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22화 (122/125)

# 122

먼저 손을 쓰기로 한 것은 진찬월과 독고화연 쌍이었다.

변왕 담천변이 역용을 하고서 비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담천변은 눈을 부릅뜨고 볼 것은 다 보면서 외쳤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두 사람이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란 것은 당연했다. 영원히 두 사람만 거할 것이라고 생각한 공간이 아니었던가. 황급히 몸을 가리자 호통이 떨어졌다.

“이곳이 어디라고 요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네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진찬월이 한 걸음 나서며 독고화연의 몸을 가리고서 이제까지의 사정 이야기를 소상히 밝히자, 담천변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가공할 기세를 내뿜으며 당장 손을 쓸 것처럼 위협했다.

“이곳은 외부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곳이다. 너희를 곱게 보내주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도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상대가 잠깐 보인 무위만으로도 이미 자신들이 상상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만용을 부려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곳에 대해 말하지 않겠으니 대인께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만일 강호에 이곳에 대한 소문이 난다면 하북진가로 찾아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담천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군. 그때는 네놈뿐 아니라 가문의 씨를 말릴 것임을 명심하여라.”

“물론입니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이 머리를 조아렸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담천변은 희락동자 이호와 노공과 동행하여 지하도를 따라 걸었다. 오교는 이미 보름 전에 문으로 돌아갔는데, 말은 여러 쌓인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심온의 보복이 두려워 자리를 뜬 것이었다. 세 사람은 문주의 뒷통수를 언제라도 갈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은 언제라도 뒤통수를 맞아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담천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진찬월과 독고화연의 돈독한 관계를 보았기에 딸아이와 사위 녀석도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흐뭇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네놈이 후흑문주의 장인이 되다니 후후후후….”

이호는 조금은 손해 본 것 같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뒤에서 걷던 노공도 맞장구를 쳤다.

“형님, 아무리 봐도 이건 우리가 당한 겁니다.”

둘이 협공을 해도 담천변은 그저 좋기만 했다.

“아, 내가 이제껏 거나하게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유쾌한 대화가 오가고 석문 앞에 이르자 노공이 바뀐 방식을 따라 석문을 열었다.

그그그긍…….

석문이 들어올려지기 시작하면서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세 사람을 먼저 공격한 것은 지독한 냄새였다.

“이 향긋한 냄새는 뭐냐?”

“향긋해도 너무 향긋하군요.”

이호와 노공이 한마디씩을 던졌을 때 담천변은 아무 말도 못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불안이 머리꼭대기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윽고 석문이 다 올라가고 내부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심온과 담유설은 서로 껴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둘은 모두 벌거벗은 채로 술독을 사이에 끼고 껴안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옷이며 주변이 온통 똥과 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냥 봐서는 심온과 담유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호와 노공, 그리고 담천변이 예상했던 광경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정겨운 눈빛을 교환하며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과 눈을 흘기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래키면 어쩌냐는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릴 줄 알았다. 그러면 모두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면서 축하의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꼬락서니를 보니 비로소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으으으, 내 딸이…….”

담천변은 옷을 벗어 담유설의 몸을 감싸고는 안아 들었다.

이호와 노공은 쓰게 입을 다시면서 서로를 마주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두 사람이 혼인을 하는 문제는 별개로, 두고두고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뭐, 별일없겠지?”

이호가 도망칠 듯 뒷걸음치자, 노공이 가로막았다.

“형님, 이렇게 가시면 곤란합니다.”

“아하하, 내가 어딜 가겠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호는 이미 몸을 빼내 달아났다.

노공은 막으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막는다고 막아질 사람도 아니고, 일만 더 커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이 각자 가문으로 돌아간 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기대에 들뜬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였을 때는 모두들 웃고 있던 그 표정 그대로 굳어져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얼마 후 하북진가와 하남독고세가의 수장은 비밀리에 자리를 같이하였다.

어색한 인사말이 오가고, 술잔을 기울이던 중 두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진실을 알고 계시지요?”

