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운객잔 12화>
제갈세가의 사공자라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대산문이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흑철권이 다시금 제갈중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금빛으로 쓰여진 ‘제갈’이라는 자수가 보였다.
오로지 제갈세가의 직계에게만 허락된 금빛 자수였다.
‘이런 큰일 났구나.’
대산문의 힘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큰일을 치루 게 생겨 버렸다.
하지만 지금 납작 허리를 구부리자니, 너무 멀리 와 버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저자가 내게 정중히 사과한다면, 오늘일은 그냥 넘어가겠소.”
흑철권이 이 문제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줄기 빛과도 같은 제갈중천의 말이 들려왔다.
제갈중천에게 주먹을 날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산문 문도가 사과를 한다면, 지금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
이렇게 하면 흑철권의 면도 살고, 제갈중천도 대산문의 사과를 받는 것이니 서로에게 나쁠 건 없었다.
“이놈아. 어서 일어나서 사과를 하거라.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다니! 이것은 문으로 돌아가서 엄히 벌할 것이다.”
“자, 장로님.”
대산문 문도는 갑자기 태도가 바뀐 흑철권에게 원망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흑철권은 오히려 살기까지 담아 대산문 문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문도에게 말을 했다.
“어서 네가 사과를 하고 일을 끝내라.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날 줄 알아라.”
결국 대산문 문도는 얼얼한 엉덩이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제가 괜한 시비를 걸어 누를 끼쳤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으면 되었소.”
제갈중천은 꾸벅 사과를 받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휘운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남겨진 대산문 무리.
그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돌아갔다.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끝난 탓에 사람들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중천. 너 때문에 손님을 놓쳤지 않느냐.”
곽휘운은 객잔으로 들어온 제갈중천을 약간의 농과 함께 맞이했다.
“어차피 저런 자들은 객잔에 와봐야 해를 끼칠 뿐이지 않소? 제가 미리 걸러낸 것일 뿐이오.”
“그래. 고맙다.”
“천만에 말씀이오.”
제갈중천은 곽휘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제갈중천에게 이 정도 표정이 나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객주님! 이놈은 뭐 하러 불렀어요? 저 하나로는 부족하신 거예요?”
남주학도 제갈중천을 보고는 부리나케 다가왔다.
“당연하지. 너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느냐?”
“너는 그 늙은이 같은 말투나 좀 어떻게 해 봐라.”
“기생오라비같이 차려입은 것을 보니, 객잔이 아니라 기루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싸우자는 거지?”
“사양하지는 않으마.”
만나자마자 서로 으르렁 거리는 남주학과 제갈중천.
둘은 멸마대 시절에도 세상에 둘도 없는 앙숙이었다.
“자자. 그만하고, 인사하거라. 우리 객잔의 총관님이시다.”
“안녕하세요. 백리화라해요.”
“제갈중천이라 하오.”
백리화는 곽휘운이 새로 데려온 제갈중천이란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고, 조금 이상한 말투를 쓰는 사람.
몸은 마치 여인처럼 크지 않고, 손 또한 섬섬옥수를 떠올리게 할 만큼 길고 고왔다.
‘곽 객주님 주변에는 재미있는 분들만 있네.’
남주학과 제갈중천.
백리화가 보았을 때 둘 모두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뭐, 물론 곽휘운도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대주님 제가 할 일은 무엇이오?”
“일단 호칭은 객주님이라 부르고, 우선 이 객잔을 중심으로 진법 몇 개만 설치하면 된다.”
“어떤 진법으로 하면 되오? 살상진(殺傷陳)?”
“……그냥 환영진(幻影陳)정도로만 해. 그리고 축기를 위한 진도 설치해 주고.”
“알겠소.”
제갈중천은 곽휘운이 아는 최고의 진법가였다.
그가 마음먹고 진법을 설치하면, 웬만한 자들은 파훼를 시도조차 할 수 없을 터.
전각을 짓는 것만으로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힘들다.
그래서 주변에 진법을 설치해, 최대한 여러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소.”
제갈중천은 다시 곧장 휘운객잔 밖으로 나가서, 한창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다가갔다.
눈으로 위치를 가늠하고는 품안에 쓰인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보름만 시간을 주시오. 그 안에 끝내 놓겠소.”
“그래. 알았다.”
보통 하나의 진법을 설치하는 것 만해도 보름은 넘게 걸린다.
하나도 아니고 몇 가지 진법을 건물들이 들어서는 이 땅 전부에 설치하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제갈중천은 보름 만에 모든 걸 끝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진법에 필요한 재료는 여기 총관님에게 말씀드려서 구하면 된다.”
“알겠소.”
제갈중천은 곧바로 백리화에게 필요한 물품이 적힌 종이를 건네었고, 백리화는 곧바로 백연상단에 연락해 물건들을 사들였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다시 객잔에 집중합시다.”
* * *
객잔 주변에 건물을 짓느라 조금 부산스러운 주변 환경이었지만, 손님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왔고, 위층 객실들도 벌써 절반 이상 찼다.
