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04화>
* * *
“숙모님. 괜찮으십니까?”
모용혜를 구해 나머지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길을 가는 곽휘운 일행.
위무악은 기운 없어 보이는 모용혜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다……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그렇구나…….”
남궁세가가 초토화되고 나서부터 시작된 지옥같은 생활.
몸은 이미 더렵혀졌고, 살아갈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가 자결하지 않고 계속 버텨온 이유는 오로지 남궁소소 때문이었다.
사마진은 모용혜가 혹시나 자결해 버릴까봐 남궁소소를 들먹이며 그녀를 묶어두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것만 같던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도저히 떳떳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숙모님.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소소를 볼 생각만 하세요.”
“그래. 고맙구나.”
모용혜도 위무악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은 그냥 자신이 버텨온 이유인 남궁소소를 보는 일만 생각하면 되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었다.
“소소는 잘 지내고 있니……?”
“물…… 론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 했지만, 지금은 꽤나 괜찮아졌습니다.”
“그래…… 다 너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너에게는 정말로 고맙구나. 그리고…… 두 소협도 정말 고맙습니다.”
곽휘운와 풍호혁에게도 정중히 감사의 말을 건네는 모용혜.
곽휘운와 풍호혁은 그 모습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뭘. 하하.”
“아닙니다.”
이런 인사를 받으려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무언가 도움이 되었고, 감사의 인사를 받는 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숙모님.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죠.”
“아니다. 나 때문에…….”
“아니에요. 마침 저도 다리가 아픈 참이었어요. 잠시 쉬었다가 가요.”
모용혜는 그간 몸이 많이 상했기에, 그저 걷기만 해도 꽤나 많은 땀을 흘렸다.
이 모습을 본 위무악이 잠시 쉬었다가 가기를 제안했다.
“자자, 바람도 좋고~ 여기 좋네요.”
“그렇군.”
시원하게 머리를 헤치며 부는 바람.
일행은 잠시 자리에 앉아 바람을 만끽했다.
“야, 곽휘운.”
“왜?”
바람에 취해있는 곽휘운를 부르는 위무악.
곽휘운은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지금의 이 시원한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까 왜 그렇게 빨리 벗어난 거냐?”
남궁세가의 앞에서 사마청을 그 자리에서 아작낼 수 있었지만, 곽휘운은 적당히 여유 있는 척을 하면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좀 빡쎈(?) 사람이 다가오더라고.”
“음?”
“우리 셋으로 조금 버거울지도 모를 사람이 오기에 빨리 빠져 나온 거다. 아마 그 사람끼고 그 안에 있던 놈들까지 튀어나왔으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걸?”
위무악은 그런 사람이 온다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다.
눈치를 보니 풍호혁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기서 들어나는 곽휘운와의 실력차이.
‘점점 더 멀어져 가는구나……’
분명 예전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인가 곽휘운은 자신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곽휘운은 풍진혁을 만나 절정의 벽을 깬 이후로 정말로 무서운 속도로 그것을 흡수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별것 하는 것 없어 보였지만, 사실 곽휘운은 계속해서 마음과 머리로 수련 중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시련들은 곽휘운를 더욱 강하게 해 주었다.
“아마 그자는 흑야패왕(黑夜覇王)이라는 자일 거에요.”
그때 들려오는 모용혜의 목소리.
그녀는 곽휘운가 말하는 강한 사람이 흑야패왕이라 짐작하였다.
그녀가 사마진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가 실질적인 주인이라 생각하면 되요. 사마진과 사마청은 흑야패왕이라는 자보다는 밑에 있는 자들이에요.”
“이거, 역시 생각보다 일이 커지겠네요.”
“흠.”
물론 일이 간단히 끝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사마세가 이외의 또 다른 적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또 다른 적이 있다는 것은 일이 한참은 더 어려워 질것이란 이야기였고, 그것은 여러모로 곽휘운 일행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일단 해가 지기 전에 일행들한테 돌아가서 이야기를 좀 나눠봐야겠네요.”
“숙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이제 좀 괜찮구나.”
다시 걸음을 옮기는 곽휘운 일행.
이미 꽤나 산 쪽으로 기울어진 태양.
완전히 산 뒤로 숨어 컴컴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할 터였다.
어둠은 너무나 춥고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 * *
“언니…… 괜찮을 거에요.”
일행은 지금 객잔에 방을 잡고 머물고 있었다.
남궁소소는 객잔에 들어와서도 불안한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위하윤이 그녀에게 괜찮을 것이라 말하자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 보는 남궁소소였다.
“그래…… 괜찮을 거야…….”
