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21화>
객잔이 하루를 마감하고, 모두 백리세가로 돌아오는 시간.
원래라면 다들 각자 수련을 하기 위해 흩어졌겠지만, 오늘은 다들 연무장에 모였다.
곽휘운은 대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부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백리화와 황혜린의 동의를 얻고, 모두들 대련을 지켜보게 했다.
“두 분 모두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휘운이 백리화와 황혜린의 정중앙에 서서 대련을 이끌었다.
백리화는 약간은 긴장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목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황혜린은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목검을 가볍게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었다.
‘흐음.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군.’
황혜린은 팽현옥에게 무공을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왔다.
팽현옥은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림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사람으로, 현 하북팽가주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황중식과 혼인을 하기 전에 무림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고수였다.
그런 팽현옥에게 무공을 배운 황혜린이니, 당연히 또래들 중에서도 나름 강자에 속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백리화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집중해야겠어.’
곽휘운은 자신이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되니 말이다.
“두 분 다 준비 되셨습니까?”
“네…….”
“네.”
긴장된 백리화의 대답과 밝고 힘찬 황혜린의 대답.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곽휘운의 말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황혜린도 백리화도 둘 다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선수는 양보할게요.”
황혜린이 선수를 양보했다.
통상적으로 고수가 선수를 양보하는 관례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 갑니다!”
백리화도 자신이 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양 않고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백리화의 가볍고 빠른 발놀림.
거기에 더해진 백화환영검은 나름 위협적인 모습을 자아냈다.
‘호오.’
곽휘운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백리화가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힌 시간도 짧고, 대련도 처음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탁. 탁.
하지만 황혜린은 조금도 당황치 않고, 침착하게 백리화의 공세를 목검으로 가볍게 쳐 내었다.
계속되는 백리화의 공세.
황혜린은 가볍게 백리화의 목검을 쳐내었는데, 백리화의 공세가 계속될수록 조금씩 뭔가 이상해져 갔다.
“!!”
“!!”
“!!”
곽휘운을 비롯해 남주학, 제갈중천, 팽현옥은 지금 백리화의 검을 보고 모두 놀라고 또 놀라고 있었다.
백리화의 검이 이 짧은 대련 와중에서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혜린이 백리화의 검을 막으면, 다음에는 더 빠르고, 더 막기 어려운 길로 백리화의 목검이 움직였다.
대련을 하는 중에,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발전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위험해.’
곽휘운은 지금 상황이 조금 위험하다고 봤다.
이렇게 황혜린이 계속 수세에 몰리면, 자기도 모르게 내공이 움직일 것이고, 그럼 큰 사고가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 대련을 중지시키기에는 백리화의 눈부신 진화가 너무나 아까웠다.
“하앗!”
그때 연신 백리화의 공세를 막아 내던 황혜린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황혜린은 대련을 통해 자신이 실력에 우위에 있음을 백리화에게 보여 주고, 곽휘운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 했다.
처음에는 역시나 황혜린의 생각대로, 백리화의 실력은 그저 그랬다.
그래서 가볍게 어울려 주었다.
너무 빨리 이기는 것은 재미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백리화의 공격이 점점 어려운 길로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황혜린은 이제 그만 대련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고 공세를 취하려 했지만, 백리화의 공세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어어?’
황혜린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꼴사납게 질 위기였다.
‘질 수 없어.’
황혜린은 백리화의 이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황혜린의 목검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만!”
곽휘운은 황혜린의 목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 즉 검기를 보자마자 바로 대련을 중지시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아직 백리화는 검기를 받아 낼 수준이 아니었다.
파각!
데구르르르.
곽휘운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기운이 황혜린의 목검을 정확히 강타했고, 목검의 절반이 부셔져 나가면서, 황혜린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황 소저. 검기는 쓰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죄, 죄송해요.”
황혜린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황급히 깨달았다.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 검기를 방출한 것이다.
황혜린은 실수를 깨닫고 급히 사과를 했다.
“하아. 하아.”
백리화는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완전한 집중상태.
백리화는 오로지 황혜린만 보고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끄, 끝난 건가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제야 조금 주변을 볼 여유가 생긴 백리화가 물어왔다.
“예. 대련은 끝났습니다. 백리 가주님.”
곽휘운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백리화에게 대답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황혜린이 재빨리 백리화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그녀는 그래도 잘못을 인정을 할 줄은 알았다.
“아니에요. 황 소저가 잘 받아 주신 덕분에 저도 많은 걸 깨달았어요.”
물론 황혜린이 원해서 계속 받아 준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황혜린이 처음부터 공세를 펼치지 않고, 수비만 한 덕에 백리화가 발전 할 수 있었다.
“자. 다들 대련을 지켜보고 느낀 것들이 있으실 겁니다. 오늘은 다들 각자 자유롭게 느낀 것을 바탕으로 수련하시기 바랍니다.”
곽휘운의 말처럼 춘삼, 추삼부터 남주학, 제갈중천까지 각자 방금 대련으로 느낀 것들이 있었다.
