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24화 (124/125)

# 124

“일단 도망치고 보자.”

새벽같이 일어나 어디 섬이라도 가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도 책을 꺼내 전라남도 쪽의 섬을 찾았다.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의 작은 섬의 이름이 눈에 확 꽂혔다.

‘비금도!’

바둑 천재 소년 이세돌의 고향 비금도, 도피하기엔 이름도 멋지다.

‘그래, 여기야. 완전히 숨어버리는 거야.’

서랍을 뒤져 mp3 플레이어를 꺼냈다. 구입한 지 육 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차로 십 분 거리에 작은 아버지가 살고 있지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싶진 않았다.

자운은 오 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일 년간을 머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와는 달랐다. 알게 모르게 눈치를 받아오던 자운은 원룸을 얻어달라고 사정을 해서 지금의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에 꼭 필요한 용돈만을 받아 쓰고 있다.

작은 아버지는 자운이 이십 세가 되면 그때 부모님의 전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평소 철훈이가 mp3를 눈독들이고 있던 터라 좀 싸게 넘긴다면 돈을 들고 나올 것이 확실했다.

당장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는 신호음이 들린 후 철훈이의 컬러링 ‘DJ D.O.C와 함께 춤을’ 이 신나게 울려 퍼졌다.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춰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그깟 나이 무슨 상관이예요.

다같이 춤을 춰봐요. 이렇게~

“그래, 신나기도 하겠다. 누구는 죽겠는데 말이야.”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 번이나 춤을 춘 다음에야 철훈이가 전화를 받았다.

“철훈이냐? 나다, 자운이… 너 전에 mp3 갖고 싶다고 했지?”

“…….”

아무 말이 없었다.

“철훈아, 듣고 있냐? 싸게 넘길 테니까 너무 쫄지 마.”

“얼마에 팔 건데?”

“헉!”

자운은 그만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철훈이가 아니었다.

“헉, 아, 아저씨가 어떻게…….”

“이러면 곤란하지. 나 지금 바쁘니까 전화하지 말게. 먼길이 될 테니 푹 자두라구. 그만 끊네.”

자운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삐리리 소리와 함께 신호가 꺼졌고, 자운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허물어졌다.

* * *

“이보게,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퍽퍽. 퍽퍽…….

중년인은 바닥에 새우처럼 누워 자고 있는 자운의 복부를 향해 로우킥을 날렸다.

퍽퍼퍽. 퍽퍽.

“일어나라니까.”

자운이 몸을 꿈틀거릴 뿐 눈을 뜨지 않자 중년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 친구 이거 시간이 없다니까. 내가 암바(arm―bar)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만.”

암바란, 이종격투기 경기에서 사용하는 관절기다.

중년인은 자운의 몸에 열십 자 형태를 띠고 암바를 펼쳤다.

“으아아아악!”

자운은 인대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고, 그제야 중년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작작 좀 자야지. 도대체 지금이 몇 신데 자고 있는 건가.”

“아이 씨,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분이 이 무슨 행팹니까?”

“그냥 장난한 거야. 뭘 그리 아프다고 엄살인가.”

“그럼 아저씨가 한번 당해볼랍니까?”

“그래, 그래, 미안하네. 그건 그렇고 준비는 다 되었겠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자운은 어깨가 아픈 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로 가야 합니까? 아저씨, 아니, 선생님, 아니, 천사님,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무림에 가는 것만 빼고 시키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제발요.”

“너무 염려하지 말게. 지금이야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겠지만 며칠만 지나면 금방 적응이 될 게야. 나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떼를 쓰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네. 자, 그럼 이동하네.”

“헉, 잠깐만요, 잠깐만요.”

자운이 중년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왜 또 그래?”

“혹시 새로 태어나는 겁니까?”

“아니.”

“그럼 어디 좋은 집에 양아들로 들어가나요?”

“음,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일단 자네가 원하는 환경을 마음으로 간절히 떠올려 보게. 자네 생각대로 될 걸세.”

“한 가지만 더요. 저 확실히 돌아올 수는 있는 거죠?”

