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47화>
텁. 텁.
너무나 가볍게 곽휘운의 손에 잡혀 버린 두 사람의 검.
주변에 지켜보던 이들도, 싸움을 하던 둘도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냥 검을 잡는 것도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힘든데, 지금은 검기를 머금은 검을 맨손으로 잡은 것이었다.
“아직 대전까지는 시일이 남았습니다. 다들 이만 자중해 주시길.”
싸우던 둘은 일순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검을 멈추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다 더 하기에는 지금 자신들의 검을 잡고 있는 곽휘운의 존재가 문제였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시지요.”
쩌저적.
곽휘운이 붙잡은 부분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소빙룡!’
사람들은 곽휘운의 별호가 소빙룡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이대로 가면 검이 완전히 얼어붙고, 그대로 부셔져 버릴 터.
“여기까지 하지.”
“돌아가겠다.”
결국 둘은 검을 회수하고,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휴.”
돌아가는 둘을 보며 곽휘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터였다.
아마 무림신성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잠도 편히 못잘 듯 싶었다.
“호오? 소빙룡이 소문보다 더 대단하다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보군.”
어둠을 헤치며 하나의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팍에 새겨진 ‘무당’이라는 자수가 눈에 띠었다.
이번 무림신성대전을 위해 찾아온 무당파의 젊은 제자들이었다.
“이제 다리는 괜찮은가 봐?”
그 중 가장 앞에 서서 곽휘운을 보란 듯이 도발하는 청년.
무당파의 제자들 중 두 번째 서열에 있는 청검수(靑劍手) 전후종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싸움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곽휘운을 보고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놈을 내가 꺾으면,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전후종의 앞을 가로막던 거대한 벽인 강경산이 곽휘운에게 꼴사납게 패배했다.
그 후로 강경산은 수련동에 쳐 박혀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그동안 전후종은 무당파 내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혀 나갔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강경산의 입지는 견고했는데, 전후종은 이번에 자신이 곽휘운을 꺾는다면 확실히 차기 장문인으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크게 불편할 것은 없습니다.”
곽휘운은 최대한 조용하게 상황을 넘어가고 싶었다.
아직 무림신성대전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일이 터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니지. 다리가 정말 괜찮은지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거든.”
스릉.
검을 뽑아드는 전후종.
전후종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면서 곽휘운과 싸움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이유에 이의를 제기하며 말리려는 이는 없었다.
전후종은 무당파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현 무림에서 무당파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간 큰 무인은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이런.”
곽휘운은 조용히 상황을 넘기기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해야지.’
어차피 자신과 무당파의 관계는 더 이상 악화될 것도 없었다.
백리세가를 위해서 참을까 싶었지만, 지금 자신이 물러난다고 저들이 이런 짓을 그만둘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나았다.
“제 다리가 멀쩡한지 확인시켜 드려야겠군요.”
“자. 간다.”
전후종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는 이미 강경산을 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주변에서도 자신을 무당제일의 기재 중 하나라고 추켜세워 주었으니 더욱 더 자신만만했다.
탓.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곽휘운에게 달려드는 전후종.
전후종의 검은 시릴 정도로 푸른색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를 청검수라 부르게 만들어 준 ‘청혼검법(靑魂劍法)’이 발현된 것이었다.
휙. 휙.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며 곽휘운을 압박해 움직이는 전후종의 검.
곽휘운을 그 모습을 미소를 지은 채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종의 검이 곽휘운의 코앞에 당도했을 때.
텁.
곽휘운의 손에 전후종의 검이 잡혔다.
“억!”
“헉!”
당황스러운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검이 잡힌 당사자인 전후종의 눈은 지진이 난 듯 떨리고 있었다.
보통의 검기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닌 청혼검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맨손에 잡히다니?
‘무슨 이런 일이!’
“이익!”
전후종은 재빠르게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곽휘운의 손에 잡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쩌저저적.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하는 전후종의 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부셔져 내렸다.
퍽. 파사삭.
완전히 얼음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전후종의 검.
“이, 이놈!”
전후종은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검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무당파에서 인정받은 제자들에게만 내려주는 검이었다.
검을 받는 것만으로도 일생의 영광이나 다름없는 것인 만큼 소중히 다루던 검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눈앞에서 가루가 되어 버리니 미칠 듯한 분노가 몰아쳤다.
“어떻습니까? 제 다리는 멀쩡한 것 같습니까?”
“감히 내 검을 이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곽휘운의 말은 지금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전후종이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오로지 곽휘운을 벌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후종. 꼴사납구나.”
그때 주변의 인파를 가르며 한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무당파의 제자들은 그 중년인을 보자 모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전후종은 어쩔 줄 몰라 하다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자, 장로님!”
