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57화>
모두가 잠들어 있는 늦은 밤.
백리화는 조용히 곽휘운을 만났다.
“무슨 일로 불렀어?”
“저 그게요…….”
말에 뜸을 들이며 말하는 백리화.
곽휘운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는데, 오라버니 아니고는 시험해 볼 상대가 없어서요.”
위하윤이나 주연희에게 부탁하기에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백리화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곽휘운말고는 없었다.
천마신교의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흠. 잠깐만 기다릴래? 내가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
“네.”
지금은 모두들 잠을 청한 늦은 밤이니, 전각 내부에서 실험해 볼 수는 없었다.
곽휘운은 백리화를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움직였다.
‘흠. 밤에도 눈이 너무 많군.’
천살궁 주변 곳곳에 눈이 너무나 많았다.
밤이 되었음에도 천살궁의 눈들은 잠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많아졌다.
‘하긴, 당연한 것이겠지.’
지금 이곳에 모인 문파들이 어떤 단합을 할지 모르니, 지켜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그들로서는 예상외의 변수를 줄여야 할 테니 말이다.
결국 곽휘운은 아예 담을 넘기로 생각했다.
휙.
곽휘운은 곧바로 몸을 돌려 백리화에게 돌아왔다.
백리화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담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네? 하지만 분명 감시가 많을 거예요.”
백리화의 말처럼 지금 이곳 천살궁을 둘러싼 담에는 수많은 감시가 있었다.
함부로 밖으로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끔 말이다.
하지만 곽휘운은 그들 정도는 속이고 담을 넘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바로 백리화였다.
백리화는 곽휘운만큼 은신술을 펼칠 수 없으니 말이다.
“내가 감시를 지나쳐 갈 수 있어.”
“하지만 저는…….”
백리화도 자신의 수준을 잘 알았다.
자신의 은신술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양해를 하나 구하려고.”
“네?”
“내가 화아 너를 점혈한 뒤에 업어서 담을 넘을게.”
곽휘운이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백리화를 점혈한 뒤에 담을 넘는 것이었다.
무림에는 수많은 점혈법이 있고, 당연히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만들어 버리는 점혈법이 있었다.
은신술은 기척과 기운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요점인 무공.
죽은 자에게는 기운도 기척도 없으니, 백리화를 점혈로 죽은 것처럼 만든다면, 곽휘운이 백리화를 업고 담을 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이 점혈법을 당하고 나면 꽤나 기분이 오묘하기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모든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되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물론 가끔씩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곽휘운은 이 점을 백리화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할래? 정말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거야.”
“할게요.”
“그래. 알았어.”
백리화의 굳은 두 눈을 본 뒤, 곽휘운은 지체 없이 백리화에게 점혈을 시도하였다.
밤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니 말이다.
툭. 툭. 툭. 툭. 툭.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혈도를 누르는 곽휘운.
곽휘운의 손가락이 혈도를 누를 때마다 백리화는 점점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
백리화가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백리화는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아주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의식이 가라앉아 버렸다.
“역시 이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아.”
곽휘운도 이 점혈법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느껴지니 말이다.
곽휘운은 그대로 백리화를 등에 업은 뒤 끈으로 꽉 동여매고 밖으로 나섰다.
‘가 볼까.’
스슥.
곽휘운은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며 천살궁의 담으로 향했다.
담 근처에도, 담의 위에도 존재하는 감시들.
하지만 그 누구도 곽휘운이 근처에 도달해서 담을 오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수준으로는 지금 곽휘운의 은신술을 간파할 수 없었다.
곽휘운은 며칠 전 천살궁에서 무치라는 자에게 은신을 간파당한 뒤, 홀로 이 은신술을 더 갈고 닦았다.
더욱더 은밀해진 은신술은 그들의 바로 코앞으로 곽휘운이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흠. 가볍군.’
곽휘운은 등에 업은 백리화가 정말로 가볍다고 생각했다.
곽휘운이 이렇게 사람을 등에 업어 본 적이 꽤나 있었는데, 백리화는 당연 그중에 제일 가벼웠다.
‘아무래도 기초를 더 단단히 다지라고 해야겠어.’
가벼운 몸이라는 것은 그만큼 기본적인 근력이 적다는 것.
내공이 있다면, 큰 상관은 없을 수 있는 것이지만, 내공이 바닥을 보일 때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곽휘운은 이번 일이 끝나면 백리화에게 기초를 더욱 단단하게 가르칠 생각을 하였다.
스슥.
그렇게 조금 달리자, 주변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공터가 하나 나타났다.
정말 딱 무공 수련을 하기 좋은 형태였다.
“흣차.”
