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74화>
“광노(狂老)는 잘 풀어 놓았느냐?”
“예.”
흑룡상단의 지부장실에 있는 향초아와 그녀의 앞에 엎드려 있는 부학.
“광노가 무림의 눈을 돌릴 동안 준비를 잘 해 놓거라.”
“예. 알겠습니다.”
수 년 전,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절강성에 위치한 무림맹 소속 문파 몇 곳이 피바다로 변해 버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엔 기이한 점이 있었는데, 피바다로 변해 버린 문파들에 있던 시체들이 하나같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심장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향초아가 말하는 광노(狂老)였다.
광노는 본래 무림맹 소속의 무인으로서, 태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근무하며 주변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게…… 웬 책이지? 색깔이 거뭇한데…… 무공서인가?’
우연히 마공서 하나를 손에 넣게 된 그는 그 이후로 차츰차츰 변해 가기 시작했다.
성격이 폭급해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남들의 눈을 피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일도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에 대한 고찰조차도 할 수 없게 될 정도의 급격한 변화였다.
이내 마공서의 마기에 취해 완전히 미쳐 버린 광노는 자신의 손으로 가족과 주변 동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기에 이르렀고, 무림맹에서는 그런 그를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마공서의 위력은 무림맹의 생각보다도 대단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광노를 잡지 못했던 것이었다.
광노는 광노대로 무림맹을 증오했다.
완전히 미쳐 버린 광노는 무림맹에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을 죽인 이들이 모두 무림맹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크히히히히! 빌어 처먹을 무림맹의 끄나풀들! 내가 살아 있는 한 네놈들은 곱게 죽을 것이라 생각지 마라!’
반드시 쳐죽여야 할 원수 놈들.
무림맹은 끝끝내 광노를 잡지 못했고, 그렇게 광노는 순식간에 무림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향초아에 의해, 천하에 악명을 떨치던 광노가 갑자기 다시 무림에 나타났다.
* * *
곽휘운이 무림맹 보호 업소 표식을 받기 위해 무림맹 항주지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곽휘운은 항주지부에서부터 비릿한 혈향이 짙게 풍겨 나오는 것을 느꼈다.
‘웬 혈향이지? ……설마!’
끼이익.
재빨리 항주지부로 발걸음을 옮긴 곽휘운이 눈가를 찌푸렸다.
항주지부엔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널브러져 있는, 가슴이 뚫린 시체들.
살아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여 살아 있는 자를 찾기 위해,
시체 쪽을 여러 번 수색해 보았지만 역시나 모두 죽어 있었다.
“이런.”
[지독하구나.]
곽휘운이 급히 시체를 살펴보았다.
모두 똑같이 가슴이 뻥 뚫려 있었고,
하나같이 심장이 없었다.
모두 동일한 무공에 당한 듯싶었다.
그것도 아주 고강한 무공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건…… 단 한 명이 저지른 일이다!]
뚝. 뚝.
아직 피가 굳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참사였다.
곽휘운은 재빨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면, 범인을 찾을 수도 있었다.
‘흔적이 있다.’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진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타닷-
재빠르게 흔적을 따라 움직이자, 금방 범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광노였다.
광노가 희번득 눈을 뜨며 곽휘운을 쳐다봤다.
그의 쩍 벌어진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히히히. 너는 뭐지? 너도 무림맹이냐?”
“당신입니까? 무림맹 지부의 모두를 죽인 사람이?”
“맞아. 내가 그랬지. 크히히히.”
“…….”
콰아아아-
광노와 곽휘운의 사이에서 기의 충돌이 일어났다.
곽휘운은 광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광노도 곽휘운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광노가 점점 흑마화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천홍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마공에 사로잡혀 미쳐 있는 자로군.]
그가 보기에, 지금의 광노는 마공의 힘에 완전히 사로잡혀 미쳐 있는 상태였다.
큰 힘을 주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정신이 나가 버리는 류의 극악한 마공.
그런 만큼, 현 상태의 광노는 최고조의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내 광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곽휘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곽휘운의 눈은 정확했다.
광노가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팟-!
곽휘운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찔러 들어오는 광노의 손.
광노의 손에는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강기가 가득 둘러져 있었다.
쾅!
곽휘운은 곧바로 휘운으로 광노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곧바로 광노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콰각. 촤악!