남궁소소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밖을 주시했다.
이미 해는 산의 뒤로 거의 다 숨어 버렸고, 땅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
-끼익.
객잔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곽혜령의 들뜬 목소리.
“어머! 드디어 오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일행은 다 같이 문 앞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서있는 네 명.
갈 때는 분명 세 명이었는데 지금은 한명이 늘어있었다.
늘어난 한명.
모용혜를 본 남궁소소의 눈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고, 눈 밑에는 벌써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어, 어, 어머니…… 어머니!!!”
분명 자신의 어머니였다.
남궁소소는 달려가 모용혜를 끌어안고 정말 펑펑 울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둘의 모습을 짠한 모습으로 바라만 보았다.
눈물의 상봉은 해가 넘어가서야나 끝이 났고, 그제야 남궁소소와 모용혜는 서로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어머니야 말로요.”
“이거, 저희가 너무 추태를 부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모용혜는 남궁소소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자신들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맵시를 가다듬었다.
“허허, 괜찮네. 여기의 누구도 자네들을 뭐라 하지 않네.”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는 풍진혁.
절로 마음이 안정되는 웃음이었다.
풍진혁은 웃으면서 잔잔하고 따뜻한 기운을 내보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풍진혁의 기운에 마음이 좀 안정되었는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모녀.
“일단은 조금 쉬시는게 좋겠어요. 남궁소저랑 할 이야기도 많으실 테구요.”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곽휘운은 모녀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나섰다.
곽휘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사람들.
분명 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할 이야기,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셔서.”
그녀의 정중한 인사.
그녀는 위무악과 위하윤을 제외 하고는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것도, 자신의 딸을 이렇게 보호해 준 것도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은혜였다.
“자자, 얼른 방으로 가시죠.”
곽휘운은 모용혜와 남궁소소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두 모녀가 방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나서 나머지 일행들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객잔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곽휘운의 주위로 모여든 위하윤, 남옥영, 곽혜령.
그녀들이 막 곽휘운에게 말을 걸려던 때였다.
“야, 곽휘운. 잠깐 나 좀 보자.”
그녀들 보다 먼저 곽휘운를 채 가는(?) 위무악.
곽휘운은 사뭇 진지한 위무악의 표정에 별다른 말없이 객잔 밖으로 나가는 위무악의 뒤를 따랐다.
풍호혁도 곽휘운와 위무악이 움직이자 조용히 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런 셋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풍진혁.
“어르신 무엇이 그리 좋으십니까?”
풍진혁과 함께 술을 한잔 기울이던 장이춘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풍진혁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아주 재미있어 질 것 같아 그러네. 내가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일이거든.”
“예?”
저 세 명이 객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성장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장이춘이었다.
하지만 풍진혁은 더 이상 장이춘에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장이춘은 풍진혁이 이런 아리송한 말을 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그냥 때가되면 알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어차피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무림의 세계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한 잔 더 하세나.”
“예.”
둘의 술잔은 계속 오고 갔고, 그 시간만큼 밖은 완전한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 * *
작은 방안.
남궁소소와 모용혜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마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요…… ……?”
먼저 어렵게 입을 뗀 건 남궁소소였다.
사실 남궁소소 그녀도 어느 정도 모용혜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미안하구나…….”
모용혜가 미안할 것이 무엇인가?
사실 모용혜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이런 소식을 자신의 딸에게 전해야만 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렇군요…….”
남궁소소는 차오르는 눈물을 쓱 닦아내며, 애써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가 운다면, 그걸 지켜보는 모용혜의 가슴이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으셨을 텐데…….”
남궁소소는 모용혜가 전 남궁세가에 계속해서 잡혀있었다면 분명 무언가 고초를 겪었을 거라 생각했다.
모용혜는 남궁소소의 질문에 잠깐 숨을 골랐다.
“후우…….”
아련해지는 모용혜의 눈빛.
모용혜는 남궁소소를 바라보며 그간의 이야기를 풀었다.
숨길 수 있다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자신의 딸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 그들이 침입해온 그날 밤…….”
시작되는 모용혜의 이야기.
세가의 무인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과 자신이 나서서 일반인들을 풀어준 것…… 그리고 사마진을 만나고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
사마진이 사마청에게 전 남궁세가를 맡기고 떠나고서부터 시작된 죄수와 같은 생활.
모용혜는 오로지 남궁소소를 위해 버텨왔다고 말했고, 이제 잘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더 이상 염원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 어미를 용서하지 말거라…… 이제 더 이상 너의 어미로 살아갈 얼굴이 없구나…….”
아무리 자신의 딸을 위해서라지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명문가의 여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