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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문주 심온-120화 (120/125)
  • # 120

    그러길 두 달여, 그녀는 생기를 되찾았고, 예전의 화사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녀는 영약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그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매일 마신 물은 다름 아닌 진찬월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꿈은 꽤 감동적이었지만 잠에서 깬 독고화연은 찝찝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이 상황에서 원수와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꾼단 말인가. 아무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깨어나면서 그녀는 머리 위에 손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것과 바로 옆에서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진찬월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이놈은 왜 머리를 만지면서 잠이 든 것인가.

    그녀는 단숨에 죽여 버리려 손을 치켜들었다.

    “내 이놈을…….”

    진찬월은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는 중에 불현듯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올렸다. 누가 먼저 일어나느냐에 따라 사느냐, 죽느냐가 정해진다는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경계 태세를 갖추는데, 저만큼 벽에 기대 부러진 검날을 잡고 손톱을 매만지는 독고화연이 보였다. 그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영영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으리라. 손에 들고 있는 검날이 그것을 더욱 큰소리로 말해 주고 있었다. 가볍게 목을 긋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힘이 쑥 빠졌다.

    “왜 죽이지 않았지?”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진찬월이 물었다.

    독고화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모두 죽을 테니까.”

    “후훗.”

    진찬월의 웃음엔 슬픔이 가득 배어있었다. 그렇다. 어차피 이곳에서 죽게 되는 것이다.

    “좋아, 관두지. 그동안 지난날을 돌아보고 마음의 준비도 하자구.”

    팽팽한 긴장감은 가신 지 오래였고, 둘 사이의 공기는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수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추한 꼴을 보이며 죽음에 이를 것이다.

    *

    “오, 이런 곳에 길이 있었군요.”

    담유설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독고화연과 진찬월이 갇힌 함정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동혈로 들어간 심온이 특정한 부분을 타격하자 동혈의 벽이 거짓말같이 열린 것이다.

    “자, 기대하라구. 흐흐흐.”

    심온이 먼저 들어가고 바로 담유설이 뒤를 따르자 저절로 석문이 닫혔다.

    지하도는 길게 이어졌다. 야명주는 넓은 간격으로 천장에 박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에겐 사물을 구분하는데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간중간 몇 개의 철문이 좌우로 보였기에 담유설은 문 손잡이를 잡고 열어보려 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감옥이야. 지금은 아무도 없지.”

    굳이 냄새나는 감옥을 구경할 필요는 없었기에 담유설은 호기심을 멈추고 심온의 뒤를 밟는 데 열중했다.

    그 뒤로 철문을 열 개 정도 지나자 드디어 끝이 보였다. 하지만 그곳엔 그저 돌 벽이 덩그러니 가로막혀 있을 뿐이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담유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음, 이 중 하나인데…….”

    심온이 머리를 갸우뚱거리자 그제야 담유설은 단순한 벽이 아닌 기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뭐 하나씩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죠.”

    “음? 하긴 그렇네. 뭐, 그렇게 하지.”

    심온은 좌우와 정면의 벽 중에서 정면을 향해 지법을 펼쳐 마치 혈도를 짚어나가 듯 훑었다. 그러자 벽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들어올려지면서 길을 내주었다.

    이곳에는 총 세 곳의 방이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독고화연과 진찬월이 머무는 곳을 엿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다시 위로부터 내려왔다. 마치 사람을 인식하는 듯 정교하게 구조된 것에 담유설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돌문이 가볍게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닫히자 석실 내부에 빛이 들어왔다.

    사방 벽에 술독이 그득하고 마른 안주거리들이 산재해 있었다.

    “오, 술을 마시면서 멋진 구경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로군요.”

    담유설의 감탄을 뒤로하고 심온은 사면의 벽을 하나씩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심온도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바깥의 동혈 입구에서 설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단지 기관진식을 열고 닫는 해법은 동일한 것이었기에 어디든 오갈 수 있었다.

    “여기는 아니군.”

    “술은 좀 챙겨 가는 게 어때요?”

    “흐흐, 좋아. 한 독만 챙기자구.”

    “얼쑤, 좋구나.”

    담유설이 어깨춤을 덩실거리는 것을 보고 심온은 피식 웃어 보이며 석문을 열었다.

    손을 빠르게 놀려 석벽을 가격하고는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실수했나?’

    석벽은 전혀 미동도 없이 굳건히 마주 바라볼 따름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놀렸다. 하지만 여전히 석문은 올라가지 않았다. 심온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연신 지법을 날렸다. 그때까지도 담유설은 전혀 위기의식 없이 극상품의 술을 찾느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거의 일각 정도가 지나면서 심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담유설이 심온 쪽을 바라보았다.

    “최고의 술 발견입니다. 으하하하!”

    그러나 당연히 맞장구를 치고도 남을 심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석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담유설도 문득 긴장하였으나 여기에 갇히는 따위의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물었다.

    “왜, 피곤해요? 하긴 좀 피곤하긴 하네요.”

    심온은 천천히 담유설을 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린… 갇혔어.”

    “서, 설마…….”

    “아무리 해도 되질 않아. 기관 장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어.”

    “이 거짓말쟁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까까지 멀쩡하던 것이 왜 고장이 난단 말이야. 어서 문 열지 못해!”

    그러나 담유설은 심온의 표정에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오, 이런……. 오, 이런……. 이럴 수가… 내가 갇히다니… 이럴 순 없어.”

    담유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독고화연과 진찬월 두 사람을 맺어주려 강금한 두 사람이 어이없게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당연히 넋이 나갈 만한 충격에 사로잡힐 수밖에…….

