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흑문주 심온-119화 (119/125)

# 119

당황스럽긴 해도 진찬월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해 의아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처음 만난 여인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제껏 강호를 종횡하며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처럼 짧은 시간에 호감을 느낀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자 쪽에서 먼저 접근해 오는 경우에도 그는 대부분 냉담하게 반응해 절로 멀어지게 만들곤 했는데, 이 여인에게선 애초에 거리감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곤란한 처지를 같이 당하였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닌 설명하기 힘든 일체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면서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했다. 그는 남녀의 연애에 대해서는 애송이에 불과했기에 짐짓 이러한 호감이 여인에게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 독고화연의 막무가내식의 웃음은 점점 막을 내리고 있었다.

“호호호, 하하하,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웃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너무 많이 웃고 말았네요. 아, 아까 제 경우를 물으셨죠?”

진찬월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화연은 숨을 여러 차례 크게 들여 마시고 내뱉고를 반복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고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 이야기도 황당하긴 하죠. 지금도 왜 제가 이곳에 빠지게 된 것인지 어리둥절할 뿐이니까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왔다는 것에 후회는 없지만, 어쩐지 남의 불행에 끼어들었다가 그 불행을 엉뚱하게 뒤집어쓴 기분이 드니 난감하네요.”

그녀는 쫓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다가 추적자들을 유인하는 과정에서 함정에 빠졌다고 설명했다.

진찬월은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하고 나름대로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사정은 맥이 풀릴 정도로 단순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혼자가 아니라 둘이잖습니까?”

진찬월의 말에 독고화연이 빙긋 웃으며 운을 띄웠다.

“백지장도!”

“맞들면.”

그 다음 마무리는 두 사람이 함께했다.

“낫다.”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비록 어려운 지경에 처했지만 다행히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탈출이 늦어지더라도 심심치는 않겠는걸.’

‘괜찮은 사내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 * *

심온과 담유설은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시금 산으로 들어갔다.

심온이 진찬월과 독고화연의 감금생활을 훔쳐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인데, 담유설도 호기심에 있어서는 세상 누구 못지않기 때문에 눈을 반짝거리며 뒤따른 것은 당연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참 왕성히 활동할 남자와 여자가 놓이게 될 때 비록 그 관계가 원수일지라도 어떠한 변화를 갖게 될 것인가는 관찰할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들키지 않을 비밀의 방이 있다는 거죠?”

“도대체 몇 번이나 답해야겠어. 제발 날 좀 믿어. 나는 이래 뵈도 문주야, 문주. 게다가 총관에게 몇차례나 확인을 했단 말씀이야.”

“흐흐흐, 이거 제대로 기대되는데요.”

“근데 이거 함께 봐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좀 어색한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방종당주는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심온이 말하는 것이 남녀 사이의 뜨거운 잠자리에 대한 것임을 못 알아들을 담유설이 아니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문주님은 제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래도 알 건 다 알아요. 혼자만 재밌는 구경하려고 그러시네.”

담유설이 워낙 당당히 말하였기에 심온은 땀을 삐질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다면야 괜찮고…….”

담유설은 뾰로통해져서 혼잣말로, 하지만 충분히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거참 아니꼽고 더러워서 원. 지가 무슨 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거지 같은 놈이, 누가 저를 사내 녀석이라고 의식하는 줄 아나… 꼴도 보기 싫은 녀석,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멍게, 말미잘같으니…….”

“이봐, 지금 다 들리거든. 제대로 중얼거려 주지 않을래?”

심온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 * *

진찬월과 독고화연은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의 조각들이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의 하루를 꼬박 넘기면서 탈출구를 찾아다닌 두 사람이었다. 그 어디에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갇힌 채로 늙고 끝내는 죽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늙을 만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구석에 놓인 작은 옥병속의 벽곡단은 고작 한 달 분량뿐이었기 때문이다.

뇌옥의 형태는 매우 단순했다.

