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53화>
다음 날 아침.
수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봉황전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비무대 위에 올라 있는 백리화와 서이린.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백리화는 백리세가를 위해, 서이린은 자신의 광명을 위해 반드시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다.
“백리세가의 가주님이랑 대전이라니, 영광이네요.”
정중하게 말하는 듯 했지만, 명백히 조롱이 담겨 있는 말투였다.
“홍매화님과 대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입니다.”
물론 백리화는 조금도 동요치 않고, 차분히 대응했다.
지금 백리화는 기분 좋은 긴장감에 오히려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 상태였다.
스릉.
가볍게 뽑혀져 나오는 검.
백리화는 가만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이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겼다.
꾸욱.
더 강하게 검을 움켜쥐는 백리화.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서이린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시오!”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백리화가 먼저 움직였다.
서이린의 주변을 가득 채운 백리화의 검영.
지금까지 수많은 무인이 이 백리화의 검영을 막지 못해 패배를 선언했다.
하지만 서이린은 지금까지 백리화가 상대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의 고수.
“흥!”
서이린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진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이린을 홍매화라 부르게 해 준 홍사검기(紅絲劍氣).
홍사검기가 얇은 실처럼 주변으로 너풀너풀 퍼지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서이린의 홍사검기에 닿은 백리화의 검영들이 그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이린의 검이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캉! 캉! 캉! 카가가각!
서이린의 홍사검기와 연신 부딪치는 백리화의 검영.
하지만 아무래도 경험도 많고, 무공도 오래전부터 탄탄히 익혀 온 서이린이 조금씩 백리화를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흐읏!”
백리화는 얇은 홍사강기에 검이 부딪칠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힘없이 나풀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이 어마어마했다.
‘부딪치면 안 돼.’
백리화의 검이 홍사검기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짧은 사이에 백리화는 해답을 찾은 것이다.
캉! 캉!
서이린은 순식간에 변화해 자신을 압박해 오는 백리화의 검에 놀랐다.
‘얕보면 안 되겠어.’
백리화도 나름 결승까지 올라왔으니 실력이 있다고 생각한 서이린이었다.
범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서이린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완전히 찍어 눌러 주지.’
솨아아아.
서이린의 홍사검기가 한층 더 많은 양의 실을 내뿜기 시작했다.
검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촘촘해진 홍사강기.
백화린은 더 이상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
“이번엔 제가 가죠!”
백리화를 향해 몸을 날리는 서이린.
그녀의 홍사검기가 사방을 뒤덮으며 백리화를 압박해 갔다.
캉! 캉! 캉!
백리화가 서이린의 홍사검기를 최대한 피해 내며 검을 움직였지만,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최근 영약으로 내공이 많이 늘어난 백리화였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절대적인 내공의 양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캉!!
훨씬 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뒤로 쭉 물러나는 백리화.
그리고는 검을 다시금 고쳐 잡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 백화환영검. 제 일초. 개화.
백리화의 주변에 나타난 수많은 검영.
처음에 보여 줬던 검영보다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하얗게 빛나며 꽃모양을 하고 있는 검영은 일견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갑니다.”
* * *
곽휘운은 백리화의 검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자신이 보여 준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백리화의 백화환영검의 모습.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본 것만으로 저렇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다니.’
여타 다른 무인이라면, 보고 흉내를 내는 것도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저 한번 본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곽휘운도 이 정도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적은 내공으로 최고의 효율을 내고 있어.’
백리화는 가진 내공이 적기 때문에 많은 수의 검영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검영의 크기를 작게 만들어서 그 수를 늘렸고, 백화환영검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름은 백화검기(白花劍氣).
탓.
탓.
다시 움직이는 백리화.
서이린도 백리화의 무공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리화의 백화검기와 서이린의 홍사검기가 격돌했다.
촤라라락.
서이린의 홍사검기에 맥없이 갈라지는 백리화의 백화검기.
꽃이 갈라지고 꽃잎이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 백화환영검. 제 이초. 화편(花片).
“앗!”
흔들흔들 움직이며 서이린의 홍사강기 사이사이를 파고 들어오는 꽃잎.
제각각 움직이며, 수없이 많은 꽃잎이 서이린을 향해 쏟아졌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
휙. 캉! 휘익. 카캉!
결국 모든 꽃잎을 일일이 제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고, 결국 몇 개의 꽃잎이 서이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갔다.
흩날리던 꽃잎들이 순간 서이린에게 쇄도했다.
촤아아악.
그대로 서이린의 옷이 찢어졌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큰 상처로 이어질 수 있는 공격.
백리화가 무공을 겨루는 대전인 만큼 사정을 둔 것이었다.
실전이었다면 명백한 서이린의 패배.
“이익.”
하지만 서이린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비화룡 위하윤도 아니고, 망해 버린 백리세가의 가주에게 질 수는 없었다.
솨아아아악.
더욱 더 붉고, 더욱 더 많은 홍사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약간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 서이린의 모습.
“내가 이길 거야!”
홍사검기가 백리화의 사방을 휘감기 시작했다.
쉬이익. 쉬이익.
