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96화>
* * *
소박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방.
한 청년이 방안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하늘의 사랑을 독차지 했음일까?
미남자(美男子)라는 말로도 부족한 외모의 청년.
“그래, 무진이가 실수를 했다고?”
목소리마저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성의 목소리였다.
“예.”
방밖에서 들려오는 대답소리.
청년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흠……. 무진이 녀석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교주님께서 두 번째 대계를 실행하라 하셨습니다.”
“그래……. 잘 알겠다고 말씀 전해 드리거라.”
“예.”
대답을 끝으로 문 밖에서 사라진 인기척.
청년은 서책을 잠깐 덮어놓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적랑(赤狼).”
청년의 말에 나타난 적의인.
천장에서 갑자기 툭하니 떨어져 나타났다.
“먼저 움직이거라.”
청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사라진 적랑.
“나도 움직여 봐야겠군. 변수는 미리 차단하는 것이 좋지.”
청년은 자신이 아끼는 부채를 손에 쥐고 방을 나섰다.
사뿐히 걷는 발걸음이었지만, 보통 사람은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청년의 실력을 짐작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화음현으로 가볼까.”
청년의 목적지는 화음현.
확인 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곽휘운이 지부에 돌아 온지도 수일.
대검파에서 일이 있은 후로 지부에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가하군.”
무표정하게 있는 곽휘운였지만, 사실 속이 조금 탔다.
이대로 화음현에 사람들의 발길이 아예 끊긴다면 문제가 있었다.
“야! 나 같아도 화음현에 안 오겠다. 이 난리가 났는데, 너 같으면 오겠냐?”
위무악의 말이 맞았다.
대검파 폭발 사건.
혈교의 공식적인 첫 번째 만행이었다.
아직 이 사건이후로 혈교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음현 근처로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저기 저 아저씨 무슨 일 있으시냐?”
위무악이 가리킨 곳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허진청이었다.
허진청은 대검파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며, 고민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검 때문이시겠지.”
허진청이 고민에 휩싸인 이유.
혈교 때문에 완전히 망해버린 대검파 때문이었다.
허진청이 대검에서 스스로 내려왔다고 해도, 평생을 대검에 머물며 살았다.
그에게 대검은 고향이자 부모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대검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대검을 떠나온 자신이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허 무사님.”
“음? 왜 부르나?”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허진청은 곽휘운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대검에 가보는 것이 나을 듯 싶습니다.”
“괜찮네…….”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
“내가 무슨 면목으로 대검에 돌아가나?…….”
계속 이런 반응만을 보이는 허진청이었다.
그때였다.
“어서옵셔~!”
지부로 들어서는 십여 명의 무리.
반사적으로 지부의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아니?! 자네들…….!?”
허진청은 그들을 보자 눈이 한없이 커졌다.
모두 매화가 수놓인 대검파 복장을 하고 있는 무리.
허진청이 그들의 면면을 보니, 모두 자신과 같이 바뀐 대검에서 핍박받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이었다.
“나 사매…….?”
“허 사형.”
그들을 대표하여 나오는 한며의 여인.
허진청과 같이 동문수학한 사매였다.
그동안 어디론가 파견되어 얼굴을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갑작스레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나를 찾아 온 건가?”
“예. 사형. 저희를 이끌어 주세요.”
“어?”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말.
이끌어 달라니?
허진청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무슨…….?”
“말 그대로에요. 대검파를, 저희를 이끌어 주세요. 장문인으로서요.”
“!!”
“!!”
허진청도, 곽휘운도, 그리고 위무악도 모두 깜짝 놀랐다.
대검파의 장문인이 되어달라니.
“하하,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농을 하다니.. 사매 그 동안 농이 많이 늘었군.”
“농이 아닙니다.”
더 없이 진지한 표정,
절대로 농담이 아니란 표정이었다.
“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만 돌아가.”
정말 말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장문인이라니?
자신은 그럴 그릇도 그럴 실력도 되지 않았다.
“사형……. 이제 대검에 남은 사람이 몇 없어요. 대검의 모든게 사라지고, 모든게 엉망진창이에요.”
“나 말고 더 적임자가 있을 것이야.”
“아니요. 사형보다 대검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뒤에 있던 인물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이면 부탁했다.
난감한 표정의 허진청.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후……. 오늘은…….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사형……. 제발…….”