제일 위쪽으로 작은 구멍이 삼 중 철망으로 차단되어 있고, 그로부터 점점 원통형이 넓어지면서 바닥은 지름이 약 십여 장 정도였다. 그 외에 다른 문은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난감하군요.”

서로 벽에 기대 마주 보는 상태에서 독고화연이 중얼거렸다. 답답한 마음 탓에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뭘 찾으셨는지요?”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서…….”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투였기에 독고화연의 반색을 하며 채근했다.

“무엇입니까? 쉽게 나갈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이니 개의치 마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진찬월은 턱을 어루만지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 오로지 출구는 우리가 들어왔던 천장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천장까지 단숨에 솟아오르지 않고 저 매끄러운 벽을 타고 기어올라 간다는 건 무리죠. 하지만 물건을 쌓아올린다면 이론적으론 가능합니다.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과 천장에 닿는다 해도 막힌 철장을 걷어낼 수 있느냐입니다.”

독고화연은 탄성과 함께 무릎을 쳤다.

“그 방법이 있었군요. 그럼 어서 바닥의 돌을 파내고 그것으로 탑을 쌓도록 하지요.”

진찬월도 독고화연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용기가 났다.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다.

그는 그나마 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진찬월은 검을 빼 들고 내력을 모았다. 검신에 옅은 광망이 어른거렸다.

독고화연은 그 모습을 보며 은근히 감탄했다. 보통 수준의 강호인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검기를 발출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돌을 쌓아올리는 것은 무리가…….’

그러나 그녀의 독백은 거기에서 뚝 끊어졌다. 진찬월의 검이 어이없게도 세 토막으로 부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런…….”

진찬월의 표정도 부러진 검마냥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보통 돌이 아니로군요.”

독고화연은 시험 삼아 바닥에 장력을 내려쳐 봤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시큼하게 아려오는 통증뿐이었다. 검격에 당한 바닥은 어떤 손상도 없었다.

두 사람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실상은 이곳이 후흑문의 뇌옥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바닥을 깨서 중앙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려 빠져나가려는 시도에 대한 대비책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절망과 공포가 무겁게 주변을 휘감아돌았다. 두 사람은 서로 위로하는 것조차 잊고 암담한 현실을 떠올렸다.

‘길어야 한 달 반이다. 아니다. 이십 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한 달 분량의 벽곡단이 있다 한들 물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마지막이 이렇게 어이없고 비참할 수가…….’

진찬월은 두 놈을 떠올리며 비참해지고 큰 원한을 품었지만 복수조차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긴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것은 독고화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의 염려는 사실 더 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혼자라면 좋으련만…….’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죽음도 죽음이었지만,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여기에서 버티는 동안 용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이 용변을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고, 상대의 용변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난감했다.

소리는 물론이고 냄새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두 남녀가 갇혀 있기로 이런 상황이라면 감성적인 기분이 날 리가 없었다. 마지막 사랑을 불태운다,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사내가 마음에 들고 멋지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갈등은 더욱더 컸다.

둘은 거의 한 시진가량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찬월이었다. 이때까지도 독고화연은 용변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소개는 뒤로 미뤘는데, 이젠 아주 느긋해져야 할 것 같으니 서로를 좀 알 필요가 있겠군요.”

독고화연은 특별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소리 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 올립니다. 저는 진찬월입니다. 강호에서는 청의예검이라 불리고 있지요.”

잔잔히 듣고 있던 독고화연의 귀에 갑작스레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경악에 차서 외쳤다.

“하북진가의 진찬월?”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존대가 사라지자 진찬월은 눈을 멀뚱거렸다.

“그렇습니다만…….”

“이 원수 놈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난 하남 독고세가의 독고화연이다.”

진찬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아주 잘 만났구나.”

아까까지 서로에 대해 배려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둘 사이엔 흉흉한 살기가 폭주했다.

