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72화>
파앗!
파사사사사사삭.
제석종의 검에서 붉디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그와 함께 제선화의 검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타탓.
제선화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그리고는 황망한 표정으로 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마신공이 분명 세상에 둘도 없을 절세의 신공이기는 하지만, 천하제일의 무공은 아니다. 거기에다 네가 익힌 것은 반쪽짜리이니 말이다.”
제석종은 제선화를 바라보며 훈계를 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의 검에서 타오르는 붉은 기운.
그것은 분명 혈기와 아주 가까운 기운이었다.
완전한 천마신공에 천살교의 혈주들에게 내려져 오는 비전 무공까지 더한 무공이 바로 지금 제석종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었다.
제선화가 익힌 반쪽짜리 천마신공으로 만든 무공과는 이미 결이 다른 무공이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은 천살교의 모든 힘을 흡수하여 강해진 상태.
제선화가 예전에 비하여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핏. 뚝. 뚝.
제선화의 팔에 상처가 생기더니 땅으로 몇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게 내가 혈육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다. 물러나거라.”
으드득.
하지만 제선화는 자신의 목숨이 끊긴다고 하여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너무나도 좋아했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했던 제석종이기에 더욱더 그러하였다.
“선화 소저, 잠깐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툭.
제선화의 뒤로 곽휘운이 나타나서는 그대로 제선화의 수혈을 짚었다.
그대로 스르륵 잠에 빠져 들어가는 제선화.
곽휘운은 제선화의 몸을 받아 들어서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뉘여 놓고는 제석종의 앞에 섰다.
“본래 저를 원하신 것이니, 제가 상대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쩌저저저저적.
곽휘운의 손에 들리는 빙검.
빙검의 모습이 보통의 빙검과는 달랐다.
새하얗게 빛나는 빙검.
무치와의 대결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그 빙검이었다.
“그건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곽휘운의 손에 들린 새하얀 빙검.
곽휘운이 지금까지 모든 무공을 집대성한 휘운신공의 요체가 담긴 빙검이었다.
새하얀 빛은 백리세가의 무공인 백화환영검의 영향을 받아서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백화빙검(白花氷劍).’
그냥 빙검과는 모든 것에서 차원이 다른 곽휘운만의 신검(神劍)이었다.
“그럼 저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요.”
제석종의 검에 타오르던 붉은 강기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검 전체를 휘감던 강기가 점점 거대해져 가더니, 그대로 단단하게 굳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피가 굳어 가는 것처럼 검 전체를 감싸 굳어 버린 붉은 강기.
검 자체의 크기도 커졌을 뿐 아니라, 그 기운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강해져 있었다.
‘천살신혈검(天殺神血劍).’
천마신공에 천살교의 무공을 합쳐 만들어 낸 무공.
보통의 사람은 익힐 수조차 없는 무공으로, 특수한 체질인 제석종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자, 갑니다!”
제석종은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곧바로 곽휘운에게 쇄도해 왔다.
캉! 카캉! 캉! 캉! 캉!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제석종의 검격.
곽휘운은 백화빙검으로 차분하게 공격을 막아 나갔다.
“하하하! 대단합니다. 천살신혈검을 이렇게 막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천살신혈검은 검에 닿는 모든 것을 잘라 낸다.
지금까지 제석종과 대련을 했던 무인들 중 단 일격을 막은 이가 없었다.
딱 한 명 존재했는데, 그는 바로 대장로였다.
천살교 대장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제석종이 펼치는 천살신혈검의 일검도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곽휘운은 너무나도 손쉽게 막아 내고 있었다.
제석종은 그것이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즐거웠다.
무공을 논할 수 있는 상대.
그런 상대가 있다는 것은 무인에게 더없는 즐거움이었으니 말이다.
캉!! 카아앙!! 캉!!
점점 더 격렬해지는 소리.
곽휘운은 백화빙검을 타고 올라오는 제석종의 힘에 조금 놀랐다.
‘이건 조금 위험하군.’
곽휘운은 제석종의 검의 위력이 위험하다는 것을 대번에 느꼈다.
전해지는 힘을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
[특이한 무공이구나.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어서 힘을 내는 무공이라니.]
천홍은 제석종의 천살신혈검의 본질을 파악해 내었다.
익힌 사람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검에 맺혀 있는 저 응고된 강기는 분명 생명력을 갉아먹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천홍이 살아 있을 때, 부교주였던 신종악이 저런 무공을 만들어 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흠. 그런데 천살교의 혈주란 놈이 저런 무공을 익히고 있다? 이상하군.]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 이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무공을 쓴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저 지켜만 보는 주변 놈들도 이상하고 말이다.
‘무언가 숨겨 둔 술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곽휘운은 저들이 분명 숨겨 둔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늘의 이 일도 숨겨 둔 무언가를 위한 밑거름일 것이다.