촘촘한 검기의 그물이 백리화를 뒤덮었고, 빠져나갈 곳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백리화를 향해 조여 왔다.
백리화는 재빨리 수비태세를 취했다.
- 백화환영검. 제 삼초. 배뢰(蓓蕾).
백리화를 완전히 감싸는 백화검기.
그 모습이 마치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카가가가각.
크그그그극.
팽팽한 힘의 싸움.
하지만 역시나 내공이 부족한 백리화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콰창!
결국 백리화의 꽃봉오리가 깨져 나가고 말았다.
“큽!”
내상과 함께 어깨에 상처를 입은 백리화.
“제 패배……. 앗!”
백리화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으나, 서이린의 홍사검기가 계속해서 백리화를 향해 쇄도했다.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해 낸 백리화.
그런 백리화를 향해 서이린의 홍사검기가 집요하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상대를 죽이려는 듯이 살기 넘치는 공격.
“그만하라!”
서이린의 살기 가득한 공격에 대전의 중지를 외쳤지만, 서이린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내공을 끌어올려 백리화에게 쇄도했다.
서이린의 홍사검기가 무차별로 백리화를 공격해 들어갔다.
카캉! 캉! 캉!!
촤아악.
“흐읏.”
엄청난 내공이 실린 서이린의 연속 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쭉 물러난 백리화.
이미 백리화의 내공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황.
이쯤이면 대전을 멈출 만 했지만, 구파일방 측의 입김이라도 있던 것일까?
아무도 대전을 멈추려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백리화를 꺾어 놓으려는 듯이 말이다.
“하앗!”
누군가 멈춰 주지 않는다면 끝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백리화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어 검을 들었다.
다시금 주변에 나타난 백화검기.
수도 적어지고, 빛도 희미해진 모습.
- 백화환영검. 제 일초, 개화.
서이린의 홍사검기에 맞서는 백화검기.
하지만 전처럼 꽃잎으로 흩날리지 못하고, 그대로 홍사검기에 의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에 눈을 빛내는 서이린.
서이린은 지금 남모르게 전음으로 지령을 받은 상태였다.
[백리세가의 가주를 완전히 망가트려라.]
그래서 서이린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했다.
거침없이 내공을 끌어올려, 내공의 힘으로 백리화를 압박했다.
“하악. 하악.”
완전히 지쳐 버린 백리화.
이제 더 이상은 한계였다.
내공은 완전히 말랐고, 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서이린은 이런 백리화의 상태를 곧바로 눈치 챘다.
‘단전을 파괴시켜 주겠어.’
서이린의 발에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대로 백리화의 단전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단전에 내공을 실린 공격이 가해진다면, 그대로 단전이 부셔질 것이다.
무인에게 단전이 부셔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그만 여기까지 하시지요.”
봄바람과 같이 따뜻하지만 차분한 목소리.
백리화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서이린의 발이 그대로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개, 객주님.”
“고생하셨습니다. 가주님.”
서이린의 발을 잡은 주인공은 바로 곽휘운이었다.
* * *
‘저건 좀 선을 넘은 것 같은데?’
분명 백리화가 놀라운 실력으로 서이린의 옷을 찢었을 때 대전은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전.
그리고 이어지는 살기가 넘쳐흐르는 서이린의 공격.
거기에 더해 처음에는 중지하라 외치던 심판자도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입을 꾹 닫고 대전을 관망하기 시작했다.
‘입김이 들어갔군.’
곽휘운은 구파일방 측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런 짓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작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중단시켜야 하나?’
곽휘운은 곧바로 이 대전을 중지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투지로 반짝이는 백리화의 눈을 보고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백리화에게 조금 가혹할지 모르지만, 이 대전이 끝나면 분명 백리화는 또 다시 크게 발전할 터였다.
‘정말로 악독하군.’
곽휘운은 서이린의 발에 내공이 모이는 것을 감지한 순간, 구파일방측을 노려보았다.
단전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정말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슥.
곽휘운의 신형이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서이린의 발을 잡고 있었다.
“백리 가주님의 패배로 하고 대전은 끝내겠습니다.”
곽휘운은 그대로 서이린의 발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휙.
그리고 곽휘운은 바닥에 털썩 앉아 있는 백리화를 들어 안았다.
“어맛!”
“가시지요.”
백리화는 갑작스럽게 들어 안는 곽휘운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몸에 도저히 힘도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곽휘운의 품이 너무나 따듯해 가만히 있었다.
“어딜 가!”
완전 무방비인 곽휘운을 향해 검을 내뻗는 서이린.
곽휘운을 찔러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 정도는 내어 위협을 하려는 목적이었다.
“무방비한 상대의 뒤를 찌르는 것이 명문 정파의 무인이 할 짓입니까?”
곽휘운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구름이 피어올랐다.
쩌저저적.
서이린의 검뿐 아니라, 몸까지 얼어붙었다.
그대로 얼음조각처럼 제자리에 얼어붙은 서이린.
“이게 무슨 짓이냐!”
화산파의 장문인인 매화일검(梅花一劍) 차전악이 이 모습에 호통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