“진찬월이라는 놈이 멍청하다고 하더니, 역시 소문 대로였구나. 어디 병신 같은 놈들에게 속아 함정에 빠지고… 미련한 놈이 어디서 감히 얼굴을 뻣뻣이 쳐드는 게냐!”

진찬월도 지지 않고 맞섰다.

“거울이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네년의 몰골이 얼마나 흉악한지 보여주면 스스로 자결을 할 텐데 말이다.”

“오냐,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 개자식아.”

“이썅!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때부터 두 사람은 엉겨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무공에 있어서는 진찬월이 한 수 위였지만, 그는 발목 부상을 입은 상태고 주 무기인 검이 부러진 상태라 형세는 막상막하였다.

둘은 각 가문에서 가장 강성파였기에 살수를 아끼지 않고 전개하여 일각도 지나기 전에 각기 몸에 무수한 찰과상을 입었다. 또한 싸움에 있어 감정이 깊게 배여 있는 상태여서 일반적인 무인들의 격전과는 다른 면모도 있었다. 그리하여 반 시진이 지나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러 서로 벽에 기댄 상태에서 두 사람의 몰골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찬월은 볼이 할퀴어져서 피가 맺혔고, 인대가 늘어난 부분을 집중 공격당해 한쪽 다리를 엉성하게 들고 있었다.

독고화연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 귀신을 방불케 했으며, 옷자락이 너덜거리는 것이 마을 어귀에서 꽃을 꽂고 돌아다니는 광녀(狂女)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신호를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죽여 버릴 테다.”

“개자식아~”

싸움은 거의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싸움이, 그것도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니 두 사람은 기진맥진해져 손가락 하나도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고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은 아직 살아 있어 상대의 마음을 긁어 파냈다.

“지독한 새끼, 아주 독종이구나.”

“내가 할 소리다, 이 썩을 년아. 그러니 아직 시집도 못 갔겠지.”

“지금 걱정해 주는 거냐, 망할 놈아.”

“걱정은 얼어죽을……. 내 네년의 두 다리를 분질러서 평생 기어다니게 해주겠다.”

“그전에 네 놈 모가지가 한 바퀴 제대로 돌아갈 테니 정신 바짝 차리는 것이 좋을걸.”

둘은 주거니 받거니 욕을 교환하더니 서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대로 누워 꿀맛 같은 단잠에 빠지고 싶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원수에게 나를 죽여주라고 웅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온 탓에 버티다 버티다 결국 독고화연이 먼저 잠에 빠져들었다. 이틀 동안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였기에 스스로 잠에 들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흐흐, 하늘이 내게 기회를 주시는구나. 오냐, 내 기꺼이 죽여주마.’

진찬월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안간힘을 쓰며 독고화연 곁으로 질질 몸을 끌어갔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통증이 몰려왔다.

“으으으…….”

고통 때문에 당장이라도 의식의 끈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끝끝내 진찰원은 독고화연 곁에 이르렀다.

‘머리를 부숴주마.’

힘겹게 손을 들어 독고화연의 머리에 일장을 날렸다.

탁!

독고화연의 머리가 으깨지고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기에, 안타깝게도 독고화연의 머리에 닿은 진찬월의 손바닥은 슬쩍 툭 건드렸을 따름이다.

탁! 탁! 탁!

몇 차례 있는 힘껏 손을 내갈기던 진찬월은 이미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쏟아 부었던 터라 손을 뻗어 독고화연의 머리에 댄 채로 의식을 잃었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두말할 것 없는 철천지원수인데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꿈속에서 두 사람은 매우 다정했고, 행복했다는 점이다.

독고화연이 꾼 꿈은 이러했다.

그녀는 중한 병에 걸려 있었다. 명의나 신의라 불리는 이들조차 고개를 저으며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시든 꽃처럼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던 중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진찬월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소금기가 느껴지는 물을 마시라고 했다. 세상에서 다시 찾기 힘든 영약이라는 말과 함께 건넨 잔을 독고화연은 말없이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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