“당연하지. 미션을 완수하면 아무 일 없이 돌아오게 되니 걱정 말게.”

“미션을 완수 못하면요?”

“음? 글쎄… 차원의 미아가 돼 버릴지도 모르겠는걸.”

“어째서 하는 말마다 무책임한 겁니까? 이 계획을 누가 짠 겁니까?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하하하하, 말조심하게. 혀가 날아가는 수가 있어. 자, 질문은 이제 그만 하고, 그만 가보게나.”

순간 중년인의 손에서 분홍빛 광채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안 돼요, 안 돼~”

자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광채는 자운의 온몸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잘 가게. 성공하길 비네.”

“이거 진짭니까?”

자운의 눈이 붉게 물들더니 끝내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염려 말게.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거든.”

자운은 광채에 휩싸이며 서서히 몽롱한 의식 속에서 몸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가는 것 같았다.

* * *

“네, 저녁 7시 전국 네트워크 뉴스 시간입니다. 오늘은 겨울 바다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강릉 앞바다에 나가 있는 정경훈 기자를 통해 그곳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정경훈 기자!”

“네, 정경훈입니다.”

“소식 전해주십시오.”

“네, 이곳은 푸른 바다가 펼쳐진 강릉입니다. 여름 바다를 열정이라고 부른다면, 겨울 바다는 사색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곳 바닷가에는 연인들이 어깨를 두르고 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띄는데요. 프로포즈를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인들과 잠시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곳은 어떻게 찾게 되셨습니까?”

화면에 이십대 후반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이가 갑자기 겨울 바다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왔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어제는 프로포즈를 받았거든요. 그이가 바다를 증인으로 삼아 제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너무 감동받아 눈물을 흘릴 뻔했답니다. 바다는 홍해의 기적처럼 쩍 갈라지진 않았지만 잔잔히 밀려와 축복을 빌어주었구요.”

“하하하,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강릉 앞바다는 전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갈라질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바다는 두 분이 영원히 갈라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저 잔잔히 바라보았겠지요. 두 분의 앞날이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강릉의 겨울 바다에서 정경훈이 소식 전해드렸습니다.”

“네, 정경훈 기자, 수고 많았습니다.”

* * *

“넌 누구냐?”

자운은 누군가 목을 강하게 죄며 외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켁, 켁.”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계속 들려왔다.

“누구냐니까?”

자운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알아들었다 해도 이렇게 목을 조르는 상황에선 말은커녕 숨 쉬기도 힘들었다.

“크으, 케엑…….”

대체 여기가 어디고, 어떻게 된 사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목이 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 나지막하지만 어딘지 위엄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목을 조르고 묻는데 누가 대답할 수 있겠나.”

그제야 자운의 목이 자유로워졌다.

“켁, 켁.”

자운은 목을 매만지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뚜렷하진 않지만 그런 대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대충 분별이 가능해졌다.

왼쪽으로 쇠창살이 보이고, 바닥엔 지푸라기가 깔려 있고, 맞은편 벽에 두 명이, 오른쪽 벽으로 두 사람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유비의 아우, 장비를 연상케 하는 사내가 거대한 볼록렌즈와 같은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커억! 뭐야? 여긴 어디야? 설마, 설마하니 진짜 무림에 오고 만 건 아니겠지? 그럴 린 없겠지? 게다가 여긴 감옥 같잖은가.’

마음으로는 간절히 아니라고 외쳤지만 마음 더 깊은 곳에서는 이곳이 무림이고, 끝내 오고야 만 것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끄덕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씨발, 오고야 말았어. 짱개들의 세계에 오고 만 거야. 노숙자, 그 새끼가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부잣집 양자가 되길 바랐건만 어떻게 감옥에 처넣을 생각을 한 거냐구. 씨팔넘!’

원래 자운은 일 년에 한 번 욕을 할까 말까 했지만 지금은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운은 갈가리 찢기는 마음에 눈물을 쏟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돌아갈래~ 나 돌아갈래~”

박하사탕이란 영화에서 설경구가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외쳐댈 때는 ‘저거, 저 완전히 똘아이로구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자식이 어디서 괴상한 고함을 지르고 난리냐.”