그대로 연무장에 가만히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는 이도 있었고, 검을 들고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다.
곽휘운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가, 아직까지 대련의 여운에 잠겨 있는 백리화에게 다가갔다.
“대련은 하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그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얼떨떨하네요.”
가늘게 떨리고 있는 백리화의 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모든 힘을 쏟아 부은 뒤 나타는 현상이었다.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첫 대련.
그것도 훨씬 강한 상대와의 대련이었다.
누구라도 긴장되고 떨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오늘 백리 가주님은 많은 것을 얻으셨을 겁니다.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 대련을 곱씹으면서 수련을 계속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네.”
곽휘운의 조언처럼, 백리화는 곧바로 머릿속으로 대련을 곱씹었다.
아쉬웠던 것과 보완할 점이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백리화는 순식간에 깊은 상념에 빠져 들어갔고, 곽휘운은 그런 백리화는 두고 황혜린에게 다가갔다.
“황 소저는 대련이 어떠셨습니까?”
“제 부족함이 너무나 절실히 느껴졌어요.”
“황 소저는 부족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된 것일 뿐입니다. 아마 다시 대련을 한다면, 황 소저가 쉽게 이기실겁니다.”
“그런데…… 오라버니께서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저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헤헷. 그럼 지금 당장 가르쳐 주세요.”
황혜린은 다시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곽휘운에게 착 달라붙었다.
방금의 대련이 분할 만도 하건만, 금방 잊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게 황혜린의 장점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이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기초 체력단련부터 시작하죠.”
“네에? 그건 지금하기에는…….”
“일단 여기 연무장부터 달리십시오.”
“하, 하지만…….”
“이걸 하지 않으시면, 무공을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너무해요! 붸~”
황혜린은 곽휘운에게 혓바닥을 쭉 내밀고는 그대로 연무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별 일 없으면 좋으련만.’
* * *
청송객잔.
3년 전 갑자기 항주에 등장한 곳이다.
월영루와 비견될 만한 규모의 객잔이 항주에 갑자기 나타나니 당연히 큰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이 항주에 이런 큰 객잔을 지은 것인지 궁금해 했지만, 무엇하나 밝혀진 것이 없었다.
당연히 갑자기 등장한 청송객잔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의 다른 객잔들이 손을 써봤지만 어느 것 하나 통하는 것이 없었다.
다른 객잔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서로 손을 잡고 값비싼 낭인들을 고용해 청송객잔에 난동을 부리게 했다.
그리고 그날 청송객잔의 이름이 온 항주에 퍼지게 되는 사건이 터졌다.
객잔들이 고용한 낭인들은 항주칠랑이라는 자들로, 항주 낭인들 중에는 당연히 최고로 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시 받은 대로 청송객잔에 가서 난동을 부렸는데, 그때 청송객잔의 호위라는 자가 나타나 그들을 막아섰다.
항주칠랑은 코웃음 치며 그를 무시했는데, 그 순간 항주칠랑 중 셋의 목이 잘렸다.
주변에 있던 그 누구도 도대체 어떻게 항주칠랑의 목이 잘렸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객잔 호위라는 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무영검객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치떴다.
무영검객.
그는 무림에서 가장 강한 이들을 지칭하는 이천(二天)팔왕(八王)십객(十客) 중 십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결코 객잔의 호위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지금 청송객잔의 호위로 나타난 것이다.
항주칠랑은 그대로 꽁지를 내빼며 도망쳤고, 이날 이후로 청송객잔은 무림십객이 지키는 객잔으로 항주에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과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청송객잔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고, 금방 항주에서 손꼽히는 객잔으로 자리 잡았다.
* * *
청송객잔의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곳.
보통이라면 객잔의 객주가 머무르는 곳이지만, 객주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로의 노인 한 명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의인, 그리고 무영검객 장호평이 안에 있었다.
“천수검문이 소빙룡에게 멸문 당했다?”
“예. 팔비가 올린 보고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게다가 회에 대해서 누설까지 했고?”
“예.”
흑의인과 대화하는 이는 초로의 노인.
그는 회의 항주 지부를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벌써 삐걱거리는 것은 좋지 않은데 말이야…….”
노인은 멋스럽게 자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막 회가 항주에서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벌써부터 삐걱거리는 잡음이 생겼다.
천수검문이야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라 없어진다 한들 상관없지만, 무림맹에 있던 소빙룡이 천수검문을 멸문 시켰다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에 회의 정체가 노출 된 것도 문제였고 말이다.
“소빙룡이랑 무림맹은 움직임이 있느냐?”
“아직은 없습니다.”
“아직은 없다라…… 그럼 우리가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지. 너는 그대로 일을 진행하라 일러라.”
“예.”
흑의인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노인과 무영검객만 남았다.
“이보게 호평. 자네가 한번 가서 보고 오게.”
“예.”
물론 그만큼 난동도 많이 늘었지만 남주학, 제갈중천의 선에서 정리가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