* * *
무당파의 장로이자 무림 십객의 한자리를 맡고 있는 십절검객(十節劍客) 천호창은 일이 있어 조금 늦은 시간 백리세가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인파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왔는데, 무당파의 제자가 꼴사납게 당하는 모습에 급하게 모습을 나타내었다.
“너희들은 이만 모두 돌아가라.”
“하, 하지만.”
“어서 돌아가라.”
“예……. 알겠습니다.”
전후종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천호창의 서슬 퍼런 눈을 보고는 입을 닫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무당파 제자들이 돌아가고, 천호창은 곽휘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군. 곽 대주.”
“하하. 서로 얼굴을 볼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입은 웃고 있었지만, 곽휘운의 두 눈은 천호창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다리는 잘 나은 모양이군 그래.”
입가에 약간은 조소를 머금고 말하는 천호창.
그 모습에 곽휘운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지기 시작했다.
“예. 허접한 자들을 이기기에는 충분할 만큼 괜찮습니다.”
곽휘운의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허접한 자들에는 무당파의 제자도 포함되는 것이니 말이다.
“못 본 사이에 혀가 날카로워졌군.”
“하하.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니 변했나 봅니다.”
곽휘운이 이처럼 천호창을 도발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천호창이 곽휘운의 무릎을 박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을 떠나 객잔을 하겠다더니, 이런 곳에서 다 망한 백리세가를 키우고 있을 줄은 몰랐군.”
“완전히 무림을 떠난다고 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하하. 맞는 말이군. 그런데 말일세. 조금 더 조심하지 그랬나. 정천맹 때문에 조금 무림맹에서 대우를 해 줬다고, 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면 오래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걸세.”
천호창은 방금 전 곽휘운이 공개적으로 무당파의 제자를 욕보인 것을 경고했다.
이렇게 창피를 당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무당파라는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남은 다리마저 부셔지고 싶은가?”
“그러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저는 더 이상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곽휘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기운.
천호창은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기운에 저항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내공을 끌어올려도 조금도 짓누르는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흐읍!”
천호창의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다리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꼴사납게 바닥에 무릎을 꿇기 직전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솨악.
순식간에 기운이 걷혔고, 천호창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지는 곽휘운.
천호창은 그런 곽휘운의 뒤를 노려보다가, 주변에 눈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놈! 절대 오늘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천호창은 속으로 지금의 일을 반드시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 * *
“흠.”
곽휘운은 방으로 돌아와 잠깐 동안 생각에 빠졌다.
조금 전 있었던 무당파와의 충돌.
물론 당연히 예상한 일이었다.
다만, 곽휘운의 생각보다 충돌이 훨씬 빨랐고, 여기서 자신의 무릎을 부순 천호창을 만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나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나 보군.’
곽휘운은 그 때의 일은 최대한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전 천호창의 얼굴을 보자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분노, 환멸, 회의감.
그 당시에는 최대한 덤덤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간 곽휘운이었다.
그대로 무당파를 쳐들어가 난장판을 벌이고 싶다고 생각을 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가 내부까지 적을 만들어 버린 꼴이 된 건가.’
외부에는 정천맹이라는 적이 있었고, 내부에는 무당파라는 적을 만들어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위협적인 법.
‘필히 어떻게든 복수를 하려 들 터인데…….’
절대로 그냥 넘어갈 무당파가 아니었다.
아마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하려 들 터였다.
‘객잔 식구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곽휘운은 무당파의 복수 대상이 객잔 식구들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곽휘운의 이 바람은 다음날 아침 곧바로 깨져 버렸다.
* * *
“이놈! 점소이 주제에 감히 무당파의 제자인 우리에게 대드는 것이냐!”
아침부터 고성이 터져 나오는 휘운객잔.
“음식을 드시지도 않고, 바닥에 버리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흥! 이런 쓰레기 같은 것도 음식이란 말이냐?”
무당파의 제자들과 춘삼이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유는 춘삼이 가져온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버리는 무당파 제자들 때문이었다.
황중식이 이번 무림신성대전 때문에 찾아온 이들에게 흠을 잡히기 싫다면서 만들어 낸 훌륭한 요리들이었다.
절대로 쓰레기라는 평가를 들으며, 그대로 바닥에 버려질 요리가 아니었다.
“이 요리는 저희 숙수님이…….”
“놈!”
슈욱.
갑자기 춘삼을 향해 일장을 뻗는 무당파 제자.
그는 이 건방진 점소이를 벌하기 위해 적당한 힘으로 일장을 날린 것이었다.
휙.
퍽.
“컥!”
하지만 춘삼은 무당파 제자의 일장을 피하고, 반사적으로 그의 복부에 일 권을 날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회피와 공격.
춘삼도 자신의 일 권이 이렇게 쉽게 적중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그간의 수련을 통해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기에 가능한 회피와 공격이었다.
물론 춘삼이 놀란 만큼 무당파의 제자들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은 금방 분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