장비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자운의 턱에 꽂혔다. 설경구는 외치다 기차에 깔렸다면, 자운은 주먹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셈이었다.

* * *

자운은 머리가 바스라질 듯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눈을 뜨진 않았다. 감옥에 갇혀 있던 놈들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운으로서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충분한 과정을 거쳐 들어오게 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느닷없이 속된 말로 ‘뿅’ 하고 나타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만일 범죄자로서 인도되어 갇히게 된 것이라면 그들의 과격함은 신참 길들이기일 것이고, ‘뿅’이었다면 귀신같이 나타난 것에 대한 의문일 터였다.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놈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짐작하기로는 대략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간수가 나타났다.

자운은 실눈을 뜨고 쇠창살 밖의 간수를 면밀히 살폈다. 간수는 쟁반에 놓인 주먹밥을 하나씩 던져 주었다. 자운은 배가 고프다는 것을 잊고 있다가 밥을 보자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들었다.

간수는 하나씩 던져 주다가 모로 누운 자운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언제 한 놈이 더 늘었지?”

그러나 의문도 잠시, 2교대 근무 중 다른 담당이 맡고 있을 때 들어온 죄수려니 생각하고 자운의 머리를 향해 주먹밥을 던지고는 옆쪽으로 이동했다.

간수의 말로 모든 정황이 명백해졌다.

그야말로 뿅, 하고 나타난 것이다. 터미네이터가 알몸으로 과거로 온 것처럼 그렇게 뿅~ 하고 말이다. 기존에 감옥에 머물던 이들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자운은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고는 얼른 몸의 촉감을 점검했다.

‘휴, 다행이군.’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나마 알몸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짱개들 세계에 어울리는 의복을 갖춘 것이냐? 그건 결코 아니었다.

런닝 셔츠와 츄리닝 바지!

배려라는 말을 한강에 내다버린 눈꼽만큼의 인정도 없는 천사였다. 다시 한 번 천사에 대해 이가 갈렸다.

주먹밥에 머리를 맞은 자운은 그제야 정신이 든다는 듯 고통스럽게 머리를 만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맞고 바닥의 지푸라기에 뒹군 주먹밥은 불결하기 짝이 없어 당장 교환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 보호원에 연락하겠다고 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저 눈물을 머금고 대충 털어낸 후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그 밋밋한 맛에 자운은 울컥, 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진짜 너무하네. 씨발…….’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동안 감옥 안에 갇혀 주먹밥으로 연명하다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샘을 막으려 해도 막아지질 않았다.

자운은 눈물에 젖은 주먹밥을 꾸역꾸역 먹어치우고는 벽에 기대고 앉았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앞쪽에 앉았다. 사내는 오십대 중반으로 보였고,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에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결코 이곳에 갇혀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 먹으렴.”

사내가 절반이 남은 주먹밥을 자운에게 건넸다. 자운은 사내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장비를 만류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이 감방 내에서는 그가 리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자운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눈칫밥을 먹은 지가 꽤 된지라 대충 눈치를 살피니 밥을 더 먹으라는 말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처음에는 입맛에 맞지 않을 게다. 그런데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냐? 게다가 솔직히 난 네가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자운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운이 알고 있는 중국어는 ‘니 하오마’ 와 ‘따꺼’, ‘덩샤오핑’, ‘장쩌민’ 정도였다.

‘짱깨 양반, 그만 자리에 돌아가시게.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네. 내가 을룡타를 쓰지 않게 해주게나.’

“뭐가 두려운 거냐? 혹시 우리 말을 전혀 못하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여 자운은 고개를 들고 사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에 언뜻언뜻 현기가 번뜩였다.

‘감옥에 갇혀 있긴 해도 나쁜 사람 같진 않구나.’

그렇게 자운이 멍하니 사내의 눈을 들여다볼 때였다.

문득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내의 눈빛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광휘가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헉! 뭐야… 이상한 신공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자운은 얼른 눈을 감으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을 감을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강력한 자력에 의해 시선이 고정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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