곽휘운은 백리화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뒤, 점혈을 풀어 주었다.
“흐읏.”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에 백리화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까지 상황이 정확히 들어오지 않아 누워서 눈을 껌뻑이는 백리화.
곽휘운은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 작게 미소 지었다.
“어때? 정말 별로지?”
“어어……. 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백리화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점혈이었다.
정말로 죽었다가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돌아갈 때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아아!”
돌아갈 때도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곽휘운의 말에 그것을 깨달은 백리화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하아…….”
백리화는 체념하기로 하였다.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떤 깨달음인지 볼까?”
“네!”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곽휘운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리화가 얻었다는 깨달음.
과연 어떤 것일지 곽휘운은 꽤나 기대가 되었다.
[저 아가씨라면, 지금 이기어검을 열 자루를 해도 이상하진 않을 거 같다.]
천홍의 말에 곽휘운도 동의했다.
백리화라면 그런 수준의 깨달음을 지금 얻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으니 말이다.
“제가 하윤 소저에게 백화강기에 대해 가르쳐 드리고 생각해 본 것이 있어요.”
* * *
지난 철마 일당과의 싸움이 있기 전에 백리화는 위하윤에게 백화강기의 요체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백리화를 가르치며 아주 작은 의문 하나를 가졌었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최근에 깨달았다.
‘백화강기를 쪼갤 수 있다면,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공을 섬세하게 움직여 강기를 쪼개어 움직이는 백화강기.
백리화는 그렇다면 반대로 강기를 하나로 합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백리화는 백화강기를 하나로 합치는 것을 수련했다.
‘으음.’
당연히 처음에는 실패를 하였다.
쪼개어진 강기를 다시금 하나로 합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깨진 항아리를 다시 붙인다고 해도 물이 새어버려 다시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강기를 하나로 합치려고 몇 번을 시도 해봐도, 그저 서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바뀔 뿐이었다.
‘그저 겉보기만 바뀌어서는 의미가 없어.’
백리화는 강기들이 하나로 합쳐지면, 그에 따라 위력도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겉보기에만 합쳐진 강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말이다.
본디 꽃의 형상을 한 큰 강기를 꽃잎의 작은 강기로 쪼갠 것이 백화강기다.
그저 겉만 합쳐지는 것은, 오히려 퇴보하는 것과 같았다.
‘중첩되듯이 합쳐져야 해.’
백리화는 혼자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위하윤을 찾아가 질문을 하나 하였다.
‘하윤 소저의 축뢰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위하윤은 백리화의 질문에 흔쾌히 축뢰의 요체에 대해 알려 주었다.
내공을 축적시켜 한 번에 폭발시키는 축뢰.
백리화는 내공을 축적시킨다는 점을 생각해, 위하윤에게 축뢰의 요체를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공을 쌓는다는 거지.’
백리화는 곧바로 홀로 수련에 들어갔다.
주변에 흩날리는 백화강기.
백리화는 집중해서 백화강기에 백화강기를 축적시켰다.
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백화강기가 서로 합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위력이 폭발할 듯 강해지고 있었다.
‘완성했어!’
백리화는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백화강기를 붙이는 것에 성공했다.
아니, 붙인다기 보다는 축적한다는 것이 더 가까울지 몰랐다.
어찌되었건 백리화는 새로운 백화강기를 완성해 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 백화강기와 백화환영검의 극의인 경화환영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휘운 오라버니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 * *
곽휘운은 지금 눈앞에서 백리화가 펼치는 백화환영검을 보고 살짝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도대체 뭐냐? 본좌가 살아있을 때도 저런 건 본적이 없다.]
천홍도 지금 백리화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백리화의 주변에 떠 있는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빛을 내는 백화강기.
아니, 더 이상 백화강기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의 위용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화아. 그건 도대체…….”
“아. 이건 제가 백과강기(白果罡氣)라고 이름 붙여 봤어요. 헤헤.”
새하얀 과실의 형태를 한 강기.
꽃잎이 떨어지고 난 후에 과실이 맺히듯, 백화강기의 다음은 백과강기였다.
‘저 강기 하나 하나가, 모두 화탄 그이상의 위력이야.’
곽휘운은 백리화의 백과강기가 마치 하나의 화탄과도 같다는 것을 느꼈다.
내공이 가득 축적된 화탄.
아마 저 백과강기는 닿는 순간 엄청난 기의 폭발을 일으킬 터였고,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화아는 볼 때마다 놀라운 것 같아.”
“네? 아직 제대로 다 보여 드리지도 않았는데요.”
아직 제대로 다 보여 주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보여 줄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때 백리화의 백과강기가 수없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온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경화환영도 중첩해서 펼쳐 봤어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