 차며 다가왔다.

    동시에 초미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곤 다친 부위를 보고는 혹여 자신이 아파할까 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녀의 칭얼거림이 시끄러웠는지 사우가 점혈을 가했다.

    고통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반나절 쉬면 괜찮아질 테니 푹 쉬라고."

    "감, 감사합니다."

    힘들게 그 말을 내뱉은 하욱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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