간절한 눈빛으로 허진청을 바라보는 이들.
허진청은 그 모습을 차마 계속 볼 수 없어서 고개를 획 돌렸다.
“생각은 해 볼 테니, 지부에 더 이상 피해주지 말고 돌아가게.”
“그럼……. 기다릴게요.”
마지막으로 가전한 마음을 전하고, 지부를 빠져나가는 이들.
그들이 나가고 허진청은 더욱 더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아…….”
짙은 한 숨.
이건 허진청과 대검파의 문제이기에, 지부의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깊어지는 허진청의 고민과 함께 날이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 * *
대검파.
장구한 세월동안 구파의 자리를 지켜온 대 문파.
명문정파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던 대검파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건 얼마 되지 않았다.
본래 대검파를 이끌어 가려했던 대사형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두 번째였던 장철기가 장문이이 되면서 부터였다.
장철기는 장문인의 자리에 앉자마자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다.
개혁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대검파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고, 문도들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물론 장철기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검파의 대부분을 장악해버린 장철기였다.
그렇게 장철기가 대검파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장철기의 뜻에 반하는 이들은 하나둘씩 대검에서 떠나거나, 사라져갔다.
장철기의 대검파.
그런데 결국 그 대검파는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맺게 되었다.
대검파의 폭발.
대검 본파가 사라졌다 해도, 수많은 분파가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폭발과 함께 분파에 있던 자본과 인물들이 허깨비처럼 사라져버렸다.
그간의 장구한 역사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망해버렸다.
망해버린 대검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대검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이들이 다시 대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시 대검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을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임시 장문인으로 나혜령을 뽑았다.
지금 모인 이들 중 가장 능력있고,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일단 임시 장문인직을 수락했지만,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한명 있었다.
허진청.
그녀는 허진청이 장문인 자리를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요청해야 했다.
그러면 분명 들어줄 터였다.
“사형. 제발 대검파를 이끌어주세요.”
“허허…….”
벌써 수 일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나혜령.
그녀는 그때마다 허진청에게 장문인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하지만 허진청은 완강히 거절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은 장문인감은 아니었다.
“장문인감이 아니래도.”
나혜령은 허진청의 계속된 거절에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부 문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형이 장문인을 수락 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 * *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해가 질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나혜령.
허진청은 몇 차례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를 따라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십여 명으로 늘었다.
그 모습에 곽휘운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저들이 문 앞을 가로막아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허 무사님. 장문인을 수락하심이 어떠신지?”
“하아……. 자네에게 미안하구만. 그런데 정말로 난 자신이 없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곽휘운.
“그럼 일단 임시 장문인을 맡는 걸로 하시죠.”
“음?”
“정식으로 장문인 말고, 그냥 임시로 맡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진짜 장문인은 나중에 뽑으면 되고요.”
나혜령도 임시 장문인이었다.
허진청이 그 임시 장문인 직함을 가져가는 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임시였기에, 큰 부담도 없었다.
게다가 더 이상 지부에 피해를 주기도 미안했다.
“나 사매.”
허진청이 다가오자 일제히 그를 향해 모이는 눈들.
기대에 가득차 있는 눈빛이었다.
“장문인을 수락하지.”
“사형!!!”
기쁨의 목소리를 내는 나혜령.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로 하겠어. 다음 장문인이 정해지기 전까지 만.”
“정말……. 정말 감사해요 사형.”
“감사드립니다!”
허진청의 수락에 일제히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대검 문도들.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내일 대검으로 갈테니, 오늘은 이만들 돌아가게.”
“예. 장문인.”
“잠시만.”
그때 떠나려는 대검파 사람들을 붙잡는 곽휘운.
사람들은 무슨 일일까 싶어 곽휘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곽휘운의 친절.
그동안 정들었던, 허진청이 임시라도 장문인이 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가 곁들여진 친절이었다.
본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지만…….
‘허 무사님이 장문인이 되면 자연스레 대검파의 비호까지 받을 수 있을 거야. 음식값은 허 무사님 봉급에세 제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없고.’
허진청과 대검파 문도들은 곽휘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친절에 감사를 보냈다.
“허허, 고맙네. 안 그래도 이렇게 그냥 보내기는 마음에 걸렸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소협.”
“자, 자리에 앉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