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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문주 심온-121화 (121/125)
  • # 121

    한 명은 울고불고, 다른 한 명은 멍한 상태에서 그렇게 첫째 날이 지났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비록 좋은 환경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탈출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기에 들뜬 기분은 이내 가라앉았다.

    또한 서로에 대한 원한 관계에 대해서는 굳이 표출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밖으로 아예 나갈 기회가 없다면 가족들과도 끝이며, 삶은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서로 다정스럽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간단히 몇 가지 규칙을 정하여 앞으로 그대로 실천하기로 했다.

    ―이후 대화는 일체 하지 않는다.

    (단, 탈출과 연관된 내용과 절체절명의 위기 때는 예외로 한다.)

    ―식사는 각자 해결한다.

    ―침대의 사용은 한 달을 주기로 교환한다.

    ―석실을 반으로 나누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단, 공동으로 사용할 물품에 대한 부분은 예외를 적용한다.)

    석실의 주방 공간에는 지하수가 흐르는 통로를 만들어놓았기에 여러 음식을 만들기에 적합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음식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가득 쌓여 있었기에 부지런만 떤다면 꽤 만족스런 식단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진찬월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독고화연을 대하였고, 찬바람을 풀풀 풍겨냈지만 모든 생활에서 보이지 않게 독고화연을 배려했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차츰 쌓여 독고화연의 마음엔 진찬월이 죽여 마땅한 원수가 아닌 보통 남자의 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겉으로는 지독한 한기를 뿜어냈다. 그런 까닭에 진찬월도 애써 싸늘해지려 노력했다.

    두 사람의 생활은 매일 매일이 똑같았다. 내공과 무공을 수련하고, 비치된 책을 읽고,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다. 이 반복된 생활이 지겨울 법도 했지만 실은 전혀 지루한 줄을 몰랐다. 보지 않는 척하면서 서로를 관찰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혼자였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둘이란 점이 더욱 다행스러웠다.

    심온과 담유설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술뿐이었다. 안주거리가 있었지만 안주거리를 씹다 보면 자연히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술을 마시다 보면 점점 양이 늘어갔다.

    술이란 마음이 괴로울 때 마시면 쉽게 취하는 법이라, 두 사람은 거의 매일같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야, 술이 떨어졌잖아. 어서 따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네가 알아서 가져다 먹어, 이 쌍놈아.”

    “뭐? 쌍놈? 내가 이래 뵈도 문주야, 문주. 어디서 막말을 하는 거냐.”

    “염병할 놈, 문주 좋아하시네. 술이나 처먹어, 자식아.”

    술이 취한 상태에서 간혹 싸움을 하게 되면 더욱 가관이었다. 삿대질로 시작하여 머리끄덩이를 잡고 모로 누워 질질 끌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머리를 잡고 잡힌 채로 잠이 들기도 했으며, 어깨를 이빨로 문 채 골아 떨어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련만 두 사람이 이런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갇혀 버린 현실이 답답하다고 느낀 것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았다.

    몸 밖으로 삐져 나오는 것들이야말로 문제의 실체였다. 심온과 담유설이 머무는 이곳은 독고화연과 진찬월이 머무는 곳에 비하자면 거의 마구간과 특급 객실에 비교될 수 있을 정도였다. 배고픔이야 술과 안주로 처리한다고 하지만 싸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처리할 만한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열흘 만에 주변 가장자리는 오물들로 가득했다. 술을 마시고 토해낸 것들부터 항문을 통해 빠져나온 냄새나는 물질들까지 고스란히 쌓여가는 광경은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지켜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술을 깰 수가 없었다. 술이 깨는 순간 지옥이 임하는 것이니, 오로지 두 사람은 더욱 취하고 취해 이 난장판 속에 완전히 잊혀지는 존재가 되길 원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변왕 담천변이나 희락동자 이호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들은 그저 한곳에 가두어두면 뜨거운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청춘들이니만큼 화르르 타오를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생활이 파행으로 치달을 것은 감안치 못한 것이다.

    “마시고 죽자. 꺼억.”

    “야, 나 잠깐 목욕 좀 하고 올게.”

    “야, 너 술독에 들어가면 어떡해?”

    “무슨 소리야. 난 목욕하는 거라니까. 너도 들어올래?”

    “좋으냐?”

    “잠수하면서 입만 벌리면 술이 막 쏟아져 들어와. 죽이는걸.”

    “그럼 나도 들어가야지.”

    심온과 담유설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절 그 자체였다.

    한 달이 지나갈 무렵, 독고화연과 진찬월은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건만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만 것이다.

    둘 다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고, 그전에는 각 가문에서 가장 강경한 인물이었기에 둘은 감정이 이렇듯 쉽게 바뀌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성적인 책망은 나약했고, 감성은 더욱더 상대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두 사람은 겉으로는 더욱더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였고 오로지 자신만 짝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혹시라도 마음이 들킬까 두려웠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 대해 그들은 나름의 분석을 해보았다.

    결코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미워했던 만큼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랑으로 급선회한 것.

    어쩔 수 없는 본능.

    의외로 괜찮은 상대.

    지극한 외로움.

