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95화>
진법을 아는 무인들은 전부 다 동원되어 진법 파훼를 시작했고, 남은 무인들은 다친 이들을 치료하거나, 의원들에게 호송했다.
사로잡았던 장철기가 진법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숨이 끊어져 버렸다.
모든 혈을 제압하고, 폭혈공까지 대비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혈교라면 분명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있었을 텐데……..
위무악은 정파 인물들을 잘 조율하면서, 장내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
다른 문파의 수뇌들도 자신들의 문도를 잘 추스르며,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였다.
“화린아. 괜찮을 거라니까.”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위무악은 망연한 눈빛으로, 영혼 없이 움직이는 위하윤을 달랬다.
“예. 괜찮아요 저는……. 저보다 소소 언니한테 더 신경 써 주세요.”
“하아……. 그래.”
전혀 괜찮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위무악은 그저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더 이야기 해봐야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몰랐다.
위무악은 진법 파훼에 힘을 보태고 있는 남궁소소에게 걸음을 옮겼다.
* * *
보고를 듣던 악무극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계획이 실패했다?”
“죄송합니다.”
꽤나 많은 돈이 투자된 대계였다.
이렇게 별다른 타격 없이 끝나서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혈뢰와 겁화진으로 그들을 모두 없애지는 못해도, 상당한 타격은 주었어야 했다.
“보고하는 너에게 잘못은 없겠지. 가서 남상인과 무진이를 데려와라.”
“예.”
재빠르게 사라지는 부하.
홀로 남은 악무극은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첫 번째 대계가 실패라……. 뭐, 당연한 것이려나. 무진이 그 놈에게서 나온 계획이니. 그래도 그렇게나 실패를 하지 말라 일렀거늘…….”
악무극은 사실 이번 대계가 크게 성공할 가능성을 높게 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핏줄인 악무진이 진행하는 일이기에, 되도록 성공할 수 있도록 그렇게나 힘을 주었건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뭐, 그래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려나……. 여봐라.”
악무극의 말에 땅에서 솟아나는 검은 그림자.
“너는 무형이에게 가서 두 번째 대계를 시작하라 이르거라.”
검은 그림자는 말도 없이 고개만을 숙인 뒤, 나타났던 것처럼 땅으로 쑥 꺼졌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악무극.
그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보지.”
* * *
위강천은 폭발이 지나가고 난 뒤, 끝없는 화염 속에서 곽휘운을 찾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웬만한 무인들은 버티지 못할 만큼의 화염이었지만, 위강천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저기에 있군.”
위강천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지근까지 다가갔다.
익숙한 목소리의 곽휘운과 처음 보는 여인이 보였다.
-풍덩.
근처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두 인영.
위강천은 바로 모습을 드러낼까 하다가,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보이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크크. 곽휘운 저놈이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볼 수 있겠어.’
평소에 보이는 표정이라고는 무표정뿐인 놈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볼 수 있으랴?
물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는 곽휘운.
위강천은 그 모습에 바로 뛰쳐나갈까 하다가, 갑자기 곽휘운을 끌어안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저, 저 자식이!! 하윤이를 놔두고!’
위강천은 곽휘운의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바람(?)피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웅은 삼처사첩이라지만, 자신의 딸을 삼처사첩 중에 하나로 만들기는 싫었다.
“좋아 보인다? 곽휘운?”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님.”
“그래. 오랜만이다.”
위강천은 화를 낼까 했지만, 곽휘운의 얼굴을 보고는 말았다.
한 점 사심이라고는 없는 눈빛.
그리고 자신이 화를 내어봐야 무엇 하겠는가?
이건 자신의 딸이 알아서 풀어야 할 문제였다.
“너, 나한테 약점하나 잡힌거다?”
“무슨…….?”
“이 모습이 화린이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크크.”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크크크. 과연, 그럴까?”
음침하게 웃는 위강천.
그 웃음을 본 곽휘운은 뭔가 오싹함을 느꼈다.
저 사람이라면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 내어, 자신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나와야지. 그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일단 여기서 나가자. 그만들 껴안고.”
그제야 아직도 서로 껴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곽휘운과 남옥영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떨어졌다.
위강천은 곽휘운의 곤란한 얼굴은 못 봤어도, 당황한 모습을 보았으니 만족했다.
“자, 곽휘운 너는 알아서 잘 따라오고. 아가씨는 내가 잘 이끌어 주겠네.”
“예.”
남옥영을 뒤에서 받쳐주며 성큼성큼 움직이는 위강천.
남옥영은 마치 경공이라도 익힌 듯 가벼운 발놀림에 스스로 놀랐다.
‘대단해.’
