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25화 (125/125)
  • # 125

    광휘는 자운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황홀지경을 연출했다. 작은 회오리처럼 뿜어져 나온 푸른 광휘는 놀랍게도 자운의 눈으로 빨려들었다.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두통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고통도 잠시,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청명함이 머리 곳곳으로 퍼져 가는 느낌이 이어졌다.

    ‘이건 도대체 뭐지?’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답이라도 하듯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방대한 분량의 한자(漢字)들이었다. 마치 덩치 큰 프로그램의 소스처럼 차르륵 펼쳐지고, 공간 중에 떠올랐다가 결합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삽시간에 그 모든 것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이는 느낌이었다.

    ‘이건 뭐야, 중국어잖아. 설마 이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모두 내게 전수해 준 것인가? 이런 게 가능하다니, 무협 소설에서도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자운은 황당함을 뒤로 미루고 일단은 테스트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생각한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여기는 어디죠?”

    ‘헉, 된다.’

    놀라운 일이었다. 생각한 대로 완벽히 중국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신기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죠?”

    자운이 유창히 말을 하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자운이 살짝 눈을 찌뿌렸다.

    ‘이 양반아, 당신이 능력을 줘놓고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방금 전 푸른 광채는 뭐였죠? 무슨 법술인 건가요?”

    “푸른 광채? 허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감옥에 오게 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다그치지 않으마, 일단 쉬도록 해라.”

    사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자운은 멍해져 버리고 말았다.

    ‘왜 저러지…….’

    그러다 문득 자운은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노숙자 천사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둘째는,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窓)이다’ 라는 힘이네.”

    ‘설마… 이게 두 번째 능력?’

    노숙자의 말대로라면 타인의 능력을 눈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그 사람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와중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거 꽤 지낼 만하겠는걸. 하하하.’

    자운이 강호에 발을 내딛는 첫날은 황당함에서 시작해 두려움으로 진행되다 결국 작은 희망의 불꽃을 피어올리는 순서로 발전했다. 이 정도면 터미네이터에 조금 못 미치긴 해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 * *

    말이 통하게 되자 자운은 어제 자상하게 다가와 주먹밥을 내민 이가 이항이란 이름을 지닌 것과 감방 안 사람들의 면면을 대충 알게 되었다. 자운은 스스로 소개할 말이 마땅치 않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온 천사인지 노숙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사람에 의해 강호를 구하라는 특명을 부여받고 왔노라 말한들 이해도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을 것이기에 ‘기억상실증’이야말로 가장 좋은 핑계거리였다.

    평소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툭하면 기억을 잃었다가 찾곤 하는 내용이 나와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많이 등장한 만큼 효용가치가 높다는 걸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이항은 자신을 학자라고 했고, 잡혀온 이유는 고을 현령의 예순두 살 맞은 생일날 시를 읊으라는 명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차라리 벙어리가 될지언정, 어찌 탐관오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을 수 있겠나. 하하하하!”

    그의 목소리에는 사나이의 기개라고 해야 할지, 선비의 기개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런 기운이 담겨 있었다. 자운은 은근히 감동을 받았다.

    ‘이 양반 그릇이 꽤 커 보이는구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그들의 인상이나 면면은 현령이 비록 흉포하다 해도 어쩐지 마땅히 감옥에 있어도 이상스러울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틀째의 아침과 점심의 식단은 다른 변화가 없었다. 역시 소량의 소금기만 들어 있는 밋밋한 주먹밥을 우겨 넣으면서 또 하루가 속절없이 흐르는구나 싶을 때 변고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복도 쪽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놔, 너희들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 거냐? 너 이름이 뭐야? 너 정말이지 실수하는 거야.”

    잡혀온 또 다른 죄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운은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아가리 닥치지 못해! 뭘 잘했다고 큰 소리냐!”

    간수가 중도에 참지 못하고 두들겨 패는지 퍽퍽 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복도를 울렸다.

    간수가 멈춘 곳은 자운이 갇혀 있는 감방 앞에 이르러서였다.

    “이놈아, 평생토록 한번 썩어봐라.”

    “네가 날 때려? 너 사람 잘못 봤어. 너 인생 다 산 줄 알어라.”

