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51화>
점혈이 풀리면서 깨어난 전후종은 싸늘해진 무당파 수뇌들의 시선을 느끼며 절망했다.
장문인이 전해 준 검도 반으로 동강 내 버렸으며 비무에서도 꼴사납게 졌다.
거기에 더해 참마룡 강경산까지 다시금 나타나면서, 전후종의 입지는 바닥을 향해 버렸다.
‘제길! 제길! 제길!’
속으로 분을 삭이는 전후종.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일이 반대로 결과를 내어버렸다.
이렇게 무림신성대전이 끝나 버린다면, 자신은 더 이상 장문인이라는 자리에 도전하지 못 할 터였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전후종도 지금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신성대전에 나가 봐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는 힘들 터였다.
‘그렇다고 단기간에 올릴 방법이…….’
단기간에 실력을 올리는 방법은 영약이 아니라면 솔직히 없었다.
보통 영약으로는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전후종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홀로 밖으로 나섰다.
저벅. 저벅. 저벅.
정처 없이 길을 걷던 전후종.
그런데 그때 그런 전후종의 앞으로 가로막는 신형이 하나 나타났다.
“클클. 분한 일이 있는가?”
“음?”
죽립을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목소리로는 나이 많은 노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던 길 가시오.”
평소의 전후종이라면 분명 노발대발하며 한소리를 날렸을 테지만,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에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
“자네의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뭐요?”
“내가 자네에게 힘을 주지. 자네는 그 힘으로 이번 신성대전에서 파란을 일으키기만 하면 되네. 어떤가?”
“힘을 준다? 허! 이제는 별 미친 사람도 꼬이는 군.”
묘한 기운을 풍긴다지만,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노인.
전후종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힘이 필요 없나?”
쿠우웅.
순간 주변을 짓누르는 엄청난 기운이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전후종은 이 엄청난 기운에 노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전후종이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무인보다도 거대한 기운.
무당파의 장문인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었다.
“어떤가? 이제 좀 이야기를 들어볼 텐가?”
“어떻게 힘을 주겠다는 겁니까?”
말투마저 조금은 공손해진 전후종이었다.
노인이 마음먹으면 자신쯤은 그냥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으니 말이다.
딸칵.
화악!
노인이 목갑을 꺼내어 열었고, 그 안에서 엄청난 기운이 순간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크고 검은 단약 하나.
전후종은 그 단약의 자태에 완전히 눈을 빼앗겨 버렸다.
“소림사의 대환단보다도 뛰어난 것이네.”
“!!”
단 한 알로 죽은 자를 살리고, 망가진 내력까지 완전히 복구해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의 희대의 영단.
이런 대환단보다 뛰어난 영단이 있다?
당연히 거짓이라며 혀를 찰 만한 이야기지만, 지금 노인이 풍기는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단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인지, 전후종은 정말로 눈앞의 단약이 대환단보다 뛰어난 것일 거라 생각했다.
‘가지고 싶다.’
깊은 욕망이 솟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것만 있다면, 능히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틀어졌던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자. 받게 자네 것일세.”
휘익.
노인이 목갑을 전후종에게 던졌고, 전후종은 재빨리 그 목갑을 받아들었다.
딸칵.
다시 한 번 더 목갑을 열어 보는 전후종.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욱 더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단약.
전후종은 당장 섭취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재빨리 품안에 넣었다.
“원하는 게 정확히 뭡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가 신성대전에서 파란을 일으키기만 하면 되네.”
“정말 그거면 충분합니까?”
“그렇다네. 그거면 충분하지. 클클.”
전후종은 마지막 노인의 웃음소리에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눈앞의 탐욕에 그런 느낌은 애써 지워 버렸다.
“자. 이만 가 보게.”
노인은 전후종이 지금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노인이 보아왔던 이들의 대부분이 같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이, 이만 가 보겠소.”
떨리는 눈으로 노인을 한번 보고는, 재빠르게 자리를 떠나는 전후종.
노인은 그런 전후종의 뒷모습을 비릿한 조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클클. 작은 여흥 정도는 되겠지.”
말과 함께 노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고, 방금 전 노인과 전후종이 있던 거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고요해졌다.
* * *
무림신성대전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
드디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신성대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례 없는 행사에, 무림맹 전력의 오 할 이상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휘운. 나 왔어.”
“하하. 어서 오십시오. 하윤 소저.”
비화룡 위하윤이 다시 돌아왔다.
곽휘운은 그녀가 떠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는데, 검성 남궁태산도 괴불룡 각운도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들 좋은 성과를 얻으신 듯합니다.”
“휘운 덕분이야.”
“맞소. 곽 대주 덕분이오.”
위하윤과 각운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남궁태산도 말은 하지 않지만 곽휘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들이 강해진 것은 분명 곽휘운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너는 대전에 출전 안 하냐?”
“나는 그저 객잔 주인일 뿐이네.”
