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01화>
곽휘운의 말처럼 그녀는 마교에서 곽휘운를 잡으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았다.
물론 강제력이 전혀 없는,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이었다.
그녀는 이 부탁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와 교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막상 부탁을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살짝 어떤 사람인지 불안은 하였는데, 지금 실제로 곽휘운라는 인물을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머나~ 아주 당돌한 아가씨네? 그런데 어디서 왔다고 했지? 마교?”
곽휘운와 곽혜령 사이로 끼어드는 당소향.
사근사근한 말투와 웃는 얼굴.
그런데 묘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교 사람이 지금 우. 리. 정파 사람인 곽대주를 넘보는 거야?”
“정파와 마교가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굳이 정과 마를 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호호. 아무리 평화협정을 맺었다지만, 곽대주는 우리 무림맹 사람이란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협정을 내세울 생각은 마렴.”
남에게 주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일까?
당소향은 조금 전만 하더라도 곽휘운를 못마땅해 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해놓고는 지금 와서 ‘우리 곽대주’라고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당소향의 말이 맞기도 했다.
정파와 마교는 물과 기름 같았다.
지금이야 평화협정아래 큰 마찰이 없다지만, 언제 평화협정이 깨지고 사태가 악화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관계의 정파와 마교인데, 정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무사가 마교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허허, 아이들의 마음이 맞는 다면 정이 마이든 상관없는 것인 게 아니겠느냐?”
당소향이 곽혜령을 쏘아 붙이자 중재를 위해 나서는 풍진혁.
당소향은 갑자기 불쑥 끼어든 풍진혁을 바라보았다.
분명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고, 곽휘운와 인연이 있는 노인인 것 같았지만 도저히 정체를 모를 노인이었다.
“어르신께서는 누구신지요?”
“나? 클클 글쎄…… 마교의 퇴물? 아니, 월하노인이라 해야 하나?”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래도 마교분들이 이렇게 버젓이 정파 한가운데를 헤집고 다닌다니…… 썩 보기 좋은 일은 아니네요.”
“지금은 평화의 시대인데 안 될 건 없지 않느냐?”
“뭐, 그건 그렇지만…….”
평화협정.
마교 인물들이 정파 영역권의 무림을 돌아다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너는 지금 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저 아이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풍진혁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아이는 바로 위무악이었다.
지부에 들어와서부터 흐릿한 눈빛으로 말없이 앉아있었다.
“우리 무악이는 잘 헤쳐 나갈 거예요.”
사실 당소향은 위무악이 심히 걱정되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옆에서 스스로 헤쳐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드륵.
그때 지금까지 흐릿한 눈동자를 하고 있던 위무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모든 눈이 위무악에게로 향했다.
위무악은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풍진혁과 당소향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풍진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악아!”
“헉!”
주위 사람들의 놀람.
하지만 당사자인 위무악과 풍진혁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르신. 저를…… 저를 강하게 해 주세요.”
* * *
“나에게 부탁해도 되겠느냐? 난 마교 사람이다.”
“그래, 무악아. 아버지나 무림맹에도 강한 사람이 많잖니? 이러지 말고 일어나렴.”
무릎을 꿇은 위무악을 일으켜 세우려는 당소향.
하지만 위무악은 요지부동이었다.
“저는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풍진혁을 바라보는 위무악의 눈은 굳은 의지를 보였다.
“강하게 해 달라…… 아까의 그 아이를 이기고 싶은 것이냐?”
“예.”
“솔직해서 좋구나. 좋다. 내가 가르쳐주마.”
“감사합니다.”
흔쾌히 수락하는 풍진혁.
풍진혁에게 또 다른 재미가 하나 추가된 것이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수련은 내일부터 할 테니, 오늘은 이만 쉬거라.”
“예.”
풍진혁의 말에 그제야 일어서는 위무악.
위무악의 눈은 또렷해졌고, 표정은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터였다.
“클클. 재미있겠어.”
방금 전까지 풍진혁과 말다툼을 하던 당소향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마교의 사람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위무악에게 무공을 가르칠 스승이 될 사람이었다.
당소향은 풍진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정확히 누구시죠?”
위무악이 저렇게 확고한 표정을 짓는 다면 자신이 말린다 해도 할 것이었다.
어차피 돌릴수 없는 상황, 그러면 상대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아들을 맡겨도 맡길 것 같았다.
“풍진혁. 마교의 태상교주지.”
“!!”
“!!”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내뱉은 풍진혁의 한마디.
본래 풍진혁의 정체를 알고 있던 곽휘운나, 위하윤 등은 놀라지 않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놀랐다.
마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건 짐작했지만, 태상교주라니……
“당소향이 마교의 태상교주님을 뵙습니다. 조금 전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요.”
태도를 바꾸는 당소향.
마교의 태상교주라면 이정도 예는 받을 자격이 되었다.
전쟁 중이라면 모를까 평화의 시기라면 서로 어느 정도의 존중은 필요했다.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 조금 전처럼 편하게 대하거라.”
“그럼. 저희 무악이 좀 잘 봐주셔요.”
“그래, 그러마.”
