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76화>
“하하. 예.”
“백리세가의 앞날에 밝은 빛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넷.
그리고 인사가 끝나고, 천소소의 눈은 다시 남궁태산에게 향했다.
“자. 남궁 공자님. 연락을 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너무 이래저래 일들이 많아서…… 이게 정말 변명이 아니라…….”
천소소에게 딱 붙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는 남궁태산.
정말 그동안 보았던 남궁태산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쯧쯧. 사내놈이 저래서야 쓰겠는가. 본좌라면 당당히 신경 끄라고 했을 텐데.]
‘정말입니까?’
[험험…… 물론이다!]
곽휘운은 천홍이 약간 귀여운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 같기도 했다.
* * *
천소소도 일행에 합류를 했다.
두 개의 막사에 한쪽은 백리화와 천소소, 다른 한쪽은 곽휘운, 남궁태산, 남주학이 쓰기로 했다.
그렇게 다섯이 모여서 막 저녁식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이봐. 천소소. 여기에 있는 것 다 안다. 나와라.”
막사 밖에서 아주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듣자마자 천소소의 고운 아미가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일행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사마적.”
얼굴을 딱 보는 순간 ‘사기꾼’이라는 말이 생각날 만큼 얍삽한 인상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백리세가를 밀어내고 새롭게 천하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린 사마세가의 사람이었다.
사마적은 사마세가의 장남으로, 다음 사마세가를 이끌어갈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사마세가도 왔나 보군.’
최근 사마세가는 아무런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조금 곽휘운이 놀란 것이 있었는데, 사마적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자도 예전 남궁태산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군.’
예전의 남궁태산과 같은 수준이라면 결코 낮은 수준의 실력이 아니었다.
그 실력으로 검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마적이 지금 저런 실력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조용히 지냈다는 것이 의아했다.
사마적이 곽휘운 일행을 한 번 훑어보곤 거만하게 말했다.
“네 낭군님이 여기에 있는데, 외간 남자와 밥을 먹으려 하다니? 이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저는 당신과 혼약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멋대로 말하지 말아 주시죠.”
“뭐라?!”
사마적과 천소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남궁태산은 이게 무슨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천소소를 바라보았다.
분명 천소소는 남궁태산 자신과 혼약을 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
“하하하. 이미 가문 간에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닌가? 네가 거절해도 이미 정해진 일이다.”
백리소소는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인상만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당신들이 우리 세가의 약점을 틀어쥐고 일방적으로 하는 이야기 아닌가요?”
“일방적으로 하는 이야기라? 그럴 리가. 그쪽 세가에서 얼마나 우리를 부여잡고 사정을 했는데…… 이거 섭섭하군.”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말하는 사마적.
곽휘운이 들어 보니 사마세가가 무슨 술수를 부려, 강서천가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사마세가의 사마적이란 놈이냐?”
보다 못한남궁태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천소소의 앞을 막아섰다.
목소리에 가득한 적대감과 분노.
남궁태산도 지금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한 상태였다.
[그렇지! 때로는 여인을 위해 화도 낼 줄 알기는 해야지!]
‘아까와는 조금 말씀이 다른 듯합니다?’
[험험…….]
“아. 이거 검성께서 이 불초 사마적을 알아봐 주니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크크크.”
명백히 조롱기가 다분한 사마적의 말이었다.
“검성께서 저보다 먼저 소소와 혼담이 오갔다는 것은 알지만…… 며칠 전 상황이 크게 바뀌었으니, 이제는 마음을 접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남궁태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으로 천소소와 사마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 와라. 천소소.”
“아앗!”
그때 거칠게 천소소의 손목을 움켜쥐는 사마적.
천소소의 손목을 움켜쥔 사마적의 표정은 득의양양함, 그 자체였다.
무림에서 검성이라 불리는 남궁태산의 여인이었던 천소소를, 자신이 합법적으로 빼앗았다는 우월감이 만연했다.
“잠깐. 너. 그 손 놔라.”
차가운 목소리로 사마적을 불러 세우는 남궁태산.
