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휘운객잔-85화 (85/203)

<휘운객잔 85화>

‘에잇, 그래도 이 장평 체면이 있지! 이렇게 쫄아서 아무것도 못하면 안 되지.’

장평은 애써 자신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을 깨웠다.

“야! 이것들아! 언제까지 나자빠져 있을 거야? 빨랑 안 일어나?”

“으으…….”

“끄응…….”

장평의 으름장에 부하들은 극한의 고통을 참아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장평은 주변을 손짓하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가서 기름하고, 불 좀 구해 와라.”

“네?”

“말귀 못 알아먹냐! 기름하고 불 구해 오라고!”

“네, 넵!”

장평의 명령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부하들.

아직 아픔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그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굼떴다.

장평의 눈에는 그런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답답했다.

“빨랑빨랑 움직여!!”

장평의 재촉에 부하들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부하들은 저마다 기름과 횃불을 들고 모였다.

장평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자, 지금부터 전각을 태운다. 기름 부어!”

장평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

바로, 전각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전각 이곳저곳에 기름이 부어졌고, 장평은 그 모습을 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불 던져!”

일제히 전각을 향해 날아가는 횃불들.

이제 불과 기름이 만나는 순간, 객잔은 잿더미로 변해 버릴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휘이이이익.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이 바람에 날아가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장평과 부하들의 얼굴이 굳었다.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귀에 들려오는 무감정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객잔 앞에 나타난 곽휘운.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기세가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나타내 주었다.

“만약 불이 붙었으면, 당신들은 오늘 모두 죽었습니다. 다행인 줄 아십시오.”

말을 내뱉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장평과 부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한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한 번만 더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시길.”

한 번 봐주는 대신, 다시는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

장평은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곽휘운의 엄청난 기세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곽휘운의 기세가 명백한 살기로 바뀌었다.

장평과 부하들은 얼굴이 허옇게 질린 채 몸을 벌벌 떨며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돌아가십시오.”

짧은 한마디와 함께 거두어지는 살기.

“처, 철수!”

“네, 넵!”

숨통이 트인 장평과 부하들은 일생 낸 속도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장내를 벗어났다.

곽휘운은 모두가 사라진 걸 보고 나서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전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흐음. 오늘도 피곤하군. 이만 쉬어야겠어.”

곽휘운은 자신의 핏자국을 지운 뒤 쓰러지듯 자신의 처소에 누웠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 떠오른 곽휘운.

“아! 이런. 벌써 가 버렸나?”

그는 아까 장평 일행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돈을 안 받았군.”

* * *

-달그락. 달그락.

천천히 청해성으로 들어오는 마차.

타고 있는 사람의 신분이 높은지, 고급스러운 문양과 함께 여러 명의 호위가 주위에 붙어 있었다.

“부대주님, 이제 얼마나 남았나요?”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옥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이제 다 왔어요.”

부대주라 불린 자는 바로 남주학이었다.

이번 멸마대의 임무는 요인 호위.

남주학은 그 임무를 맡아서, 지금 청해성으로 온 것이었다.

“그럼, 곧 곽 대주님을 뵐 수 있겠군요.”

“흥! 만나기만 하면 제가 시원하게 한마디 해야겠어요. 아가씨도 도와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걷히는 마차의 차양.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마치 달빛을 받은 듯 반짝이는 고운 피부.

그리고 하늘이 모든 정성을 들여 빚은 듯한 얼굴.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그녀를 위한 말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바로 무림맹주의 금지옥엽인 위하윤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계속해서 움직이던 마차가 드디어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아가씨. 도착했어요.”

“그렇습니까?”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

그리고는 정면에 있는 현판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청. 해. 지. 부.”

“아가씨, 들어가요.”

* * *

‘곤란하군.’

곽휘운의 앞에 있는 두 사람.

매우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한 명은 부대주였던 남주학이었고, 다른 한 명은 위하윤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곽 대주님.”

“예. 하윤 소저.”

“대주님! 저한테는 인사도 안 해 주세요?”

“그래. 반갑다.”

“저도요. 하하.”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여 어색함 없이 대하는 그들.

곽휘운과 남주학이 투닥 거리는 모습을 살짝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위하윤.

전혀 다른 성격임에도 묘하게 쿵짝이 잘 맞는 둘이었다.

“그런데 곽 대주님.”

“예.”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곳에서 와 계셨군요.”

“그, 그것이…….”

보기 힘든 곽휘운의 당황한 모습.

아마 전 무림에서 곽휘운을 당황시킬 수 있는 사람은 위하윤이 유일할 것이었다.

말에 뜸을 들이는 위하윤.