정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헌신이라 해야 할까?
톡 쏘아붙이던 말투에서 봄날의 훈풍같은 사근사근하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바뀐 당소향.
풍진혁은 이런 당소향의 모습이 싫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 대답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한참 어린 아이일 뿐 귀여워 보였다.
“그럼, 아이야 우리 혜령이가 저 아이를 만나도 상관없겠느냐?”
“그건…….”
곽휘운와 위하윤, 곽혜령을 번갈아 보는 당소향.
그러더니 작은 한숨을 폭 쉬고는 입을 떼었다.
“상관없어요. 제 딸아이가 잘 하겠죠…….”
“혜령아 들었느냐?”
“예.”
“허허, 잘해 보거라.”
“네!”
풍진혁의 응원에 방긋 웃음 짓는 곽혜령.
자신감 넘치고 시원한 웃음이었다.
-끼익.
지부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두명.
제갈중천과 남주학이었다.
지부에서 일이 터지고 즉시 풍학진을 쫓아가보았지만, 결국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대주님. 결국 놓쳤습니다.”
“무악이를 저꼴로 만든 놈이니 너희가 잡을 수는 없었겠지…… 알았다. 애들 데리고 이 근방에 감시 철저히 하고 있어라.”
“예.”
“예.”
제갈중천과 남주학은 곽휘운의 명령에 대답을 하고는 다시금 지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만 방으로 올라가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힘들구나.”
“쉬십시오. 어르신.”
곽휘운의 인사를 받으면서 방으로 올라가는 풍진혁 그 뒤를 풍호혁이 따랐다.
사실 풍진혁이 나이가 들었다고 힘들 리가 없었다.
그저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라고 빠져 주는 것이었다.
“나도 이만 쉬어야겠네, 남궁 아가씨는 나랑 같이 올라가서 차 한잔해요.”
“예. 어머님.”
당소향과 남궁소소도 방으로 올라갔고, 지부에는 곽휘운, 위하윤, 남옥영, 곽혜령만이 남게 되었다.
“하. 하. 하…… 저도 일이 있어서 그럼…….”
“어딜 도망가시나요?”
“윽.”
낮고 차분한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서늘한 목소리.
곽휘운은 이 불편한 분위기에서 도망가려 했지만, 위하윤의 말 한마디에 가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 그렇죠…… 하하…….”
곽휘운은 이렇게까지 공포감을 느끼고, 등에서 식은땀이 난적이 있었나 싶은 마음이었다.
차분하지만 싸늘한 위하윤과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남옥영, 그리고 계속 웃음을 짓고 있는 곽혜령까지.
자신은 무공은 잘 알았어도, 여자는 잘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곽휘운에게는 무섭기 만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 * *
위하윤은 곽휘운같은 사람을 자신 혼자만 독차지 할 수 없을 것 이란 걸 어느 정도 직감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남옥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갑자기 곽혜령까지 나타나버렸다.
“남소저도, 곽 소저도 정말로 휘 오라버니를 좋아하시나요?”
먼저 입을 떼는 위하윤.
어차피 사람의 마음을 자신이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 좀 더 좋게 지낼 방법을 모색하는 게 정답이었다.
“저, 저는…… 그게…… 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는 남옥영.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
평소의 그녀라면 환하게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을 터였다.
아마 위하윤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과 자신의 마음을 틀킨 부끄러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글쎄요…… 저는 아직은 정말로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좋아지고 싶네요. 호호.”
곽혜령은 여전히 자신감 있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이 가식이나 거짓 같지는 않았다.
“하…… 좋아요. 그럼 휘 오라버니의 마음은 어떠세요?”
이번에 곽휘운에게 돌아온 질문의 화살.
여인들의 대화를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듣고 있던 곽휘운은 위하윤의 질문에 모든 사고가 얼어붙었다.
“어…… 저…… 어…….”
“얼버무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단호한 위하윤의 음성.
곽휘운은 자신도 여기서 얼버무릴 생각은 없었기에,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았다.
위하윤은 곽휘운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호위대상과 호위 이상의 감정을 공유하는 연인사이였다.
남옥영은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혈교에 맞서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고, 화산에서는 큰 도움도 받았다.
곽혜령은 아직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 당당함과 웃음은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음…… 저는 세 분 다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다 저렇다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세 분이 저를 좋아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고…… 음…… 세 분 다 제 곁에서 같이 지내다보면 결론이 나지 않겠어요? 지내보고 그래도 제가 좋다고 하면 세 분만 괜찮다면 저와 세 분 다 결혼을…….”
“이 바람둥이!!”
“어머나.”
“어머, 곽소협은 엉큼한 분이셨군요?”
곽휘운의 마지막 말에 일제히 말을 던지는 세 여인.
세 명을 앞에 두고 당당히 세 명다 자신과 결혼 하자니……
농담 반 진담 반인 이야기였다.
-덜컥.
객잔 안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제갈중천.
얼굴에는 당혹감 다급함 등이 가득 묻어있었다.
평소 별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제갈중천에게는 큰 변화였다.
“무슨 일이야?”
“대주님……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