남궁태산의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고, 결연한 의지만이 남아 있었다.
“제삼자는 이만 빠져 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그 손 놓으라고 했다.”
“크크크. 아무리 검성이라고 해도 이제는 남의 여자가 된 여인을 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사마적은 조롱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남궁태산이 천소소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둘 사이에 진지하게 혼담이 오갔다는 것 역시 잘고 알았다.
그래서 사마적은 자신이 천소소를 남궁태산에게서 빼앗은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지금 남궁태산이 저렇게 나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솔직히 이런 반응을 보고 싶어 이곳에 찾아온 것이니 말이다.
“아직 식도 안 올렸을 텐데, 벌써부터 네 여자라 하기엔 이르지 않나?”
“이미 가문끼리 이야기가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문끼리는 개뿔. 당사자가 싫어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지?”
천소소는 남궁태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조금 허술한 모습을 보여 주는 남궁태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두 눈엔 결연하고 신념에 가득 찬 빛이 가득했다.
맨 처음, 천소소가 남궁태산에게 반했던 그 눈빛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마적이 주변을 둘러보며 자랑하듯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누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어느새 주위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흥미진진한 싸움이 끝이 날까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세상의 눈이 두렵지 않습니까?”
“흥. 그런 건 조금도 두렵지 않지.”
“검성이라는 명성을 믿고 너무 막 나가는 것 같습니다?”
남궁태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쉬익.
사마적의 손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남궁태산의 검격.
이대로라면 사마적의 손목이 그대로 잘려 나갈 판이었다.
“쯧!”
사마적은 어절 수 없이, 천소소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손목이 잘릴 테니까.
그리고 사마적이 천소소의 손목을 놓은 그 순간, 남궁태산이 천소소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남궁태산의 품에 폭 안기게 된 천소소.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편 사마적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쳤다.
“진짜로 검을 휘두르다니!”
“어차피 생사회를 하러 온 것 아닌가? 미리 잘라 놔도 괜찮겠지.”
천소소를 품에 안고, 한층 더 여유로워진 남궁태산의 모습.
사마적은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이것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천소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우리 세가가 자금을 회수한다면, 너희 가문이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 *
강서천가는 강서성에 흑룡상단이 나타난 뒤로 큰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흑룡상단의 등장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상권이 무너져 내렸고, 자금줄이 끊어져 버렸다.
그렇게 강서천가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손을 내민 곳이 바로 사마세가였다.
강서천가는 급하게 사마세가의 손을 잡고, 사마세가의 자금력을 발판 삼아 다시금 자금줄을 살려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회복을 하려면 한참이나 남은 단계였다.
만약 지금 사마세가가 모든 자금을 회수해 버린다면, 강서천가는 다시 자금난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강서천가 내부에서 차라리 남궁세가에 도움을 요정하자는 의견도 나왔었다.
남궁태산과 천소소 간의 관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남궁세가에 도움을 요청하여 자금 지원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남궁세가에서 해 준 지원으로 한 사업들은 모두 실패를 하였다.
결국 남궁세가에서도 더 이상의 지원은 힘들다는 연락이 왔고, 강서천가에게 지금 남은 자금원은 사마세가뿐이었다.
“지금 당장 내 옆으로 돌아오면, 오늘 일은 내가 싹 잊어 주지.”
다시금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사마적.
사마적은 천소소가 자신의 옆으로 올 것임을 확신했다.
지금 강서천가의 목줄은 사마세가가 쥐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천 소저께서는 태산 옆에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곽휘운이 나섰다.
더 이상 남궁태산과 천소소가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강서천가의 자금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뭐라?”
“제가 자금 문제를 해결해 드린다고 했습니다.”
사마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다른 누군가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은 예상치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고치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 강서천가가 가진 빚이 얼마인 줄 알고 하는 소리십니까?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하나의 세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특히 세가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돈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마적은 곽휘운이 돈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 싶었다.
“걱정 마십시오. 여기 이 친구도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그때 곽휘운의 옆에 있던 남주학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금룡남가의 남주학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