하지만 광노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비틀어 곽휘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다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어깻죽지에 피가 솟구쳐 올랐다.
“크히히히. 아프다. 아퍼!”
광노는 단 일 합 만으로 곽휘운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승산이 없다고 느낀 걸까?
“크히히히. 다음에. 보자.”
광노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장 난 무릎으로 쫓아가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곽휘운의 눈매가 좁혀졌다.
극도로 미치게 되면 극도로 단순해진다더니,
딱 광노와 다름없었다.
‘이런…… 놓쳤군,’
[아주 재빠른 놈이구나.]
곽휘운은 일단 근처의 개방 분타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근방의 무인들에게 이 사실을 퍼뜨려야 했다.
개방 분타에 도착한 곽휘운은 무림맹 항주지부가 당했다는 사실과 자신이 본 흉수의 특징들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모든 것을 전하고, 개방 분타를 빠져나온 곽휘운이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봤다.
‘생사회를 얼마 안 남겨 둔 이 시점에서 갑자기 저런 인물이 날뛴다라……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사회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공교로운 시기에 나타난 미치광이.
이 생사회를 주목하고 있던 무림맹의 눈은 분명 그 미치광이에게 돌아갈 터였다.
그렇게 무림맹의 시선이 거두어진 순간은, 음지의 세력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기획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가 될 터였다.
어느 시대든,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음지의 세력이 창궐하기 마련이다.
무림맹은 이를 잊지 말고 항상 대처하는 자세를 가지는 게 좋을 것이다.
* * *
흑룡상단의 주최하는 생사회가 열리는 날이 밝아 왔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네. 끝났어요.”
원래는 곽휘운만 가기로 한 생사회였지만, 자신도 직접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백리화와 오랜만에 힘을 쓰고 싶다는 남주학의 요청으로 결국 셋이 같이 생사회에 가기로 하였다.
객잔은 그동안 백리화에게 착실히 배운 황혜린이 맡기로 했다.
“그럼, 가시지요.”
“네!”
“네에~”
곽휘운과 백리화, 남주학은 곧바로 흑룡상단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가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으아……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백리화는 흑룡상단으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 조금 질색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발짝을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였으니 말이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길을 가는 중에도 계속 어깨를 부딪치는 상황이 자주 재연되었다.
그렇다 보니, 사소한 소란도 왕왕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생각보다 수상한 자들이 없군.’
곽휘운은 흑룡상단으로 향하는 길에 주변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걸었다.
광노 같은 음산하고 난폭한 기운이 있다면 곧장 배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흑룡상단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평범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지.’
암중 세력이 정확히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 수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생사회에는 고관대작들도 참석하는 자리란 것이었다.
주변을 지키는 호위무사나 경비병들이 많을 테니, 말도 안 되는 참사가 벌어질 확률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곽휘운의 귓가에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휘운. 너도 참여하냐?”
남궁태산이었다.
“음? 수련은 끝이 난 것인가?”
“그래. 딱 수련이 끝나자마자 여기 생사회를 지켜보라는 임무를 받고 방금 도착했다.”
남궁태산은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무림맹으로부터 이 생사회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때마침 수련의 성과를 보고 싶었던 남궁태산이이기에, 지체 없이 임무를 수락하고 항주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호오? 저 아이도 꽤나 대단하구나. 너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본좌의 왼팔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은 재능이다.]
천홍은 남궁태산을 보고 살짝 감탄했다.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곽휘운에 비해서 부족할 뿐이지, 분명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럼 일단 같이 움직이세.”
“그래.”
그렇게 남궁태산까지 추가된 일행은 개회식이 열리는 비무대로 향했다.
“이것 봐라? 아주 작정했나 본데?”
개회식이 열리는 비무대가 있는 곳.
본래 정천맹이 만들어 놓았던 비무대 말고도, 그 옆에 몇 개의 비무대들이 새롭게 생겨나 있었다.
흑룡상단이 생사회에 만전을 기할 생각으로 준비를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곽휘운 일행은 비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자.
“우오오오!!!”
“와아아아!!”
“우오오오!!!”
“와아아아!!”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성 소리가 신호라도 되듯, 텅 비어 있던 단상에 한 사람이 올라왔다.
흑룡상단 항주지부장이자 개최자인 향초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흑룡상단 항주지부를 맡고 있는 향초아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