남궁태산은 곽휘운이 무림신성대전에 출전하기를 바랐다.
솔직히 그가 출전하지 않는다면, 크게 재미있지 않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나는 출전하지 않지만, 백리 가주님이랑 중천, 추삼은 출전을 하기로 했네.”
“중천 그놈이?”
남궁태산은 제갈중천이 대전에 출전한다고 하자 조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갈중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비무나 대회에 나선 적이 없었다.
“백리세가의 이름을 걸고 출전 한다더군.”
“하! 제갈 가주님이 아시면 땅을 치시겠어.”
“아닐세. 아마 오히려 좋아하실 거네.”
곽휘운이 아는 제갈세가의 가주님이라면, 제갈중천이 이렇게 신성대전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분이었다.
“흠. 그런데 그 추삼인가 그분하고, 백리세가 가주님께서는 괜찮으실까?”
백리화와 추삼을 걱정하는 남궁태산.
제갈중천이야 어느 정도 실력이 검증된 고수이니 문제없을 테지만, 백리화와 추삼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거대한 대전에 위축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 무인 중에 위축되어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말이다.
“괜찮을 거네. 그리 약하지 않으니 말일세.”
곽휘운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둘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 * *
백리화는 바쁜 객잔 일을 끝내고 나면, 곧바로 무공 수련에 들어갔다.
무림신성대전이 백리세가를 알릴 기회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다.
‘절대로 내가 누가 되어선 안 돼.’
지금까지 곽휘운이 백리세가를 이루어 주었다.
백리화는 여기서 자신이 잘못해서, 백리세가에 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더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휘익. 휙. 휙.
구슬땀을 흘리며 연신 검을 움직이는 백리화.
절정의 단계에 오른 백리화의 백화환영검은 수없이 많은 검영을 주변에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화려함.
“정말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십니다.”
“아. 오셨어요.”
곽휘운은 백리화가 무공을 봐줄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길이었다.
그리고 백리화가 검법을 펼치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채로 잠시간 지켜보고 있었다.
훌륭한 백리화의 검법에 곽휘운은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보고 또 봐도 놀라웠다.
“혹시 제가 검법을 펼치는 것을 보셨어요?”
“네. 봤습니다.”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할까요?”
“음. 제가 보기에는 조금 긴장을 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가주님의 실력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 몸이 굳었습니다.”
“아! 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것이 지금 백리화의 몸을 조금 굳게 만들고 있었다.
“자. 저와 대련을 한번 해 볼까요?”
“네! 좋아요.”
스릉.
백리화와 곽휘운 둘 다 검을 꺼내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백리화의 몸에서 예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갈게요.”
“네.”
탓.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백리화.
그녀의 검이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검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품은 검영.
이 수많은 검영에 허초와 실초가 뒤섞여 있었는데, 눈으로는 구분하지 못할 만큼 똑같았다.
‘방심하다가는 큰일 나겠어.’
곽휘운은 이제는 정말로 백리화를 상대할 때 방심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주학과 제갈중천을 이제는 거의 따라잡은 백리화.
오늘 이 대련이 끝나면, 또 얼마나 성장할지 궁금했다.
카강! 캉! 캉!
연신 울려 퍼지는 검과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
곽휘운은 가만히 받아주는 것을 넘어서, 백리화의 무공 사이사이 슬쩍 검을 찔러 넣기도 했다.
백리화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말이다.
“하앗!”
구석구석을 찔러오는 곽휘운의 검에 당황도 했던 백리화지만, 순식간에 보완해서 막아내고 반격까지 해왔다.
마른 천이 물을 빨아들이듯 엄청난 속도로 모든 것을 흡수해 나가는 백리화.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를 보면서 조금 욕심이 났다.
“백리 가주님.”
곽휘운은 잠깐 대련을 멈추고,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백리화를 바라보았다.
“제가 하는 것을 한번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네.”
곽휘운은 다시 한 번 검을 고쳐 잡았다.
백화환영검을 펼치기 위한 자세.
- 백화환영검. 제 일초. 개화.
백리화가 펼쳤던 백화환영검보다 수 배는 많은 검영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검들이 하얀 빛을 냄과 함께 은은한 꽃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리화와는 다르게 모든 검영이 각기 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감각을 속이는 검법.
백화환영검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제가 본 백화환영검의 모습입니다. 백리 가주님께서는 저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시겠지요.”
지금 펼친 백화환영검은 곽휘운이 해석한 모습이었다.
똑같은 무공을 익혀도 익힌 사람에 따라 그 무공이 조금씩 달라진다.
아마 백리화가 해석하는 백화환영검은 곽휘운과 다를 터였다.
그럼에도 곽휘운이 백리화에게 무공을 보여 주는 이유는, 그녀라면 여기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
백리화는 곽휘운의 백화환영검을 본 후 아무런 대답도 없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곽휘운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또 다시 벽을 깨부수려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백리화의 입이 열렸다.
“객주님. 제 검을 한번 봐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