“저 혼자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물론 저희 가문에서도 저 혼자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원한을 맺게 된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에 대한 비밀을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는 데에서 묘한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진실은 묻어둡시다.”

“영원히?”

“영원히!”

두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어리더니 이윽고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심온과 담유설의 혼인 잔치는 꽤 거창했다.

겉으로는 후흑문의 일개 젊은이가 변왕 담천변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으로 공표되었으나, 그러한 명목에 비해 초대된 이들의 면면은 놀라운 것이었다.

후흑문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은거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수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단순히 변왕의 이름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하객들의 모임이었다.

여기엔 보편적으로 알려진 문파의 수장들이나 세가의 주인들은 거의 초대받지 못하였다. 강호에서는 그들을 대단하다고 할 지 몰라도 후흑문이나 변왕이 보기엔 변변찮은 인물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하도에서 도망쳤던 이호는 희락팔선(喜樂八仙)을 동반한 상태였고, 그와 함께 외경이비(畏敬二秘)로 불리는 고독천자(孤獨天子) 왕면(王眠)이 다섯 명의 수하와 함께 자리를 빛내주었다.

외경이비야말로 현 강호의 가장 큰 어른들이었기에 모임은 저절로 질서가 정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변왕과 함께 칠대기왕(七大奇王)이라 불리는 이들이 한 자리를 메웠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후흑문과 인연을 맺었던 통증왕(痛症王) 굉운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잠을 잘 때라며 틈만 나면 잠을 청한다는 수면왕(睡眠王) 공야, 개방에서 방주로 영입코자 무던히도 애를 쓰나 거기엔 관심조차 없는 거지 중의 거지 걸왕(乞王) 표춘, 미쳐 돌아다니는 극광왕(極狂王), 싸움 구경에 환장하고 또 본인도 싸우기를 좋아하는 전왕(戰王), 희락동자와는 반대로 어린 나이 때부터 급격히 늙어버린 조로왕(早老王) 몽벽.

모두 죽은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이들이 팔팔한 모습으로 혼인 잔치에 나타난 것이다.

또 칠대기왕과 연관되어진 이들도 함께 동행한 터라 기인들로 득실거릴 지경이었다.

그 외의 하객들은 주로 그동안 후흑문에 의뢰하였던 온갖 의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심온이 문주가 된 후 의뢰를 진행했던 이들에겐 빠짐없이 청첩장이 보내졌는데, 그들 중 절반 가량이 정말일까 하는 심정으로 왔다가 모두 놀란 눈이 되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 참석자의 면면을 알아본 몇몇이 인물들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혼례식은 성대하고 아름답게 마쳐졌다.

심온과 담유설은 얼굴 가득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 심온은 담유설의 약간 솟아오른 배를 여러 차례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곳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심온과 담유설은 모두를 향해 고마움의 큰절을 올렸다.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두 사람, 아니, 아이까지 세 사람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

박수가 터졌고, 모두들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심온은 앞으로의 강호도 오늘처럼 기쁨만이 가득하길 빌었다.

***

외전. 시공초월객

추자운은 겨울 바다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의 바다 풍경을 봤다는 건 아니었다.

“아! 뒈지게 춥네.”

동해 바다의 시리도록 푸른 물결은 추자운의 마음을 압도했다. 문제는 바다의 찬바람이 몸까지 압도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남녀 쌍쌍이라 찬바람이 반가울지 몰라도 자운에겐 힘겨운 시련이었다.

자운이 강릉 앞바다에 올 수 있었던 건, 중학 생활의 마지막 겨울 방학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명, 주유소 알바!

하루 여섯 시간, 시급은 삼천 원, 컴퓨터 업그레이드와 겨울 바다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두 달 정도 고생한 후 최신형 컴퓨터와 멋진 여행으로 방학을 마무리짓고 싶었다.

주유소 일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주유소가 번화가에 위치한 지라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차들로 조금 피곤하긴 해도 시간은 잘 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자운의 아르바이트는 열흘 만에 최후를 맞고 말았다.