“조금 더 강하게 가 보겠습니다.”
제석종의 기세가 한층 더 강해졌다.
곽휘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주 밝고 진한 미소.
소빙룡(笑氷龍)이라는 별호가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럼 저도 강하게 가겠습니다.”
쩌저저저저저저적.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말이다.
“흐읍!”
“흡!”
천살교 측의 사람들은 곧바로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에 내공을 끌어 올려야만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 한기가 막아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기운을 뚫고 들어와서 몸을 서서히 얼려 버리고 있었다.
가공할 만큼의 한기.
쾅! 콰쾅!! 쾅! 쾅!!
인간의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검격을 주고받는 곽휘운과 제석종.
한 번 검이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조금 떨어져서 누워 있는 제선화 쪽으로는 조금의 충격파도, 한기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아직도 저를 봐주시고 있으시군요.”
제석종은 곽휘운이 지금 자신을 상대로 하면서 모든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을 모두 신경 쓰면서도 넉넉하게 자신을 상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거 자존심이 상합니다.”
당연히 제석종의 자존심이 상할 만하였다.
어디서 누군가 제석종을 상대할 때 이렇게 봐주듯 싸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곽휘운은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상태로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펑! 펑! 펑! 펑!
그때 멀리에 있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곽휘운은 이 소리에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모두들 탈출했군.’
이 살선신마진을 벗어났을 때 그것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표식이 바로 저 소리였다.
총 네 개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모두들 제대로 탈출에 성공한 듯 싶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하. 저희도 이만 시간이 다 되어서 말입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요.”
곽휘운과 제석종은 서로 멀찍이 떨어졌다.
우열을 가르지는 못한 싸움.
하지만 서로 검을 맞댄 둘은 어느 정도 서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일지 모르지만, 곽휘운이 조금 더 앞서 있었다.
‘분하구나.’
제석종은 그것이 분했다.
늘상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그였다.
최고가 되고 싶어 천마신교까지 배신하고 뛰쳐나온 자신이었다.
천마신교에 있어서는 자신이 최고가 될 수 없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렇게 천마신교를 뛰쳐나와 천살교의 혈주가 되고 이제는 최고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벽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이번 대계만 제대로 끝난다면 내가 앞에 설 수 있다.’
제석종은 오늘 완성된 대계만 제대로 끝난다면, 무림의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 설 수 없을 터였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확실히 자신이 우위에 서리라 다짐했다.
스슥.
그 사이 곽휘운은 제선화를 안아들고는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멀뚱히 남은 천살교 측의 사람들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희도 움직이도록 하지요.”
“그러지요.”
“다들 천살궁의 모든 문을 닫고, 봉쇄진을 가동해라.”
“존명.”
제석종과 혈뇌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가 빠져나가 천살궁을 완전히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석종과 혈뇌는 천살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중심에 있는 한 전각.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전각이었다.
하지만 혈뇌가 몇 가지 장치를 건드리고 기운을 흘려보내자, 갑자기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거대한 기관음을 내며 바닥이 갈라지고, 그 아래로 계단이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제석종과 혈뇌.
그리고 둘이 밑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다시금 갈라졌던 바닥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닫혔다.
야명주가 박혀 있어 어둡지 않은 길.
제석종과 혈뇌는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아. 오라버니 오셨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네.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곽휘운이 천살궁을 벗어나자, 백리화가 제일 먼저 곽휘운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와 함께 주연희, 위하윤, 제갈중천도 곧바로 달려왔다.
“중천, 여기 선화 소저를 모셔 가거라.”
곽휘운은 일단 제갈중천에게 잠든 제선화를 넘겨주었다.
제갈중천은 일단 제선화를 안아 들고는 혹시 있을지 모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잘 나왔구나.”
곽휘운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인영.
무림맹주 위강천이었다.
위강천은 곽휘운이 힘을 써서 상황이 그나마 이정도로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무림맹주로서, 하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 맞았다.
“우리도 고맙다고 인사해야겠구나.”
천마신교측의 검마와 도마도 곽휘운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중태에 빠진 권마를 치료해 주고, 제선화까지 무사히 데리고 와 주었으니 말이다.
“하하. 저 혼자 한 것도 아닌 일입니다.”
제갈세가는 물론 백리화, 위하윤, 주연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뤄 낸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는 못 나온 것 같습니다.”
다들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대부분의 무인들이 저 천살궁 안에서 살선신마진에 의해 죽었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천살교에서 추격대를 보내어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추격대가 멀쩡한 모습으로 추격해 나왔다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나온 것이 다행일 정도지.”
무림맹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살아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쩔지 모를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큰 희생을 치루기는 하였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곽휘운은 이곳은 아직 천살교의 영향권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을 제안하였다.
다들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곽휘운의 말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천살교의 도발에 승리한 날이지만, 지금 그들의 뒷모습은 전쟁에서 대패한 패잔병의 모습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