    충분히 얻어맞았음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가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자운은 새로운 죄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헉, 하는 소리를 토해내야만 했다.

    “헉, 노숙자 아저씨!”

    어쩐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었다 싶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노숙자 천사였던 것이다. 분명히 강호로 가게 되면 더는 나타날 수 없노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그땐 농담이었어’라는 식으로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감방 문이 열리고 간수가 거칠게 미는 힘에 노숙자 천사가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자운이 얼른 다가가 부축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긴 웬일이세요?”

    노숙자 천사는 자운을 보고는 도저히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조까지 동반하였던 터라 자운은 웩, 하고 쏠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하하, 자네를 만나러 온 거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어때 지낼 만하지?”

    차라리 다른 말을 했더라면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잘 지내냐는 말에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게 잘 지내는 것으로 보입니까? 사명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감방 안에 처넣는 게 말이 되냔 말입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운이 침을 튀기며 말한 탓에 노숙자 천사는 얼굴에 튄 침을 소매로 닦아내고는 여전히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온 거잖아. 그다지 많은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닐세. 아주 미세한 오차가 이 바닥에선 의외성을 발휘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면 문젤까.”

    아주 뻔뻔하기가 번데기 주름살보다 더했다. 거기에 볼은 왜 발그레 물들이냔 말이다.

    “이봐, 신참!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

    자운이 막 어떻게 빠져나갈 지를 물으려 할 때 예의 감방 내의 질서유지담당관인 장비를 닮은 상문평이 고압적인 음성을 내뿜었다.

    자운은 흥분한 나머지 너무 떠들었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찔하며 일단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숙자 천사는 안면이 굳어지더니 자리를 완연히 털고 일어나 상문평을 노려봤다.

    “네가 감히 위대한 사명 앞에 장애물을 설치하려는 것이냐?”

    방금 전까지 비실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백만 대군을 이끄는 장수와 같은 용맹한 기운이 노숙자 천사의 주위로 어른거렸다. 노숙자 천사의 말이 이어졌다.

    “저기 앉아 있는 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 줄 네놈이 모르는 모양이라 내 참지만, 다시 한 번 참견한다면 얼마 못 가 네 입을 스스로 원망하게 될 것이다.”

    장비 상문평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확연히 드러났으니, 거의 노숙자 천사의 키는 상문평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애송아, 네가 그리 대단한 녀석이었던 거냐?”

    상문평이 자운을 향해 묻자, 자운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네? 하하하, 제가요? 그럴 리 가요. 사실 저분 오늘 처음 봤습니다만…….”

    자운의 부인에 노숙자 천사의 얼굴이 핼쑥해져 자운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덧 상문평을 바라보는 노숙자 천사의 얼굴에는 자못 위엄이 서리고 강대한 기세가 어른거렸다.

    그런 위용에 자운은 지난날 강릉 앞바다를 두 동강 내버린 것을 떠올리고는 어떤 식으로 상대를 농락해 버릴지 자못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고 이래로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곤욕을 치른 이들이 백 수레가 넘는다. 이제 너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생각인가 보구나.”

    다분히 위협적인 말투로 노숙자 천사가 뱉는 말에 상문평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내뻗었다.

    “네 몸도 입처럼 그리 대단한지 확인해 봐야겠다.”

    “훗!”

    노숙자 천사는 상문평의 주먹이 바로 눈앞에 이르렀음에도 그저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느덧 상문평의 주먹이 노숙자 천사의 광대뼈에 작열했다.

    퍼억~

    순간, 자운을 비롯한 감방 안에 있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숙자 천사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더니 감방 벽에 부딪치고는 그대로 나뒹굴고 만 것이다.

    그 꼴사나운 광경에 자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대단해, 대단할 뿐이야.’

    비장의 한 수, 혹은 절정의 신법, 그것도 아니라면 상문평의 주먹이 얼굴에 닿았을 때 도리어 때린 상문편의 주먹이 으스러지는 것을 기대했던 자운으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자운뿐이 아니었던 듯 감방 안의 이항을 비롯한 모두는 방금 전 보인 놀라운 위용에 비해 맥없이 나가떨어진 모양새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끙, 끙…….”

