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5화>
“예?”
“호호. 농담입니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제가 그렇게 별로입니까?”
곽휘운은 현소월의 말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해했다.
현소월은 그 모습이 귀여워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 유명한 소빙룡께서 이리 귀여우신 줄 몰랐습니다.”
곽휘운은 완전히 현소월에게 말려들어 버렸다.
무공을 쓰고, 머리 쓰는 것은 나름 자신 있었지만, 이런 문제에는 완전히 젬병인 곽휘운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예.”
현소월은 어느 새에 앞에 있는 음식을 전부 깨끗하게 비운 상태.
현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곽휘운도 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화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현소월은 자리를 떠나기 전에 오늘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곽휘운이 백리세가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반증하듯 휘운객잔 옆에는 많은 전각들이 새롭게 올라서고 있었다.
곽휘운에 대해 궁금했기에, 많은 돈을 들여서 알아본 현소월이다.
하지만 도저히 곽휘운이 백리화에게 이렇게까지 해 줄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음. 운명 공동체? 라고 해야 할까요?”
“예? 그럼 이미 혼인을…….”
현소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곽휘운과 백리화가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것 같아서였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꿈을 위해 달려가는 친구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친구라……. 알겠습니다.”
곽휘운이 백리화를 친구라고 표현하자 현소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저 친구라면 아직은 안심이 되었다.
물론 오늘 본 백리화를 보면, 조금은 불안했지만 말이다.
“오늘 식사 정말 좋았습니다.”
“하하. 언제든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현소월은 곽휘운과 인사를 하고는 휘운객잔을 떠났다.
총총히 사라지는 현소월을 끝까지 바라보던 곽휘운은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백리 총관님 무슨 할 말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어요.”
* * *
결국 짓고 있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다.
오늘은 휘운객잔도 하루 문을 닫고, 모두 모여 새로운 전각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직 내부 물품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텅 비어 있는 전각.
제갈중천은 각 전각들을 돌아다닐 때마다, 진법에 대한 설명과 이 전각이 어떤 용도를 쓰일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환영진은 평소에는 발동하지 않도록 설계했소. 그리고 이 전각은 접객을 하는 용도를 쓰일 것이오…….”
제갈중천은 진법뿐 아니라, 다방면으로 능통했기에, 백리세가의 기틀을 잡아 주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곽휘운이 부른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가주전이 될 곳이오.”
딱 봐도 다른 전각들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전각.
한 세가를 이끄는 가주가 머무르는 곳이니,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자. 백리 총관님 들어가 보시지요.”
“네? 제, 제가 먼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백리세가의 가주는 지금 백리 총관님 아니십니까?”
백리화는 먼저 발걸음을 떼기 주저했다.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가주라 불리며 먼저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서 들어가세요. 백리 가주님!”
“네!”
남주학의 외침에 백리화는 마음을 다잡고 가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백리세가의 가주로서의 첫 발.
괜히 가슴에서 울컥하며 무언가 올라오는 백리화였다.
‘아버지. 보고 계세요?’
백리화는 백리세가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같이 있지는 못하지만, 분명 하늘에서 보고 계실 것이라 믿었다.
“백리 총관님…… 아니지. 여기서는 백리 가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지요.”
“그냥 총관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닙니다. 한 세가를 이끄는 가주님에게 그렇게 부를 수는 없지요. 객잔에서는 총관님으로 부르더라도, 이곳에 오면 가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지요.”
곽휘운의 말처럼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앞으로 백리세가에 관련 된 일의 전면에는 백리화가 나설 것이다.
그런데 총관님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일단 백리 가주님이 계시고, 참모는 중천이가 맡을 겁니다. 그리고 주학이가 호법을 맡을 것이고, 추삼과 춘삼은 우선 무공을 배운 뒤, 훗날 당주가 될 것입니다.”
세가라는 것이 가주 한 명만으로 유지 될 수는 없다.
당연히 구성원들이 있어야 한다.
보통의 무림 세가라면 직계, 방계 혈족으로 구성될 테지만, 백리화 한 명밖에 없으니 외부 구성원들이 필요했다.
백리세가가 틀을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여기 있는 이들이 백리세가의 구성원이 되어야 했다.
“곽 객주님은요?”
“저는 무공 선생을 맡을 겁니다. 백리세가가 다시 부활했으니, 백리세가의 무공도 부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곽휘운이 백리화에게 들은 바로는 백리세가는 현재 제대로 된 무공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곽휘운이 할 일은 백리세가의 무공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밖에 백연상단이 도착한 것 같소.”
제갈중천의 말대로 백리세가의 정문 앞 쪽에 백연상단의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쿵.
굳게 닫혀있던 문을 활짝 열고, 마차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갈중천은 곧바로 상인들에게 짐을 보낼 곳을 가르쳐 주었고, 상인들은 재빠르게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뒤에 있는 마차에서 한 명의 중년인이 내렸다.