아직 객잔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항주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휘운객잔이었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니 당연히 견제하는 세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은 청송객잔 사람이에요.”
백리화는 나름 이래저래 다른 객잔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알았는데, 최근 부쩍 다른 객잔에서 염탐을 위해 찾아오는 자들이 늘었다.
지금도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는 청송객잔 사람들이 보였다.
“청송객잔?”
곽휘운이 첫날 이곳에 왔을 때 천수검문 무리들과 있던 자들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천통문에서 들어서 그들이 청송객잔 인물들이라는 것을 들었다.
“네. 청송객잔은 삼 년 전에 항주에 문을 열고, 순식간에 항주에서 손꼽히는 객잔이 된 곳이에요.”
“호오.”
대체로 그 지역에서 이름난 객잔은 수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이 태반이다.
그런데 고작 삼 년 만에 항주에서 손꼽히는 객잔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청송객잔 인물들은 음식을 다양하게 시켜서 이리저리 맛보더니, 옆을 지나던 점소이를 불러 세웠다.
“이보게. 이 음식이 정말 맛있군. 숙수님을 좀 뵙고 싶은데…….”
“숙수님은 바쁘셔서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점소이를 불러 세운 목적은 숙수를 보자는 것.
숙수를 청송객잔으로 빼가려고 작업을 거는 것이었다.
휘운객잔의 점소이는 꽤나 이 바닥에 잔뼈가 굵어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적당히 바쁘다며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좀 불러주게.”
청송객잔 인물들이 슬쩍 돈을 점소이에게 건네었다.
점소이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돈을 챙겼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빠르게 발을 놀려서 주방으로 사라지는 점소이.
잠시 시간이 흐르고, 주방에서 점소이와 함께 황중식이 나타났다.
“무슨 일로 부르셨소이까?”
“음식 맛이 너무나 좋아서 불렀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지.”
“그래서 말인데…… 저희 객잔으로 모시고 싶소.”
청송객잔 인물들은 대번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황중식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았다.
저런 부류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나 줄 수 있소?”
“원하는 만큼 드리겠소.”
청송객잔 인물들은 의외로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듯하여 살짝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원하는 만큼? 내가 예전에 받던 금액이 달에 금화로 열 개였는데, 객잔을 옮기려면 그 두 배를 주시오. 괜찮겠소?”
“예?!”
금화로 스무 개?
지금 항주 최고의 숙수도 그 정도 돈을 받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객잔에 있는 숙수가 그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농이 지나치시오.”
“농? 그럼 나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으니 포기하시오.”
실제로 황중식은 금화로 스무 개를 준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이곳 휘운객잔으로 온 것이었다.
그에게 재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맛있게 드시다 가시오.”
황중식이 다시금 주방으로 돌아가고, 그 뒤를 얼른 점소이가 따라 들어갔다.
“숙수님 그 사람들 표정 보셨습니까? 완전히 벙쪄서는. 하하.”
“흥. 놈팽이들이 눈만 높아서는 쯧.”
점소이가 돈을 받은 것도, 황중식이 나선 것도 이미 다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황중식도 객잔 일을 오래했으니, 객잔에서 일어나는 일은 훤히 알았다.
그래서 미리 점소이들에게 이렇게 돈을 찔러 주고 만나고 싶다하면, 언제든지 말하라 했다.
황중식이 잠깐 그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점소이들에게는 예외 수당이 떨어지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청송객잔 인물들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객잔에 머무르던 손님들도 전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후우. 이제 오늘도 끝나가네요.”
“오들도 수고하셨습니다. 백리 총관님.”
“그보다 오늘 약속 안 잊으셨죠?”
“네. 잊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같이 시장을 가자는 백리화와의 약속을 잊지 않은 곽휘운이었다.
점소이들이 빠르게 움직여줘서 그런지 금방 객잔의 마감이 끝났다.
“그럼. 객주님 이제 가요.”
“그런데 무얼 하러 가는 겁니까?”
“비밀이요.”
* * *
낮보다 화려하다는 항주의 밤.
시장거리도 아직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겁니까?”
“이제 다 왔어요.”
백리화의 걸음이 멈춘 곳은 포목점이었다.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꽤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포목점은 왜?”
“객주님도 검은 옷 말고, 다른 옷 좀 맞춰드리려고요.”
“괜찮습니다. 저는…….”
“객잔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세요.”
객잔을 위해서라는 말에 곽휘운은 조용히 백리화의 뒤를 따랐다.
포목점에 들어가자 곧바로 점원이 하나 따라붙었다.
“어떤 옷을 찾으십니까?”
“이 분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찾습니다. 조금 밝은 색의 옷이면 좋겠습니다.”
“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직원은 곽휘운을 한번 훑어보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곽휘운은 지금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애꿎은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아, 예.”
“객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은데,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과거에 대한 질문이 굉장히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어색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