창을 내리고 길을 묻는 손님의 면상을 향해 휘발유를 발사해 버렸기 때문이다. 손님과 사장에게 온갖 욕을 사발로 얻어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흘 동안 일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컴퓨터 업그레이드는 날아갔지만, 여행 경비로는 충분했다.

“여자 친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포말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물결을 보며 자운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함께 있어주지.”

자운이 깜짝 놀라 바라보니 머리는 산발이고, 수염은 덥수룩한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어느샌가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사실 물을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노숙자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소 일 년 정도는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사자(使者)일세.”

“사자라구요?”

“그렇지.”

“어흥, 하는 사자란 말입니까?”

자운이 사명을 받은 자, 라는 뜻의 사자(使者)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꼬락서니가 도저히 그 뜻을 적용하긴 힘들어 보여 그리 물은 것이었다.

“농담이 좀 구리군, 자운군.”

자운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몸을 벌떡 일으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저, 저를 어떻게 아시죠?”

“나는 사자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아저씨를 보낸 사람은 누굽니까?”

중년인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네? 검지요?”

중년인의 얼굴이 찌끄러졌다.

“자네, 정말 수재 중의 수재라는 추자운이 맞나?”

“수재 중의 수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자운은 맞습니다만.”

“겸손하긴, 내년이면 카이스트에 다니기로 돼있지 않나.”

자운의 입이 경악으로 쩌억 벌어지고 말았다.

알고 있는 건 이름뿐이 아닌 것이다. 오 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미친 듯이 공부만 했던 자운은 그 재능을 인정받아 내년이면 카이스트에 다니게 된 터였다.

“누구신데 제게 접근하신 겁니까?”

“안 잡아먹으니 자리에 앉게. 할 말이 많아.”

자운은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자운이 자리에 앉자 중년인이 다시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하늘에서 온 사자네.”

자운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해 버렸다.

“요즘은 하늘도 경제 사정이 좀 어렵나 보죠? 혹시 IMF라도 당한 건가요?”

“푸하하하, 이번 농담은 꽤 그럴싸하군. 내 꼬락서니를 보고 하는 말이라면 이건 그냥 내 스타일일 뿐이라네.”

“스타일 한번 죽이는군요.”

“천사나 선녀 등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버리게. 그건 몰상식이야.”

“좋습니다. 일단 그쪽을 천사님이라고 해두죠. 아니, 잠깐, 그럼 뭐 이름 같은 것이라도 있나요?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이나 가브리엘 같은 이름말이에요?”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럼 가룟 유다로 하죠.”

“이봐! 그것만 빼고.”

“그럼 빌라도.”

“에구, 내가 졌다, 졌어. 그냥 아저씨라고 하는 것이 낫겠군.”

“이름은 그렇다 치고, 하늘에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자운은 질문을 던져놓고도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느새 노숙자의 말에 말려들고 있지 않는가.

‘이거 나도 슬슬 미쳐 가는 건가…….’

“자네는 선택되었네.”

“선택이라뇨? 말도 안 돼. 그럼 제가 이 시대의 구세주란 말입니까?”

“아니.”

“휴, 다행이군요.”

“오백 년 전 시대의 구세주라고나 할까.”

“켁! 무슨 농담을 그리 정색을 하고 하십니까?”

“농담 아니야. 자넨 오백 년 전의 무림으로 가야만 하네.”

“푸하하하하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이라니, 대충 이 아저씨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아저씨, 혹시 무협 작가십니까? 아이디어가 떨어진 거죠? 맞죠? 아니면 무협 소설을 너무 많이 보신 거든지요.”

자칭 사자가 고개를 저었다.

“천억의 사람들 중에서 자네로 정해진 거야. 영광으로 알라구.”

“천억이라뇨, 현재 인구가 60억이 살짝쿵 넘을 뿐이잖습니까?”

“현 시대만 놓고 보면 그렇지.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검색해서 나온 결과가 자넬세.”

“하하하하, 아주 흥미진진한 걸요. 검색 조건이 뭐였죠?”

황당해도 너무 황당한 지라 자운은 도리어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런 추세라면 그것마저 한바탕 웃고 말 내용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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