    만약 넓디넓은 무인도에 둘만 살게 된다면, 결국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부부처럼 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된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상대가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 답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정답은 아니었다. 답은 정녕 엉뚱한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이 분명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처럼 빠른 시일 안에 갈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매일 먹는 음식에 소량의 음약(淫藥)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음약이란 복용하게 되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정욕이 솟구쳐 해소하지 않으면 광분하고야 만다. 그렇기에 후흑문에서는 아주 미세한 분량의 음약을 적절히 음식에 섞어놓았다. 처음에는 전혀 눈치챌 수도 없고, 마음도 동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차츰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정욕이 부글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후흑문이 이러한 음약의 수단을 쓴 것은 오직 시간을 단축하기 위함이었다.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지나기를 기다린다면 각 가문에서는 두 사람의 실종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고, 서로 상대 가문에 책임을 물어 큰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어 달 정도라면 강호를 횡행하는 중에는 늦을 만한 상황도 여럿 발생하는지라 충분히 감안할 만한 기간이랄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진 가운데 독고화연이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저만치 반대쪽에서 진찬월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탓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온갖 망측한 상상들이 쏟아져 두 남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석실은 외부 소음과 완벽히 단절된 탓에 작은 소리도 뚜렷하게 들리는 터라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여 마음이 들킬까 조바심을 태우자 침을 삼키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진찬월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침이 가득 모일 때까지 차마 삼키지 못하다가 아주 조금씩 삼키려 했는데 그만 조절하지 못하고 꿀꺽하는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한꺼번에 삼키게 되자 부끄러워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곧바로 그에 호응하듯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진찬월은 흠칫했다.

    방금 난 소리는 자신이 낸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녀도 날 원하고 있는 걸까?’

    이때 독고화연이 침 삼키는 소리를 낸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 진찬월이 잠을 뒤척이고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을 향해 애무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마음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먼저 나설 수가 없었기에 수동적인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을 던진 것이다.

    이에 진찬월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심장에 손을 얹어 쿵쾅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았다. 결코 들릴 리 만무했지만 자신의 귀에는 어마어마하게 울리고 있었기에 그녀 또한 듣게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까도 얼마나 싸늘히 대했던가. 괜히 다가갔다 가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이다. 천천히 움직여야 해.’

    정작 독고화연이 어서 다가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진찬월은 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독고화연은 연신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찬월이 다가오길 바라면서 밤잠을 설쳤다.

    간절하고 애틋함이 피어나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처절한 술 취함이 난무했다.

    “야, 어딜 만지고 난리야.”

    “좀 만지면 안 되냐?”

    “그래? 하긴 그렇네. 마음대로 해라.”

    “에잇, 김샜어.”

    “개 같은 놈이 만지라고 해도 지랄이야.”

    “닥치고 술이나 처먹자.”

    “알았다. 그럼 다음에 꼭 만져라.”

    “걱정 마. 어디 가지도 않을 몸뚱어리 천천히 만져 줄게.”

    “하여튼 염병할 놈,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심온과 담유설은 술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역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졌다.

    서로 극도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두 사람이 우연히 같은 잔을 붙들려다 손이 맞닿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터질 듯한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를 갈망하고 있던 두 사람은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가 서로를 수줍게 바라보았다.

    그날 밤 이후로 서로는 냉정한 표정은 거두고 풀이 죽은 모습을 하였는데, 둘 중 누구도 용기있게 다가가지 못하여 냉가슴을 앓고 있을 따름이었다.

    손이 맞닿아 전율이 이는 느낌을 받았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저…….”

    동시에 입을 열게 되자 다시 흠칫 놀라 서로에게 미루었다.

    “먼저 말하…….”

    “그쪽이 먼저…….”

    둘은 다시금 입술을 깨물고 서로를 올려다보다가 상대의 눈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이렇듯 머뭇거리고 있을 사이에 둘 사이의 공간에는 사랑의 공기가 가득 차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금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대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 뜨겁게 포옹했다. 이제껏 불굴의 의지로 참아왔던 정욕의 둑이 일순간에 붕괴되었다.

    입술이 포개지고 서로를 삼킬 듯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고, 가문의 원한 따위는 둘 사이에 미세하게라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순간 다른 방에 감금된 심온과 담유설도 뒤엉키고 있었다.

    주변은 온갖 오물로 가득하고 냄새가 진동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취기는 냄새를 분간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잔뜩 취해 제정신이 아니다시피 한 둘은 서로의 육체가 안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몸부림이 석실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이제 굳이 이곳을 벗어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탈출을 영원히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끌어안기 바빴고, 사랑의 고백을 하며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바로 극락이었고, 무릉도원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늘이 두 사람을 엮어준 것이라며 감사했다. 심지어 진찬월은 자신을 곤란에 빠뜨린 두 사람, 즉 심온과 담유설을 흐뭇하게 생각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대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소.”

    진찬월은 매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어찌 꿈일 수가 있겠어요. 만약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문의 원한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소. 혼약은 우리 두 사람이 맺는 것이오. 나가더라도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

    동생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진찬월이었기에 말을 해놓고도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우리와 동생 내외가 혼약을 맺게 되면 틀림없이 집안 어르신들도 지난날의 해묵은 감정은 털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가문의 원한이 해묵은 감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물론이오. 이미 수백 년이 지난 과거에 얽매어 소모적인 쟁투를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두 사람은 별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에 반해 담유설과 심온은 혼수상태에 가까웠다.

    배고프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같이 뛰며 춤추다가 안주거리 삼아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오물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음모를 꾸민 작자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쌍의 남녀가 모두 한창 나이인지라 굳이 두 달을 채울 필요는 없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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