    노숙자 천사는 충격이 결코 적지 않았는지 온몸과 입으로 신음을 발했다. 그러면서도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꾸역꾸역 일어서고 있었다.

    “흐흐흐, 원래 자비(慈悲)란 일초를 양보하는 것이랄 수 있지.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비?”

    상문평은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자운이 보기에 그건 이소룡이 닭 소리를 내지르며 적의 복부를 공격한 후 주먹을 바르르 떨며 짓는 표정과 얼핏 비슷해 보였다.

    “훗, 좋다. 이제 나의 태상무력천강최강불괴단혼결단무자비신비신공(太上武力天剛崔剛不怪斷魂決斷無慈悲神秘神功)을 받아봐라.”

    엄청나게 긴 신공의 이름 앞에 자운은 또 다른 좌절을 느꼈다.

    ‘뭐야, 이거 구무협을 너무 많이 읽은 거야?’

    노숙자 천사는 길고 긴 신공의 이름을 헉헉대면서 외치고는 몸을 날렸다. 허공을 가르는 엄중한 기세 속에서 그의 태상무력천강최강불괴단혼결단무자비신비신공(太上武力天剛崔剛不怪斷魂決斷無慈悲神秘神功)이 실린 일권이 상문평의 심장을 노리고 뻗어갔다.

    쉭~

    이 소리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또한 상문평의 몸을 빗겨 가는 소리이기도 했다. 살짝 몸을 틀어 방위를 바꾼 탓에 노숙자 천사의 몸은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목표를 잃은 탓에 관성을 못 이긴 몸이 휘엉청 비틀거릴 때 상문평의 수도가 그대로 노숙자 천사의 뒷목을 강타했다.

    퍽!

    철퍼덕.

    곧바로 노숙자 천사는 노숙자 개구리로 변해 바닥에 쫙 뻗어버렸고, 상문평은 그때부터 가차없이 주먹과 발길로 노숙자 천사를 밟아대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들썩이며 얻어맞던 노숙자 천사가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건 벽에 기대고 앉아 구경하던 이항이 조용히 뇌까린 뒤였다.

    “혼절했네. 그만 하게.”

    그제야 상문평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노숙자 천사의 뒷덜미를 잡고 구석지에 던져 놓았다.

    자운이 흘깃 보니 고작 숨만 까닥되면서 쉬고 있었다. 자운은 자신을 인도한 천사의 상태가 그야말로 도저히 기대하기 힘든 정신 상태임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곧바로 좌절에 빠져들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답답한 것인가.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그 속에 고개를 푹 처박는 자운이었다.

    이후 노숙자 천사는 진실로 자운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자운은 환갑을 넘어 칠순 잔치를 해야 할 나이에 이를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전에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이들은 이미 출옥한 상태였고, 그 뒤로도 수없이 많은 죄인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자운은 감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것도 죄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지식을 스캔해도 이곳에 머무는 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가며 내일이면 천사가 오겠거니 기다리다 결국 오십육 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문제는 앞으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노숙자 천사가 찾아왔다. 이른두 살의 어느 날이었다.

    “어이, 고생이 많았어. 이제야 끝이 났지 뭔가.”

    그는 예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자운은 이미 늙어버린 삭신을 보며 분통이 터졌다.

    “이 미치광이야, 내가 구원자라며! 왜 날 이곳에서 빼내주지 않는 거냐?”

    노숙자 천사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미안, 미안… 하지만 자운 자네가 이 세상을 구한 것은 사실일세. 전에 내가 말했었지, 나비효과라고. 아주 미세한 변화지만 그것이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온다는… 자네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오고 가는 죄인들의 생활상에 작은 영향을 미쳤네. 그것으로 인해 무림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마두가 절명했어. 하하하하, 모두 자네 덕분일세.”

    “이 썩을 놈의 자식을…….”

    하지만 자운은 이미 늙은 몸에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

    “자, 화내지 말게. 세상을 구한 자인만큼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그럼 이제 돌아가야지?”

    잠시 후 자운의 몸은 광채에 휘감겼다.

    서울역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병든 노인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럽다고 저만치 비켜 갔지만, 사실 그 노인이 무림을 구한 영웅인지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운 노인!

    그는 노숙자로 살아가지만 진정 시대를 구한 영웅이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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