“곽 대주. 오랜만이네.”
“장 단주님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린 중년인.
마치 숱으로 칠한 듯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이 사람이 바로 백연상단의 상단주인 장구영이었다.
* * *
곽휘운은 멸마대 대주로 있을 때에, 장구영의 상단 행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꽤나 값진 물건들을 옮기는 행렬이기에, 물건을 노린 도적들과 마두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었다.
그때 곽휘운이 모든 물건을 지킨 것은 물론이고, 장구영의 목숨마저 구해 주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항주에 왔으면서 나를 보러 오지 않다니, 섭하네 그래.”
“죄송합니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폐를 끼칠까 그랬습니다.”
“자네가 온다면, 내 아무리 급한 용무라도 미룰 수 있네.”
장구영의 말은 진심이었다.
곽휘운이라면, 설령 황제를 만나는 일이라 해도 미룰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백리세가를 다시 이렇게 부활시키려는 이유가 뭔가? 내 듣기로는 객잔을 한다고 들었는데 말일세.”
“항주에서 제일가는 객잔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 그랬습니다.”
“항주제일? 하하하. 곽 대주라면 가능 하겠지. 그런데, 분명 쉽지만은 않을 걸세.”
현재 항주는 수많은 무림 문파와 세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새로이 객잔을 하나 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견제를 받을 텐데, 거기에 망해 버렸던 백리세가까지 부활시키려 한다면, 정말로 일이 복잡해 질 것이다.
백리세가의 부활을 바라지 않는 곳도 많으니 말이다.
“뭐든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자. 그런 이야기는 이쯤하고, 내가 선물을 가져왔는데, 받게나.”
장구영이 커다란 목갑 하나를 건네었다.
물론 크기에 비해 무겁지는 않았다.
“한번 열어보게.”
딸칵.
화아아악.
목갑을 열자 안에서 진한 약향이 풍겨져 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작은 영단 열 개.
“천삼단(天蔘丹)이란 것일세. 새롭게 백리세가를 세우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네.”
천삼단.
천년설삼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영초와 약재를 달여서 만든 영단이다.
소환단에 비하자면 부족했지만, 그래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무얼 주려해도 받지 않았잖은가. 이번에는 거절치 말게.”
곽휘운은 그동안 장구영이 무언가 선물을 하려 할 때마다 거절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장구영은 잠깐 동안 머물며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백리화는 장구영이 백연상단의 상단주라는 말을 듣고는, 뜨악하는 표정을 지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보다 내가 직접 온 것은 하나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네.”
“무엇입니까?”
“백연상단이 백리세가와 후원 계약을 맺고 싶은데 어떤가?”
후원 계약.
문파나 세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물품이 소비된다.
그래서 자금과 물품들을 충당하기 위해서 상단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보호해 주거나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돈과 물품들을 받는다.
후원 계약을 맺은 문파나 세가는 상단의 힘과도 같다.
따라서 당연히 아무 곳이나 계약을 맺지는 않는다.
현재 백연 상단은 남궁세가 단 한 곳과 후원 계약을 한 상태.
그런데 지금 이제 막 발걸음을 뗀 백리 세가에게 후원 계약을 제안한 것이다.
“저희의 무엇을 보고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곽 대주에, 남 부대주, 그리고 제갈 총관까지 백리세가에 있는 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면 충분하지.”
장구영은 장사꾼이다.
아무리 곽휘운과 인연이 있다 해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지금의 백리세가가 아무것도 없다지만, 일단 곽휘운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계약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장구영은 곽휘운의 진짜 모습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니 말이다.
그날 곽휘운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정구영이었다.
“백리 가주님 어떻습니까?”
곽휘운은 백리화의 의중을 먼저 물었다.
백리세가의 가주는 백리화이니 말이다.
“음…….”
백리화는 잠깐 고민을 하였다.
분명 백리세가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수를 놓고 고민해야 했다.
훗날 곽휘운이 백리세가를 떠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와, 앞으로 백연 상단과 계약을 맺으며 발생할 여러 가지 득과 실을 저울질 해 보았다.
‘좋은 모습이야.’
곽휘운은 신중히 고민하는 백리화를 보며, 속으로 만족했다.
한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무언가를 결정할 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그 결정에 따라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분명 장구영의 제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더 고민해 보는 것이 맞다.
“지금 저희 백리세가가 드릴 것도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하. 나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것이네.”
“그럼…… 계약할게요.”
사실 백리세가에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백리화는 계약을 수락했고, 장구영이 미리 가져온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좋네. 앞으로 무기나, 옷 등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말하게 바로 보내 줄 테니.”
“네.”
아직 모든 짐이 온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도착했기에, 오늘부터 휘운객잔의 모든 이가 백리세가에서 머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