    심온과 담유설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하염없이 빠져드는 순간,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낄낄거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희락공자 이호와 변왕 담천변, 총관 오교, 그리고 장로 노공이었다.

    “멍청한 녀석.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나?”

    희락공자 이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날리면서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심온은 석문의 기관 장치가 고장이 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실상 수작을 부린 것은 바로 이 네 사람이었다.

    “이거, 딸아이한테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변왕 담천변은 말은 그리하면서도 기쁜 표정만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그였으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노공은 그 말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호가 당장에 쏴붙였다.

    “이 상판이 후회하는 얼굴로 보이냐?”

    그나마 이들 중 가장 정상에 가까운 인간은 총관 오교였다. 물론 여타 무림인에 비하면 오교도 상당히 이상한 과에 속했지만,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연배부터 다르고 성격도 특이하여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오교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염려하는 바를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오교가 볼 때 심온과 담유설 모두 성격이 지랄 맞아서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게 되면 예측지못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불안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사랑이 싹트기는커녕 누구 하나 반병신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괜찮아. 다 싸우면서 정도 들고 하는 게지. 걱정을 사서 하고 그래. 안에는 술도 가득하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좋잖아.”

    희락공자 이호가 오교의 뒤통수를 갈기면서 말했고,

    “아, 그러고 보니 술이 좀 땡기는군요. 나가서 한잔해야죠.”

    변왕 담천변이 맞장구를 쳤다.

    그 옆에 노공 장로는 여전히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도를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오교는 석문 쪽을 바라보고, 또 앞서 나가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갈등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일행의 뒤를 따라 나갔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후흑문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문주 감금 사태라니…….’

    오교는 일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떠올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건의 발단은 하북 진가와 하남 독고가의 화해를 위한 방 안이 확정되고 심온과 담유설이 장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 느닷없이 희락공자 이호와 변왕 담천변이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이호가 심온하고 담유설도 꽤 어울리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고, 이에 담천변이 이 기회에 심온과 담유설을 두 가문처럼 똑같은 방법을 적용해 맺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도저히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발상이었지만 이호가 박수를 치며 적극 밀어붙이면서 힘을 받게 되었다. 장로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노공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그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으면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원래부터 노공은 이호를 워낙 좋아하고, 그의 말이라면 뭐든 찬성하고 보는지라 당연하다고 맞장구치자 이후로는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심온에게 은근슬쩍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흘렸고, 미끼를 덥석 문 심온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

    13. 원수를 사랑하라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하루 내내 아무 말이 없었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머리에는 오로지 ‘결국은 죽는다’라는 말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미칠 듯 소리라도 쳐보고 싶었지만 그저 상대를 피곤하게 할 뿐 ‘결국은 죽는다’라는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희망을 단 한 줌도 간직하지 않고 있을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으으으으응.

    바닥이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두 사람 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진동의 원인은 벽의 한 단면이 뒤로 밀리더니 이어 통째로 들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누가, 어떻게, 왜 등등의 의문을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일단 이곳에 계속 머물고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불과했기에 두 사람은 황급히 열린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벽은 사람의 키 높이만큼 들렸다가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

    새로운 환경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본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서렸다.

    그곳은 거대한 석실이었는데 천장에는 야명주가 십여 개 이상 박혀 있어 석실을 전체적으로 밝게 비추어주었고, 도저히 갇혔다고 보기 힘든 여러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에 두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넓은 침상과 주방 시설, 풍족한 양식, 그리고 석실의 한쪽 칸은 따로 구성되어 용변을 처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간절히 찾아 헤맨 것은 탈출구였다. 또한 다른 사람이 머물지 않나 세심히 뒤져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빠져나갈 만한 곳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진찬월은 그래도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 무척 기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슬쩍 독고화연 쪽을 바라보니 그녀도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독고화연이 진찬월쪽을 바라보았고,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두 사람은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자존심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이 상황에 대해 분석해 보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이곳은 틀림없이 뇌옥을 감시하는 이들이 머물던 곳이겠지. 도대체 어떤 조직의 뇌옥이었는지 모르겠구나.’

    ‘누가 우리를 꺼내준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기관이 오작동하였다고 봐야겠군. 아, 그나저나 용변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다행이야. 침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후후… 저 인간 혹시 침대에서 자겠다고 떼쓰진 않겠지.’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앞으로 이 년 정도는 넉넉히 살 수 있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작은 안도감이 두 사람을 편안히 감쌌다.

    진찬월과 독과화연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 때, 심온과 담유설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독고화연과 진찬월은 비록 서로 원수이긴 해도 상대방 때문에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었기에 서로를 탓할 순 없었지만, 담유설로서는 명백히 심온의 멍청함으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기에 온갖 욕과 주먹질로 분풀이를 했다.

    “이 머저리야,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래? 나보고 여기서 늙어 죽으란 말이냐. 여기서 평생 너하고 갇혀 살란 말이냐구. 이러고도 네놈이 문주라고 큰소리야! 이 개자식아, 무슨 말이라도 해봐!”

    심온은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지라 대단치 않은 공격에는 적당히 맞아주었다.

    이후에도 수백여 차례에 걸쳐 석문을 열어보려 시도했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심온은 퀭한 눈에 입을 벌리고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내 꽃다운 인생을 이렇게 망치다니.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이불도 없는 데다가 용변을 보고 처리할 만한 것도 없잖아. 술하고 안주뿐인데 여기서 술만 처먹고 있으라는 거냐. 이 미친놈아, 어떻게 할 셈이냐? 너 똥싸고 그건 어디다 치워둘 건데? 이 머저라, 우린 어쩌냔 말이냐. 흐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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