무슨 조화인줄은 모르겠지만,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위강천 주위로는 불길이 감히 침범조차 하지 못했다.
보고도 믿기 힘든 놀라운 광경이었다.
“자, 다 온 것 같군.”
저 앞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곽 대주님!!!”
* * *
곽휘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오는 위하윤.
위강천은 그 모습에 살짝 인상을 썼다.
“딸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에휴.”
위하윤은 이런 위강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달려서 곽휘운을 와락 안았다.
그리고 위하윤에 이어서, 위무악과 남궁소소 그리고 권마와 풍호혁까지 주위로 다가왔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구려. 신강의 권마라는 늙은이오.”
“무림맹주를 맡고 있는 위강천이라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위강천과 권마.
그리고 풍호혁도 오랜만에 곽휘운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대검파 주위에 펼쳐져있던 겁화진이 완전히 파훼되었다.
그리고 보이는 안쪽의 모습.
“허어…….”
“이럴수가…….”
아직까지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폭발의 여운이 남아있는 참혹한 현장.
유구한 대검파의 역사와 함께해왔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거나,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널려있는 시신들.
“어서 불길을 잡고, 시신들은 최대한 한 곳으로 잘 모셔두시오. 그리고 생존자가 있을지 모르니 모두들 샅샅이 수색해 주시오!”
“예.”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아직 슬픔과 충격이 가시지 않았지만, 더 이상 피해가 번지지 않으려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 *
대검파의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어 나갔다.
불길은 거의 다 진화 되었고, 시신들은 모두 잘 수습해 공동 장례를 치루었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숙연한 모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터져나왔다.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자, 정파와 마교간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강천과 권마는 이를 느끼고 이제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였다.
“소교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권마는 떠나기 전에 일단 풍호혁의 의견을 물었다.
일단은 이곳에서의 임무가 끝난 풍호혁이었다.
본래라면 이제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흐음…….”
하지만 풍호혁은 이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풍호혁이 곽휘운 일행을 만난시간은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과의 만남은 풍호혁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마교에서는 모두 자신을 어려워하고, 떠받들어 주기만 하였다.
곽휘운 일행들은 정파인들 이었지만, 자신을 배척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완전히 혈교의 주구들이 사라졌다는 보장도 없고 하니, 소교주님께서 조금 더 머물면서 살펴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권마는 말을 하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가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이유까지 만들어 주었다.
“아직, 방값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때 곽휘운도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그럼. 염치없지만,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이 늙은이는 이만 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맹주님도 다음에 좋은 일로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교주께 안부전해주십시오.”
간단한 인사 후 빠르게 사라지는 권마와 흑풍대.
그들은 순식간에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자네들은 이만 내려가 보게.”
위강천은 곽휘운 일행을 내려보냈다.
대검파의 일도 이제 거의 끝나갔고, 이들이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내려가기 전 위하윤은 위강천을 한번 꼭 안아주었다.
이 포옹에 위강천은 금방 헤벌쭉한 표정을 지었다.
“조심히 가거라!”
위강천의 인사를 끝으로 하산하는 곽휘운 일행.
그들의 머리위로 찬란한 태양빛이 빛나고 있었다.
위강천은 그 빛이 그들의 앞날이 되기를 기원했다.
* * *
지부는 곽휘운이 용봉연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에도 별 탈 없이 장사를 계속했다.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에 지부에 남아있던 장이춘, 허진청, 점소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 대검에서 큰일이 있었다는데, 다들 무사하려나?”
“걱정하지말게. 그 친구들이 어디 보통인가?”
장이춘의 걱정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허진청.
허진청이 본 그들은 그런 술수에 당할 이들이 아니었다.
특히 곽휘운 그 친구는 더더욱.
“그나저나, 허무사님은 대검에 가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장이춘은 허진청이 대검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본 파에서 큰 일이 터졌는데, 여기에 있어도 되나 싶었다.
“이제 대검파 사람도 아니니, 내가 가봐야 무얼 하겠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허진청.
하지만 떨리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사실 허진청은 대검파에서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가고 싶었다.
아무리 대검을 나왔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대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끼익.
그때.
지부의 문이 마찰음을 내면서 열렸다.
점소이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쪼르르 달려갔다.
“어서옵셔~”
능숙하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 손님의 얼굴을 본 점소이의 눈이 더 없이 커졌다.
“저, 점주님!”
“오랜만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다름 아닌 곽휘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지부를 잠시 떠났던 곽휘운이 드디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모두 별탈 없으셨습니까?”
“하하, 우리가 뭐 탈이랄 것이 있겠어?”
장이춘도 허진청도 오랜만에 곽휘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