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77화>
“그, 금룡남가!”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이라 칭해지는 금룡남가.
금룡남가가 자금을 대어 준다면, 충분하고도 남을 터였다.
“……그 말, 꼭 지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늘부로 우리 사마세가는 강서천가에 대었던 모든 자금을 회수할 테니까.”
자기 할 말을 마치더니, 휑하니 돌아가 버리는 사마적.
얼굴을 보니 분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곽 공자님…… 그리고 남 공자님…… 그렇게 신경을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천소소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처음 보게 된 인연일진대, 이렇게 막대한 지원을 해 준다니.
정말 곽휘운의 말처럼 곽휘운과 금룡남가가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의 강서천가는 저런 은혜를 갚을 여력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닙니다. 지금 바로 제 개인 자금을 강서천가로 보내 두겠습니다. 그리고 금방 금룡남가에서도 자금이 갈 것입니다. 친구의 친구가 어려운데 못 본 척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곽휘운은 남궁태산의 연인인 천소소가 곤란해 하는 것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 고맙다.”
천소소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고, 남궁태산도 그답지 않게 고마움을 표했다.
곽휘운은 썩 나뿐 기분은 아니었다.
“자자. 다들 일단 안으로 다시 들어가요. 해가 져서 날이 쌀쌀하네요.”
백리화가 얼른 천소소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일순간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에, 온몸에 힘이 다 빠진 천소소였다.
‘이거 첫날부터 일이 좀 많았군.’
막사로 들어온 곽휘운은 첫날부터 이래저래 일이 많이 생겼음에 쓰게 웃음 지었다.
[본좌가 보기에 너는 분명 일을 몰고 다니는 것이 분명하다.]
곽휘운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위에서 끊이지 않는 사건과 사고들.
이건 결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많았다.
“오늘은 다들 피곤하니, 이만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많은 일들에 다들 피곤할 터였다.
곽휘운은 다들 이만 돌아가 쉬기를 청했다.
“잠시 만요!”
그때 남주학이 쉬기 위해 흩어지려는 일행을 불러 세웠다.
“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남주학을 바라보니, 남주학이 씩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었다.
“한 잔씩 하고 주무세요.”
남주학이 꺼낸 호리병의 내용물은 바로 술이었다.
뽕.
호리병의 마개를 열자 주변으로 술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한잔하시면 피로가 조금 가실 거예요.”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곽휘운이었지만, 오늘은 한 잔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편안하게 쉴 수 있을 듯싶었다.
“좋아. 한잔하자.”
“저도 한잔할게요.”
“제가 껴도 될까요?”
그렇게 일행 모두가 하나둘 술을 한잔하기 위해 둘러앉았다.
“하하, 딱 한 잔씩 나올 것 같네요.”
쪼르륵.
각자의 잔에 가득 채워지는 술.
“위하여.”
“위하여!”
짠.
서로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치고, 그대로 목을 타고 술이 내려갔다.
뜨겁고 알싸한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크으.”
꽤나 강렬한 술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가슴속에 뭔가 쌓여 있는 것들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
“자. 이만 들어가지요.”
“그래.”
다들 술 한 잔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단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한 잔만 더 주세요…… 딸꾹.”
“……?”
그 주인공은 바로 백리화였다.
곽휘운은 조금 신기한 눈으로 백리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리 가주님이 술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군. 이렇게나 약하실 줄이야.’
지금까지 백리화와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낸 곽휘운이었다.
그런데 곽휘운은 술 한 잔에 백리화가 취할 것이란 예상은 못했다.
“가주님. 이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시룬데? 난 휘운 오라버니랑 같이 잘 건데?”
“예?”
다소 파격젹인 백리화의 발언.
곽휘운을 오라버니랑 부르고, 거기에다가 같이 잘 거라고 했다.
물론 술에 취해서 한 것이니 본심은 아닐 터다.
[술은 숨겨진 마음을 들추어내는 묘약이지.]
“제가 백리 가주님을 모시고 갈게요.”
“안 가! 안 갈 거야!”
천소소가 백리화를 데리고 들어가려 하자, 백리화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먼저들 들어가십시오. 제가 곁에 조금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결국 곽휘운이 백리화의 옆에 조금 더 있기로 했다.