곽휘운은 입이 바짝 말라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위하윤은 매번 곽휘운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엔 일가견이 있었다.

그때마다 당하는 곽휘운도 문제긴 하지만.

아마 마교 교주를 만나도 이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왜 저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신 겁니까? 말 한마디는, 편지 한 통은 괜찮지 않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대한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곽휘운였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이곳으로 왔다.

“곽 대주님이 죄송할 것이 뭐가 있으시겠습니까. 상황이 나쁜 것이겠지요.”

위하윤도 곽휘운의 상황은 이해를 했다.

아마, 누구에도 딱히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위하윤이 이곳 청해성까지 올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여기 이거 받으십시오.”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어 곽휘운에게 건내는 위하윤.

곽휘운은 종이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어보았다.

‘무림맹 청해지부로 위하윤과 남주학 등 멸마대 인원을 충원한다.’

짧은 내용.

하지만 곽휘운의 눈을 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그럼?”

“예. 오늘부터 같이 청해지부 소속입니다. 곽 지부장님.”

“하하. 잘 부탁드려요. 지부장님!”

곽휘운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곽휘운은 순간 골치가 살짝 아파져 옴을 느꼈다.

“그럼. 제가 머물 방은 어디인가요?”

“위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으로 위하윤을 안내하는 곽휘운.

아마 오늘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잠자기는 틀린 날이 될 듯 싶었다.

* * *

위하윤이 청해지부로 오고 나서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남정네들이 주변에서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하아,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

“하아, 그러게 말일세.”

어떻게든 위하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위해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놈팡이들이 많이 꼬인다는 것이었다.

“흐흐흐. 아가씨 오늘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남성의 목 위에 올려져 있는 남주학의 검.

“멀쩡히 살고 싶으면, 물러나세요. 짜증나니까.”

계속 꼬이는 놈들 때문에 지금 남주학은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꽤나 강하게 위협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남성은 서늘한 칼의 감촉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갔다.

곽휘운이 오늘 본 저런 놈팡이들만 열이 넘었다.

‘그렇다고 무림맹 지부 문을 닫을 수도 없고.’

무림맹 지부는 항시 문을 열어두는 것이 관례였다.

언제는 일이 있을 때 찾아오라는 뜻.

그래서 저렇게 남정네들이 아예 진을 치고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질리지도 않나 봐요.”

“하하, 하윤 소저의 미모라면 저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한심하긴.”

* * *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명의 중년인들.

한 명은 현 대검파 장문인 대검일군(大劍一君)장철기였고, 다른 한 명은 대검객인 허진청이었다.

“장문인. 이만 대검을 내려가겠소이다.”

“흥. 그깟 객잔 주인하나 처리 못하는 대검객은 필요 없다. 마음대로 하라.”

허진청의 말에 아니꼬운 말투로 답하는 장철기.

상당히 화가 날 법도 한 허진청이었지만, 크게 동요치 않았다.

하루 이틀일도 아니었다.

“최근 들어 하는 일도 없이 대검객의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잘되었군. 그간의 공로와 정이 있으니 검 한 자루와 옷 한 벌만 챙겨서 대검을 떠나라.”

사실 장철기에게 허진청은 눈엣가시였다.

언제나 자신의 일에 반기를 들었고, 명령조차 잘 듣지를 않았다.

대검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전대 장문인이 있을 때 대검을 위해 세운 공로가 대단했기에, 쉽사리 쫓아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자신이 제 발로 내려가겠다고 하니, 이때다 싶었다.

“알겠소이다, 장문인. 그럼.”

빠르게 장문인실을 벗어나는 허진청.

그의 얼굴에는 홀가분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제, 대검과는 안녕인가…….’

지금까지 평생을 받쳐온 대검파.

하지만 전대 장문인이 갑작스레 변고를 당한 뒤, 대검은 변해버렸다.

돈을 위해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고, 전부터 대검을 위해 모든 걸 받친 이들을 하나둘씩 쫓아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출신이 불분명한 인물들이 채워나갔다.

‘뭐, 언젠가는 쫓겨날 몸이었으니, 지금 나가는 것이 훨씬 좋을지도…….’

쫓겨날 운명이라면, 제 발로 나가는 것이 나았다.

잠시간 걷다보니 도착한 자신의 거처.

허진청은 대검객 옷을 벗어두고, 회의로 갈아입었다.

곱게 개어져 놓인 대검객 옷을 보니, 이제 정말 대검파와는 끝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뭐, 시원하군.’

허진청은 아직 남은 미련을 떨쳐내 보고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검파를 벗어났다.

조금 더 있다가는 또다시 대검에 발목을 붙잡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있어라! 대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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