그렇게 남주학, 남궁태산, 천소소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된 곽휘운과 백리화.
“가주님. 취하신 것 같습니다.”
“취하기는 뭐가 취해…… 나 안 취했어…….”
살짝 풀려 있는 백리화의 두 눈.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여동생이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휘운 오라버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죠?”
“물론입니다.”
“아뉘! 남자로서 좋아하는 거 아냐구!”
“……알고 있습니다.”
곽휘운도 백리화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을 뿐이었다.
백리화는 분명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면서 왜 그래…… 쿨…….”
백리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결국 잠이 들었다.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를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녀를 천소소가 있는 막사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가볍군.’
너무나 가벼운 백리화의 몸.
아마 말은 안했어도 분명 많이 고생하고 있을 터였다.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를 이미 잠들어 있는 천소소의 옆 침상에 눕히고, 자신도 잠을 청하기 위해 막사로 돌아왔다.
* * *
다음 날 아침.
백리화는 어색한 표정으로 곽휘운 앞에 섰다.
전부는 아니지만, 어제의 술주정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어제…….”
“하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곽휘운은 정말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백리화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술이 정말 약해서…… 한 잔은 괜찮겠지 했는데…… 요새 더 약해진 것 같네요…….”
“정말 괜찮습니다.”
뿌우우우우!
그때였다.
밖에서 생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작인가 보다.”
각자 개인 정비를 하던 일행들이 막사로 모였다.
“가자.”
남궁태산이 앞장서서 걸었고, 그 뒤를 일행이 따랐다.
“키야. 그새 사람이 더 늘어났나 보군.”
“그러게요. 뒤늦게 참가 신청한 사람도 있겠거니 했는데, 예상보다 더 많네요.”
어제보다 훨씬 더 많아진 인파.
정천맹 개파 대전이나, 무림신성대전을 할 때보다도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 흑룡상단의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걸어 나오더니 목청을 다듬는 것이 보였다.
일장연설을 하던 그는 이윽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생사회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생사회를 시작하겠소이다!”
“우오오오오!!”
흑룡상단 사람의 주최로 시작되는 생사회.
멀리 떨어진 곽휘운 일행의 귀에까지 목소리가 또렷이 전달되는 것을 보니, 꽤나 실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
“인원이 너무나 많은 관계로, 예선은 여러 사람을 모아 한 번에 진행하겠소!”
워낙에 많은 인원이 참여하다 보니, 초반은 난투전으로 진행하려는 듯 했다.
이름들이 호명이 되었고, 순식간에 비무대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올라섰다.
“그럼. 생사결회의 규칙을 설명드리겠소.”
규칙은 매우 간단했다.
어느 한 쪽이 죽거나, 불능이 되거나, 기권할 때까지 싸운다.
독, 암기 등 어떠한 방법을 써도 무방하다.
‘이 정도면 암투회보다도 더 살벌하군.’
사파의 무인들이 즐기는 암투회.
그것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대회였다.
하지만 그래도 독과 암기는 제한했는데, 이 생사회는 그런 제한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면 끝이었다.
“독과 암기를 조심해야겠습니다.”
“네.”
“주의할게요.”
곽휘운의 말에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들 어느 정도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어떤 암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크악!”
“커허억!”
어느 새 시작된 생사회.
그래도 나름 정도 무인들이 많이 모여서 그럴까?
처음부터 암수가 난무하거나 살수가 펼쳐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싸움이 격렬해지고, 하나둘씩 피를 보게 되면서 피와 살이 튀는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다른 참가자들 역시 혈투에 흥분했는지 괴성과 포효를 내지르며 싸움을 독려했다.
“우오오오오!”
“죽여! 죽여!”
확실히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점잔 빼는 비무보다 이런 피와 살이 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파가 주최하는 암투회가 굉장한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이유일 터였다.
“다음!”
다음 차례가 오기 전에 무대는 신속하게 정리되었다.
시체들이 치워지고, 부상자들이 실려 나갔다.
그리고 무슨 장치를 했는지 몰라도, 흘려진 피는 무대 아래로 모두 깨끗이 사라졌다.
“저 먼저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해라.”
“네에~!”
일행 중 가장 처음 나서는 이는 남주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